제137편
오만한 사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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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하사. 잘 지냈나?”
문을 열자마자 백작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유릭이 황당해
하든 말든, 느긋하게 선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현 상황에서 가장 매섭게 추궁당할 자는 그였으나, 가장 산뜻한 태도
였다. 알렉산더는 봄볕 가득한 광야를 바라보는 나그네처럼 여유로운
눈으로 선장실 안의 특무부원들을 둘러보았다. 크리스펠로를 보고
는 여전히 멋지군, 군견- 하고 말하고 카바냐에게는 살쾡이 아가씨,
그만 쏘아 봐, 하고 건네고, 새파랗게 질린 에바에게는 그러면
남자한테 인기 없어, 하고 충고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리델라
와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그러나 백작을 보는 프리델라의 눈은
담담했다. 방금 전 코지마와 말을 주고받을 때처럼 서릿발 선 눈
초리가 아니었다.
“어제 새벽, 어디에 있었지?”
“내 방에. 그리고 갑판.”
갑판- 알렉산더가 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모를 프리델라가 아니
었다. 그녀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고는, 그녀로서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말을 했다.
“.....도움에 감사한다, 백작.”
알렉산더는 어깨를 으쓱하고 허리를 굽혀 보였다. 그 오만한 행동에
약간의 호의도 유기용매가 증발하듯 쉽게 사라졌다. 프리델라가 다시
무관심하게 물었다.
“클로디유 데지레와는 어떤 사이지?”
“아는 사이.”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지?”
“그녀가 나를 마지막으로 본 시간.”
오늘은 프리델라가 강적만 만나는 날인 듯 했다. 참으로 기일이다.
100년에 한명 만날까 말까한 프리델라의 맞수가 오늘 둘이나 나타
나니. 대강 알렉산더의 성격을 파악한 프리델라는, 알렉산더를 쓸
어내리듯 관찰하더니 무언가 결정을 내린 듯 눈길을 거두었다.
“체포해, 유리.”
“네?”
“체포하라고 했다. 감시는 너에게 맡긴다. 시곤에 도착하여, 그를 구
금할 곳이 생길 때까지 감시해라.”
알렉산더가 말했다.
“프리델라 대령, 당신에게는 나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 합법적 근
거가 없소.”
“영장 말인가? 파난에서는 영장이 필요 없다. 이 방에서 나가고 싶으
면 나가라. 가고 싶은 곳으로 가는 것도 상관없지. 단, 지금부터
유릭 크로반 하사가 너를 감시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증거가 나오
면 체포, 구금, 처벌할 것이다. 일단 같이 나가라, 유리.”
“언제까지 붙여둘 셈이오?”
“내가 원하는 증거가 나올 때까지, 또는 당신의 뒤에 있는 니콜라스
추기경이 당신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릴 때까지.”
알렉산더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크리스펠로의 으르렁거림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적대감은 다른 특무부대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
으나, 백작은 모두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선장실을 나섰다.
나가라는 말도 없었으나, 허락을 구하지도 않았다. 유릭은 잠깐 문
을 닫은 다음 프리델라에게 물었다.
“뭘 어쩌라고 그런 명령을 내리시는 겁니까.”
“명령한대로다. 저 남자, 니콜라스 추기경을 추종하는 자라면 우리에
게는 최고의 강적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아마도 최악의
악몽이 될 거야.”
유릭은 문을 돌아보다가, 아무래도 말해야겠다는 생각에 물었다.
“발터 스게노차의 일은 어찌 되는 겁니까?”
“그 일은, 내가 내 이름을 걸고 책임지겠다. 그는 범인도 아니고, 될
수도 없는 남자니까. 그리고...........유리, 만약 그 남자가 말한 파멸이
정말로 너를 향한다면 그 때는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 상관으로써,
보호자로써, 스승으로써.”
유릭은 선장실을 나왔다. 먼저 나간 알렉산더는 양녀인 블랑
쉐와 함께 있었다.
블랑쉐는 파란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알렉산더에게 질문을 퍼부어대
다가, 유릭이 나오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은빛 머리카락이 눈
보라처럼 몰아쳤다.
“백작님께 들었어요. 이제부터 백작님과 함께 지내신다고요? 그렇다
면 블랑쉐와도 함께 지내겠네요. 기뻐요, 블랑쉐는.”
유릭으로서는 흠칫 놀랄 만한 태도였다. 인형처럼 새파란 눈동자를
반짝이며, 열세 살은 족히 넘어 보이는 소녀가 이렇게 일고여덟살
먹은 아이 도깨비처럼 말하다니.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커다란 항구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실 거
죠? 나라 없는 임금님과 아직 황야의 탑, 못된 쇠사슬에 묶인 가난한
왕자님은 어디로 가실까요. 물론, 저도 같이 가겠지요. 저는 도움
을 주는 착한 요정이랍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저런, 안돼. 어린 아이는, 특히나 너 같은 여자 아이는 군인들 옆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단다. 당분간은 내가 아는 사람과 함께 있어라.”
“어떤 귀부인에게 맡기려고 그러시는 거죠? 그런 사람들은 싫어요.
배고픈 까마귀처럼 깍깍대며 묻는 답니다. 백작님과 무슨 관계니?
어느 집에서 태어났니? 엄마 아빠는 뭐하는 사람이니, 지참금은 얼마
나 가지고 있을까, 하고요.”
“하라면 하는 거다. 따라와라, 블랑쉐.”
알렉산더는 재잘대는 블랑쉐의 손을 잡아끌며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
했다. 별 수 없이 유릭도 따라가야 했다. 블랑쉐는 연신 떠들어 대
다가 웃음을 터뜨리고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했다.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나 도깨비처럼 정신없었다. 알렉산더는 그러는 블랑쉐를 끌고
귀빈실이 있는 복도로 내려갔다. 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가, 알렉
산더가 블랑쉐와 함께 나타나자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알렉산더는
그 중에 세 번째 즈음에 있는 방문을 두드렸다. 방안에서 누구세요,
하는 예쁜 여자목소리가 들리며 그 문이 열렸다.
에닌 마델로였다. 그녀는 크고 예쁜 눈을 크게 뜨고 백작을 바라보더
니, 곧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훔쳤다.
“데지레 양이 당한 끔찍한 사고에 대해 들었어요.”
“저런, 많이 놀랐겠군.”
“네. 발터 스게노차 씨는 아버지 친구분이신데..... 맙소사, 어떻게 이
런 일이 벌어지는 건지....정말 모르겠어요. 너무 무서워요.”
“안심해, 에닌 마델로 양. 그건 마델로 양이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부탁이 하나 있는데.”
“백작님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지요.”
알렉산더는 블랑쉐의 손을 당겨 앞으로 오도록 했다. 에닌 마델로가
놀라서 그 소녀를 바라보았다.
“누구죠, 이 아이는?”
“내가 돌보는 아이로, 이름은 블랑쉐 페인이라고 하지. 예전에 나를
도와주었던 친구의 딸인데, 가엾게도 지금은 고아야.”
“가, 같은 배에 타고 있는 줄도 몰랐어요. 세상에나, 대체 어디에 있
었던 거죠?”
“내 방에 함께 있었지. 워낙에 낯을 심하게 가리는 아이라, 밖으로 나
가는 것을 너무 싫어해서 별 수 없었어. 그런데...... 나한테 아주
복잡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잠시만 이 아이를 맡아 줄 수 있겠어?”
“복잡한 일이라니..”
에닌 마델로는 난처하다는 시선으로 블랑쉐를 바라보다가, 그제야 손
을 들어 인사를 하는 유릭을 발견했다. 맙소사, 에닌이 작게 중얼
거렸다.
“보다시피, 나는 저 청년에게 감시받는 중이거든. 감시 받으면서 어린
소녀를 데리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에닌 마델로 양이 맡아
주었으면 하는 거야.”
“네, 그렇게 하겠어요. 어머니께서도 아이를 무척 좋아하니, 아주 잘
돌보아 주실 거랍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나요? 차
라도...”
“아아, 괜찮아. 미혼인 소녀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도 큰 실례인데 더
폐를 끼칠 수야 없지. 어머니께도 안부 전해줘요. 난 이만 물러나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다가, 에닌은 유릭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아주 난처하다는 듯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느닷없이 블랑쉐가 물었다.
“언니와 오빠는 아는 사이인가요?”
“아, 그렇단다. 저.... 저기, 유릭 크로반 씨. 정말 죄송...한데... 미, 미
하일에게 이야기 들었어요.”
유릭은 로웨나를 제하고는 그 누구의 입에서도 나올 리 없는 이름이
불쑥 나오니, 아주 불안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그래서 상당히 뻣뻣하게 물었다. 에니는 정말 난처하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양 볼에 손을 얹으며 겁먹은 토끼처럼 우물쭈물 하더니 간
신히 말했다.
“유릭 크로반 씨가 아주 좋은 분이고, 정말 훌륭한 분이라는 건 알아
요. 하지만... 그 마음은 받아들일 수 없답니다. 죄송해요, 너무나
죄송스러운 말이지만.....그래도 미리 이야기 하는 게 좋을 것 같
아서요.”
“.....”
유릭이 미하일에게 아주 오래전에 했던 거짓말을 기억해 내는 데는,
매우 힘겨운 노력이 필요했다. 생각해 보니, 미하일에게 에닌을 좋
아한다는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 것
같기도 한데, 어쨌건 하긴 한 듯도 하다. 참 원거리로 애먹이는
구나 미하일....... 유릭은 잠시 이마를 짚으며 인내를 추슬렀다. 어
차피 관심도 없던 에닌에게 저런 말을 하든 말든 상관은 없는데,
잠시 잊기로 했던 놈의 존재감을 새삼 확인하게 되니 매우 불쾌했다.
“괜찮습니다, 마델로 양. 저에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마음은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소망으로 되는 것도 아니죠. 걱정
마시고, 조금도 걱정 마시고, 블랑쉐 페인 양을 잘 돌보아 주십시오.
그리고.... 파난에서의 공연을 기다리겠습니다. 잘 하세요.”
“죄송해요, 정말.”
“아니, 아니, 결단코 아닙니다.”
사실, 에닌이 있지도 않은 유릭의 마음을 받아주기로 결정을 보았다
면 그것이야 말로 더없이 난처한 상황이다. 유릭은 정말 카스톨로
가게 된다면, 그 미하일 자식 엉덩이부터 쏴버릴 테다- 라고 속으
로 읊조리며,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웃으며 에닌에게 인사하고 물러났
다. 그런데 우연히 마주친 블랑쉐의 눈이 아주 싸늘했다. 주고받는
말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넉넉하게 오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블랑쉐는 고개를 팩 돌리고는 에닌 마델로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에닌은 머뭇거리다가 자그마하게 말했다.
“저- 백작님, 공연에는 와 주실 거지요?”
“물론, 에닌 마델로 양.”
그리고 알렉산더는 그녀의 손을 당겨 그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멋진 공연이 되기를.”
에닌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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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쉬는 시간 많아진다고 글을 많이 쓰는 건 아니더라고요....
시즌이 무어냐는 질문을 하신 분이 계신데.... 그다지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저, '이만큼 썼으니 놀아도 돼!' 라는 구분일 뿐....
.............
다음 편은 3일뒤에!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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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