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38화 (138/174)

제138편

오만한 사자 #3

******************************************************************

선장이 언제 내리냐고 물어보며 제발 내려 달라고 간절하게 눈치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델라는 부하 중 그 누구에게도 하선을

명하지 않았다. 승객들은 그다지 큰 불평은 없었다. 빗줄기 쥐어짜

는 먹구름만큼이나 음침하고 우울해 보이는 단테 소위와 커다란 공

을 발로 굴리며 방글 방글 웃는 아기곰같은 페라라 소위는, 검은

제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큰 위압감을 풍기지는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카밀턴은 트레비스가 패죽이겠다는 의사를 표하며 말

렸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델라를 찾아갔다. 그러나 전혀 환영 받지

못했다. 프리델라는 카밀턴이 웃으며 달려오자,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크리스, 물어.”

가벼운 소동 끝에, 여객선은 동쪽하늘이 싸늘한 어둠으로 젖을 무렵

그 유명한 시곤 항에 도착했다.

거대한 여객선은 지친 곰처럼 나른하게 항구로 접어들었다. 환하게

불 밝혀진 항구의 부둣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를까 늦

을까, 걱정 많은 항해였으나 그럭저럭 시간에 맞춘 입항이었다.

알렉산더의 감시를 맡은 덕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유릭은 매우

울적한 눈으로 몇 번이나 봐 왔던 항구를 바라보아야 했다. 하나둘

부둣가의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노란 불들이 검은 바다위로 늘

어졌다.

“드디어 입항이군. 굉장한 항해지 않았나?”

알렉산더가 담배연기 자욱하게 내뿜으며 그리 물었다. 한 개비가 두

보루 값을 하는 알렉산더의 최고급 담배를 피우던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알렉산더에게 하인인 오터가 다가왔다. 오터는 알렉산더 옆

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는 유릭을 발견하게 되자 아주 놀랐다.

“어라, 크로반 하사!” 유릭은 손을 휘저었다. “아아, 오랜만입니다.”

알렉산더가 담배를 바다에 집어 던지며 말했다.

“오터, 짐은 모두 호텔로 옮겨둬라. 늦게 들어 갈테니........ 방은 5층

의 내 전용실이다. 지배인에게 말해 둬.”

“알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건지 여쭈어 봐도 될까요?”

“오면 늘 가는 곳. 하지만 너는 따라올 필요 없다.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면 푹 쉬도록. 여행이 길었다. 너도 피곤할 테지.”

“감사합니다.”

오터는 유릭에게도 인사를 한 다음 그 자리를 떴다. 알렉산더는 검은

바다와 남빛 하늘 사이로 펼쳐지는 빛의 항구를 바라보았다.

“사내놈 둘이서 멀뚱하게 앉아 있는 것도 지루할 테니, 오늘 저녁 근

사한 곳으로 데려다 주지. 정말 멋진 곳이야.”

“설마 이상한 곳은 아니죠?”

알렉산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둘 다 총각인데 이상한 곳에 가면 어떤가. ....이런,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농담이니까. 그냥, 음악이 좋은 곳이야. 건반이 초원이라면,

그곳의 피아니스트는 날랜 표범이자 용맹한 사자이지.....시곤에 오면,

언제나 들르는 곳이라네..... 같이 가지.”

“비싼 곳입니까?”

“이런, 부담 가질 필요 없어. 나 때문에 번거롭게 수고하는데, 그 정

도 대접은 필수 아닌가.”

“아뇨, 그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 얻어먹는 건데, 싸구려 식당으

로 가면 그것도 억울할 것 같아서요.”

알렉산더는 잠시 황망한 얼굴로 별빛 찬란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네는... 정말, 나를 아주 재밌게 해 주는 군.”

“다행입니다. 남자 둘이 손잡고 데이트 하는 와중에, 그나마 재미라도

없으면 정말 낭패니까요.”

“........”

알렉산더는 이번에는 좀 오래 황망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릭은 쭈그려 앉은 그대로 검은 밤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불안

한 짐승처럼 쉼 없이 철썩이고 있었으며, 그 유명한 시곤의 여신,

도비니엘 대극장은 희게 웅크리고 있었다. 고요하다, 그곳은. 희게 굳

은 고독처럼 고요하다.

유릭은 끄트머리만 남은 담배를 버린 다음 알렉산더에게 손을 내밀었

다. 알렉산더는 은제 담배갑을 통째로 쥐어주었으며, 유릭은 그것을

열어 하나 꺼낸 다음 담배갑을 자신의 뒷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다 준 적 없는데.”

“쪼잔하시긴.”

“다-아 가지게나.”

유릭과 즐거운 추억을 공유한 많은 상관들이 그러하듯, 이 알렉산더

도 조만간 복장이 터질 것이다.

잠시 뒤 드디어 증기선이 멈추어 서고 간밤의 사건 때문에 긴장했던

사람들은 어두운 얼굴로 항구에 내렸다. 오페라단의 가수들 역시

마찬가지라, 애써 들뜨는 것을 감추며 차례차례 내렸다. 하인들이

바쁘게 오고가며 짐을 실어 나르고, 사람들은 서로를 부르며 일행들

을 챙긴다. 그 중에, 검은 옷을 입은 코지마 부인도 있었다. 그녀는

승무원에게 이것저것 지시하여 자신의 짐을 마차로 옮기도록 한 뒤에,

난간 앞에 쭈그리고 앉은 유릭과 망연한 얼굴로 서 있는 알렉

산더에게 웃으며 인사하고는 자리를 떴다.

고요한 여인을 보낸 뒤,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 유릭이 돌아보니 오

페라 가수들과 발레리나들이 그래도 들뜨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파난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있었다. 내일은 저녁에 공연이 있기에

오후에 리허설에 들어가야 해서 꼼짝 못하지만, 그 다음날에는 쉴

수 있다고 말하며 안내원을 사서 시곤 항을 구경하자고 말했다.

로웨나는 어디 끼어있을까, 하는 생각에 오페라 가수들이 지나갈

때 물끄러미 바라보기는 했지만 그녀는 없었다.

“우리도 내리지.”

알렉산더가 그렇게 말하고는 난간에서 몸을 뗐다. 땅바닥에 그대로

늘러붙고 싶을 정도로 피곤해서 그의 제안이 아주 귀찮지만 임무라

별 수 없다. 유릭도 굼뜨게 몸을 일으키고 그를 따랐다.

배에서 내린 알렉산더는 항구에 대기하며 손님을 기다리는 수많은 마

차중 하나를 아무거나 골라잡아 탔다. 외근이라 제복 상의는 벗어

두고, 검은 바지에 군화, 셔츠만 입고 있는 유릭은 마부를 겁에 질리

게 하지는 않았다.

“오큰셀 25가.”

알렉산더가 마차 좌석에 앉으며 말했다.

오큰셀 가, 그곳은 후락한 거리다. 노동자들과 창녀들, 지명수배범들

이 모이는 음란하고 음산한 뒷골목. 그러나 25가라면, 아예 컴컴하게

물든 사람들이 오는 곳은 아니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 가난한

학생들, 가난한 연인들이 모여드는 곳일 뿐이다. 빈곤하지만 아주

타락하지는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

마부가 알렉산더의 깔끔한 복장을 훑어보더니 의아해 하기는 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마차가 도포로 판판하게 덮인 길을 달려, 좁고

좁은 골목길 몇 개를 거쳐 오큰셀 25가로 향했다. 그곳에 도착하기

도 전에 사방이 시끄러워졌다. 후락하고 낡은, 오래전에 죽은 짐승

뼈처럼 창백한 벽들.

그 벽이 둘러싼 길을 따라, 하루 일을 마친 공장 노동자들이 걸어갔

다. 낡은 옷을 꿰어 입은 지친 젊은이도, 나무 껍데기 같은 외투를

껴입은 추레한 사내도, 남루한 차림으로 거의 벌거숭이인 아이를

끌고 가는 아낙네도 있었다. 도박판이나 창녀들, 마약과 수많은

환각제를 찾아 아편굴로 들어가려는 듯한 중상류층 사람들도 눈에 뜨

였다. 그들은 마차안의 유릭과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알렉산더가 문을 두드려 여기서 내려달라 말한 다음, 직접 문을 열고

내렸다. 유릭이 뒤따라 내리니, 그곳은 그래도 제법 멀쩡한 곳이었다.

마차가 그들을 내려준 곳은 오래된 노천술집 앞이었다. 마당에는

둥근 테이블과 나무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고 식사를 하고 있다. 수수하게 차려입은 웨이트리스들이 식

사 시중을 들었다. 차양을 친 창에서, 요리사인 듯 보이는 남자가

접시를 들고 뭐라 뭐라 버럭 버럭 외치곤 했다. 부엌에서 풍겨오는

음식냄새는 참 풍요로웠다.

알렉산더가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밝지는 않았다. 촛불 두어

개가 켜져 있을 뿐, 어둑어둑했다.

촛불 불빛에 사람들이 보였다. 파난의 여름, 제법 후덥지근한 밤이었

던 지라 실내에는 그다지 사람이 없었다. 달라붙어 낄낄대는 노인과

아가씨 ‘커플’,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무직으로 보이는

청년 두 사람, 얇고 예쁜 담배를 피우며 노닥거리는...아마도, 의

상실에서 일하는 듯한 아가씨들. 그런데 눈에 뜨이는 일행들이 있었다.

하나는, 구석지고 음침한 곳에 앉아 있는 소년과 청년 일행이었다.

차림새로 보아하니, 아무래도 공원들 같아 보였다. 그러나 어둑어

둑한 곳에 얼핏 본다면 그리 속을 테지만, 유릭이 보기에 그들은

공원들이 아니었다. 소년들의 머리카락은 단정했고, 손과 목덜미는

깨끗했다. 테이블 아래로 보이는 발에는 분명 검은 구두를 신고 있

었다. 10시간 이상 먼지 가득한 공장에서 서서 일해야 하는 공원들

은 절대 검은 구두를 신지 않는다.

유릭은 소년들의 얼굴을 차례로 훑어본 다음 고개를 돌리다가, 그를

바라보는 또 다른 특이한 일행을 발견했다.

여자와 소년이었다.

여자는 바지에 허름한 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소년도 비슷한 수준의

차림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맥주병이 몇 개 놓여 있고, 중앙의 나

무접시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요리가 담겨져 있다. 여자는- 어깨

에 아무렇게 늘어진 옅은 금발에 갸름한 얼굴을 가진 젊은 아가씨였

다. 서른 정도 되었을까.... 놀라운 미녀였다. 특히나, 어둑한 조명

속에서도 빛나는 눈동자는 특이하고도 아름다웠다. 양쪽의 눈 색깔

이 눈에 뜨일 정도로 달랐다. 하나는 진한 푸른색이었고, 다른 하

나는 옅은 녹색. 그러나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얼굴

에는 이마에서부터 눈 옆을 지나 볼까지 늘어진 진한 흉터가 있었다.

옅은 금발로 가리고는 있었지만, 볼을 살짝 돌릴 때마다 흉하게 드

러났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뭐라 나직이 속삭였다. 그러자 그녀

앞에 있던 소년이 고개를 돌렸고, 유릭을 알아보고는 눈을 크게 떴

다. 유릭은 그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예전, 익스턴 광산으로 파

견 갔을 때 용병패에 섞여 있던 그 주근깨 가득한 소년이었다. 소

년이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를 알아본 알렉산더가 말했다.

“저 꼬마는........ 나도 눈에 익군. 지난 익스턴 광산에서 만났지.”

“용병이었죠.”

잠시 뒤 웨이트리스가 오자 주문을 했다.

“맥주 한 병, 주스 한 컵 (웨이트리스가 눈을 깜빡였다. ”주스라고

요?“”....하사, 뭐 좋아하나?“”딸기.“”그걸로.“) 그리고........ 주방장에게

알렉산더가 왔다고 전해. 그러면 알아서 내 줄 테니.”

“네.”

웨이트리스가 사라지자 유릭이 물었다.

“자주 오시나 보죠?”

“아주 오래전부터 자주 왔지. 나는 파난이 참 좋아. 여러모로.....추억

이 많은 곳이거든. 정말, 너무나 많아.”

유릭은 나른히 턱을 괴고 음식을 기다렸다. 그 때, 주점 문이 열리며

남자 하나가 들어왔다.

낡은 바지에 때 낀 셔츠, 바랜 조끼를 걸친 사내였다. 손질안한 양털

처럼 엉망진창인 머리는 새카만 곱슬머리였고, 부리부리 빛나는 눈도

검은 색이었다. 갸름한 얼굴이었으나, 턱이 아주 강하게 각이 져

서 어딘지 고집 세고 험악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얼굴색도 검었

다.

남자는 그 턱을 문지르며 주점 안을 훑어보더니, 카운터로 가 그곳에

서 있는 지배인에게 무어라 말했다. 지배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주점의 무대에 있는 낡은 피아노로 저벅 저벅 걸어갔다.

키는 아주 크지 않았으나 다리가 길고 껑충한 체격이라, 큰 말이 휘

적휘적 걷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 남자가 내가 말한 그 피아니스트라네.”

알렉산더가 웨이트리스가 가져다 준 맥주병을 따며 말했다. 유릭은

건더기가 살덩이처럼 둥둥 떠 있는 딸기주스를 매우 꺼림칙한 시선

으로 보았다. 다행히, 웨이트리스가 빵과 버터, 햄과 치즈, 스튜까지

연달아 가져다주는 덕에 그것을 먹지는 않아도 되었다.

피아니스트 남자가 피아노 앞에 앉더니, 악보 몇 개를 꺼내어 늘어놓

았다. 악보를 뒤적거리는 그 손도 거미다리처럼 길고도 정교해 보

인다. 드디어 남자가 그 긴 손가락을 가볍게 움직이더니, 건반을

눌렀다.

퉁- 희고 검은 건반을, 그 손가락은 매끄럽고도 강인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어떤 곡인지는, 어떤 곡이든 한번 들으면 끝나는

즉시 한번도 안 들은 곡이 되는 유릭으로서는 도저히 알 도리가

없었다.

알렉산더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는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건반 위를 으르렁거리며 달려가지. 용맹하며 난폭하고 거친, 건

반 위의 사자라네.”

****************************************************************

작가잡설: 지진이 일어났었답니다. 에그, 놀래라!

.....라지만 거의 느끼지도 못했죠.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

[홍염의 성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