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39화 (139/174)

제139편

오만한 사자#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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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가 빙그레 웃었다.

“자아, 끝까지 들어보라고. 환상적이니까.”

유릭은 피아노를 들으며 식사를 하고, 흉물스런 딸기주스를 보며 어

찌할까 심각하게 고민했다. 건반이 자아내는 음이 몰아치고 있었다.

가볍게 두드리다가, 흉포하게 으르렁대고, 그러다가 다시 가볍게....

쉴 새 없이, 비가 쏟아지듯 폭포가 쏟아지듯 사자가 으르렁대듯

코끼리가 돌진하듯, 몰아치고 몰아친다. 알렉산더가 물었다.

“어떤가?”

“글쎄요-”

피아노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낡은 특무부의 피아노를 부드럽고

우아하게 두드리던 누군가가 생각나기에 더더욱 좋아하지 않

는다.......

-안 잊어진다. 이상해. 다른 건 다 잊어버리는데... 안 잊어져..... 잊

으면 좋겠어. 아프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리고 그 남자, 피아노로 소나타를 두들기는 것을 좋아하던 카이슐

츠 소위가 처형당하고, 한 달간 혼수상태였던 크리스펠로는 깨어난

날 초췌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안 잊어져.

크리스펠로에게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가르쳐 준 것도, 악보를 모르는

크리스펠로에게 직접 피아노를 쳐 주며 곡을 가르쳐 준 것도 카이

슐츠였다. 몸으로 때우는 것을 제하고는 그 어떤 학습도 불가능한

크리스펠로였지만, 한번이라도 들었던 곡, 한번이라도 연주했던 곡

은 결코 잊지 않았다.  음악은 크리스펠로가 제대로 익힐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으며, 타인과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이기도 했다.

카이슐츠 소위가 죽고, 이제는 유릭과 파트너가 된 크리스펠로지

만 그가 카이슐츠와 관련된 어떤 것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유릭은 잘 안다.

식사를 마치고, 웨이트리스가 그릇을 치웠다. 유릭이 살을 갈아 만든

듯한 딸기주스를 울적하게 바라보다가 커피로 바꾸어 달라고 하자,

그녀는 묘하게 웃더니 그 컵을 가져갔다. 그 동안 알렉산더 옆의

맥주도 위스키 잔으로 바뀌었다.

유릭 앞에 앉아 있던 그 주근깨 소년이 일어나더니 피아니스트에게로

다가갔다. 피아노 소리는 거친 물줄기처럼 거침없었지만, 피아니스

트는 고개를 숙여 소년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사이에, 미친 듯이 빠른 음이 쏟아졌다. 찌를 틈 없이 완벽하게,

쉴 새 없이 맞물리는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고도 빠르게. 그리고 쾅-

하고, 도끼 내리치듯 강렬하게 완결음을 찍더니 의자에서 일어났다.

휘적휘적한 몸짓으로 돌아서더니 유릭을 바라보았다. 굶주린

사자처럼 이글거리는 눈이었다. 유릭이 먼저 물었다.

“아저씨, 저 아십니까?”

“이안 블로드, 내 이름이다.”

“유릭 크로반. 처음 뵙겠습니다.”

“히게아의 마탄, 초토화 3인방 중 하나, 서부의 악마, 진압군의 검은

까마귀.”

“와아.”

웨이트리스가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유릭이 그 진한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시는데, 이안이 긴팔로 팔짱을 끼며 물었다.

“아니, 어떻게 알았어! 수상한 놈이다! 왜 이렇게 말하지 않는 거지?”

“제가 좀 유명인사거든요. 어지간하면 다 알아요.”

이안이 크게 웃어젖혔다.

“역시나 소문 대로군, 마탄.”

“무슨 소문이요?”

“말시키면 반드시 복장 터진다는 소문.”

알렉산더가 앞에서 박수를 쳤다. “소문 참 정확하군.” 이안도 다시 클

클 웃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더니 건반을 연달아 세게 눌렀다.

땅, 땅, 땅- 돌멩이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안은 여전히

벙글 벙글, 심술궂은 검은 여우처럼 웃어대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의자를 옆으로 돌리고 앉았다. 살롱 음악회에라도 온 귀족 한량처

럼 여유롭고 우아한 모습이었다.

“다른 소문도 들었지. 자네는 말이야, 파난 혁명당의 숨은 영웅이라

네! 정의로운 청년, 용기 있는 청년, 국민을 위한 군인.”

이안은 긴 손가락으로 건반을 뚱땅 뚱땅 치기 시작했다. 유릭이 물었

다.

“헛소문의 진상을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자네는 억울하게 잡혀간 어느 청년을 구해주었지. 증거불충분이라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하게 자비로운 판결을 내려 풀어 주었어. 청년은

계엄령 하의 군법회의를 피할 수 있었고, 무자비한 학살로부터

구원받았지....”

“아, 그 일이요.”

하얀 까마귀 내란 사건 때 특무부로 잡혀왔던 젊은 남자를 유릭이 증

거불충분으로 석방시켰던 그 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유릭은 그

일로 단숨에 일병으로 강등되었으며, 월요일마다 ‘앞으로 잘 할게요’

라는 반성문을 올리고, 토요일마다 안보위원회에 앞으로 ‘정말

잘 하겠다니까요.’ 하고 맹세하기 위해 출두했다. 아주 나중에 자신

이 파난의 숨은 영웅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는데, 당시의 유릭

은 마약 덕에 칼 뷰겐트에게 죽도록 맞고 있던 때라 기뻐할 여유가 없었다.

이안이 물었다.

“하사, 그 남자를 기억하고 있나?”

“글쎄요...... 저하고 만났을 때 워낙에 곤죽이 되어 있었던 지라......피

떡이 된 상태는 기억하지만, 진짜 얼굴은 기억 못합니다.”

이안이 다시 피아노를 치며 클클 웃었다. 대체 어떤 음악인지, 장단

이 들쭉날쭉 이었다. 그러나 그 자체도 리듬을 타고 있었다. 변덕

스런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몸짓 같은 음악이었다. 그에 맞추어

이안은 고개를 젓고, 어깨를 들썩이더니 다시 꽝, 꽝 내리쳤다.

“바로 나야.”

“네?”

“나라고!”

이안이 벌떡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그러나 유릭은 그로부터 약간의

친숙함도 느끼지 못했다. 당시 그 남자는 맞아서 퉁퉁 부운 얼굴에,

온통 피투성이였다. 목소리도 벌벌 떨며 더듬더듬 횡설수설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위압정으로 들릴 정도로 크고 굵은 이안의 목소리

와는 너무도 틀렸다.

“아, 물론 이름은 바꿨지. 체포 한번 당한 것만으로도 직장 구하기 되

게 힘들더라고.”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썩 유쾌한 상황

은 아니었다. 유릭은 그 남자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았었다.

“자네도 그 때 내 기억과는 아주 다르군. 그 때는........ 정말 애였는

데.”

“그 때 저는 열 여섯 살이었습니다. 어린 게 당연하죠.”

“그래, 그래- 어린 게 당연하긴 하지. 당연하고말고. 당연해, 당연해,

당연해! 열 여섯이라, 맙소사! 내 생각보다는 어렸군! 그럼 지금

고작 열 여덟인가?”

그리고 그는 다시 피아노를 뚱땅대기 시작했다. 참 산만하군, 유릭은

알렉산더를 흘끔 보았다. 그는 발을 꼬고 앉아, 의자 손잡이에 손을

얹고 평화로운 얼굴로 그 정신없는 음악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행여나 다른 사람이 듣지는 않을까, 둘러보았으니 이제 실내에는 소

년 일행, 용병 여자와 소년뿐이었다. 웨이트리스는 부지런히 밖으

로 맥주와 술, 안주를 날라대고 있을 뿐이다.

“덕택에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 완성할 수도 있었고,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어. 정말 너무나 감사해. 자네 덕에, 나는 내

삶을 되찾을 수 있었다네!”

“음악가인 줄은 몰랐네요.”

“피아노는 그냥 아르바이트야! 내 진짜 일은 따로 있지. 언젠가, 때가

되면 그것을 보여줄 수 있을 거다. 자네는 지금 뭐 하나?”

“브란 카스톨에서 온 오페라 단을 호위하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꽈과과앙, 놀란 듯한 음이 터졌다.

“오오, 그 아름다운 노래의 천사, 평화의 사절인 에닌 마델로 양을 호

위하는 건가? 멋지군, 부러워. 그녀의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어. 아

름다운 소녀지. 푸른 새의 지저귐 같은 노래, 수정처럼 맑고 깨끗하

며 어여쁜 노랫소리. 그러나 어쩌나. 그녀는 이 파난이 증오하는 쓰레

기, 악덕 자본가, 돌비체와 니콜라스 추기경을 황금으로 수호하는

살비에 마델로의 딸인 걸.”

“부모의 죄가 자식의 죄일 수는 없지요.”

“부모의 가난은 자식의 가난, 부모의 부는 자식의 부, 부모의 권력은

자식의 권력, 그렇기에 부모의 죄도 자식의 죄야! 음, 오페라를 본 적

있겠지, 유릭 크로반.”

“.....네.”

거의 못 본 거나 다름없지만, 본 건 본 거다.

“오페라야 말로 가장 완벽한 예술이지. 음악, 문학, 미술! 그 모든 것

이 총체적으로 어우러져 집대성된 위대한 신화! 나는 그것을 보며

세상을 본다네! 별처럼 빛나는 영웅 같은 바리톤과, 여신이나 요정처

럼 노래하는 소프라노!”

꽈광, 꽝, 광, 꽝- 피아노 음은 계속 떨어져갔다.

“그리고 찬양하라, 그 신화를 펼치는 웅대한 신을! 위대한 천재를! 신

으로부터 숭고한 예술혼을 선사받은 영웅을!”

유릭으로서는, 이안의 말이 가진 가치는 소음과 아주 비슷했다. 뭐라

고 저 혼자 떠들어 대는데, 하나도 못 알아듣겠다. 딴전피우는데

이안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비밀을 하나 가르쳐 줄까, 하사?”

“하세요.”

피아노소리가 잔잔하게 잦아들면서, 이안의 굵은 바리톤 목소리가 들

렸다.

“위대한 음악의 창작자란, 그 안에 천개의 혼을 가진 자야. 그 혼이

이 안에서 들끓어 오르면서, 말하라, 노래하라, 만들어 내라, 그리

하여 신의 위대함을 소리쳐라! 포효하라, 하고 소리 높여 외치지.

천개의 혼이 내 귀에 속삭여. 신의 비밀을, 자연의 비밀을 알려주겠다

고, 그리고 그 위대한 비밀을 가져다가 어리석은 인간을 압도하고

지배하라고 외치지. 천재는 신의 소리를 듣는다네. 천개의 혼이

부르는 거대한 합창을 듣고, 그것을 오선지 위에 적어 내려가지. 시

의 언어를 짜내어, 그 음표 아래에 깐다네. 여신아래 펼쳐지는 황금

빛 융단처럼 펼쳐져. 축복받아 신의 악기를 만난다면, 여신의 목소리

를 가진 자와 신의 외침을 가진 자들을 만난 다면, 무대위에서는

위대한 신화가 펼쳐지지.”

“.....”

유릭은 아무래도 저렇게 헛소리하다가 잡혀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

다. 쥴리안과 맞먹는 중증이다, 저건. (게다가 이 경우는 다 큰 어

른이니 더욱 낭패다)

“유릭 크로반 군, 나는 말이지.... 혁명파들이 지껄이는 헛소리는 결단

코 믿지도, 동의하지도, 수긍하지도 않아. 만민평등, 자연으로부터

받은 동등한 권리, 모든 이가 형제이니 사랑하고 동등하게 지내라!

귀족도, 부자도, 평민도, 가난한 이도 평등하니, 위대한 혁명을 통

해 진정한 평등을 이루자!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말이야. 나와, 그

어떤 인간도 같지도 평등하지도 못해.”

“.......”

....저렇게 헛소리하다가 분개한 혁명파에 의해 고발되었을 지도 모른

다. 이안은 계속 건반을 눌러갔다. 살아있는 짐승이 으르렁거리듯이

건반이 굴러갔다.

“인간은 말이야, 대부분이 참 비루한 것들이라고. 사랑하라, 평등하

다, 이리 거창하게 외치는 자들은 인간이 얼마나 비루한지 모르는

샌님들이지. 천박하고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자들. 증오하면서도, 비

루하게 빌붙어 자신의 목숨을 유지하려는 자들! 그게 바로 인간이지!

이 중에 고귀한 자가 몇이나 있을까, 이 중에 위대한 자가 몇 이

나 있을까, 비루해지지 않는 자가 얼마나 있을까! 더럽고 더러운 인

생들, 시궁창의 오물에 처박힌 인생들, 거칠고 포악한 인생들, 머

릿속으로 궁리하는 거라고는 다른 약한 자들을 어떻게 약탈하고 범

할까, 그것뿐인 인생! 덜 초라해 보이려고 짐승처럼 으르렁대는 인생!

자아, 크로반 군. 나는 그 샌님들, 인간을 사랑하라고 외치는 샌

님들, 그 샌님들이 그리도 뼛속까지 사악하고 비루한 천것들을 만

날 일이 없었던 것들! 그들을 증오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이 지껄이는

말은 무시해! 인간이 위대해? 모두가 같아! 맙소사, 인간은 전혀

위대하지 않아! 같지도 않고! 포악하고, 탐욕스럽고, 비열하고,

아둔하지! 그게 인간이라네. 그걸 모르는 위대한 혁명당의 샌님들은,

결국 자신들이 위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국민에 의해 배신당하지!

그 비루한 자들은 빵과 금을 받고 샌님들, 어리석은 바보들을 팔아넘기지!”

피아노소리가 이어졌다.

유릭은 잠시, 아무래도 저 남자 밤거리 조심하는 게 좋을 거라는 생

각이 들었다. 유릭이 물었다.

“이안 블로드 씨, 당신은 당신의 인생이 비루하지 않을 거라 확신하

시는 겁니까?”

“당연하지! 나는 위대해.”

참 당차게도 말하니 기운 빠진다. 상대할 마음조차 나지 않는다. 이

나쁜 놈, 하고 외치면 ‘응, 그래.’ 하고 답하는 셈이랄까. 그냥 주먹

한방이 최고다, 저런 인간한테는.

“신이 당신을 택하기라도 했다는 건가요?”

“내가 위대해지기로 했으니 위대해 지는 거지, 신의 허락 따위는 필

요 없어.”

그리고 웃으며 건반을 눌렀다.

“나는 신이 숭배하고 악마가 경배하는 천재거든.”

“.......”

쥴리안의 진화체인 지도 모르겠다.

결국, 유릭이 말했다.

“이안 블로드 씨, 당신은 제가 아는 사람 중-”

이안 블로드가 히죽 웃으며 말을 끊었다.

“사람 중?

“......가장 재수 없군요.”

“..........”

“아가씨, 커피 한잔 더.”

그리고 이안은 피아노 치는 기계가 되어(잠깐 지나친 소음을 내기도 하는) 잊혀졌다.

양쪽 눈색이 다른 그 미녀가 킥킥 웃었고, 소년도 눈물까지 훔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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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무언가를 열심히 공부중입니다.......

저의 장점은 빨리 배운다는 것이지만, 단점은 빨리 잊는 다는 거죠. -_-;;

다음 편은 5일 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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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6장 요정의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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