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40화 (140/174)

제140편

요정의 공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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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행사가 정치적 의도와 맞물리면, 기획자나 제작자로서는 그보다

더 편할 수는 없다. 거만하기 그지없던 국가가 돈 한 푼주지 않아도

선전도 알아서 해주고, 손님도 알아서 몰아다 주고, 경호마저 알아

서 해 준다. 파난 사령부가 어찌나 광고를 해 주었는지, 도비니엘

극장 근처로 갈일조차 없는 항구 짐꾼조차 ‘신께서 파난의 평화를

축복하여 친히 보내신 노래의 천사가 대 극장으로 온다’고 알게 되었다.

시곤의 수많은 상류층 저택으로도 편지가 갔다. 정중한 서문을 요약

하자면 ‘안 오면 재미없다.’였기에, 오페라라면 별 관심 없는 사람

들까지 직접 표를 사야 했다.

경호도 완벽했다. 시곤의 치안군이 직접 극장과 호텔을 빙빙 둘러싸

경호를 해 주었으며, 동, 서부 특무부에서 각자 파견된 장교들이

그들을 도와 공연을 엄중히 경호했다. 검은 제복 볼일이 그다지 많

지 않았던 안정된 시곤의 주민들은, 극장 앞의 검은 제복들을 보자

단숨에 기가 팍 죽었다.

햇살 싸늘한 오전이 되자 오페라단이 리허설을 위해 도착했다. 트레

비스는 준비되고 준비된 무대를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극장 관계

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벙글 벙글 웃으며 기쁜 기색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하루해는 쏜살같이 하늘을 달렸고, 바다가 노을에 흠뻑 젖을 무렵 드

디어 온 시곤항이 고대하라고 협박당하던 공연이 시작되었다.

알렉산더를 감시하여 오페라 극장까지 온 유릭은, 박스석에서까지 그

를 감시할 필요는 없었다. 도착하니, 프리델라의 명에 의해 특무부

대원은 모두 각자의 위치에 서서 극장을 지키고 있었다. 유릭의 위치

도 정해져 있었다.

특무부가 지켜야 할 곳은 각 층의 입구와 무대가 정면으로 보이는 귀

빈석 앞, 그리고 무대 천장이었다. 낯선 사람들과 그다지 좋은 관

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크리스펠로가 무대의 천장 쪽, 유릭과 다른

부대원들은 모두 각 층의 입구, 프리델라와 에바는 정해진 자리가 없다.

7시가 되자, 일반석은 물론이요 귀빈석도 꽉꽉 찼다. 박스석으로 우

아한 귀족들과 부자들이 나타났다. 유릭이 지키는 3층 좌석도 대부분

찼다. 남자들은 매끈한 정장의 먼지를 털며, 여자들은 두사람 자리

를 치마로 뒤덮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각자 오페라글라스를 꺼

내며 트레비스와 그 극장의 명성, 특별히 초대되어온 아름다운 소

녀 가희에 대해 아는 이야기를 했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에닌 마델로의 실력이 아닌, 그녀 아버지의 재산이자 이 파난에서의

막강한 영향력이었다. 과연 누가 그녀의 신랑이 될까, 누가 그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게 될까, 그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화제를

결국 이겨버린 것은 이 오페라단이 시곤항으로 올 때 여객선에서

벌어졌던 의문의 살인 사건이다.

“발터 스게노차, 그 사람이 범인이라는 군요.”

“저도 그 사람을 알지요. 대체 이유가 뭘까요?”

“추한 사내의 짝사랑일 테지.”

“하긴, 운 좋아 부자가 된 천한 졸부. 주제넘게 대귀족가의 영애를 넘

본 거겠지요.”

“근본은 어쩔 수 없는 법 아니겠어요.”

유릭은 어제 만났던 재수 없는 피아니스트 이안 블로드를 떠 올릴 수

밖에 없었다. 재수 없기로는 그 쪽이나, 지금 이 옆에 앉아 시시덕

대는 상류층 신사숙녀나, 별 다를 바 없었다.

드디어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 박스에 지휘자가 나타나 관객들에

게 인사를 올렸다. 박수가 터졌다. 지휘자의 은빛 지휘봉이 휘날리며,

막이 올라가고 무대 앞의 조명이 쏜살같이 켜졌다.

여왕 바티스타, 5 년 전에 초연되어 굉장한 성공을 거두었던 오페라

였다. 오페라를 작곡하고 대본까지 썼던 젊은 창작자는 이 오페라

한편만 발표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폭풍처럼 브란 카스톨

의 음악계를 흔들고 사라진 천재 음악가의 ‘바티스타’는, 작곡가의

전설같은 실종과 함께 더더욱 유명해졌다. 지금도 오페라 극장들이

아주 좋아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으며(작곡가에게 돈 줄 필요가

없는 아주 착한 작품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에닌이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고 그녀를 스타로 만들어 준 작품이기도 했다. 다투스

공과 그 어머니인 다투스 부인이 무대를 위해 아낌없이 돈을 퍼

부었기에, 저명한 화가가 담당한 무대는 화려했으며 그 의상도 소도

구도 섬세하고  찬란하였다.

유릭도 트레비스가 리본까지 달아 건네준 팸플릿을 읽은 지라, 그 바

티스타에 대해 대강 알고는 있었다. 소설광인 동료에게 원작을 빌려

읽은 적도 있다. 솔직한 소감을 말하자면, 그다지 취향은 아니었다.

1막이 시작되고, 화려한 의상에 둘러싸인 코러스의 군무 속에 소녀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제넘게 이 목소리는 어떻고 저

목소리는 어떻고, 하자니 쑥스러워 유릭은 지루한 얼굴로 무대를

들여다보았다. 알렉산더가 어찌하나 보니, 박스석에 앉은 그는 옆에

앉은 블랑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블랑쉐가 끝없이 그의 옷

자락을 잡고 늘어지고 있었다.

헨리 카밀턴 경은 어쩌고 있나 보니, 트레비스가 매우 흥분하며 난간

에 매달려 있는 동안 뒤에서 신나게 자고 있었다. 어쩌다가 코지마

부인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박스석에 혼자 앉아 공연을 보

고 있었으나, 그다지 귀를 기울이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의 시선은

무대가 아닌 객석을 향하고 있었다. 유릭은 무대와 객석을 살피는

틈틈이 로웨나가 어디 있나 찾아보기도 했다. 로웨나는 거의 보이지

도 않는 역으로, 에닌을 쫓아다니는 세 명의 시녀 중 한명이었다....

(‘가엾은 로웨나.’ 유릭은 조용히 위로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내

리박히는 시선이 싸늘해서 고개를 돌려보니, 블랑쉐가 박스석 난간

에 달라붙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간에 팔을 얹고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한참 전부터 그러고 있었던 듯 했다. 눈이 마주치자,

소녀는 고개를 팩 돌리고 박스석에서 뛰쳐나가려 했다. 알렉산

더가 그녀의 손을 잡아 당겼다. 블랑쉐가 고개를 훼훼 저으며 뭐라

떼를 쓰는 것 같기는 했으나, 백작이 고개를 숙이며 무어라 말하자

얌전하게 앉았다. 그러나 앉아있는 내내 볼이 퉁퉁 부어 있었다.

배반을 알게 된 바티스타가 독배를 마시는 것으로 오페라가 끝나자,

객석의 청중이 일제히 박수를 퍼부었다. 흰 의상의 에닌이 허리 숙여

인사를 하자 다른 배우들도 같이 인사를 했다. 사람들의 박수가 더

욱 거세어졌다. 반쯤 졸고 있던 유릭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카바

냐를 제하고 비슷하게 지루해하던 다른 특무부대원들 역시 방만했

던 자세를 가다듬었다. 무대 천장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던

크리스펠로도 멈추어 서서 무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때까지 자던

헨리 카밀턴 경은, 무대 인사를 하러 내려갔던 트레비스가 돌아와

걷어차자 간신히 일어났다.

“아아, 황홀해!!! 이런 무대를 직접 보게 되다니! 난 몰라, 너무 좋

아! 꺄아아아악!”

휴게실에서 만난 카바냐는 거의 넘어갈 듯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에

게 커피를 건네주며 유릭이 물었다.

“임무가 뭔지 기억하고는 계십니까?”

“아무 일도 없었으면 된 거잖아!”

카바냐에게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십시오, 하며 도덕적인 설교를 하

는 것은 크리스펠로에게 수학공부를 시키는 것과 효과가 비슷하다.

부하나 제자인 에바의 일이라면 나서야 하지만, 상관은 비록 방

만함을 택했다 할지라도 그 선택을 존중하는 것이 의무이다. 휴게실

에서 간단하게 차 한 잔을 한 뒤에, 유릭은 알렉산더를 찾으러 나섰

다. 무대가 끝나는 즉시 알렉산더를 감시하는 소임으로 돌아가기로

되어 있었다.

오늘도 감시당하는 알렉산더는, 신사와 귀부인 몇 명과 이야기 하고

있다가 유릭이 오자 웃으며

그 자리를 떴다. 그의 옆에는 여전히 블랑쉐가 달라붙어 있었다. 마

주치자 반갑게 웃었다.

“오늘 공연, 평이 아주 좋은데.”

“그렇게 으리번쩍한데, 들어간 돈에게 미안해서라도 좋게 평해야겠지

요.”

무대가 너무나 화려해서 정신이 없었던 유릭이었다. 그리고 유릭이

보기에, 알렉산더 역시 그다지 열심히 감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흥분한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블랑쉐를 챙기기에 바빴다.

블랑쉐는 벌써 유릭의 옷자락을 잡고 있었다. 유릭이 그 손을

떼어 놓는데, 백작이 말했다.

“오늘은 체스나 한판 두지.”

“제발- 그만 볶아대십시오. 백작님이야 가고 싶은 데로 돌아다니시면

된다지만, 저는 백작님 감시하느라 피곤하단 말입니다.”

어제만 해도, 그대로 쓰러져 자고 싶을 정도로 피곤한데 술집까지 끌

려가 이상한 피아니스트와 말싸움을 한 것이다. 돌아오니 자정이

가까워져 있었다. 알렉산더가 자러 들어가자마자 유릭은 그의 객실

응접실에서 고꾸라져 잠들었다. 소파에서 딱정벌레처럼 착 달라붙

어 자다가, 아침에 알렉산더가 깨워서 간신히 일어났다.

블랑쉐가 백작에게 매달리며 졸랐다.

“블랑쉐도 같이 있게 해 주세요.”

“안 돼. 호텔로 돌아가면, 바로 에닌 양에게로 가거라.”

“하지만-”

백작이 블랑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한테는 네가 할 일이 있잖니. 내게는 내 할일 있듯이 말이다. 잊으

면 안돼. 절대.”

“알겠습니다. 하지만 잘하면 상을 주셔야 해요.”

“물론이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유릭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밤에 꼬맹이에게 시달릴 일 까지는 없을 듯 하니 편하

기는 했다. 그런데 현관에 있는 극장의 홀로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굵고 큰 목소리가 홀을 쩌렁 쩌렁 울렸다.

“어이, 유릭 크로반 하--아사!”

“.....”

쥴리안의 목소리만큼이나 듣기 싫은 목소리가 또 생길 거라고는 예상

못했던 유릭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개는 돌려야 한다는 것에

적잖은 서글픔을 느끼며 유릭은 돌아섰다.

“만나서 반갑군! 보게 될 줄은 알았는데, 고생하지 않고 보게 되니

너무 좋아!”

유릭은 성의 없이 손을 흔들었다.

“반갑군요, 이안....어쩌고 씨.”

“블로드!”

이안 블로드였다. 그는 사람들 틈에서 휘적휘적 걸어 나와, 두 팔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차림새는 꽤 근사한 정장이었다. 오늘 오페라

관람을 위해 양복점에서 빌린 물건인 듯 보였다. 양복 앞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온 티켓의 색깔을 보니 일반석, 그중에서도 뒷자리에

가장자리였다.

“웬....일이십니까?”

“웬 일은 웬일! 공연을 보러 왔다네!”

“천재님 보시기에 어땠나요.”

이안은 큰 소리로 답했다.

“아주 아주 따-분했어! 아주, 아주!”

“......”

그 엄청난 일갈에, 사람들이 돌아보기 시작했다.

“무대는 헤픈 귀족 여편네 궁둥이 같지! 제길! 하나같이 시시하면서,

금딱지 은딱지 발라놓고 금수슬 은수슬 주렁 주렁 달아 놓으면 뭔가

대단해 지는 줄 아나! 게다가 그 연주는 뭐가 그렇게 따분하담! 박

자 맞춰 하나, 둘 셋! 단지 그 뿐! 아아, 형편없었던 것은 그것만이

아니라고! 가수들은 또 어떠한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특히나 여왕,

그 멍청한 여왕!”

이제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마저도 멈추고 이안 블로드를 보고 있었

다.

“제기랄, 그 맥없는 목소리라니! 바티스타는 전사들의 여왕이라고! 그

런데 제길, 기사들에게 돌진하자! 라고 외치는 게 아니라 ‘저 오늘

이쁘죠? 그러니 돌진해 주세요.’ 라고 구슬피 애원하는 노래라니!

게다가 뭐가 그렇게 뻣뻣해, 뻣뻣하긴! 허수아비마냥 똑바로 서서 꿈

쩍도 안 해!”

“.....”

유릭은 그날의 결정을 진심으로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

으면, 그냥 군법회의에 넘겨 버릴 걸 그랬다...... 이 남자는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 자체가 최악으로 민폐다.

“노래는... 잘 부르지 않습니까?”

“뭐? 아니, 노래도 못 부르고 무대 주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잘

부르니 주역이 되는 거고, 주역은 잘 불러야 해! 하지만 이건 음악

학교 입학시험이 아니라 무대라고, 무대! 오호, 통재라! 바티스타는

나의 연인이자 우상이었건만, 그런 부자나라 막내 공주 같은 여

왕이라니!”

“.....”

홀에는 사람들로 꽉 차 있었으나 소곤대는 소리조차 없이 싸악 얼어

붙어 있었다. 그 중 몇 명이 아주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이 되어 어

딘가를 흘끔 흘끔 보았다. 유릭도 그 쪽을 흘끔 보았다.

그곳에는 사색이 다 된 트레비스가 서 있었으며, 그 옆에는 혹평당한

에닌 마델로가 울 듯한 얼굴로 서 있었다. 난리 났군, 유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섰다. 그러다 보니, 막 홀로 내려오던 로웨나와 마

주쳤다. 시녀의 의상을 입고 있는 그녀,는 팔짱을 끼고 눈살을 콱

찌푸리며 그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눈빛이 말하고 있었다. 누구냐, 앞

의 그 자식은? 유릭은 이안 블로드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졌다. 이

제부터는 모르는 사람이다.

“이봐, 하사!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어딜 가는 건가!”

“아아, 누구십니까.”

유릭은 급히 알렉산더의 어깨를 밀고 블랑쉐의 손을 잡아끌며 극장을

나섰다.

“재미있는 사람이 아닌가. 여기까지 와서....”

“살아 날뛰는 악몽입니다.... 어서 가서, 체스나 두지요.”

알렉산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무시하지 말게나. 그는 자신이 악몽을 꿈꾸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진짜 악몽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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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12시간 전에 올렸어야 했지만..............

그놈의 프릴 스커트가 뭔지............. ;;; 엘레, 뭐라 말해도 상관

없으니 색깔 예쁜 옷좀 걸어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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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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