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42화 (142/174)

제142편

요정의 공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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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웨나는 기가 막혔다.

“무슨 말이야?”

“어머니를 모시고 와 줘!”

주변을 둘러보지 않아도, 로웨나는 서서히 끓어오르는 주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어서 나가야 해, 로웨나도 겁에 질려 그렇게 생각

했다. 어서 나가야 한다고! 낯선이의 분노만큼 두려운게 어디있을까.

그러나 에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 돌아갈 수 없어, 지금은. 지금은....도저히 이 사람들을 그대로 놔

두고 그런 생활을 하러 갈 수 없어!”

“에니-!”

“이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돌아간다면...........나는 정말 나쁜 아이

야.”

“너...제발, 지금은 그냥 가야 해.”

순간, 로웨나는 뒷덜미가 후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흘끔 옆을 보니, 골목길에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희

미한 달빛에 주름지고 더러운 얼굴들이 보였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제 사람들의 덩어리는 몇 배나 더 거대해져 있었다. 사람들의

눈빛만 보아도, 그들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알 수 있었다.

“블랑쉐는 어디 있지?”

“먼저 보냈어.”

로웨나는 에닌의 팔을 잡았다.

“일단 나가자. 이분들께는 곧 돌아온다고 말하고 나와.”

그리 작게 말하며, 로웨나는 흘끗 뒤쪽을 보았다. 밖으로 빠져나가는

입구는 아직 사람들로 채워지지 않았다. 지금 빨리 가면 도망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에닌은 고집스럽게 서 있었다. 로웨나가 재

촉했다.

“에니- 제발.”

“너 혼자 가. 나는.....”

순간, 밀물이 밀려들 듯 입구가 닫혔다. 휘파람 소리 같은 것이 났다.

싸늘하고도 심술궂은 소리였다. 마르고 더럽고 주름진 손이 에닌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다른 손이 에닌의 치마를 움켜잡았다.

로웨나는 에닌의 얼굴을 살폈다. 에닌의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지만,

불쾌한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도와드리겠어요. 정말이에요. 하지만....이 옷은 놔 주세요.”

바보-

로웨나는 망연했다. 에닌은 이런 곳에 처음 올 테지만, 로웨나는 빈

민가에 살고 있기에 이런 곳의 특성을 잘 안다. 동정심이 간다고

무턱대고 뛰어들어서는 안 되는 곳이다. 섣부른 동정심은 분노를

일으킨다. 분노는 증오가 되고, 증오는 사람들 가슴 속에서 야수를

이끌어 낸다. 그 아주머니에게 빵을 주는 것으로 끝냈어야 했다.

에닌의 등 뒤에서 더러운 남자들이 나타났다. 생선 썩는 듯 역한 냄

새가 확 풍겨왔다. 술 냄새도 진했다. 남자가 에닌의 어깨의 손을

얹고, 작고 깡마르고 심술궂어 보이는 여자가 에닌의 소맷자락에서

금단추를 뜯어냈다. 더러운 손이 에닌의 팔찌와 목걸이를 뜯어냈다.

투둑, 투둑.

에닌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웃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깨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이가 와들와들 맞물렸다. 눈 안의 혐오감도 감출 수

없었다.

로웨나는 에닌을 끌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갈 수 있든 없든,

돌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방이 빈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귀 같은 그들이, 눈을 활활 태우고 있었다. 눈 안에서 활활 타는

것, 그것은 자신들을 동정하기로 마음먹은 소녀를 향한 감사도 애

정도 아니었다. 증오, 분노, 탐욕, 지옥바닥의 비천한 괴물 같은 그

런 눈이었다. 이들은 이제 사람이 아니다. 한꺼번에 초식동물을

사냥하는 굶주린 육식동물로 변해 있었다.

로웨나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 차리고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파도가 쏟아지듯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꺄악-! 로이--!”

에닌이 겁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에니, 달려, 어서!”

에닌의 팔을 잡아끌려 했지만, 에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밀려들어 에닌을 끌고 갔다. 로웨나도 잡아끌려갔다. 블라우스가

찢어지고, 단추가 툭툭 떨어졌다. 소맷자락이 부욱 뜯겨나갔다. 누

군가가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핀이 툭툭 떨어져 흩어졌다.

“로이--!”

에닌의 비명은 더 날카로워졌다. 그곳으로 가려했지만, 잡아 짓누르

는 힘에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벗어나려 했지만, 강한 힘이 로웨나의

머리를 후려쳤다. 누군가가 얼굴을 짓누르기에 힘껏 물어뜯었다.

무력감이 분노와 치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그 때, 폭도들이 비명을 지르며 밀려나갔다. 로웨나도 내팽개

쳐졌다. 모두 놀란 거미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로웨나는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여어.”

눈앞에, 얼굴을 가린 남자가 서 있었다. 낡고 더러운 옷에, 역시나 더

러운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다리는 길었다. 팔도 길고, 장갑 낀 손

가락도 길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기절한 에닌이 들려 있었다. 저

사람이 구해준 걸까? 여기저기 얻어 맞아 욱신거리면서도, 로웨나

는 남자에게 감사했다.

남자가 말했다.

“이런 저런, 조심해야지. 도시의 바닥에는 짐승들이 산다고. 고귀한

사람도, 성스러운 사람도, 이 바닥에 고인 검은 물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면 비루해지지. 요정의 날개보다 가냘픈 동정심 하나만 가지고 여길

들어오다니.”

“다, 당신 누구죠?”

“불한당 악마.”

“장난치지 말고!”

“맞아.”

“네?”

“당차고 알뜰한 시녀 아가씨, 왕자님들 용사님들 후보에게 전해. 타락

한 황금의 임금님에게도 전하시지. 큰일 났어요, 큰일 났어요! 제가

모시는 요정의 공주님께서 납치당하셨답니다, 검은 동굴에 사는

악마가 우리 공주님을 납치해 가셨어요! 제발 구해주세요!”

“에? 뭐라고 하는 거에요, 아저씨?”

“자, 알아들었으면 어서 도망쳐! 달리라고, 겁먹은 토끼처럼! 아가씨

의 역할을 수행해야지! 그리고... 혹시 알아? 왕자님 용사님들의 친

구나 종자가 충직한 그대의 짝이 되어줄 지.”

“헛소리 그만해! 에, 에니나 돌려 줘요!”

남자가 갑자기 팔을 휘둘렀다.

“오팔모크-!”

팔의 궤적을 따라, 시커먼 그림자가 솟구쳐 나왔다.

놀랄 틈도 없었다. 로웨나와 남자 중앙에, 시커먼 구멍이 펼쳐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날개를 펼치고 솟구쳐 날아와 로웨나를

덮쳤다.

“꺄악--!”

로웨나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것이 로웨나의 몸을 움켜잡고 내

동댕이쳤다.

바닥에 구르고, 머리를 부딪히고, 어깨도 쓸렸다. 여기저기 부딪히고

구르고, 머리가 번쩍 번쩍 울렸다.

“아흐..”

머리를 움켜쥐며 몸을 일으키니, 그녀가 앉아 있는 곳은 컴컴한 골목

길 안이었다.

빛이 오른쪽에서 비껴들고 있었고, 멀리서 마차소리도 들렸다. 말발

굽 소리와 인도를 걸어가는 사람들 소리도 들리고,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와 바락 바락 고함치는 소리도 들렸다.

로웨나는 벌떡 일어났다. 여기 저기 몸이 쓰라렸다. 손을 보니, 한쪽

소매는 완전히 뜯겨져 나가 있고 다른 소매는 거의 다 뜯겨져 나가

있었다. 블라우스 단추도 뜯겨져 나가 엉망진창이었다. 쥐어뜯긴

머리카락은 새집이다. 망연하고 놀라서 비틀거리다가 벽에 기대는

데 붉은 봉투 하나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봉투위에는 흰 새가 그

려져 있었다. 부리가 크고 단단해 보이는....까마귀다, 흰 까마귀.

로웨나는 그것을 집어 봉투를 열었다.

살비에 마델로에게-

귀하의 따님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공주님의 몸값은 금화로 2

백만 카스티야.

수표, 어음, 카드, 할부는 안 받습니다. 파난 식민지 은행의 도장이

찍힌 금화를 바랍니다. 첫날밤 기다리는 새색시처럼 얌전히 계시면

저희가 다시 연락드리지요.

안녀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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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그렇습니다, 에닌은 알베르였습니다..

.........

p.s 오타 수정했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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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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