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편
요정의 공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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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흑군백군의 진세를 살펴보았다. 테이블 위의 전장은 백중세였
다. 이리가면 저리오고, 저리가면 이리 오는....
“이것 참.”
유릭은 턱을 괴며 중얼 거렸다. 그 앞의 알렉산더는 느긋하게 의자에
기대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는 오터가 과일을 준비
하고 있다.
“내가 이길 거네, 하사.”
“무슨 근거로요?”
“자네가 어떻게 둘 지, 내 눈에는 훤히 보인다네. 자네는 언제나 내가
예측하는 대로 움직이더군.”
“흠, 그렇다면 전장의 운명이 당신 손안에 있다는 겁니까? 지금의 백
중세 자체가 백작님이 의도하신 거라는 뜻인가요?”
“당연한 말이지. 마음만 먹는 다면, 나는 단 다섯 수 안으로 자네를
이길 수 있네.”
“아, 네.... 그럼 내가 요렇게 하면.”
유릭은 체스말을 옮겼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웃으며 다른 말을 옮겼
다.
“그 다음 자네는 이걸 옮기려 할 테고, 이걸 이렇게 놓으면 막히게
되지. 그럴 줄 알았네.”
“음, 이걸 옮길 수도 있는데요.”
유릭은 말 하나를 들어 통통, 두 번 찍었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다른
말을 들어 그 길을 막았다.
“끝. 나의 왕과 여왕은 안전하다네.”
“흠-”
그리고 유릭은 오른쪽으로 말을 옮겼다. 알렉산더 역시 다른 말로 옮
겼고, 말 하나가 들려나갔다. 이제 유릭이 지는 판세가 되었다.
“놀랍네요.”
“세상의 운명이라는 게 이런 거라네. 자네는 자네의 운명이 자네의
것이라 생각할 테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 누군가가, 거대한 운명이,
자네의 운명을 움직이고 있지.”
“여전히 재수 없으시네요.”
“....”
유릭은 한참이나 물끄러미 판을 내려다보다가, 망설이듯 이 말 저 말
위로 손을 휘젓다가 드디어 말 하나를 들어 옮겼다. 알렉산더가 눈
살을 찌푸렸다.
“일부러 바보짓 하는 건가, 자네?”
“자, 하세요.”
“그러면 이렇게 막히지. 자네는 아예 꼼짝 못하게 된다고. 거 참, 이
건 자포자기인 건가?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먹힌 판. 이거야?”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유릭은 말을 들어 옮겼다.
“-체크 메이트.”
알렉산더는 잠시, 멍하니 판을 들여다보았다.
“백작님이 졌네요.”
“.....”
“아무리 들여다봐도, 백작님이 진 거 맞다니까요.”
유릭이 손을 내밀었다. 백작은 판을 한참이나 더 바라보다가, 유릭이
여전히 손을 들고 있자 오터를 불렀다.
“오터, 금화.”
“네.”
오터가 잠시 뒤 작은 가죽주머니에 든 금화를 가지고 왔다. 유릭은
그것을 받아 개수를 확인했다.
“대체 어떻게 한 거지?”
“진짜 명장은,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이기는 장군이
아니랍니다. 세상에 널리고 널린 게 변수, 그것을 어떻게 이용하느
냐에 따라 명장과 범장이 갈리지요.”
“그래서-”
“제 바보짓은 변수였고, 당신은 별로 잘 이용하지 못했어요. 그리고
빈틈이 생기고, 저는 치고 들어간 거죠.”
“우연이군.”
“우연을 잡아채는 것도 능력이랍니다.”
그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블랑쉐로군. 열어줘, 오터.”
문이 열리자, 블랑쉐가 조르르 달려 들어왔다. 알렉산더가 두 팔을
벌리며 말했다.
“지금 막 끝났단다. 어서 와라, 블랑쉐.”
“저도 지금 막 끝났답니다.”
블랑쉐는 알렉산더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유
릭에게도 다가오다가 체스판을 보게 되었다.
“하사님이 이기셨네요. 승리한 왕자님께 키스를.”
그리고 입에 입 맞추었다. 유릭은 멍하니 눈만 크게 떴다. 알렉산더
가 물었다.
“에닌 마델로 양은 어쩌고 이리로 온 거니, 블랑쉐?”
“에닌 마델로 아가씨는 참 착해요. 너무 너무 위험한데도, 이곳 사람
들이 어렵다는 것을 듣게 되자 돕겠다고 나갔지 뭐에요.”
“저런. 아가씨 혼자 다니면 위험할 텐데.”
“언니가 말했어요. 진심을 다해 그 사람들을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그
사람들은 절대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요. 언니는 무척 상심했답
니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의 모습에, 아주 마음 아파했어요.”
“가엾은 아가씨- 누군가를 증오해 본 적이 없는 자는 사랑할 수 없
고, 누군가를 경멸해 본 적 없는 사람은 진심으로 존경할 수도 없지.
붉은 심장 뒤의 검은 심장, 자신의 나약함과 비루함을 모르는 자
의 심장은 결코 오랫동안 붉을 수 없지. 꽃이 시드는 것을 지켜본
자만이 단단한 씨앗을 거두듯.”
“에니 언니는 너무 너무 착해요.”
“그래, 참 착하지. 천사처럼 곱고 하얀 마음의 소유자란다.”
“하지만 , 로웨나라는 언니의 친구는 참 마음에 안 들어요. 못 됐어
요. 심술쟁이 마귀할멈. 게다가 무지무지 못생겼고.”
“어이-”
유릭이 저지했다. 블랑쉐가 까르르 웃었다.
그 때 밖에서 쿵쾅 쿵쾅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노크 소
리가 쾅쾅 울리더니 밖에서 크게 외쳤다.
“유릭 크로반 하사, 어서 나오십시오! 비상사태입니다. 집합 명령입니
다!”
아닌 밤중에 무슨 집합인가. 유릭은 의자 손잡이에 걸쳐둔 제복 상의
를 집어 들고 문을 열었다. 병사하나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유
릭이 나오니 그는 급히 경례를 올려붙인 다음 외쳤다.
“비상사태입니다, 하사님! 각하께서, 특무부대원들도 모두 1층 홀로
집합하라 하셨습니다.”
“무슨 일인데?”
“에닌 마델로 양이 유괴 당했습니다! 같이 나갔던 친구 분이 유괴범
으로부터 받은 편지를 가지고 왔다고 합니다!”
유릭은 나간다는 말도 없이 방을 뛰어나갔다.
병사가 뒤따라 달려왔다. 유릭이 외쳤다.
“편지를 가지고 온 친구는 어디 있지!?”
“로비에 있습니다!”
유릭은 달려 내려갔다. 나는 듯 계단을 뛰어내려, 빠르게 홀로 달려
갔다. 가까워지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주 큰소리인 것을 보니, 분명 에닌의 어머니인 마델로
부인이다. 진정하라 외치는 남자 목소리도 들렸다. 소란에 놀란 호
텔의 투숙객들이 와글와글 모여들어 흥분하며 떠들어 댔다.
유릭은 홀로 내려갔다. 병사들은 그의 손에 든 특무부 제복을 보고
다들 길을 비켜주었다. 홀의 중앙에 프리델라와, 시곤에서의 경호를
맡은 치안군의 도리언 블릿 소령이 서 있었다. 도리언 블릿 소령
은 편지를 읽으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의 부하들이 구경나온
투숙객들에게 돌아가라 외치고 있었다.
유릭은 로웨나를 찾을 수 있었다. 치안군 장교와 오페라 관계자들이
그녀에게 무언가 추궁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그들이 말하는 소
리가 들렸다. 무어라 다그치듯 묻고 있었고, 공격적이었다. 잘 들리지
는 않았지만, 에닌, 에닌- 하는 이름만은 잘 들린다. 어떻게 되지,
가엾은 에니, 너무 놀랐을 텐데, 험한 일 당하면 어떻게 해!
그러나 유릭이 다가오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뻣뻣하던 치안군 장교
마저도 유릭이 나타나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유릭은 로웨나를
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로웨나는 고개를 돌렸다.
“에닌이 납치됐어.”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떨지도 않았다. 그러나 모습은 엉망이었다. 옷
은 찢어지고, 머리는 헝클어져있다. 블라우스 앞섬을 잡고 있는 손
등도 상처투성이다.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아무 것도 못했어. 데리고 도망치려 했
는데, 나.......난........”
유릭은 들고 있던 제복 상의를 펼쳤다. 로웨나의 눈이 커졌다. 유릭
은 훤히 드러난 그녀의 생채기 투성이 어깨를 그 상의로 덮었다.
그리고 잠시, 아주 잠시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가며 로웨나의 어깨를
눌렀다.
“.......괜찮니?”
드디어 로웨나가 울음을 터뜨렸다.
바보- 언제나 이런 식이지.
유릭은 그녀의 어깨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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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작업레벨이 아--주 높구나, 유리. -_-;
다음 편은 5일 후에!
아시죠?
p.s 오타 수정했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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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7장 벙어리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