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편
벙어리 여왕#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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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닌의 구출소식이 전해지자, 트레비스는 미친 듯이 기뻐했다.
“아아, 안드로마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음에 틀림없네!”
트레비스는 카밀턴까지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놀란 카밀턴이
버둥댔다.
“뭐, 뭐 하는 건가, 자네!”
“너무 기쁘다네! 너무 기뻐서 미치겠다네! 신께 감사드려야겠군! 오
늘 밤, 공연이 성공리에 끝나면 내가 모두를 위해 멋지게 한턱 쏘
겠네! 그리고 헤리, 이 친구야! 자네도 오늘 나와 함께 이 기쁨을
나누며 뜨겁게 보내자고!”
“....자네, 정말 단단히 돌아버렸군! 정말 미친 거야!!!!”
카밀턴은 기겁하며 트레비스를 집어 던졌다. 친구가 무슨 짓을 하던
트레비스는 여기 저기 뛰어다니고, 단원들을 얼싸안고 키스를 퍼부
어댔다.
“정말 다행이네요.”
어제 사건 이후, 시달리고 시달리다가 완전 녹초가 되어 있었던 로웨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트레비스가 그녀의 어
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린 양! 정말 괜찮다고! 그린 양 잘못도 아니었고, 그 때
그린 양까지 봉변을 당했다면 나는 정말이지.... 아아, 생각하기도
싫다네. 로웨나 그린 양도 어서 일어나 채비를 하게! 어서! 오늘
공연을 해야지! 우리의 천사, 에닌 양이 돌아왔다네!”
그러나 로웨나는 펄쩍 펄쩍 뛰는 트레비스를 보면서도 영 실감이 나
지 않았다. 여전히 울적한 로웨나를 발견한 헨리 카밀턴이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지, 그린 양?”
“너무 쉽게 일이 풀린 것 같아서요. 그 때 에니를 잡아간 그 남
자........... 그렇게 허술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뭔가, 기다렸다가 시간
맞춰서 건네준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에요.”
“나도 그리 생각한다네. 뭔가..... 아주 굉장한 음모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저 바보 친구야, 워낙에 단순해서 냉큼 기뻐하고 있지만
나는 전혀 그리 할 수 없다네.”
“동감이에요. 꼭 이럴 때 소설의 반전이 일어나더라고요.”
“내 생각인데, 만약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면 그건 반전 축에도 못
낄 꺼야. 너무 당연하잖아.”
두 사람이 그리 생각하고 있든 말든, 트레비스는 단원들을 모두 준비
시키기 시작했다. 트레비스가 나서지 않아도 도비니엘 극장주가 더욱
열성으로 무대를 정비해나갔다. 세트가 다시 정돈되고, 오케스트
라 박스의 의자들도 정리되었다. 극장 입구가 열리고, 직원들은 극
장 앞을 마차가 잘 다닐 수 있도록 치우고 닦았다. 다시 피켓이 걸렸다.
오후 다섯 시가 되자 준비는 그럭저럭 마쳐갔다. 카밀턴이 백조처럼
아리따운 발레리나들에게 둘러싸여 한 마리 수컷 공작새 같은 한때를
만끽하고 있을 때, 트레비스는 극장 뒷문에서 극장주 토마스 무어
와 에닌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극장 뒷문으로 군복차림의 소년이
달려와 그에게 쪽지를 건네준 후 돌아갔다.
“뭐람, 이건?”
쪽지를 열어보니, 그 위에는 에닌이 아무래도 상태가 좋지 않아 늦게
도착할 듯 하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공연시각은 맞출 수
있을 테니, 절대 기다리지 말고 막을 올리라는 말이 에닌의 필적으
로 적혀 있었다.
“에닌 마델로 양을 기다리는 건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우리들은 들
어가서 준비상황을 보는 게 좋겠군요.”
토마스 무어의 제안에, 트레비스는 내심 찜찜해하면서도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오페라 단원들도 모두 준비를 마쳤다. 시간이 되어도 에닌이 도착하
지 않자, 단원들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의 대표가 된 로웨나가 트레비스를 찾아가니, 트레비스는
단호하게 외쳤다.
“절대 절대 걱정 말고 준비들 하고 있게나!”
로웨나는 돌아와 그 말을 전했다. 단원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니, 하고 수군대면서도 별 수 없이 준비를 시
작했다.
쏜살같이 소문이 퍼진 뒤라, 6시가 되자 마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
다. 마차에서 귀부인과 신사들이 내리고, 입구로도 걸어온 관객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표를 내고 극장 안으로 들어와, 하나 둘 자리를
채워나갔다.
엄청난 객석은 순식간에 가득 찼고, 1층의 입석을 산 사람들도 밀려
들어와 사방이 가득 찼다. 전날보다 더욱 많아진 듯 했다. 드디어
7시 10분 전, 객석의 관객들은 천사의 귀환에 환호할 준비를 하며
흥분했지만, 무대 뒤의 오페라단원들은 환장할 지경이 되었다.
“에닌이 안 왔어--! 어떻게 해!!! 10분 뒤에는 막 올려야 하는데!”
드디어 그 재난을 자기 입으로 외친 수잔나가, 시녀의 옷을 쥐어뜯으
며 울부짖었다. 그토록 부인하고 싶어 하던 상황을 인정하게 된 단
원들은 모조리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뭔가 사고가 생겼음에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고보다 더욱 큰 사고는, 객석을 꽉꽉 채우고
도 무대를 펑크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다시 대표가 된 로웨나가 사무실에 도착하니, 트레비스와 극장
주 토마스 무어는 졸도하기 직전이었다.
“역시나 이상했다니까. 너무 쉽게 믿었어.”
카밀턴은 어느 발레리나로부터 선물 받은 손수건을 펼치며 그리 말했
다. 그 위에는, ‘오늘 어디어디에 있는 카페에서 만나 주시겠어요,
멋진 장군님? 10시에요. 기다릴게요, 달링. 서부의 금빛 사자를 연
모하는 그레이스 달시’ 라고 적혀 있었다. 트레비스가 그의 목을
뽑아버릴 듯 으르렁거렸다.
“자네, 정말! 상황 파악은 하고 있는 건가, 상황 파악은!!”
“도착했습니다!”
트레비스가 카밀턴의 목을 뽑기 직전에 사무실 문이 열리며 직원이
달려왔다. 사람들이 뒤따라 우르르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
닌이 여군 두 사람 사람에게 부축을 받으며 나타났다.
여름인데도 그녀는 망토에 모자를 둘러쓰고 있었다. 그러나 흐트러진
갈색머리나, 얼핏 보이는 얼굴은 분명 에닌이 맞았다.
트레비스가 울며불며 달려갔다.
“마델로 양! 다시 보게 되니, 이건 복된 마제스의 축복이요 자비로운
그레타의 은혜로군!”
“어라, 정말 왔네? 혹시 가짜 아냐?”
트레비스가 카밀턴에게 잉크병을 집어던졌다. 그리고 에닌을 포옹한
다음, 장갑 낀 손을 꼬옥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나, 에닌 마델로 양? 고생 많았지, 응? 이렇게나 어린데 얼마나
놀랐을까.”
에닌이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저기, 무대는...”
“설 수 있겠어?”
“조금 쉬면 할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걱정 끼쳐 드려서.”
“죄송은 무슨 죄송! 그렇게 큰일을 당하고도 무대에 서겠다는 에닌
양의 의지에 감복했다네! 우선 공연 시작은 좀 늦추도록 하지! 충
분히 쉬고 오라고.”
“저기, 물 좀...”
에닌이 힘없이 말하자, 로웨나는 재빨리 사무실 주전자의 물을 따라
에닌에게 건네주었다. 에닌이 물을 받다가 로웨나와 손끝이 닿았다.
시체처럼 아주 차고 창백했다. 로웨나가 물었다.
“너, 괜찮은 거니?”
“조금 쉬면 괜찮을 거야..... ”
에닌은 물을 마신 다음 길게 한숨을 내 쉬고는 의자에 기대어 앉았
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밀턴은 눈살을 찌푸리고,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치고, 다시 그 지팡이를 휘둘러 벽을 쳤다.
“이봐, 헤리! 정신 산만하니 좀 가만히 있으라고!”
트레비스가 버럭 고함을 내 지르자, 카밀턴은 지팡이를 딱 멈추었다.
트레비스는 로웨나에게 말했다.
“로웨나 그린 양, 어서 모두에게 알리게. 곧 시작 될 거라고! 어서.”
“알겠어요. 에니, 너도 어서 분장실로 가야지.”
로웨나가 말하자, 에닌은 고개를 젓더니 망토를 벗었다. 로웨나도 놀
라고, 토마스 무어는 물론이요 트레비스도 놀랐다.
에닌은 망토 아래에, 화려한 바티스타의 의상을 입고 있었다.
“너, 대체 언제 갈아입은 거야?”
“오면서. 먼저 가서 기다려. 아, 그리고......... 로웨나, 얼굴 분장은 아
직 못했거든. 하는 동안.... 네가 아주 잠깐, 잠깐 동안만 나대신 여
왕의 망토를 두르고 서 있어 줘. 바티스타의 노래는 합창이 시작되
고 한참 지나야 시작되니까, 그 동안만 네가 서 있어줘.”
“그럴 필요 있어? 차라리 공연을 좀 늦게 시작하면 되잖아.”
“맞아. 무리하지 말게나, 마델로 양.”
에닌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저 때문에 많은 분들이 고생했는데... 더 기다리게 할 수
는 없어요. 최선을 다하겠어요. 피로 같은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알았네, 뜻대로 하지. 로웨나 그린 양...... 그렇게 해 주게. 딱 10분
만 그리 서 있으면 되는 거니, 어렵지 않지? 로웨나 그린 양의 담
력은 카스톨 최강이니, 잘 할 수 있을 거야!”
그런 걸로 최강이고 싶지는 않은데, 로웨나는 어색하게 웃어야 했다.
에닌의 귀환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은 트래비스가 외쳤다.
“에닌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무대 뒤쪽으로 입장시켜 주겠네! 군무
맡은 배우들에게 적당히 말 해 줘. 알겠지?”
“알겠습니다.”
로웨나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나갔다. 막 문을 닫을 때, 카밀턴
이 아주 심상찮은 눈으로 에닌을 보고 있었다. 에닌이 모자를 벗어
옆에다 걸었다. 어깨로 치렁치렁 흘러내리는 그녀의 진한 갈색
머리카락을 보며, 로웨나는 생각보다는 몸이 괜찮아 보여 다행이라
고 생각하며 문을 닫고 의상실로 달려갔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공연시간은 너무 촉박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의상실에서 망토를 찾아 챙긴 다음, 급히 어깨에 두르고 가면도 찾
아내 들고 달려갔다.
단원이 거의 발광상태가 되어 로웨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웨나는
황급히 에닌이 이제 막 도착했으며, 무대는 일정대로 시작될 거라
전했다.
“역시나, 프리마 돈나. 잘난 공주님이군.”
수잔나가 짜증을 부렸다.
드디어 상황이 해결되자, 다른 단원들도 안심하며 불평을 하기 시작
했다.
“맞아! 잘못은 에닌이 한 거잖아!”
“그러게 말야! 에닌이 그렇게 위험한 곳을 나돌아 다니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냐!”
“누가 아니래니! 하여간, 그 물정 모르는 공주님 덕에 우리만 애 먹
었잖아!”
“우리만 애 먹었니? 전 치안군이 총동원 되었는데, 그 사람들이 더
고생했지.”
“맞아, 맞아. 걔는 다른 사람 고생하는 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한다니까. 자기 멋 대로지, 정말.”
로웨나는 화가 치밀었다.
“어서가요, 어서! 늦으면 관객들을 애 먹이게 되는 거라고! 그리고 너
희들, 나중에 씹든 지지든 마음 대로 하고, 지금은 나가! 그 때는
실컷 들어줄 테니!”
로웨나의 말이라면 단원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아무도 거부감을 느끼
지 않는 지라, 다들 입 다물고 무대로 나갈 준비를 시작했다.
수잔나가 물었다.
“그런데 너는 언제 그 망토를 벗는 거야?”
“에닌이 들어오면, 그 즉시 벗어다가 입혀 줘야지. 그건 내가 알아서
잘 할 테니까, 너희들은 그냥 하던 대로 하기만 하면 된다고.”
“신호라도 해 줘. 아무리 너는 너 알아서 잘 한다지만, 우리는 아니거
든.”
“알았으니 어서 나가기나 해.”
그리 말하며 로웨나는 친구들을 떠밀었다.
다들 불평은 하면서도 무대로 올라가 각자의 위치에 섰다. 오케스트
라 박스에도 연락이 갔다. 예정보다 5분 정도 늦은 시각에 오케스
트라 박스로 지휘자가 나타나 지휘봉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음악이 시작되자 드디어 안정을 찾은 객석의 관객이 기대에 들뜬 눈
으로 무대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의 조명이
켜졌다. 캄캄한 극장 안에 무대만이 떠오르듯 환하게 빛나기 시
작했다. 자주 빛 막의 끝자락이 하얗게 타오르다가 위로 올라갔다.
로웨나는 바티스타의 위치에 섰다. 그러나 하라는 대로 하면서도, 뭔
가, 아주 엄청난 일이 생길 것만 같았다. 오늘 따라 조명이 굉장히
눈부시다고 생각하며, 로웨나는 단원들과 함께 꼼짝 않고 서 있었다.
가면을 쓴 얼굴로 볼 수 있는 정면의 박스석 2층에는 알렉산더가 앉
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블랑쉐가 무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이 문제의 원흉인 블랑쉐는, 너무나 기쁘다는 얼굴로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꼴이 보기 싫어 눈길을 슬쩍 드니, 3층의
박스석에 코지마가 검은 옷을 입고 앉아 있었다. 눈이 마주친 것을
알았는지, 코지마가 빙그레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 인 줄 대체
어떻게 안 걸까- 로웨나는 궁금해 하면서도 그녀가 알아봐 주
어서 고마웠다.
군무가 시작되었다. 로웨나는 가면을 쓴 채로 고개를 들다가 아주 놀
랐다.
무대의 천장, 도르래가 가득한 그곳에 누군가가 두 발을 딛고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카만 특무부 제복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지켜보는 남
자는 전날의 그 긴 흑발의 장교가 아닌 유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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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이것 저것 처리할 게 좀 많았습니다. 드디어 다 한바탕
끝내고 안도하고..........
이제보니, 슬슬 홍염도 연재1주년이 다 되어 가는 군요.
............네, 1주년.......
...........
................. ;;; 조, 좀 연재가 느리기는 했군요. 아하하하!!!!
다음편은 3일 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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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