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편
벙어리 여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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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무대를 내려보았다.
아름다운 무희들은 늦은 저녁 새 무리처럼 움직였다. 화려한 의상에
조명이 반사되며 아침햇살 가득한 바다에 있는 듯 눈부셨다. 그 중
앙에는 에닌의 갈색머리가 아닌 로웨나의 붉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상황 파악하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에닌 마델로가 예정보다 늦게 도
착했다는 건 방금 알려졌다. 잠시 안정을 하고 무대로 나가는 데는
시간이 걸릴 테니 누군가가 대신 서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상
황에서, 침착하게 맡은 바를 할 수 있는 여자는 단원 중에는 로웨나
한 명 뿐일 것이다. 그녀는 눈앞에서 카밀턴 경의 암살미수사건
이 벌어져도 부를 노래는 다 불렀다.
유릭은 딱히 이상한 것은 발견할 수 없어서 객석을 살폈다. 박스석의
관객들은 잡담조차 나누지 않으며 무대에 열중하고 있었다. 1층의
객석도 마찬가지였다. 역시나 딱히 이상한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다 보니 샹들리에 옆에 붙은 계단에 서 있는 크리스펠
로를 발견했다. 크리스펠로는 쭈그리고 앉아 발 아래에 펼쳐진 넓
고 아찔한 객석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보
통 사람이라면 현기증 나서 쓰러질만한 높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대로 추락해도 조금도 상처를 입지 않을 크리스펠로는 덤덤하게 서 있었다.
천장을 살피기 위해 유릭은 뒤로 물러나다가 난간과 쇠붙이가 부딪히
는 철컹, 소리가 나자 다시 앞으로 나왔다. 평소와는 달리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완전무장상태다, 특무부대원들은.
지금 상황이라면, 일개 군단이 달려들어도 너끈히 해치울 수 있을 것
이다.
드디어 최초의 합창이 시작되며 천정위로 동굴 속 파도소리처럼 웅장
한 음악이 밀려들려왔다.
빛나리라.
해처럼 영원하고 달처럼 아름답게.
무희들이 퇴장하고 코러스만이 남아 앞으로 한발자국 앞으로 나아가
며 웅혼한 합창을 쌓아올렸다. 별을 휘감은 듯 찬란한 의상 속에서,
음은 빛의 밤바다의 물결처럼 몰아치고 있었다. 두 번째 줄의 코
러스가 한걸음 앞으로 나갔다. 무대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는 여왕
인척하는 시녀소녀가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치였다. 유릭도 보니, 무대 뒤쪽의 문에서 누군가의 그림자
가 나타났다. 무어라 지시가 있었는지 여왕인 척하는 시녀 주변의
시녀 세 명이 여왕을 감았다. 가짜 여왕이 뒷걸음을 치며 한걸음
내려왔다. 무대 앞에서는 여왕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유릭은 그
행동의 의도가 무엇인지 금세 알아챘다. 로웨나가 물러나고 오늘 구
출되었다는 에닌 마델로가 저 곳으로 가서 서면 감쪽같이 마무리 되
는 것이다. 곧 에닌이 나타날 것이다. 여왕이 돌아온다.
그리고 가장 빛나는 우리의 여왕
그러나 잔혹하고 차가운 우리의 여왕
그 노래 소리와 함께 앞줄 코러스가 방향을 틀었다.
새벽달처럼 차가운 우리의 여왕
그리고 두 번째 줄이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맨 뒷줄에 있는 시녀들
이 눈에 뜨이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계속 무대 뒤를 살피고 입술을
꾹 물거나 눈을 깜빡였다. 망토를 벗고 시녀로 돌아갈 준비를 하
고 있던 로웨나는 아예 무대 뒤만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가 잘못 되고 있다. 폭풍의 전조, 재난의 시작, 그 예감이 슬그머
니 옷자락을 펼치며 다가오고 있다.......
“.....”
그리고, 바로 그 때 유릭의 목줄기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자, 이제 벙어리 여왕의 즉위식이 시작될 거야.”
“......”
유릭은 고개를 돌렸다.
권총의 총구가 그의 목 언저리에 얹혀 있었다. 검고 긴 팔이 그 총을
쥐고 있었고, 어두컴컴한 무대 천장을 등지고 후리후리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복면으로 가리고 있었다. 머리도 모자로 가리고
있었다. 눈동자는 어두워서 보이지도 않는다.
“이제 무대의 조명이 죽은 해의 빛처럼 쏟아질 거라. 사람들이 가슴
을 누르며 여왕을 바라볼 테지. 하지만 여왕은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거야. 겁에 질린 요정의 시녀가 모두에게 외칠 거라네. ‘죄송합니다,
여왕님이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합창소리는 크게 크게 울려 퍼졌다. 거대한 파도처럼 솟아오르고 있
다. 그것은 어쩌면 해일과도 같았다.
우리의 여왕
우리의 여왕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더욱 웅장해졌다. 온 극장이, 오페라의 음과 노
래로 격정적으로 타올랐다. 화려한 음의 불꽃으로, 온 세상이 가득
차고 있었다.
남자가 속삭였다.
“노래의 천사, 요정의 여왕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그 자리에 벙어
리 여왕이 앉아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는
다면, 겁먹은 눈을 크게 뜨고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다면.”
“욕먹겠지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 다음 어떤 재난이 일어날 지, 짐작은 되나.”
“대규모 환불사태?”
“.....”
이번 침묵은 좀 길었다. 그 와중에도 음악소리는 장중하게 들려온다.
점점 더 거대하게. 재난을 향해, 한발자국도 멈추지 않고 미친 듯이
돌진하고 있다. 남자의 총구는 여전히 목덜미에 얹혀 있고, 그것
을 당긴다면 유릭의 목은 단번에 뽑힐 것이다.
“공연을 중단시키는 것이 지금 목적입니까?”
“그것도 있고, 또 다른 목적도 있지.”
총구가 목을 쿡 찔렀다.
“바로 너, 너희들을 죽이는 거다! 이곳에 깔린 너희들을....파난의 악
마들!”
“대체 왜...”
“왜라. 왜라고? 그건 너희들이 걸어온 피 젖은 길을 돌아보면 금방
설명할 수 있겠지. 내가 설명하자니, 벌써부터 입에 신경통이 온
다네.”
순간, 검은 그림자가 남자를 덮쳤다. 으르렁--크헝! 야수의 울부짖
음이 터졌다.
유릭은 통로의 난간을 잡고 총을 뽑았다. 그런데 깨행, 하는 울부짖
음이 터지며 크리스펠로의 몸이 내동댕이쳐졌다. 으르렁, 컹컹! 사
납게 짖어대며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일어나려는 크리스펠로의 몸
이 번쩍 들렸다가 다시 내동댕이쳐지더니, 그 위로 거대한 기둥 같
은 것이 내리박혔다.
“크리스 님!”
크리스펠로의 목이 어마어마한 거인에게 꽉 움켜잡혀 있었다. 크리스
펠로가 미친 듯이 울부짖고 짖어댔고, 결국 그 거대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 똥개는 내가 맡지.”
오거 비슷한 엄청난 거인이 크리스펠로의 몸을 억누르고 있었다.
근육이 울퉁불퉁 솟은 구릿빛 팔은 몽둥이처럼 억세고 굵었으며, 바
위 같은 몸통과 허벅지는 술통을 이어 붙여 놓은 듯 어마어마했다. 굵은
목 위에 얹힌 얼굴은 말처럼 길고 도깨비처럼 험악했다. 머리카락
은 검고 짧았다. 크리스펠로가 버둥댔지만, 평소에 동료들이 편리
하게 쓰던 쇠사슬이 이제 그의 약점이 되어 있었다. 거인의 굵은 손
가락에 그 쇠사슬이 틀어 잡혀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유릭은 거인을 겨냥했지만 쉭, 하는 빠른 소리가 들리더니 유릭의 목
이 휘감겼다. 누군가의 긴 팔이 유릭의 목을 감고 들고 있는 칼을
턱에 댔다.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고개를 흘끔 돌려보니, 여자였다.
금발머리에 각기 다른 색의 눈동자를 가진, 그저께 술집에서 보았
던 바로 그 여자였다. 여자는 유릭의 손목을 후려쳤다. 권총이 떨어
지자, 그것을 걷어 차 거인에게로 던졌다. 거인이 그것을 받아 움켜
쥐었다. 꽈드득, 소리와 함께 권총이 그 엄청난 손아귀에서 박살났다.
아아, 군용품담당한테 나 이제 죽었다- 유릭은 절망적으로 중얼 거
렸다.
거인이 씹다 뱉은 뼈를 던지듯 구겨진 권총을 내던졌다. 그것을 눈앞
에서 본 크리스펠로가 잠잠해졌다. 으르릉-- 나지막한 으르렁거림만
스며 나오고 있었다.
검은 옷의 남자가 껄걸 웃어젖히며 외쳤다.
“자, 이제 공연을 시작해야지! 악마의 등장과 함께, 벙어리 여왕의 즉
위식이 시작되는 악당의 부조리극이.”
유릭은 목이 감긴 채로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창검으로 무찌르라.
여왕의 발아래 핏빛 영광을 쌓으라.
노래는 계속되지만, 무대의 혼란은 이제 눈에 뜨일 지경이었다.
그 누구보다 당황하고 있는 것은 로웨나였다. 여왕이 나타나지 않는
다면, 모든 냉혹한 시선과 당혹의 침묵이 로웨나를 중심으로 몰려들
것이다. 원래 그녀가 맡아야 할 시녀들 틈으로 숨어 도망치는 것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시녀들은 텅 빈 여왕의 자리
를 모두에게 보여줄 것이다.
덜그럭, 뭐가 흔들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샹들리에 근처에 소
년 하나가 서 있었다. 소년은 산탄총을 들고 샹들리에의 쇠사슬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역시나 익스턴 광산과 술집에
서 보았던 주근깨 용병소년이었다.
복면의 남자가 외쳤다.
“침묵이 암흑처럼 덮치면, 드디어 시작될 거야. 경악과 광란의 무대
가. 벙어리 여왕이 나타나는 순간에...........!”
그것은 굵고 우렁찬, 훌륭한 바리톤.
유릭이 외쳤다.
“이안 블로드.......?!”
남자가 웃었다. 그리고 복면을 벗어 던졌다.
검은 곱슬머리가 쏟아졌다. 길고 날렵한 얼굴도 드러났다. 그리고 검
고 뜨거운 눈동자가 유릭을 똑바로 향했다.
“......당신.”
“미안, 사실 진짜였어, 나. 억울하게 잡혀온 게 아니었다아네. 처형당
한 사람 중 그 누구도 나보다 확실한 흑마법사는 없었을 거야.”
무대의 합창 소리가 더욱 강렬해져갔다. 이제 모든 소리가 묻혀져갔
다. 이안이 심술궂은 아이처럼 웃었다.
여왕이여-
시선이 몰려들었다. 극심한 파도, 극심한 폭풍, 재앙처럼 몰려드는 순
간이 있었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재앙 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
침묵..............
아니다.
지배하리라
나는 왕이며 왕관의 주인
흰 꽃잎 위에 붉은 피가 이슬 맺히리라
검은 말발굽이 그 위를 짓밟으리라!
“어라?”
이안 블로드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순간, 긴장의 극한이 넘어가는
순간, 어둠을 꿰뚫는 아침햇살의 창처럼 노래가, 사막으로 쏟아지는
소나기 같은 노래가, 기적처럼, 황금의 화살처럼 솟구쳤다.
뒤통수 맞고 등짝 밟혀 당황한 이안이 입을 적 벌렸다.
“뭐야, 이거.......!!!”
유릭이 외쳤다.
“키케-!”
빛이 작렬하며, 여자가 눈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그 틈에 유릭
은 여자의 허리를 팔꿈치로 후려쳤다. 여자가 검을 뽑았고, 유릭도
허리의 검을 뽑았다. 여자가 검을 휘둘러 유릭을 찔러 들어왔지만,
유릭은 빠르게 피해 난간 위로 뛰어 올랐다.
크리스펠로가 순간 인간으로 변하며 그 주먹을 힘껏 뻗어 거인의 턱
을 후려쳤다. 우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비명이 터졌다.
“으헉!”
크리스펠로가 움켜잡힌 쇠사슬을 직접 잡아 뜯었다. 쇠사슬이 바닥에
철그렁 철그렁 떨어졌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러, 거인을 후려쳤다.
거인의 육중한 몸이 날아가 나동그라졌다.
“페, 펜리....키언인가.”
거인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턱을 움켜잡으며 비틀 비틀 일어났다.
그러더니 히죽 웃었다.
“그렇다면, 네가 그 크리스펠로로군! 서부 특무부의 개!”
크리스펠로는 아무 말도 없었다.
거인이 킬킬 웃으며 외쳤다.
“주는 밥 처먹으면서 꼬리 흔드는 개! 푸하하, 그게 바로 너로군!
만나서 영광이다, 천하의 비천한 똥개 같으니!”
크리스펠로가 멍하니 거인을 보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 욕인가?”
“....당연하지!”
그러나 크리스펠로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나쁜 거야?”
“뭐가?”
“주는 거 먹는 거.”
“......”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하는 거.”
“......!!!”
“그게 나쁜 건가? 난 모르겠어.”
거인이 경악했다.
“놀리냐, 지금! 당연히 수치스러운 짓이지! 일족의 치욕이다! 만월만이 우리의
주인이며, 우리의 어머니! 사냥하지 않고 빌어먹으며, 그들의 명령에 복종하는
건 수치다!”
“그럼 하지 마.”
“뭐?”
“네가 싫으면 네가 하지 마. 나는 싫지 않아.”
그리고 크리스펠로는 바닥을 박찼다. 거인이 팔을 휘둘렀지만 자신의 팔로 막고,
몸을 휘둘러 그 턱을 걷어찼다. 빠악-! 바위 무너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인의
몸이 나동그라졌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거인의 몸이 휘몰아치듯 변했다.
엄청난, 붉은 늑대였다. 크리스펠로의 덩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차라리
곰이라 해도 그다지 위화감 없는 엄청나게 육중한 늑대였다. 인간 모습일
때와 비슷하게 그 팔다리는 나무 둥치라도 뽑아온 듯 엄청나다.
그것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크리스펠로가 등의 활을 뽑았다. 그의
활이 자신을 향하자, 붉은 늑대가 짖듯이 외쳤다.
“비겁하군! 무기를 사용하다니!”
그러자 크리스펠로가 말했다.
“그거, 나쁜 거야?”
“당연하지--!!!! 제기랄, 너는 그 질문 좀 하지 마! 바보냐, 너!!!”
격분한 붉은 늑대가 왈왈 짖어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크리스펠로의 손은
여전히 활을 쥐고 있었다.
“그럼 너는 기분 나빠해. 상관 안 해. 프락티온!”
푸른 빛이 솟구쳐 늑대의 이마에 명중했다.
깨애애애애애애앵-- 길고도 구슬픈 울음소리가 극장 천장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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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말시키면 당한다!!!
어서 어서 올리고 일하러~
........다녀와서 오타 수정합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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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