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편
벙어리 여왕#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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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상관, 굉장하군! 그런 말을 듣고도 저리 차분하다니.”
유릭은 여자의 검을 맞받아치며 말했다.
“크리스펠로 대위님을 화나게 하려면, 말로 긁는 것 보다 먹던 밥그
릇을 걷어차는 게 더 확실합니다.”
“....”
유릭은 여자의 검을 받아치고 찔러 들어갔다. 여자가 급히 몸을 틀며
검을 후려쳤다. 챙캉, 챙캉, 검이 미친 듯이 부딪혔다.
“검, 어디서 배우셨나요?”
“그건 왜 묻지?”
“저하고 너무 잘 맞아서. 아무래도, 스승이 같은 듯해요.”
여자가 호오, 하고 웃으며 검을 후려갈겼다. 검날이 깔끔한 호선을
그었고, 다시 유릭의 검과 맞부딪혔다. 여자가 검을 밀어붙이며 외
쳤다.
“꽤 잘하네? 권총 박살나면 끝인 줄 알았는데!”
“아아, 조사미비. 정보수집을 소홀히 하면, 그건 패인이 된답니다.”
“무슨-”
“행운의 여신, 자매이신 승리의 여신은 무지한 자를 경멸하지요!”
“웃기네!”
“그리고 게으른 자는 더더욱 경멸한답니다. 돌보다 많은 것이 행운,
그러나 무지한 자와 게으른 자는 그 어떤 것도 줍지 못한답니다.”
다시, 챙챙, 검이 부딪히고 검광이 번뜩였다. 여자가 뒤로 물러나고,
유릭도 뒤로 물러났다. 유릭은 검을 휘둘러 고쳐 잡고는 여자의 턱을
가리켰다. 여자는 검을 당겼다가 빠르게 휘두르며 말했다.
“일단 이기고 나서 지껄이시지?”
“아하, 글쎄요.”
유릭은 검을 세워 여자의 공격을 미끄러뜨리고, 다시 휘두르고 찔러
들어갔다. 여자의 검이 흔들렸다. 다시 베어 들어가자, 여자는 간신히
검을 막았다. 유릭은 저돌적으로 몰아쳤다. 흔들림이 더욱 커지자,
유릭의 검이 여자의 검을 후려쳤다. 여자가 잠깐 검을 당기는 사이,
유릭은 그대로 몸을 날려 그 턱을 후려갈겼다.
발길질 한방에, 여자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여자가 놀라고 경악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턱의 피를 훔치며 생전 처음으로 뺨맞은 공
주님처럼 경악했다.
“나, 나, 날 쳤어!”
“찌르는 건 되고 치는 건 안 됩니까?”
“감히이--! 감히 날 쳤어, 감히!”
“그건 아가씨가 할 대사는 아닌데.”
등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 목소리에, 놀란 여자는 검을 당겼다. 그 순
간에 은빛 봉이 그 검을 후려치고 손목을 딱 때리고 등을 후려갈
겼다. 검이 날아가고,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허리를 숙였다. 발 아래
로 봉이 찔러 들어와, 그녀를 걸어 넘어뜨렸다. 콰앙, 그녀는 그대
로 넘어졌다.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녀의 턱 아래로 은빛 봉이
쑥 밀려들어오며 그녀의 몸을 짓눌렀다.
여자가 이를 악물었다 떼며 고함을 질렀다.
“이거 뭐야!”
“뭐긴 뭐야, 이 아가씨야. 너 체포야. 개기지마. 일정에 없던 일 해서
지금 앞에 있는 건 무엇이라도, 프리델라님을 제하고는 다 작살내고
싶은 상태라고.”
“!!!!”
여자가 부들부들 떨며 이를 북북 갈고 주먹을 꽉 쥐었다. 그냥 놔둬
도, 열 받은 김에 졸도까지 해서 마무리 할 것 같다.
카바냐는 여자의 목을 봉으로 짓눌렀다. 이제는 주먹은 못 휘두르고,
부들부들 떠는 것 밖에는 할 도리가 없었다. 여자가 이를 북북 갈며
으르렁거렸다.
“나중에 보자, 나중에!”
“어머나, 나중에 보실 것 없이 지금 제 얼굴 잘 봐두세요. 아마도, 이
게 우리의 마지막이 될 테니. 제 이름은 카바냐 코로뉴. 이름 기억은
필수.”
그리고 카바냐는 봉을 뽑아, 여자가 일어나자마자 그 뒤통수를 후려
갈겼다.
“윽-!”
여자는 그대로 기절했다. 유릭과 카바냐는 이제 크리스펠로를 도우는
게 좋지 않을까, 하고 고개를 돌렸으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빈 술
통처럼 쓰러진 거인의 머리를 발로 툭툭 차고 있는 크리스펠로였다.
방금 전에 날린 한방에, 아주 쉽게 기절한 듯 보였다. 카바냐가 고
개를 돌렸다.
“자, 이제 두목님 차례인가-”
그런데 정작 이안 블로드는 부하들 도울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열
심히 무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난간에 발을 얹고, 신 같은 표정
으로 무대를 바라보더니 씨익 웃었다.
“운이 좋군, 너희들. 미리 대역을 준비해 뒀다니.”
“그런 적 없는데요.”
그리고 당신, 부하들 해치우면 당신 차례인데요- 라고 말하려던 유
릭은 그만두기로 했다. 이안이 외쳤다.
“너희들은 몰랐어도 그 트래비스인지 뭔지 하는 3류 장사치는 대역을
준비해 뒀어-! 허, 참. 이거 낭팬데! 이렇게 허망하고도 당연한 방
법에 넘어가다니! 대체 언제 계획이 샌 거야!”
유릭은 속으로만 답했다. 급조된 프리마돈나랍니다, 용감한 시녀아가
씨가 대범하게 여왕의 역을 하고 있지요-
“이봐요, 이안 씨. 들을 땐 듣더라도 지금은 체포당해 주셔야 하는데
요.”
“얼빠진 바보 하나 체포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 잠깐만 닥쳐달라
고! 좀 듣자, 좀!”
강간범이 인권을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황당했으나, 그 자세가 너무나
당당해서 유릭은 정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사위가 조용해졌다. 음악소리가 이어지는 가운데, 여가수의
아리아가 퍼지고 있었다.
마음은 돌이나
입술은 이슬 젖은 장미
손에는 가시가, 혀에는 독이
그러나 그건 향초이자 독초
유릭은 그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아니, 방금 전에 침
묵의 순간을 넘어서 펼쳐졌던, 긴장과 분노를 갈가리 찢으며 솟구
쳤던, 아침 햇살아래 펼쳐지며 어둠을 씻어내리는 웅혼한 황금의
숲처럼 터지던 첫 번째 아리아가 귀를 울릴 때부터, 누구의 노래인
지 알고 있었다.
“로웨나........”
이안이 고개를 팩 돌리며 말했다.
“대역 아가씨 이름인가? 이거...”
유릭의 검이 이안의 목덜미에 닿았다.
“지금 방해하면 죽습니다.”
그리고 살벌하고도 상냥하게 웃는 모습을 보며, 이안은 침을 꼴까닥
삼켰다.
“뭐, 음- 방해할 생각 없어! 그냥 놔둬도 최악으로 끔찍한 솜씨야!”
“당신만 그런 것 같은데요.”
그러며 유릭은 무대를 가리켰다. 이안이 닭싸움에서 진 아이처럼 매
우 자존심 상해했다.
“제기랄! 전문가가 아니잖아, 넌! 저 관객도 마찬가지고!”
“그러나 비전문가가 절대다수지요.”
이안은 이를 득득 갈아붙였다.
“좋아, 저 대역 아가씨를 위해, 일단은 여기서 끝내도록 하지...... 나
중에 보자고. 아마도, 다른 곳에 있는 너희들 동료와 상관은 어찌
되었을지 모르지만....그래도 지금은 기뻐해! 봄의 새싹을 부둥켜안
고 눈물 쏟듯이, 너희들이 오늘의 재난을 비껴나간 것을 감사해. 하
지만 봄의 폭풍은 겨울의 폭풍보다 무서운 법이지!”
그리고 그의 소맷자락이 펄럭였다. 무엇을 하려는 지 알아챈 유릭이
외쳤다.
“크리스, 피해요!”
크리스펠로가 거인의 몸에서 뛰어 내렸다. 이안의 몸 주변에서 새카
만 마법진이 떠올랐다. 글자도, 모양도 심하게 어그러져 있었다. 그냥
본다면 찢겨진 종이처럼 보였다. 이안이 가슴으로 팔을 당기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쇼타임을 외치듯이 유쾌하게 소리쳤다.
“오팔모크!”
사방에 검은 섬광이 가득 찼다. 아귀가 허공을 할퀴며 울부짖는 듯한
굉음이었다. 그것이 박쥐떼처럼 무수히 쏟아져 쓰러진 여자의 몸을
덮고, 거인의 몸을 휘감았다.
이안은 이마에 손을 얹었다 떼고는 말했다.
“지금은 안녕. 나중에 봐. 클라이막스는 바로 다음이니까.”
그리고 씻어 내리듯이 사라졌다.
가득 찼던 검은 박쥐 떼 같은 조각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쓰러진
여자도, 거대한 거인도, 악몽에서 깨어나듯, 막이 내리듯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거대한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밀려들며, 세상은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카바냐가 멍하니 있다가 중얼 거렸다.
“이제부터는 진짜 우리들 일이 되어 버렸네.”
“.....그런데......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쳐버렸으니, 프리델라 님께 맞아
죽겠.....지요?”
“......”
카바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나저나, 다른.....분들은 어떻게....되었을까요?”
“단테와 페라라가 같은 조가 되어 옥상으로 갔으니..”
“그 누구도 살아 있을 리 없네요.”
“아마도.”
“......”
히게아의 마탄, 탄달로스의 신궁, 드류벨다의 창, 그리고 초토화 3인
조.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최악의 명성이 몰살의 페라라와
피바다의 단테였다. 누가 갔을 지 모르지만 지금쯤 피떡이 되어 있을
곳이다.
남자 가수의 아리아가 무대 위의 전쟁터와 옥상에서 쏟아지고 있을
피바다와는 상관없이 사자의 포효처럼 울려 퍼졌다. 에바가 미리
손을 써둔 덕에 천장 밖으로는 그 어떤 소리도 충격도 새어나가지 않
은 지라 관객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무대에 몰입하고
있었다. 프리마돈나가 유괴되고 특수무력부대 장교 몰살 프로젝트
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세상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유릭은 무대를 내려다보았다.
이제 여주인공의 1막 마지막 아리아가 울려 퍼진다.
이 노래를 기억한다. 그렇다. 그 노래, 그 때 꼭대기 층에서 들었던
들끓는 달빛 같던 그 노래다.
여명을 맞이하는 호수의 수면처럼 찬란한 목소리, 명멸하는 수천의
색채가 실타래처럼 뒤엉켜 있으며, 수만의 영혼이 하나의 가면 아
래에 있는 듯한 목소리, 그것이 바로 그녀의 목소리다. 아무것도
없지만, 저 몸과 목소리와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가진 그녀의 목소리다.
다른 이가 주연이었던 무대, 다른 이를 기대하고 왔던 관객, 그러나
이곳의 주인은 그녀이며 이곳의 왕은 그녀이다.
마침내 노래가 끝났다. 프리마돈나가 뒤바뀐 줄 전혀 모르는 이들이
환호하고, 가면아래에 있는 로웨나가 아닌 다른 이름을 불렀지만,
그래도 유릭만은 그가 아는 진짜 이름을 불렀다.
“로이....”
카바냐가 휘파람을 불렀다.
“와오, 굉장한 여왕님이군! 브라보!”
“여기서는 개판이었지만, 오늘의 무대는 대성공이로군요.”
박수와 환호는 거센 소나기처럼, 신의 폭풍처럼 온 극장을 울리고 있
었다. 유릭도 웃으며 박수를 쳤고, 카바냐도 그리했다.
“그건 그렇고......혹시 프리델라 님도 공격당하셨을까?”
막이 내려갈 때 카바냐가 물었다. 유릭은 옥상으로 가기 위해 천장
입구로 가며 고개를 저었다.
“미치거나 돌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닌 한 그 누구도 손대지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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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자, 이제... 어서 일의 바다로 헤엄쳐 들어가야지요..
.....빠져나와서 오타 수정합니다;;
다음편은 5일 뒤에!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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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38장 시녀와 공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