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48화 (148/174)

제148편

시녀와 공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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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는 생각했다. 이건 그냥 지나가는 악몽이라고. 그리고 내 잘

못은 절대, 절대 아니라고.

시시때때로 저자식이 누군가에게 제대로 혼 좀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

한 적은 많고도 많았지만, 정말 그리되기를 바랐던 적은 결단코 없

었다고. 그러니 이건 내게 내린 벌이 절대 아니라, 저놈의 평소행각

탓에 벌어지는 인과응보일 뿐이라고.

“올해는 우리집안 남자들이 여기저기서 인질이 되는 해인가 봐. 쥴리

안에 이어 이번에는 내가 인질이로군.”

“.......”

즉, 저렇게 지껄여 대는 것에 대한 인과응보인 것이다. 오랜 친구인

트래비스 자신도 인질범과 공범이 되고 싶을 지경인데, 저 놈의 운

명을 관장하는 신 역시 복장 터지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이, 트래비스, 나의 벗이여.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따지고 보면,

인질범을 끌고 온 것은 트래비스 자네가 아닌가. 다아 자네 탓이

라고.”

“닥--쳐!”

트래비스는 화가 치밀었지만, 카밀턴의 턱에 허연 칼날을 들이대고

있는 덩치 큰 사내 때문에 당장 카밀턴을 후려치려 나갈 수도 없

었다.

“난 민간인이라고! 내, 내가 그 남자가 에닌 마델로 양으로 둔갑하고

왔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내냐고! 따지고 보면, 군인인 자네가

먼저 알아야 하는 거 아냐!”

“아아, 그건 내 전공이 아니라...켁.”

지금 이 두 남자가 처한 상황은 무척이나 단순했고, 단순한 만큼 해

결할 방도가 없었다.

로웨나 그린이 무대로 가고, 트래비스는 에닌에게 어서 어서 쉬고 준

비하라고 격려한 다음, 먼저 무대로 가서 단원들을 지휘할 생각이

었다. 그러나 막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카밀턴이 “어이, 트래비스.

큰일 났어.” 하고 말하길래 이 자식 또 뭐야, 가다가 뭐 엎었어

깨먹었어, 하고 생각하며 돌아보았다. 그리고 트래비스가 발견한 것

은, 목이 틀어 잡힌 카밀턴과 그 옆에 칼을 들이밀고 있는 에닌

마델로였다.

트래비스가 기겁하며 “에닌 양, 이게 대체 무슨 짓이야!” 라고 묻기도

전에, 에닌 마델로의 모습은 잡아 뽑듯이 변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날씬한 소녀가 아닌 키 크고 장대한 체구의 남자였다.

애꾸눈에 광대뼈가 높이 솟은 각지고 험상궂은 얼굴이었다.

트래비스가 졸도할 듯 외쳤다.

“남자!”

남자가 껄껄 웃었다. 그 호탕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트래비스는 그의

손을 붙잡고 눈물 좍좍 뽑으며 기뻐하고 얼싸안았던 자신의 그 모든

행동이, 진심으로, 치떨리게 혐오스러웠다. 허락만 된다면 당장에라

도 손 씻으러 가고 싶었다.

“에닌 양은 어디 간 건가!”

트래비스가 묻자 남자가 외쳤다.

“그 아가씨야, 아주 안전한 곳에 곱게 곱게 모셔져 있지. 그런데 지금

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그러며 카밀턴의 목에 칼을 더 깊이 들이댔다.

“제, 제길. 원하는 게 뭐야, 너!”

그러나 협상은 별로 오래 가지 못했다. 할 필요도 없었으며, 할 생각

도 없어지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그 사내 역시 트래비스

만큼이나 당황하게 되었다. 그것은 트래비스 때문이 아닌, 트래비스

뒤로 나타나 지금까지 서 있는 검은 제복의 장교 때문이었다.

장교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으나, 애꾸눈 남자

가 “가까이 오면 이 남자 죽인다!!” 하고 협박하자 그 자리에 딱

멈추어 섰다. 그 옆에는 가냘픈 체구의 사제 소녀가 장교만큼이나

카밀턴의 안위에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인질극 현장을 보고 있었다.

한참이나 침묵의 시간이 지난 뒤, 장교-프리델라가 무덤덤하게 말했

다.

“안 죽여?”

“...........”

“...........”

카밀턴이 끙 하니 한숨을 내 쉬었다. 머리끝까지 불화살이 솟구친 인

질범 애꾸눈 남자가 외쳤다.

“무슨 헛소리냐, 지금!”

“죽인다며.”

“정말 죽인다는 말은 아니다! 내 말을 들....”

“그럼 겁탈하게? 그럴 작정이었다면 나는 가겠다. 그건 내 전담이 아

니니까. 그런 얼굴로 보지 마, 트래비스. 치안군은 불러 줄 테니.”

카밀턴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애꾸눈 남자가 허겁지겁 카밀턴

에게 물었다.

“이봐, 장군. 당신의 부, 부인 아닌가?”

“이혼했다네. 고로, 남남이야. 그러니 놔 줘. 나 가지고 인질극 벌여

봤자 욕만 먹지 아무 소득 없을 걸.”

정상적인 부부이거나 부부였을 거라 착각한 당사자만 바보 되는 상황

이었다. 그리고 카밀턴이 정상인이라 착각한 것 역시 잘못이었다.

카밀턴이 힘없이 말했다.

“어이, 젊은이. 나 안 놔줄 거야?”

“내가 바보냐, 정말 널 놔주게!”

“나 가지고 뭐하.....켁!”

카밀턴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마를 감싸며 몸을 웅크리

는 것도 잠시, 남자가 카밀턴의 목에 발을 꽂아 넣었다. 남자는 프

리델라 쪽으로 칼을 겨누며 외쳤다.

“어차피 내가 노리는 건 너다, 프리델라! 거기서 꼼짝 마! 칼을 버려

라. 억지로 관심 없는 척 하며 날 속일 생각이었다면 오산이다! 정말

이 남자를 죽일 테다!”

그의 발아래에서 카밀턴이 정말 관심 없는 거라니까, 어쩌고 하며 투

덜댔지만, 남자가 발에 힘을 더 꽉 주는 바람에 턱이 뭉개질 것 같은

고통 속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팔시티 공작가의 치욕이군, 헨리. 그냥 혀 깨물고 죽어.”

카밀턴은 남자의 발아래에서 길고 긴 신음을 흘렸다.

“제길, 내가 왜 당신이랑 결혼했는지 모르겠다니까.”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헨리.”

“아하, 그러면 식장엔 왜 들어온 거야? 식 올리기도 전에 도망치지

그랬어?”

“그야, 당신이 먼저 도망갈 줄 알았으니까.”

“내가 왜!”

“후퇴는 당신 전공이잖아.”

“......”

결국 참지 못한 인질범이 외쳤다.

“젠장, 둘 다 부부싸움은 나중에 시간 날 때 해!”

프리델라도 카밀턴도 입을 다물었다. 트래비스가 이봐, 괜찮나? 하고

슬그머니 묻자 카밀턴이 괜찮을 리가 있냐! 하고 바락 바락 화내다가

남자에게 다시 밟혔다.

프리델라가 남자에게 물었다.

“일단, 할 일부터 하는 게 좋겠지. 이봐, 너. 대체 왜 특무부를 노리

는 거지?”

드디어 상황이 좀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남자가 씨익 웃었다.

“우리는 반군이다.”

“정부군은 아닐 테지.”

“.....”

남자의 발밑에서 카밀턴이 말했다.

“저기, 둘 사이의 일이라면 나부터 놔주고.....캑! 알았어, 닥치고 있을

테니 잘 해보게....캑.”

프리델라는 그런 카밀턴을 무관심하게 보다가 남자에게 물었다.

“바보는 내버려두고, 어서 말해라. 왜 우리를 노리는 거냐.”

“궁금한가?”

“폼 잡을 것 없다. 어차피 그 이유를 알리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것

아닌가. 그냥 말 해.”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복수다, 2년 전에 너희들이 저지른 죄에 대한!”

“초토화 작전 하에 우리들이 수행했던 진압전 말인가? 우리는 명령대

로 한 것이다.”

“그렇게 잔인하게 하라는 명령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은 파난 살육전을 수행했던 우리 모두의 죽

음인건가.”

“그렇다. 가장 말 잘 듣고 힘센 개부터 처리하는 것이 상식이니까. 사

령부를 상대하려면, 너희들 흑마법사들부터 없애는 게 원칙!”

남자의 목소리는 사무실을 한번 쩌렁 울릴 정도로 힘찼다. 트래비스

는 기가 죽었고, 카밀턴도 잠시 투덜대던 것을 멈추었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그렇다면 죽여라.”

“응?”

프리델라는 앞으로 나서며 검을 뽑았다.

“죽이고 싶다면 죽여라. 그렇게 노력해라.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원

하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그리고 우리들도 싸울 것이다. 우리들의

생존을 위해, 우리들의 삶을 위해, 우리들의 미래를 위해. 서로가

원하는 것이 서로의 어깨위에 있다면 투쟁은 불가피한 것! 싸워라,

그리고 나를 이겨라.”

상황이 어이없이 돌아가자, 카밀턴과 트래비스가 멍하니 프리델라를

보았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하지만 남자, 내가 이기면 내가 다 갖는다.”

프리델라를 잘 아는 카밀턴과 트래비스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

하는 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아, 저 버릇 어디가나. 좌천이 아니라

강등을 당해도 똑같을 것이다. 남자가 당황하며 카밀턴에게 물었다.

“뭐, 뭔가 굉장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저게 무슨 말이야?”

“니들 다 죽었다는 의미라네.”

“!!!!!”

남자가 카밀턴을 걷어찼다. 나한테 화풀이야, 썅! 귀족치고는 험한 말

을 지껄이며 카밀턴은 테이블 밑으로 굴러갔다. 상황이 무시무시하게

돌아갈 것을 알아챈 트래비스가 그를 따라 테이블 밑으로 기어들

어 갔다.

“따라 하지 마!”

“민간인은 전문가를 따라가야지. 도망치는 건 자네 전문 아닌가.”

“콱 그냥!”

그 때, 콰과광! 천둥을 두들겨 패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사방에, 어둠을 뭉친 듯한 그림자들이 나타나더니 순식간에 거대해졌

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천장과 바닥에 시커멓고 거대한 것

들이 나타났다. 딱, 딱, 딱- 검은 안개를 품은 듯 시커먼 그것들이

소름이 잘잘 끼치는 울음소리를 냈다.

프리델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들을 보았다.

“꽤나 진화한 마령이군. 역시나 흑마법사인가.”

잠시 몸을 부르르 떤 그들은, 프리델라가 아닌 그녀 옆에 있는 가냘

픈 에바를 향해 날아들었다. 벽과 천장과 바닥을 차자, 우드득 소

리가 나며 벽에 금이 쩍쩍가고 바닥이 패이고 천장이 무너져 돌조각

이 와스스 떨어졌다.

에바가 허리에서 무언가를 뽑았다. 스컹, 뱀이 휘날리듯 검고 시커먼

그림자가 날아갔다.

“스팔카!”

그녀가 쥔 검은 뱀 같은 채찍의 몸체에, 순식간에 빛의 문자들이 새

겨지기 시작했다. 쫘악, 천장과 바닥을 후려치자 그곳이 도끼로 내

리찍은 듯 패였다. 가볍게 스친 테이블이 반으로 쩍 갈라지며 무

너졌고, 트래비스와 카밀턴은 동시에 신음을 삼키며 엎드려야 했다.

에바는 채찍을 휘둘렀다. 흰 빛과 검은 빛이 허공을 할퀴며, 그녀를

향해 무너지든 마령들이 일제히 좍좍 갈라졌다. 다리가 잘리고, 몸

체가 반으로 갈리고, 머리가 터졌다. 벌레 떼가 코끼리 발에 밟혀

뭉개지듯 산산 조각나고 있었다. 검은 몸체에서 흰 얼룩이 스며 나

오며 그 위에 인장이 맺히기 시작했다. 오망성의 인장이었다.

“승계되는 인 입니다.”

“눌러.”

“네.”

에바는 채찍을 당겨 팔에 감은 다음, 목에 걸린 투란바코스의 십자가

에 손을 얹었다. 십자가가 떠오르며 그녀를 중심으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몸이 갈라지면서도 움직이던 마령들이 덜컹 덜컹 멈추었다.

프리델라가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잠깐, 무언가 번뜩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순간에 검은 마령들의 몸체에 더 있던 인장들이 모조

리 갈라졌다.

프리델라가 외쳤다.

“에바, 정화해-!”

빛이 더욱 강렬해지며, 갈라졌던 인장이 순식간에 지운 듯이 사라졌

다. 프리델라가 검을 휘둘렀다. 그 가벼운 동작과 함께, 주변의 모든

마령이 종이를 반으로 가른 듯 가로로 좍좍 찢어지며 사라졌다.

주변이 깨끗해졌지만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웃으며 외쳤

다.

“이제 시작이다!”

순간, 그의 턱으로 발차기가 날아들었다. 빠각! 자갈 깨지는 듯한 소

리가 들렸다. 뒤로 자빠질 틈도 없이, 프리델라의 검집이 그 후두

부를 가격했다. 남자가 신음을 흘리며 쓰러지는 순간에, 카밀턴이

테이블 아래에서 빠져나와 부서진 테이블을 집어 들어 그 머리를

후려갈겼다. 경련을 일으키던 남자는 완전히 죽 뻗어 기절했다.

“후- 감히 누구를 인질로 잡아?”

자랑스럽게 승리의 미소를 짓는 카밀턴에게 트래비스가 빈정댔다.

“비겁한 놈.”

“이것도 전술이라네.”

카밀턴은 가볍게 손을 턴 다음 프리델라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여보, 구해줘서 고마워!”

“살았으면 꺼져.”

프리델라는 검 끝으로 턱을 겨누어 카밀턴을 저지한 다음, 쓰러진

남자에게로 갔다. 기절한 남자를 뒤집은 후, 검은 안대를 치웠다.

안대로 가린 눈 꺼풀위에 오망성의 인장이 박혀 있었다. 에바가

다가와 그 위에 손을 얹었다. 흰 빛이 번쩍였다가 사라지자, 그

검은 인장은 더욱 시커멓게 변했다.

“소환진입니다.”

“자기 몸에 새긴 건가.”

“네. 이것을 몸에 새길 때 매개를 서 준 흑마법사가 분명 있었을

겁니다. 다른 마법사로부터 승계된 인이었으니까요. 스스로 새긴

건 아닙니다.”

“그렇다는 것은-”

에바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프리델라가 검으로 남자를

겨누었다. 검은 오망성이 푸르게 변하며 쓰러진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검은 얼룩으로 뒤덮였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추적 걸어.”

“네.”

에바가 손끝으로 십자가를 퉁겼다.

“싱케.”

십자가에서 뭐가 번쩍인 듯 했다. 남자의 몸이 순식간에 시커멓게

변하더니, 그림자처럼 검게 변했다. 곧 빛이 쏟아지듯 어둠이

씻겨 내려가며 그의 몸이 사라졌다.

“점점 복잡해지는 군”

프리델라가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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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극장에 왔던 반군 대부분 사망. 사인은 복장파열.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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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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