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편
시녀와 공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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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옥상의 페라라와 단테에게 가기 위해 천장에서 내려왔
다.
여주인공의 아리아가 끊어지지 않았기에, 세상은 공식적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상태였다. 아무 것도 모르는 관객들은 오늘 어느 어느
부분이 좋지 않았나요, 오오, 누구누구의 어디 어디가 괜찮았지요, 하
고 외치곤 했다. 그 어디에서도 로웨나의 이름은 들려오지 않았다.
가장 많이 들리는 건 에닌, 에닌, 에닌 마델로-
유릭은 웃음이 나왔다. 그들이 칭송하는 여주인공이 에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일까. 다들, 어쩐지 좀 이상했다고 짐짓
고상한 척 할 것이다.
유릭은 고개를 돌리고 방향을 바꾸어 달려갔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으로 들어가자, 직원들은 막으려다 말고 일제히 후닥닥 물러나며
어서 가라고 허리까지 숙이며 인사했다. 유릭은 수고하세요, 하고
격려까지 해 준 다음 배우대기실로 향했다.
여배우 대기실에 도착하니, 문 안에서 꽤나 요란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가까이 가자 금방 그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에닌이 없어서 정말 큰 일 나는 줄 알았지, 뭐야!”
아는 여자 목소리다. 수잔나였나, 제시였나.
“에닌이 돌아오면 로웨나 너한테 엄청나게 감사해야 할 거다. 대재앙
이 일어날 뻔했다고!”
“객석의 관객이 빤히 바라보는데 썰렁해졌어봐! 상상도 하기 싫어!”
“하여간, 에닌 그 기집애는 정말 민폐라니까. 대체 왜 안 온 거래?”
“나중에 물어 봐야지. 세상에, 주연이 되어서 무대를 펑크 내다니! 아
무리 대스타라지만 말이야, 그렇게 무책임한 행동은 정말 잘못이라고
봐,”
맞아, 맞아, 맞아- 하는 수군거림이 이어서 들려왔다. 그 때 유릭이
서 있는 것을 눈치 챈 여가수 하나가 입을 딱 다물고 턱으로 문을
가리켰다. 유릭은 문을 더 넓게 열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유릭을
알아본 단원들이 씻은 듯이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만날 때는 방글
방글 웃으며 잘도 대해주던 아가씨들이, 제복 하나 걸쳤다고 이리
도 살벌해지니 유릭은 꽤나 당혹스러웠다.
“어라, 유리.”
시녀의 옷을 입고 있는 로웨나가 그를 불렀다. 망토만 여왕의 것이었
다. 가짜 여왕이다, 로웨나는. 오늘 그녀의 역할은 여왕의 행세를
하여 왕국을 지켜낸 용감한 시녀아가씨다.
유릭은 웃으며 말했다.
“첫 주연무대, 축하해.”
“아하-”
로웨나가 떨떠름하게 웃다가, 슬쩍 눈길을 돌리며 의미심장하게 물었
다.
“저기, 나 괜찮았어?”
“글쎄-”
애매한 답에 로웨나가 당장에 울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니, 유릭
은 문 닫고 나간 다음 우하하하, 웃어젖히고 싶었다.
“역시 형편없었던 거야!”
로웨나가 그리 말하자, 동료들이 다들 기겁을 하며 위로했다. 처음인
데 그 정도면 잘한 거야, 아냐 잘했다고! 에니보다도 잘했다니까!
아악, 울지 마! 등등등. 단원들로서는 무대를 극적으로 되살려 준
로웨나에게 백번 감사해도 모자랄 판이었다. 로웨나가 잘 부르든 못
부르든, 그 상황에서 아무도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면 그것이야 말
로 생각도 하기 싫을 정도로 참담한 대재앙이었을 것이다.
“로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어.”
“응?”
“객석 쪽 둘러보고 오는 길이야. ‘오늘의 주연인 에닌 마델로 양’에
대한 칭송이 아주 높던데. 조금도 걱정 말라고.”
로웨나도, 다른 여가수들도 멍하니 유릭을 바라보았다. 유릭은 이마
에 손을 댔다가 떼며 경례를 하고는 말했다.
“2막도 잘 부탁해, 여왕님.”
로웨나가 눈을 크게 떴다. 유릭은 문을 닫고 대기실을 나섰다. 살벌
하게 조용하던 분장실 안이, 유릭이 한발자국 떼자마자 엄청나게
소란스러워졌다.
세상에, 로이! 네 남자친구 굉장해! 남자친구 아니라니까! 어머나, 그
럼 애인, 약혼자? 아아, 나도 저런 말 해주는 남자 하나 있으면 좋
겠네! 내가 나중에 뵐 해군장교님도 저런 분이셨으면 좋겠어! 꺄
아아악, 최고야! 다음에도 잘 해!
재잘 재잘 떠들어 대기 시작하고, 흥분하며,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
고 누구의 신세도지지 않고 위기를 이겨낸 것에 즐거워하며 흥분
했다. 그들로서는 굉장한 모험을 한 셈이다.
유릭은 대기실을 지나 옥상으로 향했다.
옥상에 다다르자, 그를 반기는 것은 언제 봐도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운 페라라와 세상만사 아무것에도 관심 없다는 듯 우울한 단테
였다.
“여어, 유리.”
단테가 수첩에 무얼 적다가 고개를 돌렸다. 유릭은 가볍게 경례를 한
후 말했다.
“보러 왔습니다. 여기서는 별 일 없었습니까?”
“보는 대로.”
멋들어진 지붕을 밝히기 위해 번쩍이는 조명은 금빛이었다. 그러나
별빛은 부옇게 흐려지고 달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고즈넉하고 애잔한 밤이었건만, 문 앞에는 잡아 뜯겨진 손이 나뒹굴
고 있었고 페라라 옆에는 피투성이 머리가 하나 얹혀 있었다. 수첩을
덮는 단테 앞에는 살점과 내장, 머리카락, 뇌수가 피범벅이 되어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습격을 받았어요, 유릭 군.”
페라라가 말했다.
“몇 명이었습니까?”
“글쎄요. 다섯 명은 넘는 것 같던데, 모두 흑마법사더군요.”
“그래서-”
유릭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다 쓸었군요.”
“그렇지요, 유릭 군. 여긴 옥상이라서, 저희들이 힘을 다 쓴다 해도
민간인 피해는 전혀 없을 테니까요.”
“.....”
난자의 페라라와 난사의 단테이니, 옥상만큼 좋은 전장이 어디 있을
까. 고즈넉한 밤, 습하고 묵직한 공기에 들척들척 들러붙은 피비린
내는 아주 지독했다.
“그런데 말이지요- 유릭 군.”
페라라가 허리에서 단검을 뽑더니 자루 끝의 고리에 손가락을 넣고
빙빙 돌렸다. 유릭은 흠칫 놀라 뒤로 눌러났다. 대부분의 부대원이
그러하지만, 유릭도 프리델라 다음으로 이 단테와 페라라를 무척
무서워했다. 사실, 서부 특수무력부대 본부에서 대장님께 맞는다,
다음으로 무서운 말이 단테에게 찍힌다, 페라라가 싫어할 걸, 이
라는 말이었다.(그것보다는 좀 덜 한 게, ‘유리가 빨래 안 해줄 거다.’ 였다)
동글동글한 얼굴로 화단을 가꾸는 아기곰 페라라와 음침하고 우울하
게 피안과 낙서의 세계를 떠도는 단테는, 실제로는 겉과 속이 살벌
하게 따로 노는 진짜 악마들이었다.
“그 쪽은 아무 일도 없었나요?”
“저희들도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요? 역시나, 우리 모두를 노리고 온 거로군요.”
아마도, 페라라는 평소 행각 때문에 자신과 단테를 노린 걸지도 모른
다 생각했을 것이다. 유릭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것뿐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설마요. 제 생각인데요, 하사. 아무래도 다시 우리를 공격할 것 같지
는 않습니다.”
“비슷한 의견입니다.......... 아마도-”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지겠지요. 이들이 근거지를 작살내고 박살내어
토벌하라고.”
“그리고.......아마도, 그 근거지가 100%의 확률로 함정이겠지요.”
유릭은 하늘이 참 노랗다고 생각했다. 페라라도 앙증맞게 한숨을 내
쉬었다. 에효-
“.....일은 일을 물고 오지.”
뒤에서 단테가 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이 말해도 오싹할 말을, 단테가 말하니 소름이 오소소 돋았
다.
서부 사령부 소속 특무부가 소집된 것은 저녁 8시 반, 2막이 시작된
직후였다.
유릭과 카바냐, 크리스펠로를 비롯한 ‘천장담당조’와 단테와 페라라로
이루어진 ‘옥상담당조’는 집합과 함께 보고를 올렸다. 닥치는 대로
맞을 거라 각오하고 갔었으나, 프리델라도 범인을 놓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다들 속으로 감사했다.
그 시간, 공연의 경호를 맡았던 시곤 수비대의 보고를 받은 서부 사
령부는 실질적인 파난의 주인인 총사령부에 보고를 올렸다. 그리고
자정이 되자 특무부의 프리델라가 서부 사령부 본부로 소환되었다.
시곤 치안군은 모두 부대로 돌아갔으나, 특무부는 본부가 시곤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있는 지라 오페라 극장에 계속 남게 되었다.
특무부만 극장에 남게 된 것은 아니다. 카밀턴 경, 카스틸리아
오페라 단 전원, 트래비스, 그리고 유릭이 감시를 맡고 있는 알렉산
더 역시 체포된 상태로 극장에 남아 있어야 하게 되었다.
안개가 야트막하게 낀 밤이었다.
흰 달은 성난 고양이의 등처럼 희게 부풀어 오르며 희끄무레하게 빛
났다. 뿌연 안개에 젖은 거리, 가로등의 불빛 역시 그러했다. 사방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시곤 수비대의 명에 의해 배들은 모두
입항도 출항도 금지되고 시민들은 전날부터 발효된 통금령에 의해
집 안으로 숨었다. 9시 경에, 근처에 파견되어 있던 스티브 프리먼
중위와 존 노튼 하사, 엘레노아 킴버 중사, 시스터 제인과 브라더
에릭이 소환되었다. 가히, 최강의 밀도로 특무부가 모였다. 각자,
사령부의 회의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사태가 벌
어질지 예상 못하는 이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 누구도 입 밖으
로 내지 않았지만, 어찌 될지 누구나 예상하고 있었다.
“아주 거창하게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질 것 같군......피냄새가 나.”
유릭의 감시를 받는 알렉산더가 그렇게 나른하게 말했다. 유릭은 그
를 등지고 2층의 창으로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곳은 지옥과 가까우니까요........ 언제나 유황냄새와 피냄새가 나
지요.”
안개에 축축하게 젖은 거리로, 드디어 말발굽소리가 들렸다. 많이 기
다릴 필요는 없었다. 유릭과 알렉산더가 있는 휴게실로, 엘레노아
킴버 중사가 달려와 프리델라의 도착을 알렸다. 유릭은 특무부의 임
시 작전회의실이 된 극장의 회의실로 향했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다른 부대원들은 벌써 모여 있었다.
“사령부로부터 토벌령이 내려졌다.”
유릭을 마지막으로 전원 집합하자, 프리델라가 말했다. 유릭이 물었
다.
“모두 가는 겁니까?”
“모두.”
모두 열 명, 그것도 전원 전투대원으로 모였다면 이건 상당한 숫자
다. 그러나 흑마법사가 있었으며, 그들은 군을 습격했다. 시곤 시에서
직접 초대한 오페라 단의 가수이자, 현 정권의 경제적 실세중 하나
인 살비에 마델로의 딸이 유괴되었다. 명분은 충분하다.
“협상은 안 합니까?”
“방탕한 아들을 둔 집안의 황금만큼 양심이 있는 콘슬러 장군이라면
그리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총사령부가 직접 명령한 것. 그들
에게 있어, 반군이라 확인되는 즉시 자비는 없다. 토벌, 사살, 그리
고 몰살. 그 뿐이다. 협상은 치욕. 위정자의 권위는 사람의 목숨보
다 중요한 것. 돈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서부의 특수무
력부대 전원이 동원된다 하더라도 정당한 결정.”
프리델라는 가지고 온 편지를 꺼내어, 부하들 쪽으로 던졌다.
유릭이 그것을 받아 펼쳤다. 처음 인질범으로부터 왔던 편지와 똑같
은 필적으로 적혀 있었다.
요구한 몸값은 시곤 북쪽에 있는 황금의 콜로세움 서쪽, 그랑달타의
석상 앞으로. 새벽 3시까지 가지고 오도록. 누가 가지고 오든 상관
없음.
“모두 서부의 유적지에 있는 콜로세움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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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우후후후.
다음편은 3일 뒤에!
p.s 오늘도 오타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 군요;; 수정했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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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