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50화 (150/174)

제150편

시녀와 공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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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이 물었다.

“그렇다면, 인질범들의 요구는 어찌되는 겁니까.”

“묵살된다.”

“에닌 양의 목숨이 위험해 질 텐데요.”

“무시된다.”

“살비에 마델로의 딸입니다.”

“유감스럽게도, 사령부는 그녀가 죽기를 바란다. 연약하고 아름다운

여자, 시민의 사랑을 받는 여자, 그런 여자가 폭도들에 의해 납치

되어 처참하게 죽는다. 그리 되면 그녀는 사령부의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돌비체와 니콜라스를 위한 순교자. 반군의 도덕성에 치명타

를 가할 수 있는 순교자. 사령부로서는 그쪽이 더 이익이다.”

옆에서 카바냐가 끄흥, 하고 한숨을 내 쉬고는 말했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일단 그곳으로 쳐들어가서 피바다를 만

든 다음, 에닌 마델로의 시신을 수습해서 사령부에 갖다 주라는 거

군요.”

“그런 셈이다.”

유릭이 말했다.

“그리 되면,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죽인 셈이 됩니다.”

예상하고 있던 바였던 듯 프리델라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사령부가 약속했다.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그거, 안 믿어.”

크리스펠로였다.

대체로 상황파악을 못하는 크리스펠로가 사태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

면, 그건 모두 다 알지만 차마 체면 때문에 아무 말 못하는 경우일

뿐이다. 칼 같은 진실인지라, 다들 울적한 얼굴이 되었다. 사령부

의 구두약속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아니, 상황이

바뀌면 언제나 변해왔으며,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거의 지켜지지

않아왔다(특히나 뭐 준다는 약속일 경우, 절대 지켜지는 법이 없다).

프리델라는 골치 아프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모두 이가는 소리조

차 없이 잠잠해지자, 프리델라가 말했다.

“일단 모두 콜로세움으로 떠나라. 조는 도착한 후에 배정해 주겠다.

그리고...........”

프리델라는 유릭을 보았다.

“알렉산더, 그 남자를 불러라.”

“네?”

“나는 너희들에게 명령은 내릴 수 있다. 그리고 사령부가 내게 명령

을 내릴 수도 있지. 그러나 나는 그 권리로 너희들을 살인자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니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을 불러라. 어서.”

“어쩌시려고 그러는 겁니까.”

“에닌 마델로를 구하는 것은,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에게 맡긴다.”

알렉산더를 아는 크리스펠로, 카바냐, 에바의 얼굴이 확 변했다. 유릭

이 나서며 되물었다.

“어째서-”

프리델라가 말했다.

“어차피 나 그 계집애 모른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뺨 몇 대 갈

겨 주고 싶을 정도로 싫다. 그러나 나는 너희들을 살인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그녀를 구하려 하는 거다. 군인도, 적도 아닌 민간인을

죽게 내버려 두는 것은 진짜 살인. 그것도 1급 살인이며 중죄이다.

충분히 죄인인 너희들이다. 예정된 희생, 명령받은 희생이라 할

지라도 나는 막을 것이다.”

“왜.......하필 그 사람입니까.”

“지금 당장 구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언제라도 다시 잡을 수 있지만 에닌 마델로는 지금 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기도 해.”

그리고 유릭을 가리켰다.

“유리, 어서 알렉산더 백작에게 여기로 오라고 전해라. 당장 데리고

와.”

더 이상의 항의도, 의견제시도 없었다. 모두가 침묵한 가운데, 카바냐

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음에도 프리델라의 명령은

수행되었다.

유릭은 동료들이 있는 자리를 떠, 알렉산더가 기다리고 있는 2층 휴

게실로 향했다.

“끝났나.”

유릭이 나타나자 알렉산더가 반겼다. 백작 옆에는 블랑쉐와 오터가

있었다. 블랑쉐는 알렉산더의 팔에 매달려 뭐가 그리 좋은 지 신나게

조잘대다가, 유릭이 들어오자 달려왔다. 유릭은 블랑쉐가 달려들려

는 것을 손을 들어 막은 다음 말했다.

“백작,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들어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에닌 마델로 양을 구해주셨으면 합니다.”

블랑쉐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알렉산더가 소리 내어 웃었다. 스산한

웃음이었다. 예정된 일이 예정대로 일어나는 것을 기뻐하는 악마의

왕의 웃음이었다.

“폭도들에 의해 유괴된 아가씨를 구하는 건 군인이 할일 아닌가?”

“사정이 생겼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는 게 있어야 도와주지.”

“프리델라 님께 말씀하십시오. 그분의 명입니다.”

“그래? 그 사람이라면 좀 더 쓸만한 거래를 제시하겠군.”

유릭은 에닌과 알렉산더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다정하

게 대하는 듯 보이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백작은 언제나 에닌을

물건 보듯 냉랭하게 바라봐 왔다. 로웨나가 백작을 싫어하는 것도

그 탓이다. 그리고 지금도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의 목숨을 구해달

라는 부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거래를 말하고 있다.

“그럼, 일단 가 보도록 하지.”

알렉산더가 일어났다. 블랑쉐가 매달렸지만 그는 그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오터에게 건네주었다. 오터는 블랑쉐를 아주 무서운 것을

만지듯 조심조심 잡아끌었다. 알렉산더는 유릭을 앞장세워 회의실로

향했다. 미소 짓는 그는, 아무런 긴장감 없이 오히려 기대에 찬

얼굴이었다.

회의실로 돌아오자, 프리델라 옆에는 의외의 인물이 서 있었다.

코지마였다. 그녀는 유릭과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었다.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그리 묻는 눈길을 보내자 그녀는 웃기만 할

뿐이었다. 다행히, 다른 부대원들은 벌써 나가고 없었다. 카바냐나

에바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악을 써대며 노골적으로 적대했을 것이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대령, 크로반 군에게 사정은 대충 들었소. 내가 어쩌면 되는 거지?”

프리델라가 편지를 집어던졌다. 알렉산더는 그것을 받아 읽은 다음,

다시 접어 테이블 위에 얹었다.

“하지만, 이건 군의 일이오. 나는 공식적으로는 민간인이며, 체포까지

당한 상태지. 이런 명령을 내리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된다고 보는데.”

“사정이 생겼다.”

“그렇다면 내 사정도 변하게 해 줘야 하는 것 아니오.”

“.....원하는 게 뭐지?”

“나를 풀어주시오. 그리고 더 이상 그 일로 나를 귀찮게 하지는 마시

오. 그거면 되오.”

“좋아.”

프리델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인 듯 했다. 답변은 너무도 짧고

간단했다.

“백작, 지금 당장 출발해 주길 바란다. 우리의 토벌전은 당신의 사정

을 봐 주지 않고 시작되어 당신의 생사를 확인하지 않고 끝날 것

이다. 에닌 마델로를 구하는 대로 콜로세움에서 빠져나오도록.”

“저런, 참 냉정하군.”

“냉정해도 되는 사람이니까, 당신은.”

“미움 받는 건가.”

“서러울 것도 없잖아.”

알렉산더가 피식 웃었다.

“알았소, 좋아. 곧 출발하도록 하겠소......”

“저도 같이 가겠어요.”

프리델라 옆에서 코지마가 나섰다. 프리델라와 유릭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혼자서는 힘들 거랍니다. 그러니 같이 가도록 하죠. 도와드리겠습니

다. 게다가 아가씨를 구하는 일. 여자인 제가 도움이 될 거랍니다.”

코지마는 민간인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 상황에서 그녀는 지휘권을

요구할 수도 있는 위치였다. 알렉산더는 정중히 말했다.

“기꺼이 도움을 받겠습니다, 부인.”

프리델라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냉랭하게 돌아서, 회의실을 나갔

다. 유릭은 그녀를 대신하기라도 하듯 알렉산더에게 말했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백작.”

“자네도. 그리고 그 동안 나 감시하느라 수고했네.”

“감시라기보다는 같이 놀아드리느라 수고한 거죠.”

알렉산더가 피식 웃었다. 유릭은 가볍게 경례를 하고, 코지마에게도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회의실을 나섰다. 어찌하든 그들의 소관이며,

어찌되든 그들의 책임이다. 게다가 전혀 걱정할 인물들이 아니다.

한 사람은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사람은 철십자 기사단.

따지고 보면 특무부인 유릭보다 위다.

1층으로 내려가니 동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대장인 프리델라가 앞

장서자 그들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시스터 제인이 등에 매고

있던 것을 유릭에게 던졌다.

“받아. 오는 길에, 대장장이가 너에게 주라고 맡긴 물건이야.”

“아, 감사합니다.”

그것은 먹물 입힌 듯 시커먼 라이플이었다. 유릭의 손길이 닿자, 총

신에 시퍼런 문자가 을씨년스럽게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제인이 말

했다.

“대장장이가 조심조심 다루라고 하더군.”

“제 목숨은, 언제나 제 무기에 과부하를 걸지요. 어쩔 수 없답니다.”

옆에서 페라라가 그 을씨년스러운 단검을 돌리며 말했다.

“유릭 크로반 하사가 유달리 무기를 혹사시키는 건 사실이잖아요. 오

랜만에 돌아왔으니, 이번에는 많이 아껴주세요. 무기가 과부하로

박살나는 건, 특무부의 손실이랍니다.”

“그리고 손실은 곧 동료의 중노동으로 이어지죠. 반성합니다.”

그 동안 유릭 대신 전방배치 되어 중노동을 해왔던 크리스펠로와 카

바냐가, 그리 태연한 유릭의 말에 눈살을 찌푸렸다. 에바도 끼어들

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아오는데 무지 무지 오래 걸렸습니다.”

“........그 때 완전히 개박살 났잖아. 어쩔 수 없지.”

에바가 입을 꾹 물었다. 그것을 박살 낸 사람은 다름 아닌 처형당한

카이슐츠였다.

유릭은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펠로, 카바냐, 유릭, 프리델라, 페라라, 마지막으로 단테. 이것

으로, 2년 전 대토벌전의 최선두에 있었던 특무부대원이 완벽하게

모인 셈이었다.

딱 한 명, 카이슐츠를 제하고.

우연일까?

설마, 그럴 리가.

악마의 섬에서 우연 따위는 없다. 모든 것은 사악하고 집요한 계획에

의한 장난질일 뿐.

유릭은 대기하고 있는 군마의 등에 탔다. 환하게 불 밝혀진 극장2층

의 창문으로, 오페라단원들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중에는 로웨

나도 있었다. 유릭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박차를 찼다.

말들이 으르렁거리듯 포효하며 바닥을 걷어찼다. 안개가 가라앉은

길 위로 육중한 말발굽이 울려 퍼졌다. 로웨나가 군에 대해서는 전

혀 모르는 것이 다행이다. 지금 유릭이 무엇을 하러 가는지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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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애도. 권총을 박살내니 라이플이 나타나는......

오늘도 버터의 백작, 알렉산더............... (...)

이놈의 오타는 맨날 맨날;;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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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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