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편
황금의 콜로세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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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벌써 막히신 건가요? 다음 악보는 왜 안줘요?”
로웨나가 짜증을 부리자 이안도 역시나 으르렁댔다.
“너 때문에 헷갈리는 거지, 내 음악적 영감에 이상이 있는 게 아니라
고!”
“아하, 영감이 내달려오던 좁은 길에 바위가 하나 놓여 있다, 이거로
군요.”
“맞아, 바로 그거야! 거기서 막혀버려서! 나는, 나는, 나는!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고.”
이안이 그 긴 손가락으로 로웨나를 척 가리키며 외쳤다.
“그리고 이게 다 네 탓이야, 네 탓!”
“.......아주 그냥, 일만 꼬이면 다 내 탓이래! 이번에는 대체 왜요!”
“네가 산만하게 굴잖아! 지금의 너는 바위, 그것도 화산의 목구멍도
막아버릴 거대한 바위라고! 네가 없을 때는 잘만 되었다고!”
“으아, 그게 몇 번째로 말하는 건지 알기나 해요? 그러면 돌려보내
주면 될 거 아니에요!”
“아하, 내가 왜? 그리 되면 에닌도 같이 가게 해 달라고 할 거 아냐.”
“같이 가게 해 줄 것도 아니잖아요. 돌아가서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에닌은 무사하답니다, 하고 말하면 내 역할 끝이라고요. 저쪽에 있는
그 누구도 제가 에닌을 구해서 돌아올 거라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이 얼간이 아저씨야! 그리고 지금 벌써 한 시간 째라고요, 한 시간!”
그리고 로웨나는 시계를 찌를 듯이 가리켰다. 이안은 대략 한 시간
동안 영감이 안 떠오른다는 둥, 곡이 안 풀린다는 중, 배고프다는 둥
칭얼대고 있었다. 그리고 로웨나는 대략 30 분전부터 아저씨 시
끄럽다는 중, 심심하다는 둥, 돈 더 줄 생각은 없냐는 둥 투덜대고
있었다. 예술가의 창작욕을 불태울만한 고독은 결벽증 걸린 하녀가
쓸고 지나간 방처럼 한 톨 남아있지 않았으며, 이 좁고 낡은 돌
방을 지키고 있는 건 지극히 후회중인 이안과 방만한 로웨나 뿐이었다.
로웨나가 말했다.
“방법이 하나 있어요.”
“뭔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죠. 차근 차근, 대체 어디서부터 늘어졌나
들여다보는 거에요.”
“어라, 그것 참 좋은 방법이네.”
“네에, 그럼 잘 들여다보세요. 저는 지금부터 한숨 잘게요.”
로웨나는 얼굴을 구기는 이안을 등지고 에닌이 잠든 침대 맡에 앉았
다. 에닌은 옆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로웨나가 너는 맘 참 편해서 좋겠다, 하긴, 네가 언제 맘
편하지 않았던 적이 있기는 있었던가, 하며 물끄러미 보고 있는데
이안이 악보를 집어던졌다.
“야, 좀 불러 봐라.”
“내 목소리 듣기 싫다면서요. 시키고 싶으면 여기, 아저씨가 너무너무
좋아해서 납치까지 해 온 에닌을 깨워다 시켜요. 나는 졸려요.”
“돈 받았잖아.”
“피아노 쳐달라고 해서 받은 거지, 노래까지 불러준다고 말 한 적은
없는데요.”
“5카스티야.”
“도둑놈 같으니. 15카스티야!”
“진짜 도둑은 너라고! 그 형편없는 목소리로 그 정도 돈을 받으려고
하냐!”
“그럼 에니를 깨워다 시키던가!”
“시키려고 했는데, 하도 울고불고 해서 그냥 재워 버린 거다! 나라고
너같이 목소리 끔찍한 애한테 시키고 싶겠냐.”
“돈 줘도 안 해!”
“.........불러주세요.”
그리고 이안은 다소곳이 악보와 돈을 바쳤다. 로웨나는 전쟁에서 승
리한 여왕이 왕관을 잡듯 악보를 낚아챘다. 악보를 보니, 첫머리부터
아주 화려하고도 정교한 음으로 구성된 아리아로 가득 차 있었다.
로웨나는 입술을 비죽였다.
“무진장 화려하네요. 이런 식으로 부르면, 듣는 사람도 지치고 부르는
사람도 지칠 거라고요.”
“신이 주신 목소리라면 이 모든 것을 소화해야지.”
“웃기시네. 처음부터 끝까지 메인디시만 나오는 요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5분 만에 배불러서 질릴 걸요.”
“신이 허락하면 가능해.”
“신도 봄을 만드시고 여름을 만드셨지요. 신은 섭리에 맞는 것만 허
락하신답니다.”
“잘났다!”
이안이 으르렁거리자 로웨나는 얼굴을 들이밀며 쏘아붙였다.
“말 막히면 윽박지르시는 게 취미신가. 고함 좀 그만 질러요!”
“네 목소리가 더 커! 어쨌건, 불러, 불러, 부르라고!”
“하려고 했다고요-! 돈이나 준비해!”
그 엄청난 성량에 이안은 귀를 막으며 꽥, 신음을 흘렸다. 로웨나는
악보를 대강 읽은 후에 힘주어 부르기 시작했다.
삼키고 무너지고 다 휩쓸어갔어요
그건 절망이었지요
“어이.”
느닷없이 이안이 시비조로 불렀다.
“네? 맘에 안 들어요? 그만두게 하려면 부른 만큼은 돈 줘야해요.”
“제길, 알아서 할 테니까 악보나 줘봐.”
로웨나가 악보를 건네주자 이안은 펜을 들어 미친 듯이 악보를 고치
더니 로웨나에게 도로 던졌다. 로웨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잔뜩 고쳤어요?”
“불러 봐.”
자작나무 아래 그늘진 곳에 묻힌 황금의 반지
그것은 왕의 황금. 인간의 눈물 성자의 피와
선인의 살로 빚은 그들의 포도주
무지개를 걷어라 황금을 짓밟고 비단을 찢어라
창으로 지르고 검으로 베어 화살로 꿰어라
“무슨 곡이 이렇게 피가 퍽퍽 튀어요? 공연은커녕 검열통과도 못하겠
네.”
“내 마음이다.....! 잔소리 말고 계속 불러! 돈 줄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해 놓고서는, 이안은 악보를 미친 듯이 고쳐대고 있었
다. 진정 빛의 속도였다. 그리고 로웨나에게 차례차례 집어 던지면서
외쳤다.
“계속 불러! 고친 대로!”
로웨나가 손을 내밀자, 이안은 흥정도 없이 5카스티야 지폐 세 장을
얹어 주었다. 로웨나가 더 놀랐다.
“우와, 아저씨 돌았어요?”
“영감 증발한다! 어서 불러!”
“언제는 영감이 제대로 있었나, 엉터리!”
“어서, 이 왈패 아가씨야!!”
대략 2시간 정도 지난 뒤, 로웨나는 22카스티야에 해당되는 거금을
세고 있었다. 와아, 돌아가면 방세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하고 재잘
대며 이안이 저 거머리, 저 악질, 등등을 중얼거리며 쏘아보든 노
려보든 상관치 않았다.
“완전 자판기군. 현금을 넣으니 냉큼 냉큼 노래가 나오는 걸 보니.”
“흥정을 하려던 게 잘못이죠. 저는 주는 만큼 잘해준답니다. 덕택에
돈 좀 벌었네요. 에닌 대신 출연해서 특별 출연료를 챙기고, 아르
바이트 해서 이렇게 돈을 벌고. 놀라워요. 아저씨 같은 사람이 남의
인생에 도움 될 일이 생기다니 말이에요.”
이안은 피와 살을 짜내어 고친 악보를 가방에 차곡차곡 챙겨 넣은 다
음 끈으로 묶었다.
“어쨌건 수고했다.......... 나중에 필요하면 또 부르지, 자판기 아가씨.
다아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돈준만큼은 하는건 마음에 들어.”
“그 때 즈음이면 벌--써 이 파난을 떠나 제도로 돌아갈 걸요. 다른
자판기 알아보세요.”
“오호, 그래? 어떻게 하나. 나도 브란 카스톨로 갈 예정인데.”
“어머나, 그러기도 전에 체포될 것 같은데요.”
“아하, 나는 내 무대의 연출자야. 그리고 그런 나는 원하는 걸 원할
때 원하는 대로 끝내지. 절대 체포 안 될 거라고. 나는 잡히는 역이
아니거든!”
“참 잘나셨어라. 그럼 제 역은 뭐죠?”
“나도 몰라! 너는 시녀 역 하라고 데리고 왔더니, 거만한 여왕님이
되어 내 작업실을 장악했거든! 돌발 상황이야, 넌.”
“돌발 상황을 잘 다스리는 것도 연출자의 실력이랍니다.”
그리고 로웨나는 지폐를 흔들어 보이고는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안이 그런 로웨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느닷없이 물었다.
“그런데 너 말이다, 유릭 크로반과는 대체 어떻게 아는 거냐?”
로웨나가 더 놀랐다.
“아저씨가 유리를 대체 어떻게 아는 거죠?”
“이 바닥에서는 어지간하면 다 아는 놈이다. 어떻게 아는 거야, 정
말?”
“운명이 우리의 눈이 마주치도록 했지요. 그 후로, 우리의 인연은 아
주 길게 이어졌답니다.”
이안의 얼굴이 구겨졌다.
“우엑.”
“그러는 아저씨는 어떻게 유리를 아는 거죠?”
“아아, 예전에 반란 일어났을 때 한번 체포되어서 크게 얻어터진 적
이 있었는데......... 그 때 그놈이 내 취조를 맡았었지.”
“왜 놔줬을까.”
“제길, 나도 그게 의문이라고! 처음에는 꼬맹이라서 놔 준 줄 알았는
데, 알면 알 수록 날 놔준게 신비로운 녀석이었다니까. 아니, 처음
으로 봤을 때도 놀랐지. 고작 열 대여섯밖에 안 된, 엄청나게 어린
녀석이라는 것에 놀랐고, 그 다음은......”
“다음은?”
이안은 자신의 눈을 가리켰다.
“어린놈의 눈이 아니라서 놀랐다. 찼지, 지독하게. 심장이 차갑고 날
카로운 유리조각으로 가득 차 있는 듯한, 그런 냉혹한 눈이었다고.”
“유리가 좀 노인네 같기는 하죠.”
“아니, 아니야. 그건 한줌의 온기도 없는 눈, 애정은커녕 동정조차 없
는 비인간적인 눈, 날카로운 무기질로 가득 찬 눈이었다고. 그런
존재는 앞으로도 없을 거고, 있어서도 안돼. 결단코. 그런데 그런 놈
이 날 놓아준 게, 아직도 난 의문이라고.”
로웨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유릭의 어디가 어때서? 다정하고
상냥하기만 한데. 그런 로웨나의 얼굴을 보며 이안이 심술궂게 웃
었다.
“아가씨, 파난의 특무부가 어떤 곳인지 알아?”
로웨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안의 웃음이 더욱 심술궂어졌
다.
“하긴, 빈민가에서 하루하루 벌어먹고 사느라 바쁜 아가씨가 대체 뭘
알겠나. 2년 전, 하얀 까마귀의 반란 사건......... 정부는 그것을 가
벼운 내란 미수라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지. 진짜 반란.
섬의 절반을 장악했던 대대적인 반란이었다. 정부군은 끝없이
패했고..... 결국에는 최악의 결정을 내렸지.”
“최악의 결정이요?”
“그들은....... 특수무력부대에 진압을 명령했다. 이 반란이 북부전선과
연계한 흑마법사의 준동이라는 핑계로, 특무군에게 학살을 명했지.
그리고 반란은 단 일주일 만에 완전 진압되었다. 그들은 소개령도
내리지 않고 반란이 일어났던 마을과 도시를 전파했다. 학살했지!
그리고...... 자신들이 댔던 핑계의 증거를 확보하기 위해, 딱 한
달간 파난 전체를 통틀어 흑마법사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령을 내렸
다. 엄청난 사람들이 잡혀갔다. 흑마법사인 사람은 극소수. 거의
대부분이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지. 평범한 사람이기에 쉽게 잡혀가고
쉽게 죽고 아무도 그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어. 산처럼 쌓인 시체는
죄악이 아닌 업적이 되었지.”
이안이 바닥을 가리켰다.
“이 파난의 특무부는 바로 그런 곳이야! 그들의 손에는 악마의 권력
이 쥐어져 있고, 그 목에는 인간의 사슬이 묶여 있지! 그러니, 지금
파난의 특무부는....... 공포 그 자체다. 권력자의 칼이자 총이자
주먹이야. 없어져야 하는 공포의 악마들이라고!”
로웨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럼 에닌을 납치한 것도, 그녀의 몸값을 요구할 장소를 제시한 것
도, 그리고.......극장에서 그런 소동을 벌여 특무부가 이 일에 끼어
들도록 한 것도, 그들이 당신들을 소탕하기 위해 있는 대로 파견되도
록 한 것도, 아저씨 계획이었던 거 아니에요?”
이안이 허걱, 하고 신음을 삼켰다.
“혹시 누가 말해줬냐? 네가 어떻게 알아?”
“아뇨. 머릿속에 이걸까 저걸까 하며 가정해 본 게 잔뜩 있었는데, 아
저씨 덕에 그래도 사실에 근접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빼 놓아 본 것
뿐이라고요. 아저씨 반응을 보니 맞나 보네요. 바보, 알아서 답을
말해주네.”
이안이 웃었다(이를 조금 갈기는 했지만, 결론적으로는 웃는 얼굴이
었다).
“말 했잖아. 나는 이 무대의 연출자(director)야.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것이 일어나도록 해. 내 배우들이
완벽하게 연기하도록 하지. 제 역할에 충실하게! 그리고 바로 지금......
내 연출과 각본에 따라, 이곳으로 악마의 광란이 시작될 거야.”
그리고 속삭였다.
“..........아가씨, 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엔딩을 원해. 악당과
악마의 죽음으로 끝나는 그런 해피엔딩 말이야.”
“그렇다면 공주를 납치하고 시녀까지 불러다가 착취하는 악마는
반드시 죽어야겠군요.”
“......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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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로웨나 완승.
어제는 모니터 폭사로 결국 글 못 올렸습니다. -_- 그리고 이리저리
일아보아 모니터 구입에 성공......자그마치 엘씨디 모니터입니다.
우하하하!
그러나 따뜻한 온돌침대를 잃은 자룡군은 서운한가 봅니다. -_-;;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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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