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53화 (153/174)

제153편

황금의 콜로세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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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난 곳곳에 멸망한 옛 왕국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무너진 벽이 있고 지붕 없는 건물들이 있다. 허리 잘린 탑과 뿌리 뽑

힌 기둥들이 있으며, 더럽혀진 제단이 있다. 섬에서의 전쟁이 끝나자

정복자의 국민들은 그곳으로 떼 지어 몰려왔다. 그 왕국의 잔해

안으로 시체에 끼는 구더기들처럼 기어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비루

한 이들이었다. 빈민가 후미진 곳에서도 머물지 못하는 그들은, 옛

왕국의 붉은 살점 남은 뼈 틈에 잠자리를 틀었다. 버려진 나무판과

거적, 구멍 난 함석 따위들을 가져다가 지붕을 이었다. 돌을 쌓아

만든 공동 벽난로에 불을 피웠다. 지나가는 마차를 향해 동정을 구

하며 손을 내밀고, 그 손에 푼돈이 쥐어지면 굽실거리며 돌아서서

증오했다. 동정받길 원하며 동정하는 자를 경멸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아름다운 곳은 있고 아름다울 때도 있다. 시곤의

서부에 거인의 시체처럼 쓰러져 있는 장대한 유적의 터-그리고 가장

많은 빈민들이 모이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모래 빛 벽돌을 쌓

아 올려 만든 그곳은, 굉장한 유적이었다. 먼 옛날에는 그곳은 거

대한 신의 도시였으며, 번영과 영광과 찬란한 신화의 땅이었다. 웅

대한 콜로세움과 이교신의 예배당이 있던 그곳은 축수된 금빛 나는

벽돌로 지어져 있었다. 웅대하고 둥근 기둥을 세우고 아치형으로

입구와 복도를 만들어 이교의 신들을 세워 놓았다. 온천지에서 긁어

모은 듯한 온갖 풀과 나무들이 그 바닥과 벽과 지붕을 무성하게 뒤

덮어, 계절이 따뜻해지면 울긋불긋한 꽃들이 곳곳에 무더기로 피어난다.

그리고, 해가 지거나 뜰 무렵이 되어 비루한 그림자를 진한 음영으로

가리면 그곳은 모두 불타오르듯 빛난다. 먼 곳으로 돌아가는 여행

자들은 외치곤 한다. 맙소사, 저곳은 황금으로 지어져 있군!

군인들이 그곳을 휩쓸고 지나간 것이 어제 저녁부터 오늘오후까지.

유적 구석구석 천막을 짓고 웅크려 사는 사람들은 바닷가 바위틈

게처럼 숨어 군인들이 유적을 지나가거나 뒤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군인은 벽을 무너뜨리고 지붕을 잡아 뜯었다. 여자들을 걷어차고

노인들을 던지고 남자들을 모욕했다. 사나운 개들처럼 짖어대며 사

람들을 몰아세우고 강압적으로 압박했다.

그들이 물러난 것은 저녁 무렵. 사람들은 안도하면서도 자기 굴로 돌

아와 웅크렸다. 자정이 지나 싸늘한 새벽이 되자, 다시 말발굽 소

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어 대체 이번에는 누가

지나가나 들여다보다가, 비명을 지르며 집으로 도망쳤다. 각자 짐

을 챙기며 아이들을 깨웠다. 고함을 질렀다. 일어나, 일어나! 어서 도

망쳐! 제길, 어물대다간 다 죽는 다니까!

희끄무레한 달빛이 스며드는 대로를 달리는 건, 분명 검은 제복이었

다. 흰 칼라와 소매를 단 사제복을 입은 여자가 선두를 달리고 있

었다. 깡마른 그녀가 위로 치켜든 손 안에는 붉고 희고 금빛 나는 빛

의 구들이 떠돌고 있었다. 그것들이 맹렬히 휘돌더니 콜로세움 쪽

을 가리켰다. 둥글고 거대한 옛 시절의 경기장 위로는 우유 빛 달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저곳입니다.”

수호사제 시스터 제인이 말했다.

“우선 대피명령 내려야할 겁니다. 아무리 목표가 콜로세움이라지만,

꼴을 보아하니 여기도 무너질 것 같은데.”

유릭이 그리 말하자, 페라라가 앙증맞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럴 필요도 없을 듯 한데요.”

뒤를 흘끔 보니, 벌써 사람들이 놀란 벌 떼처럼 길로 쏟아지며 대피

하고 있었다. 모조리 특무부의 전진방향과 반대였다. 애들이 울며

불며 엎어지고 구르고, 노인들이 다친 거미처럼 비실비실 도망가고,

여자들은 아이를 집어 들고 남자들은 노인을 업거나 질질 끌어댔다.

가족 없는 아이들이나 노인들은 그대로 휩쓸러 가거나 내동댕이쳐졌다.

“하긴, 우리는 제복 자체가 경보죠.”

뭔가, 아주 한심스럽다고 생각하며 유릭이 말했다. 모두 가! 안 가면

재미없다! 하며 윽박지를 필요도 없다. 제복 입고 나타나기만 하면

민간인대피령이나 다름없다.

“전원 무장하라-!”

프리델라가 외쳤다. 카바냐가 봉을 꺼냈다. 페라라는 두개의 구부러

진 단검을 손에 쥐었다. 크리스펠로가 활을 꺼내고, 단테는 책을

꺼냈다. 유릭도 라이플을 장전했다. 이갈듯 철컥 철컥 소리가 들리며,

총구 끝에 흰 문자들이 떠돌다가 사라졌다.

“동으로 크리스, 유릭! 서로 단테, 제인! 스티브, 존, 엘레노아는 남!

카바냐, 에바는 후방. 너희들은 명령이 내려지면 전파한다! 그리고

북은 나 혼자 전담하겠다! 모두 흩어져라-!”

명령과 동시에 갈림길이 나왔다. 콜로세움을 빙 둘러싸는 길이었다.

희끄무레한 달빛이 우유를 뿌린 듯 낡고 오래된 건물의 어슴푸레한

윤곽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얼어 죽은 시체처럼 푸릇했다.

프리델라가 외쳤다.

“시스터 에바, 구역 설정하라!”

에바의 투란바코스가 빛나며 콜로세움을 중심으로 거대한 빛의 원이

둘러쳐졌다. 순간, 페라라가 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에서 단검이

츠캉, 솟구쳐 휘돌았다. 억, 하는 비명과 함께 둔탁한 것이 퉁퉁 굴

러왔다. 페라라의 손으로 단검이 돌아왔다.

“다드케!”

금빛의 조명이 확 켜지며 주변을 비추었다. 건장한 남자의 목 없는

시체가 그곳에 뒹굴고 있었다. 손에는 라이플이 들려있었다. 목은

경사진 길 끄트머리를 뒹굴고 있었다. 특무부원들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보통 사람이다.

프리델라가 말했다.

“소탕할 자들 중에 민간인들도 끼어있군.”

“어쩔까요.”

페라라가 묻자, 프리델라는 담담하게 말했다.

“따지지 말고 죽여라. 어차피 우리와 맞설 생각이었다면, 죽을 각오로

덤비겠지.”

그리고 그녀는 검을 뽑았다. 희고 얇은 검날이 습한 어둠 속에서 사

나운 야수의 이처럼 번뜩였다.

“서부 특무부대장으로 명한다! 가라, 싸워라, 그리고 귀환하라--!”

짧은 기합과 함께, 검은 말들이 각자가 맡은 방향으로 흩어졌다.

유릭은 말을 몰아 콜로세움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의 옆을 말에서 뛰

어내린 크리스펠로가 늑대로 변해 단숨에 따라잡았다. 긴장한 말이

부연 한숨을 내 뿜었다. 허물어진 아치를 지날 즈음, 유릭은 말

고삐를 한손으로 틀어잡고 다른 손으로 라이플을 장전했다. 총구 끝

에서 뿌연 빛이 스며 나오더니 그 총신을 따라 문자가 내달리듯 새겨

졌다. 거대한 검은 늑대와 제국 특무부전투원이 나타나자, 콜로세움

의 낡은 벽에 기대어 잠을 청하던 부랑자들이 벌떡 일어나 화급히

도망치기 시작했다. 콜로세움 옆에 붙은 2-3층으로 된 높은 건

물들에서도 사람들이 거미떼처럼 쏟아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시정벌에 나선 몬스터라도 된 기분이군요.”

순간, 탕- 총성이 터졌다.

낡고 헤어진 건물들 속에서 그 소리는 칼처럼 선명했다. 유릭은 고개

를 숙이고 있었다. 총은 그의 머리를 노렸으나, 결국 목덜미를 지나

맞은편 벽에 부딪혔다. 성큼 베어낸 듯이 벽이 움푹 파였다. 유릭

은 라이플을 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총구에서 푸른 섬광이 터졌다. 칼날 같은 번득임이 보이는

순간에, 총알이 날아왔던 벽이 철퇴에 맞은 듯 통째로 박살났다.

지붕이 무너지고 벽이 허물어지며 부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그 벽에

서 날렵한 그림자가 튀어 올라 바닥에 착지했다. 유릭은 망설임 없

이 그를 겨누어 쏘았다. 바닥이 박살나며 터져 올랐다. 검은 그림

자는 날렵히 피하더니, 유릭을 향해 제비가 허공에 꽂히듯 빠르게 날아왔다.

“!”

유릭은 말에서 뛰어 내렸다. 그러나 말의 발에 그 검은 그림자가 명

중하며, 말의 한쪽 발이 으스러졌다. 히이이이잉--! 말이 울부짖

으며 길 위로 쓰러졌다. 피가 바닥에 쏟아졌다. 유릭은 라이플을

당기며 몸을 일으켰다. 검은 그림자는 그가 마주하는 길바닥에 놓여

있었다. 도약전의 개구리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유릭은 라이플을 세워 허공을 향해 쏘았다. 콰앙-! 바닥이 쩌릉 울

릴 정도의 굉음이 터지며, 맞은 편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그림자가

솟구쳤다. 유릭은 라이플을 쏘았다. 그러나 푸른 섬광은 검은 그

림자의 바로 옆을 꿰뚫었다.

“크리스--!”

크리스펠로가 바닥을 박차며 검은 그림자에게 달려들었다. 으르렁,

컹컹--짐승들이 뒤엉키며 울부짖는 소리와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크리스펠로가 검은 그림자를 악문채로 아래위로 흔들다가

내던졌다.

“피해요, 크리스 님!”

유릭이 외치며 라이플을 쏘았다. 카항, 섬광이 작렬하며 검은 그림자

를 명중시켰다. 깃털 빠지듯 그림자 조각이 튀어 올랐지만 살점도

핏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크리스펠로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여 활

을 뽑았다. 검은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시커먼, 그림자인형극에

등장하는 종이 배우처럼 새카만 인간이었다. 그 양 손이 흔들리더

니, 그곳에서 검은 칼날이 솟구쳤다.

“프락티온--!”

크리스펠로가 활을 쥔 팔을 뻗었다. 지잉-! 하얀 섬광이 활의 중앙

에 맺히며 쏘아져 나갔다. 그러자 검은 그림자가 양팔을 휘저었다.

그 끝에서 솟구친 검은 칼날이 섬광을 향해 쏘아져 나가며 맞부

딪혔다. 콰과광-! 섬광이 터지며 파편이 되어 튀어 올랐다.

유릭이 외쳤다.

“암만--!”

흰 꽃 같은 마법진이 암흑 속에서 펼쳐졌다. 유릭이 방아쇠를 당겼

다. 마법진 너머로 엄청난 바람이 솟구치며 주변을 휩쓸었다. 매서운

돌풍이었다. 바닥의 포석이 뽑혀져나가고 벽은 양 옆으로 무너지

며 와르르 쏟아졌다. 검은 그림자가 몸을 웅크렸다. 바람이 그 위

를 휘저으며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크리...”

크리스펠로에게 마저 공격해 달라고 외치려했지만, 육중한 몸집을 가

진 것이 크리스펠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유릭이 서 있는 바닥까지

지진난 듯 울렸다. 크리스펠로가 발을 휘둘러 그것을 걷어찼다. 육중

한 몸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지며 분노에 찬 울부짖음을 터뜨렸다. 그

것은 불덩어리처럼 거대한 몸을 가진 거대한 늑대였다.

유릭은 그가 극장에서 보았던 그 펜리키언일 거라 생각했으나 다시

보니 아니었다. 크리스펠로에게 맞아 나동그라졌다가 몸을 일으키는

늑대는 분명 그 곰개와는 달랐다. 불길에 그을린 듯 구불거리는 털

을 가진, 거대하고도 날렵한 늑대였다.

유릭은 총구를 겨누었다. 늑대의 모습이 불사르듯 변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역시나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구리빛 피부는

같았으나, 머리카락은 더욱 붉었고 몸도 더 날렵하고 탄탄해 보였다.

달라붙는 검은 셔츠에, 군용바지를 입고 군화를 신고 있었다. 입

술은 들러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남자가 크리스펠로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부웅- 육중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듯한 파공음이 터졌다. 크리스펠로가 주먹을 휘둘러 명치를

걷어 치려 했지만, 남자의 반대편 팔이 크리스펠로를 후려쳤다.

크리스펠로가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그의 몸에 부딪혀 가냘픈 나무

로 받쳐둔 빈민가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크리스펠로가 몸을 일으

키기도 전에 남자의 주먹이 날아 들어왔다. 크리스펠로의 가슴에

쇠못처럼 내리박혔다.

“크억!”

극히 듣기 힘든 크리스펠로의 신음이 터졌다. 남자가 허리를 비틀며,

몽둥이 같은 발을 휘둘러 크리스펠로의 등을 걷어찼다. 크리스펠로가

급히 피하며 늑대로 변했다. 남자가 솟구치듯 뛰어들더니, 크리

스펠로의 목을 두 팔로 꽉 끌어안았다. 크르렁! 크리스펠로가 울부짖

으며 몸을 뒤틀었다. 남자는 크리스펠로를 끌어안은 채, 바닥으로

몸을 날렸다. 크리스펠로가 비명을 터뜨렸다. 바로 옆의 벽이 우지

끈 무너지며 벽돌이 와르르 쏟아졌다.

유릭은 어떻게 해서든 그 거대한 남자를 맞추려 했다. 크리스펠로는

발버둥치며 남자의 몸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남자는 크리스펠로를

통째로 으스러뜨릴 듯 팔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러나 유릭을 향해

엄청난 방전음이 터졌다. 방아쇠도 소환의 주문도 외치기 전에 번

쩍거리는 전격이 몰아쳐왔다. 몰아치며, 하늘을 할퀴고 바닥을 긁어

내며 벽을 잡아 뜯었다.

유릭은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크리게아!”

양 손끝에서 동시에 마법진이 나타났다. 라이플의 총신을 중심으로,

주먹 쥔 손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희고 거센 바람이 솟구쳤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회오리치며 공격을 막아냈다.

“암만!”

바람이 솟구치며 전격을 먹어치웠다. 유릭은 두 팔을 당기며, 뒤쪽을

향해 총을 쏘았다. 크헉, 비명이 터졌다. 유릭은 라이플을 휘둘렀다.

작고 마른 몸이 라이플에 맞아 새된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유릭은 라이플을 휘둘러 앞을 쏘았다. 카앙, 전격의 핵인 마법진이

박살나며 나가떨어졌다. 뒤에서 다시 작고 마른 몸이 일어나려 했

다. 유릭은 발을 휘둘러 그 몸을 걷어차고, 라이플을 휘둘러 머리

를 후려쳤다. 작은 몸이 칼을 뽑아들자, 그 팔목을 후려치고 목을

움켜잡아 벽에 짓눌렀다. 얼굴이 마주쳤다.

“너-!”

아는 얼굴이었다.

벌써 몇 번이나 본 주근깨 얼굴의 그 용병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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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서부 초토화 군단을 이기려면, 일단 말을 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걸, 이번의 적들은 알고 있군요..

다음편은 3일 뒤에!

p.s 오타 수정...-_-;;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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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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