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편
황금의 콜로세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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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떻게......”
유릭이 어떻게 된 거냐고 제대로 묻기도 전에 로웨나의 등 뒤에서 다
리가 긴 남자가 기절한 여자를 업고 나타났다. 유릭이 총구를 들
었다. 그 남자는 한숨을 끄흥, 하고 내 쉬더니 업고 있던 여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닌 마델로였다. 그녀는 축 늘어져 정신을 잃
고 있었다. 남자- 이안이 유릭을 보며 말했다.
“어이, 놀라지 마. 나는 네가 여기에 있을 줄 알고 온 거니까.”
유릭은 바닥을 가리켜 보였다.
“별로 안 놀랐어요. 여기 이 마법진, 당신 짓이지 않습니까.”
“어라, 어떻게 알았어?”
“당신이 바보라고, 다른 사람들도 다 바보인 건 아니랍니다.”
이안이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 때 에닌이 몸을 들썩이더니, 고개를 들며 신음을 흘렸다. 아직 어
지러운 듯, 얼굴도 창백했다. 로웨나가 달려가 에닌을 살피며 물었다.
“정신 들어? 괜찮아?”
“로이.....여긴.....”
그러며 에닌이 눈을 크게 뜨자, 기겁한 로웨나가 에닌의 입을 틀어막
았다.
“비, 비명 지르지 마!! 으악, 그만둬, 그만둬!!”
에닌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알렉산더를 발견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
다. 세상에나- 그러나 보호자를 만난 아이처럼 순식간에 안심했다.
로웨나는 에닌을 힘껏 일으켜 세웠지만, 에닌은 이리저리 비틀거
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도저히 혼자서 뭘 해 볼 수 없는 로웨나는
알렉산더에게 부탁을 해볼 생각으로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았지만,
알렉산더는 냉담했다. 남의 일 보는 듯 무관심한 눈빛으로, 발끝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서 있을 뿐이었다. 하여간 진짜 악당이라니
까- 로웨나는 포기하고 갖은 힘을 다 해 간신히 에닌을 일으켜 세웠
다. 유릭이 라이플을 장전하며 말했다.
“백작, 거기 그렇게 멍청하게 서 계시지 마세요. 백작이 할 일은 저기
저 아가씨를 구하는 거잖아요.”
“....아아, 나도 알고 있어.”
그러나 알렉산더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듯 나른한
눈길만 던졌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에닌의 몸이 확 낚아채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졌
다. 에닌이 날카롭게 비명을 질렀다.
“꺄악!”
“에니!”
큰 손이 에닌의 머리채를 움켜잡아 뒤로 당겼다. 그녀의 가느다란 목
언저리로 흰 칼이 닿았다. 이안도 신음을 삼키며 돌아보았다. 유릭의
총구도 에닌을 향했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남자목소리가 터졌다.
“대체 왜 이 계집애를 놔 주려는거냐, 이안 블로드-!”
“어차피 미끼였잖아.”
“곱게 놔 준다는 말은 없었어! 그래서 나는 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둔 거고, 네 장단에 맞춰준 거란 말이다!”
키 큰 남자가 에닌을 잡고 있었다. 애꾸눈- 유릭은 그 남자의 얼굴
을 알고 있었다. 역시나, 그 때 그 광산에서 봤던 용병단의 흑마법사
남자였다. 이름은 조셉 콘라드. 그는 울먹이는 에닌의 머리채를
잡아당겨, 그 목이 드러나게 한 뒤에 칼을 더 깊이 들이댔다.
로웨나는 새파랗게 질려 알렉산더를 보았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차가
운 얼굴로 남자와 에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오히려 납치범인 이안 블로드가 당혹해하며 외쳤다.
“조셉, 어서 그 여자를 놔 줘! 고작 열일곱 살 먹은 꼬마 여자애야!”
“고작 열일곱 살? 열일곱이든, 일곱이든, 살비에 마델로의 딸이지! 그
더러운 마델로의 딸년이라고! 너덜거리도록 욕보이고 껍질을 벗기고
목을 잘라 시곤항의 부두에 걸어놔도, 그래도 그건 죄가 아니야!
그 애비 놈의 죄지!”
에닌의 목에 칼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칼이 파고들며 피가 스며 나
왔다. 조셉은 에닌의 머리를 흔들며 고함을 질렀다.
“네 돼지 같은 애비 새끼의 돈으로 네년이 사는 거다! 고생 모르고,
요람 속 천사처럼 곱게 보호받으며!”
“저, 저기..”
에닌이 울먹이며 고개를 돌렸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에 옷깃은 이미
피범벅이었다. 겁에 질린 소녀의 얼굴과 마주치자, 조셉이 주춤하며
칼을 거두었다. 에닌이 뭐라 말하려 했다.
탕-!
시뻘건 살점이 피보라와 함께 흩어졌다. 에닌의 옷 위로 피와 살점이
쏟아졌다. 로웨나에게도 피가 튀었다.
피범벅이 된 에닌은 멍하니 무너지는 조셉의 몸을 보았다. 로웨나도
머릿속이 텅텅 비어버렸다. 너무나,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방금 전까지 악을 쓰며 고함을 지르던 남자가, 머리의 절반이 날아
간 채 쓰러지고 있었다. 로웨나 자신에게 튄 피에서 풍겨오는 지독
한 비린내를 맡은 것은 한참이나 뒤였다.
로웨나는 유릭을 보았다. 유릭은 싸늘한, 수정으로 빚은 인형처럼 혹
독하고 차가운 얼굴이었다. 방금 한 사람의 머리를 부수어 놓고서도,
그 눈은 여전히 냉혹했다.
로웨나는 이를 악물었다가 떼고는 에닌의 어깨를 잡았다.
“일어나, 에니! 어서!”
그러나 에닌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그 뺨을 휘갈기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며, 로웨나는 험악하게 외쳤다.
“어서 일어나! 더 이상 지체하면 또 일이 터질 거라고! 그러니 일어
나, 지금 당장!”
“난 못 해! 너, 넌.......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그렇게 말할 수 있니?
어떻게......사람이 죽었는데 그렇게, 그렇게 모르는 척 외면을 하고
도망치려고....!”
에닌의 눈에 공포와 혐오가 찼다. 그것이 누구를 향하는 것인지 모를
로웨나가 아니었다. 화가 치밀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에닌에게 화가
치밀었다. 이젠 아예 주먹으로 한대 갈겨 버리고 싶었다. 에닌을
싫어했던 적도, 질투 했던 적도 많았지만, 이렇게 화가 나는 건
처음이었다. 패배감이 느껴졌다. 모욕당한 듯한, 지독한 패배감이었다.
그 때 알렉산더가 다가와 에닌이 울먹이든 말든 상관치 않고 그녀의
몸을 안아 들었다. 에닌이 흐느끼며 그 품안에 안겨들었다.
유릭이 말했다.
“알렉산더 백작, 어서 에닌 마델로 양을 데리고 이 자리를 떠나십시
오.”
“서둘러야 하나.”
“옆에 놔두니, 참 귀찮아지는 군요.”
그 목소리가 혐오스럽다는 듯 에닌이 귀를 막았다. 그러나 유릭은 한
점 흔들리지도 않았다. 할 일을 하고, 볼 것을 본다는 듯한 냉혹함
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유릭을 위해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로웨나
는 알았다. 로웨나는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그리고 유릭
의 팔을 잡아 당겨, 벌써 피에 흠뻑 젖은 알렉산더의 손수건을 집
어 던지고 자신의 손수건으로 그 상처를 세게 맸다.
“나중에 봐!”
그렇게 외치곤 로웨나는 뒤돌아 달렸다. 알렉산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가, 로웨나가 따라잡자 다시 앞을 보았다. 그의 품안에 안긴
에닌은 여전히 흐느끼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말했다.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
로웨나는 고개를 숙이며 어렵게 말했다.
“고마워요.”
“당연히 할 일이지. 게다가 공짜로 한 것도 아닌데.”
대체 뭘 받고- 물어보려던 로웨나는 에닌을 보고 그만두기로 했다.
에닌이 그저 알렉산더가 자발적으로 그녀를 구하러 온 거라 착각하게
내버려 두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인질로 잡힌 에닌을 바라보
던 알렉산더의 그 눈이 잊혀지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람. 처음부터......처음부터, 그 남자가 에닌을 인질
로 잡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유리가 그 남자의 머리를 날릴 거
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알렉산더가 웃으며 그리 물었다. 소름이 오싹 끼쳐서 로웨나는 고개
를 돌렸다. 하여간, 눈치는 빠르다니까- 그렇게 투덜대던 로웨나는,
그제야 아주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그 때, 그러니까 그 때.........
클로디유 데지레가 참석했던 무도회, 로웨나를 데리러 왔던 알렉산
더와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아주 먼 옛날에 있었던 일을. 그리고- 맙
소사, 그 때 알렉산더가 이렇게 말했었다.
-놀랍군. 고작 두 살 때 일을 그렇게 잘 기억하고 있다니.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런데, 로웨나는 그것이 두 살 때 일이라고
말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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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로이, 손수건을............손수건을.................손수건
을...........!!! 백작님이 미워하셔!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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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