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편
황금의 콜로세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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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걸음소리가 멀어지자, 유릭은 총구를 들어 이안을 가리켰다. 이안
이 웃으며 크게 말했다.
“레이디들이 다 퇴장했으니, 이제 싸움꾼들의 장인가?”
그러나 이글거리는 분노는 참지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나서며 손을
들었다. 손가락이 긴 손등 위에, 빛으로 된 마법진이 나타났다. 손등
위에 나타난 건 아니다. 손가락 한마디 정도 떠 있다. 몸에 새긴
것이 아니다. 유릭은 방아쇠를 당겼다. 캉- 이안의 목 언저리를
스친 푸른 탄환이 벽에 맞아 퉁겨났다. 다시 푸른 섬광이 번쩍이며,
이안의 이마를 스쳤다.
“제기랄 자식! 쏘려면 제대로 쏘지!”
“방금 전 당신의 부하처럼 해 드릴까요?”
이안이 이를 갈아붙였다.
“악마 놈 같으니!”
“제가 어떤 놈인 지는,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그럼 왜 그 때 나를 놔 준 거냐!”
“당신을 믿거나, 당신이 무죄라서 놔 준 것이 아닙니다.”
“그럼 왜!”
“망치고 싶었던 건, 저 자신이지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뭐?”
“저는 열여섯 살이었고, 사람들은 누구나 자포자기하고 멍청한 짓을
할 때가 있는 법입니다. 당신은 운 좋게 제가 멍청한 짓을 할 때
걸린 거죠.”
“그러고도 군인이냐!”
유릭이 방아쇠를 당겼다. 이안은 급히 피했고, 그 탄환은 이안이 등
지고 있던 기둥에 명중했다. 산산조각 나며 돌조각이 튀었다.
“잘못한 거죠.”
참으로 태평한 답에 이안이 이를 북북 갈았다.
“제기랄, 말 시킨 내가 잘못이지!”
유릭은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그제야 이안은 유릭이 왜 이렇게
요란하게 총을 쏘아댔는지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온 콜로세움을
울리던 진동이 사라지고 없었다. 유릭이 웃었다. 유릭이 등진 벽 위
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뼈처럼 흰 활이 그림자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얼굴이 마주치자, 그 그림자가 앞으로 나서며 활을 들어
그를 겨냥했다. 흑발의 미남자였다.
이안은 이를 드러냈다.
“즈라킨은 나가 떨어졌나 보군.”
“때려눕혔어.”
“어떻게! 네놈 보다 몇 배로 셌을 텐데!”
“이길 때 까지 때려서 이겼어.”
그리 말하는 청년의 얼굴도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상처에, 다리를 다
친 듯 몸도 기울어져 있었다. 늑대남자의 눈이 이안의 등 뒤를 향
했다. 오싹한 기분을 느끼며 돌아보니, 그곳에는 키가 작고 얼굴이
동글동글한 남자가 양 손에 단검을 들고 서 있었다. 마주치자 남
자가 씨익 웃었다. 아이처럼 귀여운 웃음이었다. 그러나 온 몸에
칼집이 나 있었고, 피투성이였다. 그의 단검이 발하는 음산한 기운은
살벌할 지경이었다. 이러면 꼭 양 옆에서도 오더라고, 그러며 이안
이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그곳에도 검은 제복의 장교가 서 있었다.
비쩍 마르고 얼굴이 시든 오이처럼 생긴 남자였다. 손에는 작은 책
이 들려져 있었고, 그 끄트머리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유릭이 이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분이 바로 이 일의 주동자랍니다.”
이안이 고함을 질렀다
“비겁한 자식! 냉큼 일러 바치냐!!!”
“일러바치는 게 아니라 보고하는 건데요.”
이안은 욕을 퍼부어 댔다.
“생포할 거냐!”
“범법자 체포라고 하지요.”
그리고 각자의 무기들이 모두 이안을 향했다. 총 끝과 활과 단검과
책 끄트머리 등등. 이안이 억지로 웃었다.
“좀 힘겹겠지만........ 해 보자고.”
다시 이안의 주먹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가슴과 허벅지 위에도 새겨
졌다. 거대한 별의 위성처럼 그것들이 떠돌며 빛을 뿜어 올렸다.
무너진 벽과 바닥에 새겨져 있던 부조의 테두리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위에서 뿌연 그림자들이 스며 올라왔다. 그러나 그건, 비록
우유로 빚은 듯 희고 뿌연 빛이었지만 형체가 잡혀 있었다. 여자
가 있었고 남자가 있었으며 소녀가 있고 소년이 있고 노인이 있고
아이들이 있었다. 집회에 나온 이들처럼 멍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며
하나 둘 폐허의 광장을 채워나갔다.
“이거...”
유릭은 분명 이것과 비슷한 것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번 익스턴
광산의 동굴에서 보았던, 바로 그것! 나비들이 이끌어내던 거대한
유령의 집회.
이안이 외쳤다.
“자, 내 이름은 이안 블로드. 망자로 빚은 마령들의 왕이며 숙주, 지
휘자이며 연출자! 더럽혀진 왕국의 사제다! 타락한 제국의 기사들아,
한번 상대해 보자고!”
말이 끝나는 동시에 이안의 얼굴이 변했다. 그저 그을린 듯 검은 빛
이라 생각했던 그의 얼굴은 이제 구리빛이었다. 그 볼과 이마에,
희게 새겨진 문신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안이 웃었다.
“이제부터 진짜다!”
유릭은 이 남자가 반군의 일원이면서도 반군을 경멸했는지 알 것 같
았다. 특무부보다 약한 것이 뻔한 부하들을 여기저기 널려 놓고서도
가책이 없었는지도 깨달았다. 이 남자는 애당초 이 나라 사람이
아니었다. 모조리 이용해 먹은 것이다. 반군도, 특무부의 흑마법사들
도. 이 자리에 한데 모아 놓아, 한번에 쓸어버리기 위해.
“엄호 부탁드립니다. 이 남자는 제가 상대하죠.”
유릭은 총구를 들어 이안의 이마를 겨냥했다. 이안이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이번에는 놔 줄거냐, 아니면 체포할 거냐.”
“당신을 놔 준 것이 그 때의 제 실책이라면, 책임져야 하는 것 역시
저입니다. 그 실책 때문에 제 동료들이 다치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 제가 당신을 상대하겠다는 겁니다.”
“그 때는 놔 주고 지금은 죽이겠다는 거냐? 우습군! 왜 그렇게 일관
성이 없어!”
“사람은 누구나 변합니다. 2년 전에 옳은 선택이, 지금은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때는 원했던 것을, 지금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
습니다.”
“잘났다!”
이안이 팔을 걷어붙였다. 그의 팔뚝에도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주변
을 뒤덮은 우유빛 날개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유릭은 총을 장전
했다. 철커덩,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총신에 흰 문자들이 주르륵
나타났다. 이안이 주먹을 움켜쥐며 뒤로 밀어젖혔다. 희뿌연 마령의
무리가, 그 유령의 집회가 회오리쳤다. 흰 칼날로 베는 듯, 돌바닥
과 기둥이 패였다. 그곳에서도 흰 연기가 스며 올랐다. 그 모든 것이
이안의 가슴 앞에서 몰려들더니, 폭포처럼 폭발했다. 밀림의 깊고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내리는 폭포처럼, 맹렬한 포효를 토해내며 쏟아졌다.
유릭은 총구를 겨누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보며, 온 사방이 희게 뭉
개지는 것을 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히게아--!”
마법진이 펼쳐지며 회오리쳤다. 탄환이 마법진을 통과하며, 화산처럼
불꽃이 솟구쳤다. 그것이 허공을 휩쓸어 올리며, 폭발하는 하얀 힘의
몰아침과 맞부딪혔다. 쿠르릉, 사방이 뭉개졌다.
“시스터 제인, 구역 설정하십시오!”
그들을 중심으로, 금빛 기둥들이 내리박혔다. 그 사이사이에, 얼키설
키 엉킨 그물들이 나타나며 폭발하는 힘이 퍼지는 것을 막았다. 방
향을 잃은 흰 마령 하나가 솟구치다가, 단테를 향해 내리꽂혔다.
단테가 책을 들며 외쳤다.
“살리린!”
책이 펼쳐지다가 한 페이지에서 멎었다. 그 위에서 마법진이 나타나,
위로 떠올랐다. 그 중앙에서 붉은 실오라기가 나타나다가, 운석처럼
그 마령을 후려쳤다.
이안이 유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유릭은 라이플로 그의 턱을 후려쳤
다. 그러나 이안의 손에서 칼이 솟아나와 유릭의 가슴을 베어냈다.
피했지만 옷깃이 찢어졌다. 셔츠까지 베어나가며 피가 튀었다.
이안이 이를 갈아붙이며 외쳤다.
“네 놈....!”
셔츠 틈으로 보이는 유릭의 가슴 위로, 피가 스며든 문신처럼 붉은
문자들이 가득 나타나 있었다. 유릭은 주먹을 휘둘러 이안의 가슴을
후려쳤다.
“암만!”
마법진이 나타났다. 유릭과 이안 사이에, 왼쪽, 오른쪽에도. 세 방향
에서 나타나, 흰 빛을 뿜어냈다. 마령들의 흐름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크리게아!”
칼날 같은 냉기가 퍼지며, 그 흐름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암만!”
그리고 그 얼어붙은 덩어리들이 산산 조각났다. 유릭은 피 묻은 손수
건을 잡아 뜯으며 외쳤다.
“알반 이로네!”
핏방울이 튀었다. 그것이 마법진에 닿으며, 번지듯 시뻘겋게 물들었
다.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떼며 외쳤다.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신이 점지한 악마냐.”
“그건 당신의 신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우리가 믿는 신보다 훨씬 많잖
아요.”
“죽을래, 너!”
유릭의 총구가 올라가 이안의 이마를 향했다.
“자, 5분 정도.”
“뭐?”
“벌써 눈치채셨을 테지만, 그보다 더 오래 이 상태를 유지하면.......제
몸은 망가집니다. 한 달 정도는 전투불능이 될 테지요. 그 정도만
버텨 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살 겁니다.”
“왜 이렇게 까지 하는 거냐! 네 몸, 그거...........!”
“이것은 죄인의 형벌. 수인의 쇠사슬, 살아가기에 견뎌야 하는 업.”
“이제 이해가 되는 군! 네 놈이 왜 미쳤는지!”
철커덩, 총이 장전되며 총구에 문자들이 나타났다.
“4분.”
“나쁜 노옴!”
그 때, 우르릉- 바닥이 울렸다. 유릭이 딛고 있는 여신의 무너진 부
조가 빛나기 시작했다.
“물러나라, 유릭 크로반! 위험하다!”
누군가의 외침- 여자 목소리-
“프리델라 님?”
-바닥을 조심해.
알렉산더가 그리 말했다. 유릭은 뒤로 물러나며 바닥을 보았다. 바닥
의 여신이, 무너지고 깨어지고 모독당한 여신이 빛나고 있었다. 금방
탄생한 듯, 진짜 여신인 듯 빛나고 있었다. 이안이 경악한 듯 입
을 딱 벌렸다.
“뭐야, 이거!”
“당신이 하는 거 아니에요?”
“젠장, 젠장! 내가 이런 짓까지 할 정신이 어디 있어!!! 이 미친놈
아!”
여신을 중심으로, 아침의 광선 같은 빛이 방사상으로 펼쳐졌다. 그
빛의 선이 바닥을 뒤덮고 벽을 휩쓸어 올렸다. 순간, 유릭은 정말
찬란한 황금의 콜로세움을 보았다.
금방 닦여진 듯한 시선한 바닥과 벽과 천장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이
교도의 긴 옷을 걸친 사람들이 제단 같은 바닥의 여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가장 화려한 옷을 걸친 여자가, 나른한 얼굴로 천장
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푸른 하늘이
그 위에 펼쳐져 있었다. 여자가 고개를 돌리더니 두 팔을 펼쳤다.
찢어지듯 세상이 변했다.
“유리!”
크리스펠로가 달려들어 유릭을 잡아끌며 외쳤다. 멀리서 봐도 엉망이
던 그의 얼굴은, 가까이에서 보니 진짜 엉망이었다.
“잡아야 해요!”
유릭은 라이플을 들며 외쳤다. 찬란한 빛 속에 이안이 서 있었다. 그
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건 그가 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삼켜지듯
사라졌다. 유릭이 라이플의 방아쇠에 손을 얹었지만, 크리스펠로가
그 총구를 위로 향하게 했다. 탄환은 하늘을 꿰뚫었다.
“위험해, 저거. 아주!”
그리고 빛이 억눌린 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금빛 뒤덮였던 바닥은 회
색으로 변하고, 찬란했던 여신도 다시 남루한 노파처럼 변했다. 안개
낀 하늘과 희끄무레한 달이 나타났다. 더욱 폐허가 된 유적이 나
타났다. 그리고 무너진 여신의 이마에는 프리델라의 검이 박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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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와하핫!
아울은 5월 2일부터 5월 5일 까지, 대만으로 효도관광 간답니다.
그래서 다음편은 7일 뒤에!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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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40장 흉터의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