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59화 (159/174)

제158편

흉터의 공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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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지마는 마차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쿵쿵쿵- 거인의 발자국 소리같은 그 울림은 이어지다가 마침내 멈추

자 그제야 그녀도 눈을 떴다. 눈앞에는 곱게 단장한 얼음 같은 소

녀가 앉아 있었다. 열 서넛 정도 되었을까, 그 어린 소녀는 은빛

눈썹에 둘러싸인 새파랗고 커다란 눈동자로 코지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깨어나셔야 해요.”

코지마는 활짝 열린 마차의 문밖을 바라보았다. 노파의 이처럼 울퉁

불퉁한 폐허의 벽 끄트머리 위, 옅은 붉은 빛 하늘 위로 안개로 빚은

새떼 같은 것이 날아갔다. 코지마가 물었다.

“아가야, 네 주인은 대체 뭐니.”

소녀-블랑쉐가 쌀쌀맞게 답했다.

“왕이시죠.”

“어떤 왕이지?”

“모욕당한 왕.”

그리고 블랑쉐는 방긋 웃었다. 소녀다운 귀여움은 전혀 없는, 스산하

고도 오싹한 웃음이었다. 아이가 말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비밀이랍니다.”

“말하려무나. 나는 마녀들의 왕, 사악한 정들은 내 말에 따라야 해.”

“그리고 오만한 신의 전사. 우리들은 당신같은 사람을 싫어해요.”

코지마의 손이 블랑쉐의 목덜미를 스쳤다. 얼룩 같은 나비무늬가 고

양이 눈이 반짝이듯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소녀의 눈이 흐려지며, 그

작고 도톰한 입술이 열렸다.

“우리들은 참 오랫동안 임금님을 모시고 살았답니다. 임금님은 무서

운 분이셨지만, 우리들에게는 무척 다정하셨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은 누군가를 찾으러 좀 먼 길을 떠나셨지요. 우리는 그분이

기사를 찾으러 간 건지 왕자를 찾으러 간 건지 몰랐어요. 어쨌건-

그렇게 떠나셨던 분이 돌아오셨지요. 어떤 일이 있었느냐 물어도

답해주시지 않았어요. 그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아이들아, 굉장한

일이 생길 거란다. 이 사악한 제국이 무너질 거야, 뒤집힐 거라고.

우리들은 고대하고 기다렸답니다. 임금님께서, 드디어 사악한 왕

자님을 찾았다고 생각했어요.”

재잘재잘- 코지마는 그 아이의 목소리가 얼음 사이로 흐르는 차가운

물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임금님은 파란 바다가 보이는 곳, 새하얀 돛들이 백조날개처

럼 펼쳐진 항구로 가셨어요. 그곳에서 그분은 행복하셨답니다. 눈이

까맣고 목이 흰 아가씨를 만나셨어요. 아가씨는 임금님을 사랑했고,

곧 왕비가 될 예정이셨지요. 우리는 모두 불만이 좀 많았어요.

그 아가씨는 너무 너무 온순하고 멍청하고 평범했으니까. 그 중에.......

클로디유 언니는 제일 불만이었답니다. 그 아가씨를 엄청나게

미워했어요.”

“....그러니.”

코지마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 쉬었다.

“그렇게 행복했는데, 임금님은 그만 배반을 당했어요. 우리들을 남겨

놓고 잡혀가셨답니다. 클로디유 언니가 와서 말했답니다. 그분은

지하로 가셨다고 했어요. 팔다리의 힘줄도 끊어졌대요. 다시는 지

상으로 나오지 못할 거라 했지요. 그러고는 언니는 우리들을 팔아

버렸답니다. 저는 도망쳤지만, 다른 형제들은 참 가엾게 되었어요.

낙인이 찍히고 쇠사슬에 묶이고 상자에 가둬져서 여기저기 보내졌답

니다. 안쓰러워라. 우리는 노예지만 자부심 넘치는 노예들. 그런 우

리에게, 그건 참을 수 없는 모욕.”

그리고 블랑쉐는 입술위로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런데 임금님은 결국 돌아오셨어요. 쇠사슬을 끊고, 낙인을 지우고,

지하에서 도망쳐 이곳으로 오셨지요. 그분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우

리들을 찾아다니셨어요. 모두 돌아오기 시작한답니다. 아아, 성궤의

날에 봉인된 형제들도 돌아왔으면 좋겠어요.”

“성궤의 날?”

블랑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성궤의 날. 악독한 이 나라의 마녀가 우리들의 형제와 우리

들의 어버이와 우리들의 왕의 힘을 빼앗아, 자기 몸으로 봉인해 버린

그 날. 우리는 제단을 잃고, 주인을 잃고 추악해졌답니다.”

그러던 블랑쉐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눈살을 찌푸리고 이를 악물었

다. 코지마도 고개를 돌려 마차창 너머를 보았다. 컴컴한 길 너머로,

사람의 흐릿한 모습이 어렸다. 구름빛 회색 망토였다. 블랑쉐가

쏘아붙이듯 날카롭게 말했다.

“정말 싫은 언니가, 결국에는 돌아왔네요. 아아, 저 언니는 너무 너무

싫어요. 너무 너무.”

“왜지?”

“저 언니는....... 임금님의 금고를 털어간 도둑놈의 딸이에요. 더러운

피를 이어받아 더러운 먹이를 받아 크는 털 빛깔 고운 암캐. 그런

주제에 왕자님을 모욕했어요. 사악한 왕자님은 정말 귀한 분이신데,

저 도둑의 천한 딸은 하인만도 못한 취급을 하죠.”

“무구하게 타락한 아가야, 그 소녀는 공주란다.”

블랑쉐가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그럼 왕자는 공주와 결혼하는 건가요?”

“네 말대로라면, 그리고 지금 이대로만 나아간다면 그 왕자는 사악하

고 위대한 왕이 되겠지. 그런 왕은 공주와 결혼해선 안돼. 여왕과

결혼해야해.”

코지마는 망토를 집어 들고 직접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려갔다. 그리고

콜로세움으로 향하는 길 앞에 섰다.

잠시 뒤 길 끝에서 알렉산더가 나타났다. 그의 품안에는 에닌이 안겨

있었다. 유리상자 속 인형처럼 아름다운 소녀는 겁먹은 생쥐처럼

남자의 팔 안에 몸을 틀어박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옆에는,

로웨나가 밤기운에 어깨를 움츠리며 떨고 있었다.

코지마는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로웨나가 놀랐다.

“부인, 어떻게 여기 계신 거죠?”

“백작을 도우러 온 거랍니다. 로웨나 그린 양, 그런데 그린 양은 어떻

게 여기 와 있는 거지요?”

“저기, 설명을 하자면 복잡한데........아, 고맙습니다.”

코지마가 망토를 내밀자, 로웨나는 얼떨떨해하며 그 망토를 받았다.

코지마는 로웨나의 어깨와 목, 볼에 피가 튀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시선을 느낀 로웨나는, 말라붙은 핏방울을 손목으로 문지르며

훔쳐다.

“좀 흉하죠?”

“괜찮나요?”

“네, 저는 괜찮지만........에닌은 아주 안 괜찮아요.”

코지마는 뒤돌아보았다. 알렉산더는 에닌을 데리고 마차로 향하고 있

었다. 에닌은 여전히 떨며 흐느끼고 있었다. 알렉산더는 에닌을 마차

안에 눕힌 다음 마부석 쪽으로 갔다. 마부는 없었다. 알렉산더가

직접 마차를 몰고 온 것이다. 코지마는 로웨나의 어깨를 끌어당기

며 말했다.

“이제 돌아가죠, 로웨나 그린 양. 많은 사람들이 걱정할 거랍니다.”

“아, 네, 네.”

코지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훌륭했어요, 그린 양.”

“네?”

“오늘 공연. 그 누구도, 그린 양처럼 화려한 힘이 넘치는 여왕을 노래

부를 수는 없을 거에요. 당신의 첫 주연무대를 본 것을, 저는 두고

두고 기억할 겁니다. 그것을 많은 이들에게 자랑할 날이 있을 거

랍니다.”

로웨나의 볼이 붉어졌다.

“가, 감사합니다.”

“훌륭한 예술가를 위한 찬사는 관객의 의무랍니다. 가지요, 로웨나 그

린 양. 많은 일이 벌어졌던 하루지만, 푹 쉬고 나면 저를 찾아 와요.

여왕을 위해 다과를 준비할 테니.”

“괜찮나?”

“설마요.”

유릭은 계속 기침을 토해냈다. 쿨럭 거릴 때마다 회색 돌바닥 위로

핏방울이 튀었다.

“약은?”

“먹었습니다. 조금 뒤면 나아질 겁니다.”

프리델라는 여신의 이마에 박힌 검으로 걸어갔다. 시스터 제인이 와

서 유릭의 목을 짚으며 맥박을 확인했다. 그녀가 손을 떼자, 그 손

톱에서 붉은 문자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상태가 별로 안 좋군-

유릭은 그리 생각하며 입술의 피를 닦다가 그제야 자신이 손에

로웨나의 손수건을 꽉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에 흠뻑 젖어 있

었다. 그것으로 지혈하려 했지만 시스터 제인이 직접 자신의 상비용

붕대를 꺼내어 손목을 감기 시작했다. 유릭은 그 손수건은 주머니에 넣었다.

“좋아, 그럼 일단 점검한다.”

뒤에서 프리델라가 검을 뽑으며 말했다. 부대원들 모두 덜덜 떨고 이

를 악물며 그녀의 평가를 기다렸다. 평가는 곧 얼마나 어떻게 두드려

맞느냐로 이어진다. 그녀의 눈은, 이제 막 시스터 제인이 붕대를

감고 난 유릭의 팔목에 멎었다.

“그건 쓰지 말라고, 내가 예전에 분명 말했던 적이 있다.”

“죄송합니다.”

빠악-! 프리델라의 주먹이 날아가 유릭의 얼굴을 후려쳤다. 유릭은

아득하게 날아가, 포석이 울퉁불퉁 솟아 있는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맞은 것도 아프지만, 그 돌덩이에 부딪히니 더 아팠다. 눈물 찔끔

흘리며 몸을 일으키는데, 프리델라는 이번에는 크리스펠로를 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덤볐고 맞았고 때렸고 이겼습니다.”

참 간략하다. 유릭은 엎드린 채로, (그리고 시스터 제인은 그렇게 엎

어진 유릭의 맥박을 무표정한 얼굴로 확인하고 있었다) 저래서 크

리스펠로는 더 아프게 더 오래 더 많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

령 없고, 없는 주제에 고지식할 정도로 솔직한(생각이 없는 것이다,

라는 결론이 더 그럴싸할지도)것은 정말 문제다.

역시나, 프리델라가 말했다.

“이긴 게 아니다. 네 적은 다른 동료들이 사자떼에게 몰린 사슴 한

마리처럼 변해 있으니 너와 싸우는 걸 포기한 거다! 언제나 경고

했다. 무턱대고 덤비지 말라고. 너를 도울 수 있는 카바냐는 근처에

있었다.”

“죄송-”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발이 돌려차기로 크리스펠로의 턱을 후려갈겼

다. 크리스펠로도 날아갔다. 프리델라가 첫 부임했을 때 다들 크리

스펠로가 봐 주는 거야,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프리델라에게 맞

은 크리스펠로가 진짜 아파, 아파, 아파! 하고 깨갱대는 것을 보고

집어 치운지 오래였다. 얼마 지나지도 않아 다들 비슷하게 두들겨

맞았으니, 거짓말 마! 엄살이다! 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정말, 엄

청나게 아팠다.

프리델라는 이번에는 페라라를 보았다. 부상은 페라라가 제일 심했

다. 단단한 제복이 여기저기 찢어져 있고, 시스터 제인 덕에 피는

잠시 멈추었지만 이미 흘린 피는 상당했다.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냐.”

“상대가 꽤 강하더군요......... 역습의 마령, 제 공격을 흡수해 퉁겨내

는 능력을 가진 마령이었습니다. 난사를 날리니, 그만큼 다시 되돌

아오더군요.”

“그리고 넌 일단 계속 휘갈기고 봤겠군.”

“네.”

“넌 다 나으면 맞는다.”

페라라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나중에 맞는 사람은 대체로 프리델라의

컨디션이 최상일 때 맞는다. 그러므로 제일 아프다. 프리델라의 눈이

이제는 멀쩡한 단테를 향했다. 단테는 피 젖은 책을 들고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넌 하나도 안 다쳤군.”

“네. 제 상대는 굉장히 약했습.........”

말이 끝나기도 전에 프리델라의 주먹이 명치를 후려갈겼다. 그는 유

릭보다 더 멀리 날아갔다.

“일찍 끝났으면 왜 안 도우러 갔나.”

“.....”

저보다 더 아프겠군요, 라고 생각하며 유릭은 단테를 측은하게 바라

보았다. 단테는 늘 그러하듯 음울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맞기 싫다......”

“안 맞을 방도가 없어요....”

“탈영이나 할까?”

“지난번에 제가 탈영했다가 붙잡혔을 때 두들겨 맞는 거 안 보셨습니

까?”

“.......”

프리델라가 외쳤다.

“모두 일어나 돌아가라! 치료는 콜로세움 밖에서 한다! 어서 가!”

유릭은 단테를 일으켜 세우고, 늑대로 변해 아프다고 깨갱대는 크리

스펠로를 잡아끌었다.

어느덧 동쪽 하늘이 뿌옇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각자, 앞으로 굉장한

토벌전이 벌어지지 않기만을 바랬다. 그때부터는 중노동이 된다.

중노동으로 끝나는 것만이 아니라, 어마어마하게 괴롭다.

예전 상부의 명령과 그것을 멍청하게 받아들인 비특무부 출신의 대장

덕에 대토벌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결과는 전쟁 중에 1/3에 해당되는

부대원의 사망. 그 중 절반 이상이 전사한 것이 아니라 처형되었다.

그것은 동부도 마찬가지였다. 동부의 특무부대장 존 스틸 대령은 부대

원에게 죽었다. 일주일 뒤 식민 동서부의 특무부의 대장이 모두 바뀌었다.

총사령부는 방침을 바꾸어 특무부 출신을 식민 특무부의 대장으로

임명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그렇게 부임한 것이 동부 특무부의 제임스

호그 대령과 서부 특무부의 프리델라 마고 앤더슨 대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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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으하하하;; 여행 후유증이 심각하군요. 지금도 멍하니 모니

터를 바라보며 '아아, 지난 주에는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랴~'

하고 중얼 거리는 중입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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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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