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편
흉터의 공작#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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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무사하구나!!”
후방을 담당하기로 되어있던 카바냐가, 동료들이 나타나자 두 팔을
벌리며 환영했다. 그리고 유릭의 상처를 보고, 또- 라는 듯 눈살을
찌푸리고, 페라라를 보고는 허덕, 하고 신음을 삼켰다. 페라라가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듯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아, 상대는 죽
었어요- 어떤 놈이었냐고요? 글쎄요, 끝나고 나니 멀쩡하게 남아 있
는 건 머리 반 쪽 뿐이라. 누군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굉장
히 강했으니, 조사하면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카바냐는 마지막으로
크리스펠로의 상처를 보고 기겁했다. 으악, 누가 널 이 지경으로 만들었어!
“시스터 제인, 일단 모두 응급처치 해 줘라.”
프리델라가 언짢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시스터 제인이 자신의 말
에 있는 응급상자를 꺼내어 가지고 왔다. 그 때, 잠시 보이지 않았던
에바가 달려왔다. 그녀의 손에는 붕대와 가위, 소독약이 들려 있었다.
“뭐냐, 에바.”
프리델라가 묻자, 에바가 단호하게 답했다.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다 여기 있는데, 대체 무슨 부상자 말이냐.”
“방금 전, 근방을 수색하던 중에 부상자를 발견했습니다. 치료를 부탁
하며 자수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에바의 오른쪽 손에는 채찍이 들려 있었다.
프리델라가 물었다.
“처음부터 자수하던가?”
“아닙니다! 칼을 들며 협박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고했으며, 그분들
이 경고를 거부했기에 저도 항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에바는 채찍을 들어보였다. 부대원들 전원이 생각했다. 아마
도, 진짜 부상보다는 에바의 ‘항의’에 맞아 터진 상처가 더 심할 것
이라고. 프리델라가 물었다.
“반란군이었나?”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백금발에 짝눈을 가진 젊은 여자 한명과
어린 소년 한명이었습니다.”
프리델라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내가 직접 만나보겠다. 유릭, 카바냐, 너희들은 나를 따라와라. 에바,
안내해라.”
“네!”
에바는 일단 시스터 제인에게 구급약을 받아든 다음 앞장섰다.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 높다란 벽으로 둘러싸인 폐허를 지나자, 아마도
피난을 간 빈민들이 집이었던 듯 거적으로 지붕 비슷한 것을 해 덮
어 놓은 곳에 도착하자 에바는 큰 소리로 말했다.
“왔습니다! 나오세요, 숙녀분.”
안쪽에서 여자목소리가 들렸다.
“나갈 테니, 너는 어서 이 녀석 치료나 해줘. 정말 중상이라고.”
“알겠습니다.”
거적으로 덮인 어둠 속에서 키 큰 여자가 나왔다. 희뿌옇게 밝아오는
여명의 빛 속으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나자 프리델라가 이런, 하고
신음을 삼켰다. 카바냐가 비명을 질렀다.
“으악, 저 계집애!!!!!”
유릭도 응? 하고 놀랐다. 여자는 지크, 바로 그녀였다. 방금 전 유릭
과 한바탕 하고 도망친 그 여자. 그녀는 엉망진창인 백금발을 넘기고
고개를 들더니, 프리델라와 다른 두 명의 특무부대원을 보고는 씨
익 웃었다.
“다시 만났네, 아가씨 하고 총각.”
프리델라가 검을 뽑아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카바냐도 등에 걸린 은
봉에 손을 얹었다. 유릭의 총구는 이미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지
크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웃으며 말했다.
“리디 언니. 이것 좀 치워달라고 말해주면 안 될까?”
“닥쳐라.”
카바냐가 입을 딱 벌리며 유릭을 보았다. 너 알고 있었냐? 유릭은 고
개를 저었다. 생판 모르는 일인데요. 그러나 유릭은 짐작은 되었다.
페라라와 단테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절대 한꺼번에 나오지
않는다. 프리델라가 둘 다 데리고 온 것은, 어지간한 일이 일어날
줄 알고 그리한 것이다. 정보는 이미 새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델라가 지크에게 물었다.
“그런데, 대체 누가 부상당한 거냐? 네놈은 아주 팔팔해 보이니, 정신
적 부상이니 뭐니 지껄이지 말고 말해.”
“재작년에 이 근방에서 구해준 꼬마가 다쳤지....언니 부하에게. 정말
사정 안 봐주고 마구 갈기던 걸.”
“적이라 판단되면, 다섯 살 꼬맹이의 머리도 갈겨야 하는 게 우리들
이다. 배부른 소리 집어치워!”
지크가 네, 네, 어련하시려고- 중얼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저기-”
유릭이 손을 들었다. 카바냐가 옆에서 쿡쿡 쑤셔대고 있어 괴로웠다.
이봐요, 중위님.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시지, 왜 행여나 물어봐서 맞
을까봐- 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에게 시키십니까- 나는 네 상관이야.
네, 네- 멋진 상관님. 콱, 그냥! 어쩌고 하는 말이 빠르게 오고
간 다음에, 유릭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물었다.
“상황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대령님, 저기 그 지크라는 분과 아는 사
이십니까?”
프리델라는 귀찮다는 듯 무성의하게 지크를 가리켰다.
“지클린데 클링조르. 내 사촌 여동생이다. 이번....일이 생기기 전에
미리 귀띔을 해 줬지. 그날 극장에 나타난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나온다고 피했다가는, 그 동안의 노력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상황이었으니까.”
유릭은 머리를 굴렸다. 그렇다, 프리델라는 대공가의 일원. 그녀의 사
촌동생이라면 귀족중의 귀족이자 대귀족이다. 벌써 눈치 챈 카바냐의
얼굴이 서서히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감히’ 그녀의 턱을 발로 걷
어찼던 유릭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클린데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말 했지? 감히 내 턱을 찬 죄를 묻겠다고.”
프리델라가 말했다.
“건방진 소리 하지 마라, 지클린데! 그 때 그들의 임무는 그곳을 지
키는 것 이었다! 그들이 널 죽였다 해도 나는 죄를 묻지 않았을 거
다- 그리고.........너도 네 신분에 맞게 행동해라! 지금 네가 해야 할
일은 수도에 얌전히 처박혀 네 자리를 지키는 거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레반투스 대공아--!”
잠시 얼어 죽을 정도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되었다. 프리델라는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돌아섰고, 상황 파악이 도저히 되지 않는
카바냐는 멍하니 지클린데의 얼굴만 보았다. 한참 만에, 유릭이
물었다.
“진짜 정체가 뭡니까?”
지클린데가 우아하게 웃으며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지클린데 클링조르 반 레반투스. 현 레반투스 대공이다. 잠깐 알아볼 게
있어서 이곳 용병단에 끼어 있었던 거야. 만나서 반가웠다, 하사, 중위.”
카바냐가 뒤에서 중얼 거렸다. 나 이제 죽었다, 나 이제 죽었다. 유릭
도 생각했다. 저도 이제 죽었습니다.
납치사건은 대강 마무리 되었다. 납치된 에닌이 돌아오자 파난 사령
부는 마음 놓고 그 동안 조심조심 다루던 빈민들을 모조리 풀어주
었다. 겉으로는 나오지 않았으나 그러나 어차피 소문은 난다. 좁은
틈에서 스며 나온 소문은, 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결국에는 넘쳐나
게 된다. 언제 어떻게 에닌 마델로가 반란군에게 납치되었는지는
누구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지만, 어쨌건 그녀의 납치만은 암묵적인
사실이 되었다.
에닌은 돌아오자마자 자기 방에 틀어박혀, 치안군 장교들이 찾아와
누구와 만나서 어떤 일이 일어냐고 물어보면 울면서 모른다고만 말할
뿐 그 어떤 증언도 하지 않았다. 로웨나에게 혹시? 하며 음험하게
묻는 남자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로웨나는 “맥주병 주둥이로 네 후
장을 후벼 파 주기 전에 닥치고 꺼져, 이 자식님아!” 라고, 매우 공
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조사를 맡은 예의바른 치안군 장교에게는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서 충격을 받은 거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장교는 다행히 잘 이
해해주었다. 아아, 정말 힘들겠군요, 로웨나 그린 양! 하며, 로웨나
를 지극히 위로하는 아주 이해하기 힘든 짓을 하기는 했지만, 어쨌
건 그는 더 이상 에닌을 추궁하지 않고 로웨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
았다. 공연 끝나면 시간 나시나요, 근방을 구경하고 싶지 않으세요,
제가 잘 아는 식당이 있는데 뭘 좋아하세요, 등등- 도무지 사건
과 연관이 없는 것만 잔뜩 물어보았다. 로웨나는 저는 남자친구 있
어요, 라고 말한 다음 유릭의 이름을 댔다. 장교는 실망하다 못해
절망하며 돌아갔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로웨나에게 알렉산더가 찾아왔다. 이틀 내내
마델로 부인이 “우리 에니 어쩌니, 어쩌니!” 하며 고성을 지르는 것을
꿋꿋이 참고 있던 로웨나는, 그날만큼은 에닌이 사랑의 힘으로 이
총체적 고난을 극복하게 되기를 빌었다.
“에닌 양의 상태는 어떤가?”
“아주 안 좋아요. 위로해 주시면 좋겠는데.......충격이 좀 큰가 봐요.”
“같은 장면을 봐도, 태도는 아주 다르군.”
“백작님도 같은 장면을 보시지 않았나요?”
“난 그런 장면을 자주 봤거든.”
“하긴, 악당이시니까.”
로웨나라고 그런 장면 보고도 멀쩡할 만큼 비위가 좋을 리는 없다.
꽃으로 장식한 얼음이었어- 로웨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상냥하다고,
다정하다고 생각했는데, 잘 해준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누구나에
게 그렇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기에 로웨나에게도 그리 해준 것이
다. 그리 생각하니, 정말 맥이 팍 빠지며 엄청나게 실망스러웠다.
알렉산더와 함께 에닌의 방을 찾아가, 일단 알렉산더만 들여보낸 다
음 문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산더가 나왔다. 문
옆에 쭈그려 앉은 로웨나와 마주치자 그는 웃으며 말했다.
“마지막 공연은 할 수 있을 거야.”
“정말요?”
“그럼 나중에 보자고.”
로웨나는 자리를 뜨려는 알렉산더를 붙잡았다.
“왜 그러지?”
“저기, 그 블랑쉐 페인 양 말인데요...”
“블랑쉐는 왜?”
“엉덩이 좀 때려 달라고요.”
할 수만 있다면 로웨나 자신이 직접 두드려 패고 싶었지만, 귀족가
아가씨에다가 그녀와 약간의 친인척 관계도 없는 지라 소용없는 줄
알면서도 알렉산더에게 화낼 수밖에 없었다. 알렉산더는 웃음을
터뜨렸다.
로웨나는 그의 옷자락을 놓고는 문을 열고 에닌의 방에 들어갔다. 방
에는 온갖 사람들이 보낸 선물과 꽃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으며, 테
이블에도 편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모두 펼쳐져있었다. 사정을 아
는 사람들로부터 도착한 무사귀환을 축하한다는 편지도 있고, 공연
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 편지도 있었다. 에닌은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가 로웨나를 반겼다.
“어서와, 로이.”
로웨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에닌의 안색을 살폈다. 아침까지 종이처럼
하얀 얼굴로 발발 떨고 있더니, 지금은 약간이나마 웃고 있었다.
로웨나가 다가가자, 에닌이 그녀의 손을 잡아 볼에 댔다. 볼은 차고
축축했다.
“이제 괜찮은 것 같아. 공연도 할 수 있을 거야.”
“다행이구나.”
“하지만.......잊을 수는 없을 거야. 아니, 잊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
그래서 로이, 브란 카스톨로 돌아가면.....아버지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 할 생각이야.”
“걱정하실 텐데.”
“아냐, 그래도 해야 해. 만약...그 남자가 말한 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그러면 그 사람은 아버지 때문에 죽은 거나 다름없어.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 때문에 죽어가고 있고 고통 받고 있는 거야.
로이, 나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잘못된 건 고칠 거야.”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지만, 로웨나는 격려하듯 웃어주
었다.
마델로가 어떤 사업을 하고 있는 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
다. 뒷골목에 사는 로웨나다. 뒷골목의 왕 중 하나인 리자베따의
총애를 받는 난처한 몸이기도 하다.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마약, 매춘, 식민지 노예매매와 밀수- 그것이, 파산 직전이었던
마델로를 구했다. 알렉산더와의 관계가 짐작되기도 하다. 알렉산더
대신 자신의 이름을 걸고 실질적인 사업을 하는 대가로, 마델로는
파산의 지옥에서 구원받은 것이다. 카스틸리아 극장에 대한 투자가,
아마도 마델로가 하는 거의 유일한 합법적인 사업일 것이다.
“이제.......공연 준비를 해야겠지. 열심히 하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 때문에 그런 공연을 봤을 관객들에게 사죄해야지.”
“응?”
에닌은 웃으며 로웨나의 볼에 입 맞추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하게 해서 미안해. 하지만 정말 미안한 건, 나를
위해 애써 온 관객들에게 공연을 보여드리지 못한 거야. 많이 실망
했을 거야, 그날.”
“아, 그건-”
로웨나는 에닌의 얼굴을 살폈다. 그러나 에닌의 얼굴에는 한점 얼룩
도 없었다. 너무도 무구하게, 너무도 솔직하게,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옳은 것이라 생각하며 맑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맞는 말이라는 건
알아도, 인정해보자고 해도 머리 한쪽이 뜨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닌이 말했다.
“트래비스 씨에게도 말해줘. 공연을 하겠다고. 그리고...... 열심히
해서, 그 날 그런 무대를 보고 실망한 관객들에게 보답하겠다고.”
그렇게 말하며 환하게 웃는 에닌을 보며, 로웨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무어라 말해도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아이인데, 무엇을 보여
주어도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아이인데 무얼 말하겠는가. 로웨나는 낭비를
싫어한다. 그리고 어차피- 로웨나는 급조된 대역이었을 뿐이다.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그런데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트래비스 씨를 모시고 올게.”
“고마워, 로이. 너는 정말 진실한 내 친구야.”
로웨나는 웃었지만, 정말 자신이 그녀의 진실한 친구인 지는 의문이 들었다.
지금만큼은 차라리 아무 사이도 아닌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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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우하하..... 돌아오니 할일이 무진장 많군요;;
다음 편은 3일 뒤에!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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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