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61화 (161/174)

제160편

흉터의 공작#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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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무르익은 어느 날, 카스틸리아 오페라단 초청공연의 마지막

막이 꽉 찬 객석 앞에서 올라갔다.

마지막이라서 그런지, 과하게 비싼 입석마저 모조리 팔렸다. 트래비

스는 근방의 귀족들과 부유층으로부터 협박장 비슷한 편지를 미친

듯이 받았다. 없는 걸 어떻게 내놓습니까, 하고 눈물 흘리며 해명

편지를 보내자 누구누구는 되는데 나는 안 되냐고 윽박질러대는 답

장을 30분 만에 받았다. 예로 드는 게 모조리 카밀턴이었다. 프리

델라와 보겠다고, 두 장이나 빼갔던 것이다. 그렇게 가져갔으면 얌전

히 있을 것이지, 아아 저는 트래비스가 주었답니다, 라는 말을 자

랑스럽게 해대니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 특혜라는 말까지 나돌 지경이

었다. 벌써 공연을 보았던 사람마저 오늘도 보겠으니 좀 팔라고 편

지를 보냈다. 아아, 별일 다 있기는 했지만 공연은 성공이구나-

하고 기뻐하는 것도 잠시, 표가 없어요- 하고 답장 보내자마자 당

사자인 노백작이 직접 출두하여 내 놓으라고 했다. 부인과 보고 싶

다며, 가격을 세배까지 올렸다. 트래비스는 잠시 기다리라 말한 다

음, 사무실 옆 휴게실에서 어여쁜 발레리나 도나 양과 노닥거리는

카밀턴에게서 초대장을 빼앗아 백작에게 넘겼다.

“고맙소, 트래비스. 오늘 표가 한 시간 만에 매진되었다고 해서 얼마

나 걱정했는지. 아내에게 미안하게 될 뻔 했지 뭐요. 나중에 사례

하리다.”

“뭘요. 브란 카스톨에서 뵙겠습니다.”

카밀턴이 따라와 욕을 하든 말든 트래비스는 노백작과 즐겁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러나 대체 왜 이렇게 마지막 공연이 인기가 좋은

건지, 트래비스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에닌의 이름값인가, 하

고 생각하자니 둘째날 표는 그냥 저냥 팔린 정도라 그리 말할 수

도 없다. 결국 트래비스는 에닌이 구출되어 돌아왔다는, 천사의 귀

환이 화제가 되어 그런 건가- 하고 단순하게 결론을 내렸다.

마지막 공연이 시작되자, 극장 주변에는 지난 번 공연보다 다섯 배

정도 되는 치안군이 깔렸다. 특무부는 서부 특무부의 부상으로 동부

특무부가 증원되었다. 우하하, 우리가 유능하다는 증거다! 하고

자랑스러워하던 동부특무부는 서부특무부원들에게 오페라 초대장이

갔다는 사실을 알고 악을 쓰며 화를 냈다. 서부 특무부원은 하루

정도는 치료받지 않고 외출하게 해 달라는 유릭, 부상이 심하니 입원

해라 이 개자식아, 라는 명령을 받아도 기를 쓰고 가겠다고 박박

우기는 크리스펠로, 그리고 매우 당연하게도 카바냐를 제하고는 모

두 팔아치웠다(프리델라도 에바를 시켜 팔았다). 단테가 동료들 대

신 암표상과 흥정(비슷한 협박)을 하여 다섯 배가 넘어가는 가격으

로 팔았다(절반 정도는 협박이 들어갔을 것이다).

이틀 연속으로 쉴 뿐만 아니라, 서부 특무부가 무능하여 동부 특무부

에게 나머지 토벌전까지 맡기겠다는 총사령부의 방침이 공연날 아침

전달되자, 서부 특무부는 열광했다. “만세, 일 안한다!” 동부 특

무부는 억울하다며, 이거야 말로 특혜라고 악을 썼지만 무시되었다.

“젠장, 일 한다!”

저녁 7시, 그 동안 일어났던 모든 사고를 잠시 잊은 채 드디어 극장

문이 닫히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기대에 찬 관객은 무대를 말려 죽여

버린다. 그날 역시 그러했다. 카바냐는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박스석에 앉아, 검은 제복의 흉흉한 기운을 온 천지에 뿜어냈다.

크리스펠로는 오페라 무대보다는 오케스트라 박스석에 오케스트라

단원이 들고 있는 바이올린을 더욱 간절한 눈으로 보았다.

서곡이 시작되자 객석을 꽉 채운 관객들의 눈이 기대로 타올랐다. 막

이 올라가고 바티스타의 그 유명한 첫 번째 코러스가 휩쓸 듯 펼쳐

졌다.

진통제 해열제를 사발로 먹고 나온 유릭은, 박스석에 앉아 시녀의 역

을 하는 로웨나를 지켜보았다. 무대에서의 그녀는, 첫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코러스가 끝나며 여왕, 바티스타의 화려한 콜로라

투라가 시작되었다. 돌아온 에닌은 첫날보다 아름답게 노래를 불렀다.

약에 쩔어서 듣고 있음에도 지난번 보다 훨씬 더 훌륭하게 생각되

었다. 크리스펠로는 굶주린 강아지 같은 눈으로 오케스트라 박스

만 바라보았다. 카바냐는 열심히 무대에 열중했다. 그런데 객석분위

기가 눈에 뜨이게 흐트러지고 있다는 것이 뻔히 보였다.

유릭은 박스석을 살폈다. 박스석의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잡담을 하고

있었다. 2층 박스석에 앉은 노귀족 부부의 얼굴도 별로 밝지 않았다.

1, 2층의 손님들의 주의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모래가 바람에 날리

듯 흩어지고 있다. 절반 이상 되는 관객들의 얼굴에 실망의 기색이

어렸다. 뭔가, 아주 잘못되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첫날에는 절대

이렇지 않았다. 유릭이 무대를 가리키며 카바냐에게 물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죠?”

“여왕이 바뀌었잖아. 이거 이거, 정말 재앙이군. 이안 블로드인지 뭔

지 하는 녀석이 에닌 양을 보쌈해간 것보다 더 큰 재앙이라고.”

“바뀐 건 지난번이었잖습니까.”

“그래. 이슬처럼 예쁜 공주 대신 피처럼 화려한 여왕이 나타났었지.”

에닌이 노래를 마치자 예정된 박수가 예정된 만큼 터졌다. 달라진 건

하나도 없었건만, 구름이 햇살을 가린 듯한 어둑한 느낌만은 지울 수

없었다. 에닌이 허리를 숙이자 막이 내려왔다. 무대의 불이 꺼지

고 객석이 밝아졌다. 15분간의 휴식이 시작되자, 몇 분간 사람들은

엉거주춤 멍하니 있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릭은 약에 취해 잠들

었고, 크리스펠로는 여전히 오케스트라 박스를 노려보았고, 카바냐

는 그런 크리스펠로를 “나중에 돈 모아서 저거 다 사자.” 라며 위로했다.

그런 분위기는 2막까지 똑같이 유지되었다. 바티스타의 자살까지, 첫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객석의 반응도 1막 때보다는 훨씬 더

정돈되어, 첫날과 비슷한 박수가 터졌다. 2막이 거의 끝날 무렵, 로

웨나가 퇴장한 후부터는 아예 푹 곯아 떨어져 있던 유릭은 직원으로

부터 쪽지 한 장을 받았다. 쪽지에 적힌 서명을 보니, 카밀턴으로부

터 온 것이었다. 카바냐를 보니, 그녀는 불평을 하면서도 무대에

열중해 있었고, 크리스펠로는 바이올린에 열중해 있기에 유릭은 양

해 없이 일어나 자리를 떴다.

-2층 휴게실에 있네. 좀 와 주게나. 자네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네.

유릭은 다시 그 쪽지를 들여다보며, 졸음에 비틀거리며 극장 2층 휴

게실로 향했다. 뭐 시킬 거라도 있나, 그리 생각하며 유릭은 휴게실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카밀턴이 들어오라 말했다.

유릭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그대로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카밀턴

은 혼자 있지 않았다. 그의 앞에, 몸집이 작은 소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유릭이 들어오자 일어났다.

“형!”

“가토?”

만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가토의 갑작스런 등

장에 유릭은 당황했다. 카밀턴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1막이 끝나고, 트래비스와 함께 사무실에 있는데 이 가토 크로반 군

이 왔다네. 자네를 찾아왔다고 하더군. 자네가 오페라 관람 중이라고

했더니, 기다리겠다고 하더라고........ 어차피 나는 오페라에 관심

도 없으니, 가토 크로반 군과 2막이 끝날 때까지 놀아주었다네.”

가토가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정말 다시없을 영광이었습니다.”

“뭘. 덕택에 즐거웠던 건 나라네. 그런데....정말 못 알아보겠는 걸. 하

나도 안 닮았어.”

카밀턴은 그렇게 말하며 가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토가 쑥

스러워하며 고개를 돌렸다. 유릭이 물었다.

“가토,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음악 선생님이....학교 그만두고 가면서 표를 한 장 주셨어. 한번 보

라고 하시면서. 하지만 너무 재미없더라고. 무슨 내용인 지 통 모

르겠어.”

“혼자 왔니?”

가토는 고개를 저었다.

“친구들하고 같이 왔어. 그 애들도 다 초대장을 받았거든.”

“친구들은 어디있지?”

“지금 객석에서 졸고 있을 걸.”

카밀턴이 피식 웃고, 유릭도 조용하게나마 웃었다. 그 때 휴게실 문

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관객들이 모두 쓰는 휴게실인

지라, 별다른 양해 없이도 문이 열렸다. 점잖게 차려입은 소년들이

들어오다가, 유릭과 카밀턴을 보자 얼어붙은 듯 멈추었다. 가토가

앞으로 나서며 그들을 소개했다.

“헨리 카밀턴 각하, 모두 제 친구들이에요. 형, 내 친구야. 인사드려.

이분은 헨리 카밀턴 경이시고, 이쪽은 우리 형 유릭 크로반이야.”

친구들은 굉장히 어색해하며, 유릭과 카밀턴에게 엉거주춤 인사했다.

존경이든 두려움이든, 어린 소년들을 겁먹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서부의 영웅과 파난의 공포, 특무부 전투원이다. 그런 분위기를 대

강 눈치 챈 카밀턴이 일어났다.

“오늘 참 즐거웠네, 가토 크로반 군. 나중에 형과 같이 오면, 그 때는

정말 근사하게 한턱 내지. 크로반 하사, 자네도 잠깐 나 좀 보지.”

애써 말은 아끼고 있지만, 유릭은 카밀턴이 가토의 친구들을 생각해

서 자리를 비켜달라는 말임을 금방 눈치 챘다. 유릭도 가토를 곤란

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가토도 유릭이 형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도 않고, 어차피 모르는 친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받아들이는 건 별개문제다. 유릭은 어린 학생들에게 그 정도의 관용

을 바라는 건 무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차피 학교에서 대부분을

보내는 아이들, 편견이나 차별은 나쁜 것이라 배워 아는 것과 직

접 만난 전혀 다른 세계의 타인에 대해 혐오나 편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들은 배우기는 배웠으되 훈련은 되지

않은 아이들이다.

“나중에 보자, 가토.”

유릭은 휴게실을 나섰다. 먼저 나간 카밀턴이 휴게실 문을 물끄러미

보다가 유릭이 나오자 고개를 돌렸다.

“자네가.......... 왜 가토 군을 그토록 군에서 빼려고 했는지, 이젠 알

겠군.”

역시나- 유릭은 씁쓰레하게 웃었다. 허둥댄 것이 참 바보처럼 생각

되었다.

“......상부에 보고하실 겁니까.”

“아니.”

카밀턴은 고개를 저었다.

“저리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리 아무것도 모르고 살 수 있다면......그

러면, 그것으로 된 거야. 그리고..... 자네가 왜 그렇게 멋모르고 설

치는 어린아이들을 싫어하는 지도 알 것 같아. 쥴리안 녀석...... 자네,

정말 그 녀석이 미웠겠군.”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니, 미워해도 괜찮아......크로반 군. 자네는 아버지를 잃었잖아. 그

럴 권리가 있어.”

“알고 계셨습니까.”

“방금 안 거라네.......자네 말이 맞군. 자네 아버지는 무죄야. 하지만

크로반 군, 동생을 위한다면 아버지의 복권은 포기하게.”

“........그건....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카밀턴은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가질 수는 없어. 하나를 얻는 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고,

하나를 지키겠다면 하나는 희생시켜야 하네. 동생을 지키고 싶다면,

과거의 아버지는 포기하도록 해. 그러나 아무리 그리하다 해도 삶을,

희망을, 미래를 포기하지는 말게, 크로반 군. 포기는 타협이고,

타협은 언제나 최악의 선택인 법이니까.”

“......”

눈앞에, 피투성이가 되어 끌려온 남자-지금은 이안 블로드라 불리는

그 남자를 보았을 때 유릭이 생각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유릭은 아버지를 생각했다. 아버지에게는 죄가 없었고, 그것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은 유릭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누가 죄인

인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죄인의 미래를 위해 침묵하고 거짓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택했다. 아버지가 파난 종신형을 선고받을 때,

그 파난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그리고 아버지가 병에 걸렸을 때,

유릭은 내내 누가 진짜 죄인인지 고발하고 싶은 자신을, 그러나 차

마 그리하지도 못하는 자신을 혐오했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슬퍼

하면서도 어쩌면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그 가혹한 저울질을 그만둘

수 있었으니까. 이제는 마음껏 가토를 사랑하고 보살필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몇 년 뒤 군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리고 토벌전으로 지쳐

갈 때 다시 그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 가토, 그리고 유릭

자신. 그것들이 저울질을 시작하며 유릭을 괴롭혔다. 그래서 유릭은

결국 그를, 이안 블로드를 놓아주었다. 이안에게 죄가 있든 없든,

그가 반군과 친분관계가 있던 말든, 미래에 무언가를 저지를 수

있던 말든, 당시에는 증거가 없는 그를 놓아주었다.

어찌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그대로 파탄 나 버리면 나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과거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지만 과거는 그

자신이었기에, 벗어날 수 없기에, 그렇기에 유릭은 현재도 파탄내

고 싶었다. 곧바로 끌려간 진압군 취조실에서 유릭은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으름장과 협박을 묵묵히 듣고 있으며,

역시나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타협했다.

그렇게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운명을 내동댕이치고 싶었다......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릭이 말했다.

“.....그래서........ 언제나,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

랐습니다. 무능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그러면 사람들이

절 버릴 거라고, 저를 외면할 거라고, 그러면 정말 혼자가 되어 버

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의지하지 않으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의지하겠다는 건가?”

“아뇨.....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 특무부에 들어왔을 때부터 제 동

료, 제 상관들에게 의지해 왔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

니다.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은........저

자신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내동댕이치려는 운명을 쥐어서 돌려준 것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동료들이었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그토록 부인하고 싶어 하던

그의 동료들이었다.

-나와, 바보야. 할 일이 넘쳐난다.

봄비에 젖은 겨울의 땅에서 싹이 트듯, 한 방울 잉크가 겹겹이 쌓인 천으로

스며들어 그 모든 천을 물들이듯, 그 날의 유릭은 혼자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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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유리가 없어진 후 특무부의 가사업무는 마비상태.

밥이 없다! 빨래가 안 되어 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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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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