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편
흉터의 공작#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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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막이 끝나고 무대 인사까지 끝나자 단원들은 모두 드디어 파난에서
의 꿈같은(악몽이 대부분이었지만) 일정이 끝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작 일주일을 머물렀는데, 몇 주는 거푸 있었던 듯한 기분이다.
“아아, 매일 밤 파난의 시곤에서 쇼핑을 하고 싶었는데.”
놀기는커녕, 쓸만한 남자하나 찾지 못한 발레리나 도나는 노골적으로
불평했다. 제일 괜찮은 남자인 헨리 카밀턴 경은 도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신분이다. 다른 발레리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발레단원
중 그 누구도 에닌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에닌의 무사귀환에 안심하
면서 그녀 때문에 벌어졌던 일을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녀들에게는
오히려 에닌의 무사함이 다행이었다. 이제부터 마음껏 욕해도 되니까.
“오늘 분위기 봤지? 그렇게 썰렁한 건 참 오랜만이지 않니.”
발레리나 대기실에서, 여왕백조 도나는 오페라단원들의 대기실이 활
짝 열려있다는 것을 분명 확인한 뒤에 그렇게 큰 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험악한 말을 빤히 듣고 있는 오페라단원들의 대기실은 점점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도나는 더욱 큰 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날이라서 사람들이 참 많기는 했는데.........어쩌니. 저 분위기
를 보아하니, 에닌 마델로 양은 다시 초청되긴 글렀다.”
그 때 대기실의 발레리나들이 슬며시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도나가
턱을 들고 돌아보니, 문 옆에 에닌이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도나가 싸늘하게 웃었다.
“어머나아 걱정 마, 에닌 마델로. 너는 인기가 있든 없든 부자 아버지
가 계시잖니? 그 미모를 추앙하는 기사님들도 널리고 널렸고. 안될성
싶으면, 제일 열성적인 사람 하나 붙잡아 결혼해.”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에닌이 어떤 얼굴이든 말든 상관없이, 비틀린
웃음을 감추며 통쾌해했다. 그 누구도 편들어 주지 않았다. 누구도
동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도나는 발레리나들의 여왕이다. 그녀를
대장으로 삼은 다음, 월급도 오르고 다른 직원들로부터 무시당하
거나 희롱당하지도 않게 되었다는 것을 잘 아는 발레리나들은 누굴
편들어야 하는 지 안다. 그러나 에닌은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눈
안에 눈물이 고이기는 했지만, 애써 웃으며 자리를 떴다.
“도나, 저러다 저애가 자기 아버지에게 일러바치면 어쩌려고.”
“걱정 마. 쟤는, 착한 척 하고 싶어서 안달난 애라고. 일러바치거나
하는 나쁜 일을 해서 나쁜 아이가 되느니, 참고 참아서 착한 아이가
되려 하지. 그래서 나는 절대로 걱정 안 해.”
발레리나들도 모두 그 사실을 알기에 킥킥 웃기만 했다. 그것을 도나
가 얼마나 이용해 왔는지도 잘 알고, 그 덕에 얼마나 많은 혜택을
누렸는지도 잘 안다. 에닌의 성격을 이용해 월급을 올린 것도, 연
습시간을 줄인 것도, 모두 도나였다.
“그나저나, 왜 그렇게 썰렁했을까? 여태까지 그런 적은 한번도 없었
잖아?”
단원중 하나가 그리 묻자, 도나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쟤네 아버지가 안 따라왔잖아.”
단원들이 모두 새떼처럼 까르르 웃어젖혔다.
“저 여우.”
로웨나가 비죽대자, 도나를 싫어하는 여가수들은 동시에 이를 북 갈
아붙였다. 단원들 모두 에닌을 싫어하기는 했지만 극장의 발레리나
들은 오페라 여가수들의 적이다. 서로를 이웃 벌통의 여왕벌 정도로
대우하는 도나와 로웨나도, 결단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하지만....오늘 분위기가 이상했던 건 사실이잖아.”
수잔나가 드디어 금단의 말을 해 버렸다.
로웨나도 차마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 말을, 드디어 수잔나가 해
버린 것이다. 듣던 아이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긴 이상했어.”
“뭔가 썰렁했지.”
“에닌이 달라진 것도 아니었는데.”
“오히려 첫날보다 나았는데.”
“관객들 수준이 갑자기 높아질 리도 없잖아.”
“맞아! 로웨나가 대역했을 때, 가수가 다르니 뭐니 하면서 난리친 사
람은 하나도 없었잖아. 가수 목소리도 구분 못하는 동네 사람들이,
오늘은 대체 왜 그런 거지?”
“게다가 그날 온 사람이 또 오지 않는 한, 달라졌다는 걸 알아챌 사
람은 없을 텐데.”
다들 고개를 흔들고 갸우뚱하다가, 아무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자 한
숨만 푹푹 내 쉬었다. 이대로 파난을 떠난다면, 무언가 아주 중요한
것을 두고 온 것처럼 뒤끝이 좋지 못하다. 그러나 그 원인을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 다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것 밖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어차피 신문에서야 마델로 씨가 돈 푸는 즉시
에닌 마델로는 과연 노래의 천사, 음악의 요정, 평화의 전령이자 여
신이라는 찬사로 미친 듯이 도배될 테지만 관객들의 반응까지 속일 수는 없다.
다들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에닌에게 슬럼프라도 온 것 같다. 그러나
그 상황은 이 파난에서의 공연으로 끝나야 한다. 브란 카스톨에가
서도 이러하다면 낭패다. 에닌의 슬럼프는 에닌 혼자만의 일이 아니
라 극장 전체의 수입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에닌 마델로의 아버지
가 극장을 쥐고 있는 이상, 그녀가 잘하든 못하든 간에 계속 주연이
될 것이다. 주연이 맥이 없다면 관객들은 안 오면 되는 문제지만,
그 주연의 등만 바라보는 다른 단원들과 극장주 트래비스는 정말
낭패가 아닐 수 없다.
단원들 모두 맥없이 앉아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렸다. 제시가 문을 열
자, 대기실 문 앞에는 직원 소년이 장미꽃다발을 안고 서 있었다.
소년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다음 활기차게 말했다.
“로웨나 그린 양이 누구십니까?”
다들 손가락과 눈으로 일제히 로웨나를 가리켰다. 소년이 달려와 로
웨나에게 꽃다발을 안겨 주었다.
“어느 신사분이 그린 양에게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여기, 이건 카드
랍니다.”
그리고 카드도 건네주고, 귀엽게 인사를 꾸벅하고는 대기실을 나갔
다.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로웨나는 눈
빛으로 난자당하는 듯한 심한 압박감을 느끼며 봉투를 열었다.
그날의 여왕을 위해
“네 남자친구다!”
수잔나가 외쳤다. 소녀들이 모두 부러움에 가득 찬 눈으로 외쳤다.
“맞아! 그 사람은 그날 주연이 너였다는 걸 알잖아!”
“좋겠다! 오늘 박스석에 앉아 있던데, 어서 가 봐!”
“검은 제복이니 못 찾을 리도 없지! 어서!”
로웨나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친구들에게 떠밀려 대기실에서 쫓겨
났다. 로웨나는 얼결에 쫓겨나, 멍하니 장미와 카드를 들고 서 있
어야 했다. 카드의 글씨는 아무리 봐도 유릭의 글씨가 아니었다.
유릭은 인쇄라도 한 듯 유려한 명필이었지만, 그 카드의 글자는 로웨
나와 거의 비슷할 정도로 처참한 악필이었다.
“이걸 유릭이 썼다고 하다니.”
유릭에게 미안해진다. 무시무시한 모욕이다. 게다가 유릭과는 그 사
건 이후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소심한 녀석도, 유약한 녀석도 아
니니, 로웨나가 그 사건을 어찌 받아들이든 ‘너의 생각은 너의 자유야.’
라고 할 녀석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금방 다시 만나자니
미안했다. 특히나 에닌의 행동 때문에 더더욱 미안했다. 무엇보다
미안한 것은, 유릭의 친절을 받으면서 무언가를 기대했던 자신이었다.
그날 배 위에서, 그리고 에닌이 납치된 날에, 자기도 모르게
의지했던 자신 때문에 유릭에게 미안했다. 만나러 가면 만날 수도
있었지만, 로웨나는 일부러 찾아가지도 않았고, 다행스럽게도 유릭은
그날 이후로 유릭은 극장 근처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니, 이
카드는 결단코 유릭이 썼을 리 없다.
그러나 카드를 아무리 노려보아도, 대체 누가 이것을 썼는지는 도무
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로웨나는 아는 사람 중에 대체 누가 가장
글자를 못 쓰나 고민하다가 포기하기로 했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카밀턴 경을 비롯하여). 이대로 들어가면 친구들이 또 조잘조잘
대며 훈수 놓을 것이기에, 로웨나는 느긋하게 복도를 거닐었다.
관객들이 대기실 근방을 거닐며 직원들의 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
나 무대에서의 반응이 신통하지 않았기에, 그다지 열성적인 관객은
없었다. 오히려 발레리나를 보러 온 신사들이 더 많아 보였다.
그러던 로웨나는 그 관객들 중 누군가의 뒷모습을 보고 눈이 멎었다.
키는 중간 정도, 그러나 다리는 아주 길고 손가락도 긴 사람이었
다. 남자는 그 긴 손가락으로 검은 고수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로웨나는 달려가며 외쳤다.
“저기!”
남자가 돌아보았다. 그러나 뒷모습은 이안과 꼭 닮았지만, 얼굴은 완
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짙은 피부도 같고 검은 눈도 그대로였지만,
얼굴은 완전히 달랐다.
“죄송합니다.”
남자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감사 인사 하러 온 거야? 저런, 그럴 필요 까지는 없는데. 그날 수고
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이랄까.”
그 목소리는 훌륭한 바리톤, 분명 이안 블로드의 목소리였다. 로웨나
는 눈썹 하나를 치켜 올리며, 은근하게 물었다.
“아저씨이?”
“오오, 뭐가 그러신가. 나야, 나. 이 얼굴 멋지지? 나는 얼굴을 잘 바
꾼다네. 목소리도 바꿀 수 있지만 이번만큼은 아가씨를 위해 그대로
두었지. 그건 그렇고, 오늘 무대의 에닌 마델로는 여전히 형편
없더군!”
“사실, 제가 봐도 그랬어요.”
이안이 히죽 웃었다.
“간만에 아가씨가 내 말에 동의하는 군. 아가씨 의견을 좀 말해보지.
대체 왜 형편없이 들리지?”
“그야, 그냥 노래만 예쁘게 부를 뿐 연기는 조금도 하지 않으니까 그
렇죠! 오페라 아리아 콘서트도 아니고, 그게 뭔지! 뒤에서 듣는 제가
다 졸렸다니깐요!”
“훌륭한 안목이군.”
“네에, 그리고 그 훌륭한 안목으로 아저씨를 알아봤으니 지금 가서
신고할 게요.”
이안이 푸하하 웃어젖혔다. “신고해서 어쩌게? 지금 내 얼굴은 그 때
와 완전히 틀린데, 아가씨는 나라고 박박 우겨도 에닌 마델로 양은
완강히 부인할 걸. 저 사람은 아니라고. 하지만 신고 하고 싶으면 해.
나는 괜찮을 테니까. 아가씨는 브란 카스톨에서 열린 오디션에서
날 보게 될 거야!”
“잘났어, 정말! 그런데 브란 카스톨의 오디션이라는 건 또 뭐에요?”
“신작 준비 중이거든. 그곳에 가자마자 극장 잡고 얼른 오디션을 걸
테니, 기대하고 있으라고! 보고 싶으면 와. 아주 근사한 배역이니까.
안녀엉!”
그리고 이안은 모자를 벗어 인사를 하고는 뒤돌아섰다. 로웨나가 붙
잡으려 했지만, 옷자락을 채 잡기도 전에 이안은 제비처럼 빨리 사
람들 속으로 숨어들었다. 로웨나는 그를 찾으려 했지만, 몇 번이나
둘러보아도 그리 많지도 않은 관객들 속에서 도저히 찾을 수 없었
다. 완전히 도망친 것이다.
로웨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투덜댔다.
“잘 해 보라지, 황제병 환자.”
로웨나는 장미를 들고 돌아가며 생각했다.
일단은 트래비스나 치안군 장교를 찾아서 “그 아저씨가 여기 타나났
지 뭐에요!!” 하고 신고해야 한다. 그러나 이안 자신이 장담한 대로,
그가 잡히지 않고 무사히 이 파난을 빠져나가 카스톨로 가 그 신
작인지 뭔지 하는 것을 발표한다면 기대는 해 주기로 했다. 그의
전작 ‘바티스타’는 분명 굉장한 걸작이었고, 극장에서 애용되는 레
퍼토리였으며, 다른 관객은 물론이요 로웨나도 아주 좋아하는 작품
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날 완성되어 이안의 가방 속으로 들어간 스코
어는 분명 굉장한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떤 무대에서 어떻
게 만들어 질지, 그리고 그 오페라의 주역이 되는 디바와 디보가 누
구일지, 그 무엇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로웨나는 기대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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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후우.
12일날에는 발등에 불붙이러 갔습니다. 어제는 발등에 불을 끄고
있었지요. -_-;; 결국 이틀이나 늦어서...... 죄송합니다!!!1
정말 죄송해요!!!
그래도 다음편은 5일 뒤에 올라갑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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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41장 추기경의 소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