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65화 (165/174)

제164편

추기경의 소환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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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 카스톨의 다른 극장이 그러하듯, 카스틸리아 대극장도 하반기

시즌에 개막될 작품이 한창 기획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트래비스는 유명 작곡가들, 리브레티스트, 출판업자과 매일 같이 이

야기를 나누고 회식을 가졌다. 그 분야 관계자들을 이세계인 취급

하는 카밀턴은 당연히 따라다니지 않았으며, 파난에서 오랜 벗의

치졸함을 재차 확인했던 트래비스는 아주 안심했다. 그러나 정작

작곡가들과 만난 트래비스는 꽤 낙담해야 했다. 작품 준비 중인 대

작곡가들은 카스틸리아 극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살비에 마델로

에 대해 굉장한 반감을 표했기 때문이다.

“아, 물론 살비에 마델로의 딸인 에닌 마델로 양이 훌륭하다는 건 인

정하오. 하지만........이런 말 하기는 참 미안하지만, 마델로 양의 목

소리는 소화할 수 있는 레퍼토리가 너무 한정되어 있어. 게다가 지

금 준비 중인 작품은 에닌 마델로 양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주연배우는 바뀔 수도 있다고, 트래비스 자신도 장담 못하는 말을 하

기도 했지만 작곡가들은 고개를 저었다. 카스틸리아 대극장에서의

살비에 마델로의 월권은 암묵적인 침묵 속에 작곡가들 사이에 널리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차라리 극장이 작더라도, 자신

의 영향력과 발언권이 보장되는 곳을 원했다.

출판업자들도 비슷한 말을 하며, 자신이 지원하는 작곡자들을 설득해

달라는 트래비스의 청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마델로가 돈 많은 건 나도 알아. 그러나 그 사람이 나한테 돈 주는

건 아니잖아....이봐, 트래비스. 자네가 싫다는 게 아니야. 자네가

운영하는 극장이 카스틸리아만 아니라면, 나는 언제라도 브란웰과

오코너를 설득할 거야.”

물론 발이 넓은 트래비스가 말만 하면 당장에 작곡을 해 주는 작곡가

들은 있기는 있다. 그러나 트래비스는 파난의 시곤에서 공연을 하는

영광도 누렸기에 하반기에는 신작을, 그것도 유명작곡가의 신작을,

자발적인 영감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그런 명작을 올려보고 싶었

다. 그러나 기획 단계부터 꼬이기 시작하니, 꽤나 실망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힘 빠져가는 트래비스의 사무실로 로웨나가 찾아온 것은 극장

가수들의 재계약이 이루어지는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보통은 9월을

시작으로 잡기에, 매해 7-8월에 재계약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통례였다. 그러나 잔뜩 힘이 빠진 트래비스는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기에 로웨나가 찾아왔을 때 아주 짜증을 내버리고 말았다.

“무슨 일이지, 로웨나 그린 양?”

아주 무관심하고 귀찮아하기까지 하는 트래비스의 표정에, 로웨나는

굉장히 실망했다.

“저, 7월 말이라서 찾아온 건데요.”

“그래서? 7월 말이 뭐? 7월말에는 따로 할 말이라도 생기는 건가?

응?”

로웨나는 간단하게 체념했다. 예의바르고 상냥한 트래비스가 이렇게

역정을 낸다면, 무슨 말을 하든 안된다.

“아니에요. 다음에 찾아올게요.”

“아, 그렇게 하도록 해. 지금은 내가 워낙에 바빠서.... 사적인 부탁

같은 건 들어줄 수 없다고.”

“네.”

로웨나는 눈살을 잔뜩 찌푸린 채로 사무실을 나갔다. 트래비스는 다

시 작곡가 이름들을 떠 올리느라, 로웨나의 표정에 신경 쓰지도 기

억하지도 못했다.

사무실을 나온 로웨나는 아주 실망했다. 지난 파난에서의 초청공연이

후 극장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져간다는 건 눈치 채고 있었지만, 결국

재계약 실패로 이어지게 되자 힘이 쭉 빠졌다. 수잔나와 리리아는

벌써 재계약을 했고, 제시는 극장을 옮길 예정이었다. 이제 로웨

나 순서가 되어서 찾아간 것인데, 트레비스가 그렇게 무시무시하게

앉아 있으니 도저히 재계약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뭔가 잘못했나,

하고 생각해봤지만 그 동안 열심히 일해 왔을 뿐 달리 눈치 받을

만한 일은 없었다.

“어쩔 수 없지 뭐.”

한숨을 푹푹 내 쉬며 빈민가의 낡은 아파트로 돌아오니, 우편함에 소

포 하나와 편지 하나가 꽂혀 있었다.

로웨나는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며 소포부터 확인했다. 끈을 풀고 노

란 포장지를 벗기니, 낡은 책이 한권 나왔다. 로웨나는 책 표지에

붙은 노란 영수증을 떼고 책을 펼쳐보았다. ‘쿠르드차의 노래’, 초판본.

흔한 책은 아니지만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비싼 책은 아니었다.

책 표지를 열어보니, 그것을 보낸 사람의 서명과 간략한 메시지가

적힌 메모지가 한 장 들어 있었다. 로웨나는 빙그레 웃으며 책을

덮었다. 같이 온 편지의 주소를 확인하며 열쇠를 찾는데, 문 안쪽

에서 음식 냄새와 엉망진창인 노랫소리가 들렸다. 미하일이 참으

로 오랜만에 (유릭이 떠난 후로 단 한번도 일찍 들어온 적이 없었다)

일찍 돌아온 것이다.

로웨나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녁 준비에 한창인 미하일

은, 이것저것 엉터리 노래를 부르며 닭고기 스튜를 끓이고, 오븐으

로는 감자요리를 굽다가 로웨나가 들어오자 웃으며 반겼다.

“어서와, 로이!”

“너, 미하일 맞니?”

로웨나는 자기가 직접 미하일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으하하, 나라고 맨날 늦게 들어오는 건 아니라고! 어서 옷 갈아입고

나와! 근사한 저녁을 차려주지.”

“간만에 기특한 짓을 하는 구나.”

로웨나는 웃으며 편지를 뜯었다. 그렇게 막 내용확인을 하고 있는데,

미하일이 국자를 던지며 휘잉 날아왔다.

“누구한테 온 거야! 혹시, 그 유릭 녀석한테 온 건 아니지?”

“설마. 이건 오디션 합격통지서란다.”

그러며 로웨나는 카스조 오페라단의 오디션 합격통지서를 펼쳐보였

다. 미하일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 내용을 확인했다.

“정말이네? 야, 너! 이번에 극장 옮기게?”

“아무래도 재계약 될 것 같지 않아서 말이야. 그리고......... 뭐, 나쁠

건 없을 거라고 봐. 지난번에 받은 특별 출연료 덕에, 당분간 어머니

병원비 걱정은 안 해도 되잖아. 어차피 거기 계속 있어봐야, 그다

지 달라질 것도 없고......새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파난에서 돌아오자, 트래비스는 로웨나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

청난 돈을 주었다. 많아야 100카스티야 정도나 받을 거라 생각했

는데, 트래비스는 자그마치 350카스티야. 즉, 에닌의 출연료보다 많

이 주었던 것이다.

-로웨나 그린 양, 그린 양은,카스틸리아와 나를 구원했어! 천 카스티

야도 아깝지 않네.

감사하면서도, 다음 계약은 좀 더 많은 연봉으로 하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러나 트래비스가 별로 마음에 없는 듯하니,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게다가 요즘은 정말 극장을 옮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다른 누구

도 아닌 에닌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친구사이였고, 그 아이가 어떤 성격이고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 지 훤히 알아 왔었기에 실망할 일도 화날 일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화가 날 일을, 로웨나는 미리 예상하고 짐작하고

준비하고 있었기에 화를 내지 않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번 파

난에서의 일은, 그저 철없는 에닌의 실수라고 봐 줄 수만은 없었다.

그리고 에닌 뿐만 아니라, 에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고 지내는 란

슬로 백작, 알렉산더와도 멀어지고 싶었다.

그 남자, 로웨나나 에닌, 그리고 그들과 관련된 마그레노의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지금 아주 잔인한 진실을 숨기고 있다. 멀어

져야 한다. 그 진실이 눈을 뜨고 이를 드러내고 날개를 필 때, 만약

그 남자와 가까이 있다면 그 폭풍에 휩쓸려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

면, 로웨나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이, 로웨나! 와인이라도 한 병 사올까?”

“그럴 돈 있으면 집세나 내. 아참, 너.......이번 달 집세는 어떻게 되는

거야? 할머니가 내일 받으러 온다고 하던데.....”

“.....”

순간 로웨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랜만에 미하일이 일찍 들어왔

다고 좋아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하게 되자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었다.

“없지?”

미하일이 아무 말도 없자, 로웨나는 이를 뿌득 물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벗어두었던 모자를 도로 집어 들고, 가방도 들었다.

미하일이 당황했다.

“어디 가는 거야, 너!”

“오늘은 외출해야 하니까, 저녁은 너 혼자서 먹어!”

“그래도 야, 애써 준비했는데....”

“나를 위해서 저녁을 준비한 거니, 아니면 이번에도 집세 못 내니까

봐 달라고 저녁 준비한 거니? 미안하지만, 집세 때문이라면 나는

하나도 고맙지 않아!”

“그래도 준비한 사람 정성을 생각해야 할 거 아냐! 월세 안냈다고 이

렇게 치사하게 굴기냐?”

“월세 때문이 아니야! 미하일 카프첸코, 너는 언제나 나한테 원하는

게 있을 때만 이런 식으로 착한 척 굴잖아! 그게 싫은 거야, 이 바

보야!”

“대체 왜 그렇게 삐딱하게 구는 거야! 나는 그냥 친절하게 굴면 안

되는 거냐?”

“너, 그저께 어디 갔었지?”

“그날은 모임이 있어서 늦게 들어온 거야! 중요한 일이었다고!!”

로웨나는 가방을 휘둘러 미하일의 턱을 후려갈겼다.

“멍청아, 그날은 내 생일이었어! 대문 앞에 돌아오는 즉시 오늘 내

생일파티가 있으니까 리자베따 네 가게로 오라는 말을 붙여 놓고

갔고, 그걸 내 손으로 뗐다고!”

미하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로웨나는 이마에 핏대가 설 정도로 이

를 악물었다가 떼며 외쳤다.

“언제나 이런 식이라니까! 언제나! 대체 언제 나에게 신경 써 줄거니,

대체 언제 나를 존중해 줄 거야! 대체 언제!”

로웨나는 현관을 향했다. 미하일이 붙잡았지만 거세게 손을 뿌리쳤

다.

“놔!”

“어디 가는 거야, 너!”

“내 생일을 기억해 주고, 내가 무얼 가지고 싶어 했는지 기억해 준

사람에게 감사인사 하러 가는 거야! 돌아올 때까지, 너는 지금 차

리는 거 너 혼자 다아아아 먹고 다아아아 치워놔! 안 치워놓으면, 정

말 쫓아내 버릴 거야!”

그리고 로웨나는 현관문을 쾅 닫고 나갔다.

망연히 그 문만 바라보던 미하일은, 화가 치밀어 올라 식탁 위에 얹

힌 책을 거칠게 집어 들고 표지를 펼쳤다. 그 안에 끼워져 있던 노란

메모지가 나비 날개처럼 팔랑 팔랑 떨어졌다.

미하일은 그것을 낚아채 내용을 읽었다.

열여덟 번째 생일 축하합니다, 로웨나 그린.

수풀처럼 푸르고, 아침노을처럼 붉은 당신에게 축복이 있기를. 창포

처럼 푸르른 시구로 채워진 시집을 보냅니다. 불타는 황금처럼, 달

궈진 쇳덩어리처럼 뜨거운 날, 이 언어가 은빛 시냇물의 차가운 물

줄기가 되어 당신의 목을 축여줄 수 있기를.

이것이 당신의 생일 이틀 뒤에 도착한다면, 그날 저녁 저를 찾아와

주세요.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을 경애하는 레오폴트 마렐 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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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드디어 등장하는 간식 레오폴트 군~

p.s 오타 이제야 수정;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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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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