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66화 (166/174)

제165편

추기경의 소환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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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박차고 나온 로웨나는, 큰길가로 나와 열심히 마차를 잡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중간한 시각이라 그런지, 마차는 잘 다니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젠장, 좀 태워주면 안 되냐! 제길, 좀 다녀라,

다녀!! 하고 고함치고 짜증내고, 그렇게 한참이 지나는데 마차 한

대가 로웨나 앞에 섰다. 그러나 제도에서 발급하는 등록번호가 없는

개인 마차였다. 아무데서나 서네, 로웨나는 투덜대며 물러났다. 그러

자, 마부가 마부석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마차를 잡는 중인가, 로웨나 그린 양?”

로웨나는 놀란 얼굴로 그 마부를 바라보았다. 검은 얼굴의 오터가,

로웨나를 길바닥에 엎어진 아이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오터 씨? 여긴 웬 일이세요?”

“고맙군. 이름을 잊어주지 않아서. 지나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오터는 마차를 가리켜 보였다.

“주인님께서, 네가 어딜 가는지 모르겠지만 보기 참 안쓰러우니 목적

지까지 태워 주라고 하시는 군.”

로웨나는 마차를 가리켰다.

“백작님이...요?”

“그럼 다른 사람이 내 주인인가. 당연하다. 타라. 그분께서는 지금 블

랑쉐 페인 양과 함께 계시다.”

“블랑쉐....페인 양도요?”

“그래.”

가장 만나기 싫은 사람 둘이 동시에 나타났다. 로웨나는 오늘 일진이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재계약은 안 되고, 미하일과는

으르렁대고 싸우고, 이제는 알렉산더와 블랑쉐가 세트로 나타났다.

로웨나가 탄다 만다 아무 말도 없자, 오터가 마부석에서 내려와

마차 문을 열었다.

“실랑이는 그만두고, 어서 마차에나 타지.”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차 문으로 들여다보니, 초대라도 받

은 듯 평소보다 훨씬 점잖게 차려입은 알렉산더가 앉아 있었다.

“만나서 반갑군, 로웨나 그린 양. 어디로 가는 거지?”

“윌리엄 랜든 경의 저택이랍니다.”

“잘 되었군. 나도 그곳으로 가는 길인데.”

로웨나는 슬슬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누구 만나러 가는 건가요?”

“윌리엄 랜든 경. 그의 집에서의 만찬회에 초대되었지- 아마도, 그린

양의 아버지 친구들도 참 많이 올 거야.”

마지막 말이 로웨나를 침묵시켰다. 아버지- 여전히 그와 연관되는

건 정말 싫다.

로웨나가 입을 꾹 다문 채 아무 말도 없자, 알렉산더는 웃으며 마차

문을 가리켰다.

“어서 타지. 그리고 로웨나 그린 양, 크게 걱정할 것은 없어. 랜든 부

인과 나에 대한 치졸한 소문은 더 이상 없거든. 지금의 나는 연인인

아름다운 클로디유 데지레 양을 불의의 사고로 잃은 가엾은 남

자니까..... 위로만 잔뜩 받고 있지.”

“다행이네요, 참으로.”

“홀아비 취급받는 건 참 억울하지만 말이야. 어서 타.”

로웨나는 알렉산더의 마차에 탔다. 알렉산더가 등진 마차 구석에는

별로 만나고 싶지도 않았던 블랑쉐 페인이 새파란 눈동자를 빛내며

앉아 있었다. 살아있는 인형을 보는 듯, 정말 기분 나쁜 소녀였다.

로웨나가 인사도 없이 고개를 돌리자, 블랑쉐는 뭐가 그리 즐거운

지 까르르 웃었다. 로웨나가 쏘아보자, 소녀는 너무나 무섭다는 듯

들어오는 알렉산더의 팔에 매달렸다.

“눈싸움은 그만. 블랑쉐, 너도 장난치지 말거라.”

“네, 백작님.”

말은 그렇게 해도 블랑쉐는 키득거리며 로웨나를 보다가, 눈이 마주

치면 백작의 옷으로 파고들었다. 로웨나는 그 블랑쉐에게 신경 쓰기

싫어서,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것을 물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로 랜든 경의 저택에서 만찬회가 열리는 건가

요?”

“그냥 수상파 단합 대회 같은 것이지. 그러는 그린 양은?”

“초대받았어요. 레오폴트에게. 아시죠?”

“랜든 가의, 종이 인형처럼 병약한 외아들 말이군. 만난 적은 한번도

없지만, 언제나 내년의 생일을 걱정하는 소년이란 이야기는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죠.”

“병이라도 있는 건가?”

로웨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그 병명은 아무도 몰라요. 늘 가슴이 답답하다고 하죠.

악마가 심장을 움켜쥐고 위협하는 것 같대요-레오폴트의 말이죠.

자주 기침을 하고, 숨이 차오르기도 하고- 고열에 시달리고.”

“저런, 참 힘들겠군. 그런데...........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병을 앓

는 사람이 하나 있어. 증상은 정말 비슷하군.”

“어머나, 그 사람은 괜찮나요?”

“심하면 며칠 병원에 입원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는 그다지 지장

이 없더군. 게다가 그는 자신의 병이 언제 발작을 일으키는 지 잘

알고 있기에, 늘 비상약을 준비해 다니지. 평소에는 그 약만으로도

충분한 듯 하더군.”

“레오만큼 심하지는 않나보군요. 약 몇 알로도 충분하다니.”

“아니, 레오폴트 군의 치료법이 틀린 걸 수도 있어. 내가 아는 그 사

람은, 주변에 그 병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들로 가득하거든. 그가

처음 증상을 보였을 때, 그것이 무엇 때문인 지 단번에 알아내

적절한 치료법을 찾아 준 것이지. 완치하는 방법도 알고 있지만- 그

건, 그 사람의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 일이기에 보류하고 있지......

...맙소사, 로웨나.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참 놀랍군.”

로웨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백작의 이야기를 듣

고 있었다.

“저기, 백작님. 아자렛 랜든 부인에게도 그 이야기를 해 주시겠어요?”

“내가 왜?”

으악- 로웨나는 이를 악물었다. 잠시나마 이 남자가 악마라는 사실

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서로 서로 도우면 좋잖아요.”

“그린 양이 그리 말하니 참 놀랍군. 물론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아. 하

지만, 그 사람의 병이 진짜 무엇인지 말하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

말하고, 그 치료법이 무엇인지 말한다면, 아자렛은 절대 그 말을 믿

지 않을 거야. 남편인 윌리엄 랜든 역시 마찬가지. 아마도, 나는 다

시는 그 집을 찾지 못하게 될 테지.”

아자렛- 로웨나는 그 호칭이 굉장히 신경 쓰였지만, 섣불리 지적하

지는 않았다. 그에게 부탁해야 하는 지금 그의 비위를 상하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백작의 비위맞추기라니- 로웨나는 자괴감

비슷한 기분마저 들었다.

“아주머니에게는, 레오폴트와 랜든 경이 삶의 전부에요. 많은 것을 잃

어왔던 그분께 남은 건 가족 뿐이에요.”

“그러니, 내게 보답 없는 자비를 베풀라는 건가. 그녀를 동정하여?”

“아자렛 아주머니는, 당신이 레오폴트를 치료할 길을 열어준다면 몸

이라도 바칠 걸요.”

결국 빈정거리는 로웨나의 말에, 알렉산더가 웃음을 터뜨렸고 블랑쉐

역시 킥킥 웃었다.

“로웨나 그린 양, 나는 분명 비열한 남자지만, 그렇게까지 저열하지는

않아. 남편이 있는 여자든 없는 여자든, 나를 사랑하는 여자든 내가

사랑하는 여자든, 나는 내 욕망을 타협시키지 않아.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는 것 없이 가져가.”

“힘으로 빼앗는다는 말이라면, 그게 더 비열하다고 말하고 싶네요.”

“나에 대해 굉장한 오해를 하고 있군. 그것은 명예와 자존심을 주고

원하는 것을 가지는 것. 그리하면, 결국 상대로부터 경멸 받을 거야.

그린 양, 내게 있어 분노와 증오는 달지만 경멸은 쓰디쓴 거야. 나

는 그건 아주 싫어.”

“역시나 악당이시군요. 훨씬 낫긴 하군요. 그리 되면, 뭐가 어찌되던

당사자 책임이지 당신 잘못은 아니니까.”

알렉산더는 웃었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블랑쉐가 하얀 말티즈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며 창밖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저곳. 채 눈뜨지 못한 악마의 어린 아들이 잠들어 있네요.”

로웨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블랑쉐를 쏘아보았

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도무지 블랑쉐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다.

“그에겐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느냐, 블랑쉐,”

“우리의 왕자님과 같은 운명. 그러나 그 둘은 아주 같지만 완전히 다

르군요. 같은 운명, 같은 성좌, 똑같은 홍염이 그들을 보필하지만,

그들은 달라요.”

“뭐가 다른데?”

알렉산더가 웃으며 물었다.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면, 같은 운명이라면 어찌하여 그들이 가는 방

향이 다른 걸까- 말해 보거라, 블랑쉐.”

“운명은 성난 말이 끄는 수레바퀴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 의지는 땅의 살에서 갓 떼어낸 철광석 같은 것.

그것을 모루에 얹고 망치로 두드려 검을 벼리는 것은 인간의 힘.

누군가의 검은 예리하고, 누군가의 검은 단단하며, 누군가의 검은

무디고 녹슬지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임금님, 악마를 해방시켜요. 왕자가 그의 족쇄를 풀수 있도록, 그가

타락한 제국의 어리석은 황제의 목을 베고, 간악한 자들이 쇠못을

두드려 봉인한 성궤의 함을 열도록. 그리고 새로운 새벽을 열도록......!

임금님, 악마를 해방시켜요. 마왕이 있어야 용사가 탄생하는 법.

타락한 공작을 이긴 왕자는 왕이 될 거랍니다.”

알렉산더의 손이 블랑쉐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로웨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소녀가 줄줄이 쏟아내는 말은, 결단코

저 나이 또래의 소녀가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아니었다. 그리

고 그런 소녀를 바라보는 알렉산더 역시, 작고 예쁜 부하를 바라보

는 듯한 눈길이었다.

당신들은 뭐지-

로웨나는 다시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알아서도, 물어서도 안 될 듯 했

다. 그것은 살해당한 비밀이 봉인된 관같은 것, 아무리 궁금하다

하더라도 열어선 안 된다. 그 비밀은 많은 원한을 품고 있고, 그렇기

에 관이 열리는 순간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되어 귀환할 것이다.

그러나, 굳이 로웨나가 아니더라도, 그 비밀을 부활시킬 자는 어디에

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비밀이 부활하면, 로웨나 역시 운명에

휩쓸릴 것이다.

-운명은 성난 말이 끄는 수레바퀴 같은 것. 그러나 그것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

블랑쉐가 장미 가시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그 말이, 머리에 얼룩처

럼 남아 있었다. 잊으려했지만 잊혀지지 않았다. 잠시 뒤 마차가

멈추었다. 밖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소리와 함께, 오터가 “알렉산더

란슬로 백작이오!”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다 왔군, 자 이제 내리지.”

“왠지- 내리고 싶지 않아졌어요.”

“어째서?”

“무언가......가 일어날 것 같아서. 그리고 그 무언가는 성난 산불처럼,

거침없는 폭풍처럼 제가 알고 제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것들을 휩쓸어

가 버릴 것 같군요.”

“로웨나 그린, 그런 건- 그린 양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일어나지 않는

게 아니야. 그대의 소망과는 상관없이 일어나, 역시나 상관없이 그

대를 휩쓸어갈 테지. 하지만 의지를 잃지 않는 자의 배는, 그 속에서

도 등대를 찾아........그린 양, 그래도 나는 그린 양이 그린 양의 등

대를 찾기를 바래.”

“고맙군요.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물론. 그린 양은 언제나 나를 재밌게 해 주거든.......어쨌건, 어서 내

리자고.”

마차 문이 열리며 랜든 경의 저택이 나타났다. 흰 석회를 바르고 녹

색 지붕을 얹은 소박한 저택이었다.

그러나 정원의 작은 인공 연못과 그 위를 가로지르는 소박한 무지개

다리, 그 연못 주변에 무성하게 무리지은 창포와, 그 연못의 수면에

떠도는 둥근 연꽃의 잎들은, 화폭에서 쏟아진 듯 아름다웠다. 로

웨나는 마차에서 내려 현관이 아닌 그 정원의 다리로 향했다.

“어디로 가는 거지?”

“뒷문으로 들어가게요. 백작님은 만찬에 공식 초대된 분이지만, 저는

이집 아들 친구일 뿐이라고요. 돌아갈 때는 제가 알아서 갈 테니,

기다리지 마세요.”

로웨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뜰로 달려갔다. 돌아보고 싶지도 않

았다. 지금,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아주 사악한 것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허연 이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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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너의 뒤에 있는 건 질투마왕........ 조심해, 로이. -_-

자아, 다음편은 5일 뒤에!

오타 수정했습니다.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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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42장 피의 천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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