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67화 (167/174)

제166편

피의 천사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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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마당으로 들어온 로웨나는 레오폴트가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하인

하녀들과 마주치기는 했지만 고용인들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도련님

레오폴트의 친구인 로웨나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낯선 고양이가 들어온 듯 로웨나가 어디로

가든 내버려 두었다.

병약한 레오폴트가 머무는 방 주변은 한낮의 늪처럼 고요했다. 자주

쓰러지는 레오폴트가 머무는 곳이기에 바닥에는 잔디처럼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고, 모서리 날카로운 가구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라도 일어나 무슨 책이든 원하는 대로 볼 수 있는 서재가 있었다.

그의 취향에 맞는 그림을 걸어둔 갤러리도 있었다. 작은 응접

실도 있고, 작은 휴게실도 있었다. 어린 왕자의 연약하고 신경질적

인 왕국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게 독립되어 있는 곳이 바로 레오폴

트의 별채였다.

로웨나가 도착했을 때는, 갤러리도, 응접실도, 휴게실도, 서재도 모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로웨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응접실로

들어갔다. 응접실 문 맞은편에는 가족화가 걸려 있었다. 그림 안에

는 하늘색 드레스를 입은 아름다운 아자렛과, 어마어마하게 미화된

윌리엄 랜든 경. 그리고 아자렛의 품안에 안긴 레오폴트가 그려

져 있었다. 작고 동그란 얼굴에 새카만 눈동자를 가진 귀여운 소년

이었다. 다섯 여섯 살쯤 되었을까- 그림안의 소년은 아주 건강해

보였지만, 이 때의 레오폴트는 사실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언제 죽

을지 모르는 아들과 그 아들을 돌보는 가엾은 아자렛을 위해 랜든 경

이 그리게 한 것이지만, 실제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박제된 거짓이죠. 천박한 색깔을 입힌, 싸구려 설탕으로 만든 맛없는

사탕.”

로웨나는 고개를 돌려, 벽난로 쪽을 보았다. 그곳에는 여름임에도 피

워진 벽난로, 그리고 흰 얼굴의 소년이 긴 의자에 나른하게 누워

있었다. 목은 부러질 듯 가늘었고, 드러난 어깨는 가늘고 말랐다.

의자의 팔걸이 아래로 늘어진 손목 역시 가늘기는 마찬가지. 그림을

바라보는 얼굴은 종이처럼 하얗고, 머리카락은 진한 갈색이었다.

그리고 눈은- 그림안의 소년이 그러하듯 검은 구슬처럼 새카맸다.

“저 안에 진실이 없어요. 아이는 갓 딴 복숭아처럼 건강하고, 어머니

는 근심 없이 행복하고, 아버지는 빛의 천사보다 더욱 미남이니.”

새하얗고 새카만 소년-레오폴트는 로웨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

었다.

“그런 얼굴로 보지 마세요. 동의하시면서. 이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

지만, 아버지의 얼굴이 추남이라는 건 너무도 잘 안답니다. 그러나

저는 아버지의 흉한 얼굴을 사랑해요. 나를 사랑해주는 이는 천

사보다 고귀하고, 나를 지켜주는 이는 성자보다 자애로운 분. 붓으

로 덧댄 저 거짓보다 가치 있는 것은 제가 아는 그 진실.”

“싫으면 떼버리지 뭐 하러 달아놨어. 내가 해 줘?”

“누나의 결론은 언제나 명쾌하군요. 떼어 버릴 거에요. 다른 화가를

불러, 진짜 제 모습을 그리게 할 거에요.”

레오폴트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마른 몸집의 소년은 일어서자 더욱

가냘파 보였다.

“와 줘서 기뻐요. 그리고 생일 축하해요. 생일 파티에 갈 수 없는 저

는, 이렇게 주인공을 저의 집으로 초대할 수밖에 없죠. 사죄할게요.”

“음, 어차피 떠들썩한 사람들이 떠들썩하고 정신없이 벌이는 파티였

다고. 진주같은 귀공자님이 왔으면, 아마도 당장에 기절해서 실려

나갔을 걸.”

극장의 친구들과 꼬마 발레리나 소녀들이 근처 카페에서 생일파티를

열어주었고, 아르바이트 하는 클럽에서도 언니들이 열어주었다. 리

자베따가 그 건장한 팔을 휘둘러 직접 케이크를 구워 주고(맛은 정

말 처절했지만), 죠세핀이 군가 비슷한 축가를 부른, 머리가 얼얼하

도록 시끄러운 파티였다.

“어여쁜 온실 안에서 자라는, 살리지도 죽이지도 못하고 약 가루만

뿌려대야 하는 처치곤란의 난초인 저는 부럽군요.”

“야생 잡초들이 들으면 무지 화낸다.”

“누구나 가진 것을 증오하고 가진 자를 질투하죠.”

“애늙은이.”

“다음해의 생일을 걱정하는 것이 노인이라면, 저는 태어날 때부터 노

인이랍니다.”

레오폴트라는 녀석은 이렇게 칙칙한 염세적인 말을 입에 달고 다니기

에 로웨나는 그런 말하면 못써, 하고 말하지도 말할 생각도 없었다.

삶을 부정하는 것이 레오폴트가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어제, 할머니가 보낸 사람이 저택에 왔습니다. 증조할아버지, 그러니

까 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덕에 두 번이나 랭카스크 공작이 되신

그분께서 위독하시다는 군요. 지난주에만, 벌써 두 번이나 혼수상태

에 빠지셨다는 군요.”

“화해하고 싶다는 건가.”

“아마도요. 조만간 저희 일가가 랭카스크 가에 들러 증조할아버지와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군요. 얼마나 잘 될지는 모르지만, 아

버지께서는 허락 하셨답니다. 저도 같이 가는 겁니다.....곧 뵙게 되

겠지요. 아버지를 가문에서 내치신, 고고하고 위대한 랭카스크

공작님을........”

그렇게 말하던 레오폴트의 눈이 멎었다. 무엇을 발견했는지, 눈살을

미묘하게 찌푸렸다. 웃는 건지 언짢아하는 것인지 모를, 복잡한 얼

굴이었다. 뭐니? 로웨나도 같은 곳을 돌아보다가, 눈살을 콱 찌푸렸다.

문 가, 레오폴트를 위해 흐릿하게 밝혀진 응접실의 조명이 스며드는

그곳에 작은 소녀가 서 있었다. 블랑쉐였다. 레오폴트와 만나 보라고

알렉산더가 그랬는지 아자렛이 허락했는지 랜든이 무시했는 지,

알 도리는 없지만, 블랑쉐는 눈을 반짝 반짝 빛내며 레오폴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구지, 너는?”

레오폴트가 묻자, 블랑쉐는 푸른 원피스 자락을 양 옆으로 들어올리

며 무릎을 살짝 굽혔다.

“공작님께 인사드리러 왔어요. 제 이름은 블랑쉐 페인-”

“그리고 알렉산더 백작의 양녀.”

로웨나가 블랑쉐가 뭐라 헛소리하기 전에 끼어들었다.

“만나 뵙게 되어 기뻐요. 하얗고 까만, 아름다운 공작님.”

블랑쉐는 그렇게 말하곤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작은 새가 날개를

펼치듯, 그 어여쁜 은빛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가볍게 날아 들어왔다.

그리고 소녀는 그 하얀 손을 레오폴트에게 내밀었다.

“손을 주세요, 공작님. 키스해 드릴게요.”

레오폴트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자, 소녀는 숭배하는 신에게 경의를

표하듯 허리를 숙이며 그 손을 잡아 키스했다.

“블랑쉐 페인 양. 나는 공작이 아니야. 될 수도 없고, 될 생각도 없

지.”

“임금님이 계시고, 왕자님이 계시지요. 그러니 당신은 공작님이랍니

다. 우리들의 공작님.”

그리고 블랑쉐는 손을 놓았다.

“나라 없는 임금님은 방황하고, 왕관을 받지 못한 왕자님은 노예이며,

공작님이신 당신은 온실에 유폐되어 있군요. 당신의 어깨에는 장미

덩굴의 낙인이, 당신의 가슴에는 도꼬마리의 낙인이, 당신의 다

리에는 물결치는 엉겅퀴의 꽃밭이.”

레오폴트가 웃으며 물었다.

“그러는 페인 양, 당신은 뭐지?”

“저는 하얀 광대랍니다. 늙은 임금님의 사랑을 받고, 젊고 아름다운

왕자님을 동경하고, 악의에 가득 찬 공작님을 조롱하는 광대.”

레오폴트와 블랑쉐를 지켜보는 로웨나는 점점 기분이 나빠지고 있었

다.

블랑쉐가 들어오는 순간에, 모든 것이- 무대가 변한 듯한, 속한 세계

가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방이 어두워졌다. 이상한 것들이

몰려와 관람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되도록이면 이 기집애야,

백작한테 가든 그냥 꺼지든 하라고!! 하고 외친 다음 엉덩이를 두

드려 주고 싶었다.

그러나 레오폴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 했다. 블랑쉐를 바라보

며, 오로지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를 빛낼 뿐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설탕인형, 꿀로 빚은 광대로구나.”

레오폴트가 그리 말하자, 블랑쉐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한껏

정중하게 말했다.

“저는 무척이나 달콤하지만, 이 안에 가시가 들어 있답니다. 설탕이

다 녹으면, 그 안의 가시가 당신의 혀를 찌를 거랍니다. 하지만 이

설탕 한 숟갈은 당신을 꿈의 세계로 데려다 드릴거에요. 멋진 꿈의 세계

로. 가시 따위, 찔리면 어때요. 그리도 황홀했는데, 그리도 즐거웠는데,

그런 고통쯤 참아야지요. 그건 대가랍니다.”

“레오, 그만둬. 저 꼬맹이는 보내버려.”

로웨나가 속삭였다.

“왜죠?”

“더 묻지 마. 그냥 기분 나빠서 그러는 거니까.”

그 모습을 보는 블랑쉐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둑고양이의 여왕님, 이웃나라인 뒷골목을 지배하는 당신은 충고는

할 수 있어도 선택을, 운명을 바꿀 수는 없지요. 모든 것은 공작님이

하실 바-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천천히 생각하세요.

우리는 기다리는 데 너무도 익숙해져 있으니.”

“나가지 마.”

“레오.”

“괜찮아요, 걱정하지 말아요, 누나. 이곳은 나의 왕국, 어머니가 만들

어주시고 아버지가 지켜주시는 유리의 온실. 악마의 전령을 초대한다

할지라도, 제 소관. 누나가 손님이듯, 저 소녀 블랑쉐 페인도 제

손님입니다.”

블랑쉐는 웃으며 다시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레오폴트가 물었다.

“블랑쉐 페인, 네가 말하는 임금님이 누구인지 대강 알겠는데.......왕

자는 대체 누구지?”

“누구보다 위대하고, 누구보다 강한 분. 누구보다 상냥하지만, 누구보

다 사악하신 분. 그리고 공작님, 당신은 그분과 만나게 될 거에요.

그건 운명, 숙명- 강한 빛과 강한 어둠을 가진 당신과 그 분은 반드

시 만날 수밖에 없어요.”

“보고 싶군.”

“보여 드리지요....자, 고양이의 여왕님. 손을 주세요. 당신의 피가 필

요해요. 왕자님을 원하는 당신의 피가.”

“무슨 말이야, 너!”

블랑쉐는 로웨나의 손을 잡았다. 로웨나는 급히 잡아 뽑으려 했지만,

대체 언제 찔렸는지- 마치 장미가시에 찔린 듯 손끝에서 피가 맺

혔다. 핏방울이 구슬처럼 둥글게 뭉쳤다가 똑, 하고 떨어졌다. 레오

폴트의 눈이 그 핏방울을 향했다.

그 핏방울이 바닥에 얼룩지자, 마치 잉크병을 엎지른 듯 검은 얼룩이

번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핏방울을 중심으로 엄청나게 넓어졌다.

하늘이 펼쳐지듯, 바다가 펼쳐지듯, 시커먼 그림자가 사방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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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로웨나, 너도 차암~ 마차에서 내려서 일주일 만에 뒷마당

에 들어가다니. (....)

레오폴트의 정체는....... 까만 앙꼬가 든 하얀 찹쌀떡. 간식으로는 최적.

자아, 백작님. 드셔요~

p.s 오타 수정했습니다.............정말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어요;;

p.s2 고쳤습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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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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