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편
피의 천사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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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나는 별들이 휘몰아치듯 쏟아졌다. 검게 물결치는 바다가 무서운
여왕의 망토처럼 펼쳐졌다. 그 끝을 희게 가르는 무언가의 뾰족한
끄트머리가 보였다.
잠시 뒤, 로웨나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다. 그 끄트머리는 분명
여객선의 뱃머리였고, 그 앞에서 누군가가 서서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여객선의 난간에 기대어,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유릭이었다.
분명 유릭이었다. 그가, 검은 제복의 그가 어느 낯선 여객선의 뱃머
리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른하게 늘어져 있던
그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더니, 난간에서 등을 떼고 허공을 응
시했다.
“그가 왕자인가?”
레오폴트가 물었다. 로웨나가 그 목소리에 놀랐다. 너무도 뚜렷하게.
눈앞에는 유릭이 있는데, 들리는 것은 레오폴트의 목소리. 그녀로
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로웨나는
눈앞을 덮치는 누군가의 큰 손을 보았다. 흰 장갑을 낀 손이, 로웨
나의 얼굴을 향해 다가와 눈을 가렸다.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지
며 바뀌었다. 어둠이 휩쓸리듯 사라지고, 가득했던 파도소리와 물살
헤치는 소리도 사라졌다.
다시 서 있는 그곳은, 이제 레오폴트의 하얀 응접실 안이었다. 푸릇
한 램프불로 어둠을 지운, 그런 하얀 응접실 안. 로웨나는 당혹스런
꿈에서 깬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그녀의 눈길이 닿는 그곳에는,
하얀 장갑을 낀 손에 있었다. 로웨나가 정신을 차리자 그 손이
내려갔다. 시야가 걷히자, 로웨나는 그제야 방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레오폴트가 멍하니 서서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도,
로웨나에게 그러했듯 흰 장갑을 낀 손이 얹혀져 있었다. 늘 하얗던
레오폴트의 얼굴은 지금은 새벽의 눈밭처럼, 차라리 푸릇해 보일
정도로 창백했다.
“오늘 보여줄 것은, 이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욕심내지 마라, 소년.
지금의 네 몸은 이 모든 것을 버틸 수 없어.”
낮고 고요한 목소리- 백작, 알렉산더였다. 알렉산더는 레오폴트의 이
마에 댔던 손을 내리고, 도망치려는 블랑쉐의 어깨를 붙들었다. 레
오폴트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당신은.....”
“알렉산더 란슬로.”
레오폴트는 씻긴 듯 더욱 창백한 얼굴이 되어 뒤로 주춤 물러났다.
분명 인사나 건네려고 하는 듯 보였으나, 너무나 힘겨웠기에 휘청
거렸다. 로웨나가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그러나 손에 닿는 그의
체온은, 대리석 덩어리처럼 차가웠다. 그 숨소리도 거칠어지고 있었다.
로웨나는 의사를 부르려다가, 레오폴트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웃고 있었다. 새벽의 빛 자락을 본 방랑자같은 그런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유릭은 검은 바다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며 바라보는
바다는, 무언가를 탐욕스레 집어삼키고 태연하게 드러누워 있는 거
대한 검은 짐승 같아 보였다.
누구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묘한 느낌이라는 건 분명했다. 등 뒤에서 커다란
짐승의 숨소리가 훅, 하고 난 듯한 오싹함. 귀를 기울이고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지만 더 이상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
자정을 넘기기 전에 브란 카스톨에 도착할 여객선은 빠른 속도로 바
다를 가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평선 너머로 불빛이 떠오
르기 시작했다. 잠시 뒤, 브란 카스톨로 입성하는 사람들이 가장 먼
저 만나게 되는 마그레노 항이 나타났다. 아직도 유릭의 편지에 열
심히 답장을 쓰는 백부 노버스 크로반이 저곳에 살고 있다. 뛰어내
리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건만, 유릭은 그저 항구를 바라보며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항구의 불빛이 유릭을 고대하듯 바라보다가,
점점 멀어지며 사라져갔다.
넓은 강으로 접어든 여객선은 강을 따라 늘어선 집들의 불빛을 스치
며 브란 카스톨-몇 달 만에 재회하는 제국의 위대한 심장으로 파
고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할 거라 알리는 벨소리가 쩌렁 쩌
렁 울렸다. 어둠의 정적에 묻혀 있던 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러나 제도에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시
커멓게 물들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밤11시 무렵,
배가 드디어 브란 카스톨에 정박했을 때에는 빗줄기가 후두둑 떨어
져 우산이 필요할 정도였다. 항구에는 마중 나온 사람들의 검은 우
산이 시커먼 양떼들처럼 무리지어 있었다.
유릭은 짐에서 우산을 꺼내어 펼쳐 들었다. 우산위로 빗방울이 후두
둑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오랜만에 재회하는 사람들이
반갑게 인사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비가 오네, 하필 밤에 도
착하는데 비가 뭐람! 우와, 많이 컸구나! 일은 어떻게 됐어? 뭐라고? 이런!
유릭은 왠지 웃음이 나왔다. 먼 옛날, 정말 먼 옛날- 언제나 저런 귀
환을 꿈꾸었다. 햇빛 화창한 날에, 아버지와 함께 이 브란 카스톨에
내려 집으로 돌아가는 꿈을. 그러나 지금은 잊은 지 오래다. 이
어둠의 제도에서, 유릭을 마중 나올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유릭 크로반!! 유리이, 유리이!! 어딨어, 유릭 크로반!!!”
“.........”
그렇다고 이런 마중을 바란 것은, 결단코 아니었다. 아니, 차라리 마
중 나오지 말아줘!!! 하고 악을 쓰고 싶은 기분이었다.
“우와, 찾았다!!! 제복 입고 있으니 금방 알겠는데?”
“.....”
“제복 입은 건 처음이다! 역시, 어리버리해도 특무부는 특부부군! 정
말 반갑다!!”
이제 유릭은 당신 몰라요, 하는 척을 그만두고 힘겹게 고개를 내렸
다. 유릭보다 목하나 반은 작은 지옥의 사자, 쥴리안 시저 반 가스코
공자께서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안녕!”
“네가 여긴 웬.......일인 거지?”
“아, 삼촌댁에 놀러갔더니, 삼촌이 마침 누굴 마중나간다고 준비하고
계시더라고! 그래서 따라 나왔지. 운명이다! 너와 내가 만나, 이 브란
카스톨에서 벌어지는 암흑의 음모를 분쇄해야 한다는 마제스의
계시임에 틀림없어!”
“......”
망연해하던 유릭은 비슷한 얼굴로 쥴리안을 바라보는 카밀턴을 발견
했다. 카밀턴은 쥴리안의 뒤퉁수를 울적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유
릭과 눈이 마주치자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해석하자면, ‘내 의도는
절대 아니었다네. 용서해 주게, 크로반 군!!!’ 정도였다.
레반투스 대공 지클린데 님께서 유릭이 이번 배편으로 브란 카스톨에
올 거라 카밀턴에게 알렸을 테고, 카밀턴은 제도에 연고가 없는 유
릭이 여관이나 호텔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걸 알기에 데리러
온 것 같았다. 그러나...... 재앙의 쥴리안 시저 반 가스코 공자님께
서 마침 그날 그 순간에 쳐들어와 외출 준비를 마친 카밀턴과 마
주친 것은, 그 누구도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카밀턴은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이었으며, 유릭은 아시니 다
행입니다, 라는 얼굴이었다.
“어서 오게나, 유릭 크로반 하사.”
“웬 일이신 겁니까?”
“지크...에게서 듣고 왔다네. 음, 그래서....... 브란 카스톨에서 머무는
동안, 내 집에서 지내는 게 좋을 듯해서 마중 나왔.......다네.”
“나도 당분간 외삼촌댁에 있을 거야, 유릭 크로반! 여름 방학이거든!!
잘 지내보자! 같이 제국의 정의를 구현하는 거다!”
“.........유리, 조만간 다른 숙소를 알아봐 주겠네.”
“감사.....합니다.”
유릭은 손을 내미는 늙은 하인에게 짐을 건네주고, 따라붙으려는 쥴
리안을 필사적으로 등졌다. 쥴리안이 여기저기 고개를 들이밀었지만
이리저리 방향을 피하며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시선이 마주치
는 즉시 지옥이 시작될 것이다. 결국 쥴리안이 펫, 하고 투덜대며
늙은 하인의 우산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쥴리안이 멀어지자, 그제
야 카밀턴이 물었다.
“지크에게 다 들었네. 추기경의 소환장을 받았다지?”
“그렇게 되었지요. 저도 참 갑작스러워서, 달리 생각나는 건 없네요.
대체 어떤 사람입니까, 그 니콜라스 추기경이라는 남자는.”
“저주받을 절대강자.”
카밀턴은 굳은 얼굴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 붉은 사냥개들을 부리는 애송이 사냥꾼.”
유릭도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들이 가는 길 앞에, 붉은 제복을 입은
세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빗물 젖은 제복위로 미끄러지는 빛의
빛자락 끄트머리에 투란바코스의 십자가가 새벽햇살처럼 싸늘한 빛
을 발했다.
철십자 기사단-
유릭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 명은 마흔을 훌쩍 넘어 보였
고, 다른 두 기사는 아주 젊었다. 그들 모두 피처럼 검붉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특무부와는 악마와 천사들만큼이나 극심한 관계인
철십자 기사단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기사 중 선두에 선 중년의 남
자가 이마에 손을 얹으며 경례를 올려붙였다. 카밀턴은 대강 이마에
손을 댔다가 떼었다.(누가 본다면 이마의 빗물을 닦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참 오랜 만입니다, 바솔로뮤 애덤슨 경.”
그리고 그 말을 한 것은 유릭이었다.
“12년 만이지............유릭 크로반 군.”
바솔로뮤 애덤슨이 말했다.
“음, 어떻게 아는 사이인가?”
카밀턴이 둘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12년 전, 체포 영장을 가지고 저희 집을 방문하셨던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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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글이 느린 이유는...............
아아, 5일은 정말 짧군요......(...)
다음편은 5일 뒤에!
p.s 이젠 안 믿는 다고요? ........................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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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