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69화 (169/174)

제168편

피의 천사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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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릭은 이 키 크고 무서운 얼굴의 남자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12년 전, 아버지와 아들이 사는 아주 평범하고도 한적한 중산층 집안

으로, 이 남자는 똑같은 색의 제복을 입고 같은 제복을 입은 부하

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묵직한 군화가 바닥을 저벅 저벅 쳤다. 아주 무섭고 큰 짐승의 발자

국 소리 같다고 생각했다. 이 남자는 아버지에게 무언가 아주 긴

말을 외쳤다. 아버지의 멱살을 잡아 내동댕이치고 수갑을 채웠다. ‘

중요한 증인’ 이라는 말을 하며 유릭의 체포를 명한 것은 이 남자였

다. 아버지를 고문실로 집어넣은 것도 이 남자였으며, 심문에 아

무런 진척이 없자 어린 유릭을 가리키며 고문실로 데리고 가라고

명령한 것도 이 남자였다.

“많이 컸군. 그 때의 어린 강아지가 다 큰 사냥개가 되었어.”

“12년은, 그 때의 젊은 사냥개가 늙기에도 충분히 긴 시간이니까요.”

바솔로뮤의 미간이 좁아졌다. 당시의 이 남자가 서른 정도 되어 보였

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은, 그 동안 일을 참 성실하게 해

와서 그러한지 거의 쉰 살 정도 되어 보였다.

“건방지군.”

“한창 괘씸할 나이라서요”

바솔로뮤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가 등진 그의 부하들 역시, 빗줄기에

흠뻑 젖은 채 유릭을 노려보았다. 성난 독수리떼같군- 유릭은 그

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추기경 예하께서, 철십자 본부로 너를 데리고 오라 명하셨다.”

“지금이요?”

“우리는 직접 왔고, 그것은 직접 데려가기 위함이다. 와라.”

설명도 설득도 없었다. 바솔로뮤는 바로 등을 돌렸고, 유릭이 뭘 어

찌할 틈도 없이 철십자의 기사들이 유릭을 둘러쌌다. 카밀턴과 유릭

사이에도 소년티가 채 가시지 않은 젊은 기사가 비집고 들어왔다.

아주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카밀턴은 물러났다. 나른히 한숨을 내

쉬기는 했지만, 많이 겪어본 일인 듯 체념하는 기색이었다.

“다녀오게나........... 본부 앞에, 사람을 대기시켜 놓겠네. 일이 끝나는

대로 그 사람과 함께 오게나. 그 동안, 내 저택말고.....달리 묶을

곳을 찾아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유릭은 인사를 한 뒤에 핏빛 제복의 기사들을 따라나섰다. 항구에 운

집한 사람들은 두런거리는 소리조차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무언가 굉장한 일이 생겼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빗줄기가 호되게

떨어지는 소리가 사방에 가득했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외치는 소

리가 뒤섞여 휘몰아치는 듯, 한여름의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항구로 들어오는 입구에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검은 마차에도 투란

바코스의 핏빛 십자가가 노려보는 눈동자처럼 박혀 있었다.

정말 속 보이는 군-

유릭은 체포나 다름없이 마차에 타며, 그렇게 생각했다. 유릭의 아버

지를 체포하여 심문하고 고문하다가, 6살밖에 안된 유릭을 고문관

손에 집어 던져주며 아들 녀석을 보면 생각이 바뀔 거라 말하던 바

솔로뮤를 보낸 건 너무 속 보인다. 우연일 리도 없고, 좋은 의도일

리는 더더욱 없다.

협박이다, 이건.

그러나 이상하긴 하다. 유릭은 출신성분 불량한 식민 특무부의 하사

에 불과했다. 체포하여 들들 볶아댄다 하더라도, 니콜라스 본인도

아주 잘 알 듯한 사실 밖에는 토해낼 게 없다. 유릭을 통해 프리델라

나 지클린데, 또는 카밀턴을 협박하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정말 대

단한 실수다(지클린데는 유릭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카밀턴은 믿

음이 안가고, 프리델라는 바보같이 인질이나 되었다고 두들겨 팰 것이다.)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피로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코앞에 철십

자 기사단을 우글우글 앉혀 놓고 잠들 수 있는 특무부원은 없을 것

이다) 별로 수다 떨고 싶은 상대도 없었기에, 유릭은 창만 바라보았다.

창문을 미끄러져 내리는 빗방울이 가로등의 빛을 쫓아갔다.

생각해 보면 그 마지막 날은 너무나 맑았던 것 같다. 정말, 너무나

맑았다. 하늘은 새파랬고, 구름도 하얗게 빛났다. 정원으로 쏟아지는

햇살도 너무나도 눈부셨다. 그러나 그날, 창밖을 바라보는 유릭은

두려웠다. 하늘의 빛나는 눈이 유릭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

다. 그 무엇도 유릭을 감춰주지 않을 것 같았다. 아버지는 거의 피

우지도 않던 담배를 끝없이 피우고 있었다. 연기는 거실에 가득했었

고, 그것을 바라보는 아버지는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네가 어찌 살아 왔는지, 다 듣고 왔다.”

바솔로뮤가 먼저 말했다.

“참 행복하게 살았지요. 그러나 그것이 당신 덕이라고는 말하지 않겠

습니다. 당신은 그저 사냥개였을 뿐이고, 그건 명령을 받고 한 일에

불과하니까요.”

뜨끈한 분노가 마차 안을 달구었다. 유릭은 자신을 노려보는 기사단

을 향해 웃어 보였다.

“물론....... 여섯 살짜리 아들을 고문실 바닥에 집어 던지고, 여차하면

잘 써먹어 보라고 명령하셨던 건 참 신선한 발상이었지만 말입니다.

그것도 명령받은 것 같지는 않더군요.”

철컥, 누군가가 칼자루에 손을 가져간 듯 했다. 퍽퍽, 누군가가 마차

바닥을 발로 찼다. 바솔로뮤가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구원의 길은, 언제나 네 앞에 있다. 추기경 예하께서는-”

“산자들의 세상에서 구원 같은 건 없습니다.”

뿍- 이번에는 어디선가 이 악무는 소리가 들렸다. 유릭은 마차 안의

기사들을 둘러보았다. 어둠에 묻힌 그들의 눈은 한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뭘 어쩌라고? 마주봐 주기 싫어서 눈길을 돌렸다. 그렇게

유릭이 무시하니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었다. 빗방울이 마차 천장을

치는 소리는 북소리처럼 컸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고 문이 열렸을

때, 유릭이 가장 먼저 내렸다. 빗줄기는 퍼붓듯 쏟아지고 있었고,

눈앞에는 두개의 기둥이 파수병처럼 서 있는 현관문이 세워져 있었

다. 현관문은 활짝 열려져 있었으며, 그 안으로 검은 대리석이 깔

린 복도가 똑바로 뻗어 있었다. 복도의 양 옆에는 기둥 모양의 받침

과, 그 위에 갑옷과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그 사이사이마다 성

자들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은은하고도 깊숙한 빛을 발하는 램프들

이 켜져 그것들을 싸하게 밝혔다. 비에 흠뻑 젖은 군화를 그 안으로

들여놓자, 유릭의 뒤를 따라 내린 철십자의 기사들이 양 옆에 섰다.

“체포당하는 기분이군요. 아니, 정확히는 유괴당한 기분이네.”

“장난치지 마라.”

“장난치는 것도, 말장난도 아닙니다. 적어도, 제게 있어서는 이것은

진실.”

철컥, 칼집에서 칼이 반쯤 미끄러져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유릭은

그 쪽을 흘끔 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유릭을 노려보던 가장 어린

기사의 검이 뽑혀져 나와 있었다. 유릭은 훑듯이 시선을 올려 그

기사의 눈을 마주보았다. 진한 갈색눈의, 앳되고 고운 얼굴의 소년이었다.

“검을 넣으십시오.”

“기사의 검은, 기사의 의지다.”

유릭이 총을 뽑았다. 소년 기사의 검이 뽑혀 나오기도 전에, 유릭의

총구가 그 목덜미에 얹혔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저의 의지. 이건 원죄를 짊어진 기사의 검입니

다.”

“거, 건방지게!”

“당신의 권위는 무엇입니까?”

“뭐?”

“당신의 권위는 당신 스스로 증명하는 것. 당신은 깨끗한 제복과 성

급한 검은,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습니다. 건방지다고 말해야 할 건,

당신이 아니라 바로 접니다.”

“넣어라, 둘 다!”

바솔로뮤가 말했다. 유릭은 철십자의 손아귀 안에 있는 만큼 먼저 총

을 거두었다. 그것으로나마 이겼다고 생각했는지, 소년 기사는 약

간은 웃으며 검을 집어넣었다. 역겨운 애송이-

유릭은 점점 더 신경이 날카로워지기 일어나기 시작했다. 온 몸이 곤

두서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파난을 출발하는 날- 아니다, 추기

경의 소환장을 받는 그날부터 계속 이러했다. 유릭은 사냥꾼의 냄새

를 잔뜩 맡은 맹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밤의 기사단 본부는 유령의 입김처럼 싸늘했고, 곳곳에 무겁고 으슬

으슬한 습기가 고여 있었다. 철그럭, 철그럭- 철십자 기사들의 검

붉은 군화발이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한 바닥을 밟는 소리가 고성을

배회하는 유령기사의 발소리처럼, 쓸모없는 기계의 오래된 심장

소리처럼- 그렇게 들려왔다.

“여기서 기다려라.”

마침내, 유릭은 어느 거대한 대기실의 문 앞에 서게 되었다. 문의 양

옆에는, 키 큰 두 명의 천사상이 지키고 서 있었다. 투구를 쓴, 아

름답고 잔혹해 보이는 얼굴의 여자들이었다. 한명의 손에는 가느다

란 창이, 다른 한명의 손에는 아름다운 세검이 들려 있었다. 유릭

은 체포 비슷하게 끌고 온 철십자 기사들이 문을 열자, 기다란 의

자가 놓여 있는 대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그림이 벽과 천장

을 온통 뒤덮고 있어, 또 다른 세계를 멀찍한 하늘에서 들여다보는

듯한 현기증을 느끼게 했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빗줄

기 쏟아지는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는다. 유릭은 그곳의 커다란 창

문을 보았다. 빗줄기가 창문에서 줄줄 쏟아지고 있었다. 실내의 빛

이 그 빗줄기와 빗방울 위로 휘몰아쳤다.

잠시 뒤, 등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 옷자락 쓰는 소리

도 들렸다. 유릭은 돌아섰고, 잠시 어찌 인사해야 하나- 고민했던

것을 잊어버렸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놀랍게도- 너무나 놀랍게도 지클린데였다. 옷

은 그 때와는 달리 아주 긴 수도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엉망진

창이던 백금발도 아주 부드럽고 단정하게 빗겨 내려져 어깨와 등줄기

로 차분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얼굴은 기억하는 것보다 더 흰 색이었

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옷깃을 매만지던 손을 내렸다. 색이

다른 두개의 눈이, 유릭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눈치였으나, 무엇을 기다리는 지 유릭으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기에

먼저 물었다.

“여기는 웬 일이십니까, 전하?”

그녀는 아무 말도 없었다. 싸늘한 눈으로 유릭을 바라보다가, 볼을

쓸어내리는 백금발의 한쪽을 걷어냈다. 그 흰 볼은 갓 씻은 복숭아

처럼 매끄러웠다. 즉, 흉터가 없었다.

“나는 붉은 십자가의 추기경 니콜라스, 전하라 불릴만한 신분이 아니

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분명 남자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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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등장, 니콜라스 총.................추기경님!!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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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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