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홍염의 성좌-172화 (172/174)

제171편

인연의 교차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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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한 것도 유분수지, 남의 집에 와서 아침도 안 먹고 늦잠인가!”

다음날, 카밀턴은 늘 그러하듯 오늘도 늦잠이었고, 유릭은 늘 그러하

듯 아주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을 마시고 있

었다. 유릭 혼자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 트래비스는 아주 신경질을

냈다. 평소라면 카밀턴이 그날 정오까지 자던, 다음날 정오까지

자던 아무 상관도 하지 않던 트래비스였다. 무언가 꼬인 것이 있으니

이리 신경질을 부리는 것임에 틀림없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악, 말도 마!! 요즘 일이 얼마나 꼬이는 지!”

역시나, 요즘 일이 안 풀리는 것이다. 어제부터 아주 신경질을 부리

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트래비스는 깨작깨작 스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주방장이 본다면, 내

요리에 불만 있냐! 그럴 거면 처먹지 마!! 하고 악을 쓸만한, 정말

성의 없는 태도였다. 대체로 이렇게 온 몸으로 나 기분 나쁘다, 라

고 표현하는 사람의 속마음은 거의 비슷하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즉, 누군가에게 하소연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트래

비스는 당장에 울상을 지었다.

“신작 기획 중인데........작곡가들이 내 극장에서는 안하겠데! 출판업

자들을 찔러봐도 답은 다 똑같아. 으악, 이러다가 이번 가을 시즌에

고정 레퍼토리를 올리는 치욕을 감수해야 할지도 몰라!”

고정 레퍼토리고 신작이고 뭐고, 군인인 유릭에게는 어차피 구름 너

머에서 경전 읊는 소리와 비슷했다. 이런 자리에는 카바냐가 있으면

딱 좋겠는데. 유릭은 유명한 카스틸리아 대극장주와 함께 사업의논

을 하는 영광을 누리면서도, 그와 조금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다는

것에 조금은 애석해했다.

“대체 왜 싫다는 겁니까?”

“살비에 마델로 때문이지, 뭐. 살비에의 발언권이 막강한 이상, 어떤

신작이 올라오든 그 딸인 에닌 마델로 양이 주연이 될 수밖에 없어.

작곡가들이 불만인 점이 바로 그거라네.”

“하지만 에닌 마델로 양은 스타지 않습니까.”

“스타긴 스타지. 하지만 아무리 스타라도, 모든 역할을 소화할 수 있

는 것도 아니고 모든 역할에 어울리는 건 아니야. 게다가...........사실,

에닌 마델로 양은.... 유명한 작곡가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네.

그 동안 히트한 건, 전부 고정 레퍼토리에서였을 뿐이야.”

“하지만 잘 하잖아요. 스타이기도 하고.”

“응. 잘 하긴 잘 하지. 하지만........ 목소리가 깨끗하고 곱기는 한데,

그다지 변화가 없고..... 별로 화려한 맛도 없고, 무엇보다도 에닌

마델로 양은 연기력이 그다지 좋지 못해. 오페라 가수가 미모와 아

름다운 음색만으로 버틸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지...... 솔직한 말

을 하자면, 에닌 마델로 양은 너무 빨리 스타가 되었고, 너무 빨리

자기 스타일이 고정되어 버렸어. 게다가 살비에 마델로가 너

무 싸고도니........그 연기력이 조금도, 조금도, 조금도!! 늘지 않는다고!!

정말 볼 때마다 무대 위에 인형 세워 놓은 것 같다니까!!!”

그리고 포크로 빵을 콱 찍었다. 덜컹, 하고 테이블이 한번 크게 흔들

렸다.

솔직하게 말하라면, 유릭은 사실 에닌 마델로가 주연으로 나선 오페

라를 단 한번도 재미있게 본 적이 없었다. 관심이 없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음색이 참 곱다고 생각했는데, 보면 볼수록 재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그저 오페라를 몰라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지만, 지난

번 로웨나가 무대에 섰을 때는 그 느낌이 너무나 틀렸다.

“아-”

유릭은 이제야 에닌이 다시 무대로 돌아왔을 때 어째서 그다지도 따

분했었던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가창력이나 음색의 문제가 아니라,

그 연기력의 문제였던 것이다. 로웨나의 목소리는 굉장히 화려하기

도 하지만, 그 변화가 풍부하기도 했다.

“무슨 생각 한 건가, 자네?”

트래비스가 그리 물어보며 눈썹 끝을 밀어 올렸지만, 행여나 그 말을

해서 비웃음이나 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유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트래비스가 대강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집사가 편지

두 통을 가지고 왔다. 유릭이 건너편에서 보니, 하나는 굉장히 고

상한 여자 필적인 듯 보였고, 다른 하나는 정말 엄청나게 엉망진창

인 필적이었다. 트래비스는 엉망진창인 쪽부터 보다가, 얼굴을 아

주 심하게 찌푸렸다.

“뭐야, 이건?”

“뭔데요?”

“신작 준비 중인데, 조만간 좀 만나서 이야기 하자는데? 뭐야, 출판업

자 소개도 없이 작곡가가 직접 대뜸 극장 내노라니. 바보 아냐,

이거?”

트래비스는 더 볼 가치도 없다는 듯 편지를 구겨 쓰레기 통으로 집어

던졌다. 유릭은 그 어마어마하게 엉망진창인 필적을 어디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떠오르지는 않았다. 유릭 주변에는 글

씨 못 쓰는 사람이 너무도 많았다. (크리스펠로의 경우 정말 최악인

데, 어순을 절대 지키지 않아 잘 쓰든 못 쓰든 전혀 알아볼 수 없

기 때문이다.) 트래비스는 그 다음 편지를 보다가, 얼굴이 순식간

에 창백해졌다.

“뭐, 뭐야, 이건!!!!”

“뭔데요?”

“으악, 난 몰라! 존스, 존스!! 어서 외출 준비해! 어서!!! 당장 레오노

라 카스조에게 사람 보내!! 오늘 극장 사무실에서 보자고! 으악, 난

몰라! 언제 이렇게 진행 된 거야!”

유릭은 트래비스가 집어던지는 편지를 낚아챘다. 트래비스는 유릭이

보던 말든 아무 상관도 못하고 옷을 갈아 입기 위해 드레스 룸으로

달려갔다. 유릭은 편지를 들여다보았는데, 편지 봉투에 적힌 것

만큼이나 우아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트래비스 카트슨 씨에게

지난번의 제 청을 들어주셔서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로웨나 그린 양

은 제가 잘 가르쳐 훌륭한 소프라노로 만들겠어요. 신께서 축복하

시길.

레오노라 카스조.

밖에서는 트래비스가 온갖 호들갑을 떨어대며 외출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잠시 이마를 긁적이던 유릭은, 마시던 커피를 완전히 비우고 자리에

서 일어났다. 살벌한 추기경과 더욱 살벌한 제국사정쯤, 오늘 하루

정도는 잊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웨나는 출근준비를 하고 나오다가, 미하일이 테이블 위에 얹어 놓

았던 편지를 보는 것을 발견했다. 레오노라 카스조로부터 온 2차

오디션 합격 통지서였다(잘 보라고 그곳에 놔두었다).

“야, 너. 정말......극장 그만 두려는 거야?”

미하일이 조심조심 물었다.

로웨나는 그런 미하일이 좀 불쌍해 보였다. 지난번에 한바탕 싸운

뒤로, 미하일은 아주 조심조심 행동하고 있었다. 처음 걸음마 배운

아이가 비틀거리는 듯한 그 모습에, 로웨나는 지난번에 그렇게 화를

낸 것이 좀 미안해지기도 했다. 미하일은 이기적이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자기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는 법이

없는 철부지지만, 그래도  눈치가 아주 조금은 있다(그것마저 없다

면 정말 낭패다).

“재계약이 되지 않았으니 별 수 없잖아. 그래도 오라는 데가 있으니

다행 아냐?”

“아니........너라면, 어딜 가든 잘 해 낼 거야. 합격한 것 정말 축하해.

그리고.........저기, 이거.”

그리고 미하일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테이블 위에 봉투 하나를

꺼내어 놓았다. 로웨나는 달려가 그 봉투를 집어 열어보았다. 돈이

었다. 세어보니, 월세 반 년치였다.

“세상에나, 언제 이 많은 돈을 장만한 거야?”

“아르바이트비가 나왔어. 이번 학기 복학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이야? 그런데 왜 여태 말 안하고 있었던 거야? 응?”

“그게, 차마 말 못하는 아르바이트였거든.”

“무슨 아르바이트였는데?”

로웨나가 눈을 번쩍거리면서 묻자, 미하일은 정말 죽고 싶다는 얼굴

로 말했다.

“이상한 소설.....을 좀 썼어. 아악, 제발!!! 그런 표정 지을까봐 말 못

한 거란 말이다!! 교수님들이 안다면.......크아, 다들 나를 짐승 취급

할 거라고! 브란 카스톨 제국 대학생이 음란 소설 작가라니!!”

“그래서 여태까지 늦게 다닌 거야?”

“그래! 제기랄, 나 혼자 쓰는 것도 아닌데 다들 작업 시간은 무조건

밤이 좋다고 하지! 게다가 나 빼고 모두 술고래 노총각 아저씨 들

이고! 내 집에 놀러 와 술 마셔도 되느냐고 묻는 거 말리는 것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그리고 미하일은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계속 할 거야?”

“물론 아니다. 이번 시즌 원고료를 다 받은 다음 그만 뒀어. 돈을 좀

더 올려줄 테니 재계약 하자고도 했는데........그건 못 하겠더라고.

어쨌건 늦어서 미안하다.”

로웨나는 두 손을 마주잡고 미하일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별빛 내린

듯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오늘 뭐 사 줄까?”

“하여간, 너는 뭐든 밥 한 끼로 때우려고 하지. 좋아, 대신 싼 건 안

된다. 그 동안 구박한 것 까지 다--아 합쳐서, 무지 무지 비싼 걸로

사 줘야 해!”

“물론이지! 와아, 굉장히 기분 좋아! 너무 너무 좋아!! 오늘은 정말

최고다!”

“너한테는 돈 들어오는 날이 지상에서 제일 행복한 날이지! 좋아, 이

제부터는 개학하기 전까지 할 일도 없는데, 매일 매일 극장 바래다

줄게. 아르바이트 끝나면 기다리고 있어. 데리러 갈테니.”

로웨나의 눈이 더더욱 커졌다.

“정마알?!!!”

“그만 좀 놀라라! 젠장, 나 먼저 나가니까 너도 어서 따라 나와!”

로웨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미하일이 집세를 내고, 복학을 하고, 심지

어 로웨나를 챙겨주기까지 한다! 그 순간만큼은 미하일이 먼 나라의

공작님처럼 근사해 보였다. 로웨나는 우산을 챙겨들고 미하일을

따라나섰다.

나가니,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했

다. 습기로 공기도 아주 무거워 눅눅했다. 미하일은 뭐가 그리 불

편한지 하늘만 보고 걷다가, 극장이 가까워질 무렵 슬그머니 말했다.

“야, 너....... ”

“응?”

로웨나는 여전히 기대에 찬 눈으로 미하일을 보고 있었다. 미하일은

피식 웃더니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었다.

“졸업 하면 말이다........... 언제 졸업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

건......... 졸업하면, 나.... 정말 부지런하게 살 거야. 믿어줘.”

“물론 믿어!”

“그리고......앞으로는 잘 할 게, 정말 맹세할 수 있어.”

“오늘만큼은, 네가 사실은 이 제국의 황태자였다고 말해도 믿어주지!

이따가 봐.”

로웨나는 방긋 웃고는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극장 문을 열자

마자, 극장 입구에 모여 있던 여자애들이 로웨나에게 우르르 달려

왔다.

“너, 극장 그만 둔다며!!”

그 선두에 선 수잔나가 크게 외쳤다. 로웨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재계약이 안 되었거든. 그래서 다른 곳 오디션을 봤어. 다행히

합격했고.”

수잔나가 입을 딱 벌리고, 제시는 덜덜 떨고, 리리아는 아예 울먹였

다.

“네가 왜!!! 당장 주연을 주어도 모자랄 판에, 재계약을 안 해주다

니!! 나뻤어, 로이! 그런 일이 있으면 우리에게 말 했어야지! 같이

의논했으면 좀 달랐을 거 아냐!”

“아, 그야..... 챙피하잖아. 다들 재계약되는데 나만 안 되면.......사실,

합격하기 전까지는 한 마디도 못하겠더라고.”

“너, 스카웃 된 거지?”

제시가 물었다. 로웨나는 정색을 했다.

“스카웃은 무슨! 여기, 이 브란 카스톨로 와서 나는 단 한번도 스카

웃 제의를 받은 적이 없다고. 그리고 그날 내가 에니 대신 노래를

불렀다는 건 대외 극비잖아.”

“비밀은 비밀이지만, 귓구멍 제대로 달린 사람이라면 그날 주연이 너

였다는 건 다 알고 있다고! 정말 아무도 모를 리 없고, 몰라서도 안

된다고!”

“맞아! 아악, 너무해! 분명 살비에 마델로 씨의 농간일 거야!”

“맞아! 자기 딸 대신 주연 무대에 서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라고! 널

몰아내려고!”

리리아와 수잔나가 함께 호들갑 떨며 으르렁댔다.

로웨나는 분위기가 아주 한심해졌다.

“됐어, 됐어. 어차피 끝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그 말에, 다들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

만큼 슬픈 것이 또 있을 까. 그러나 발레리나들의 우두머리가 백조

여왕 도나라면, 계약직의 어린 평단원들의 우두머리는 로웨나였다.

그런 로웨나가 떠나니, 다들 생존의 위협까지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조금만 어리 버리 굴면, 발레리나 패거리에게 단숨에 제압당할 것이다.

“그래도.....축하한다. 카스조 오페라단이라면, 정말 유명한 데잖아.”

“실력있는 가수들도 많고.”

“레슨 해 주는 선생들도 좋고.”

“에닌 마델로 같은 애도 없고.”

수잔나의 마지막 장식에 다들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언제까지 다닐 거야?”

“아마도 이번 달 말 까지나 다음달 까지겠지. 어쨌건, 새로운 시즌의

캐스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옮기게 될 거야.”

“좋겠다. 이런 곳을 떠나 더 멋진 곳에서 더 자유롭게! 하긴, 너는

학교 다닐 때부터 뭐든 제일 잘했어. 머리도 좋고, 피아노도 잘 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원래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걸지도 몰라.”

“그건 그래. 교수님들도 네가 에닌과 같은 오페라 단에 들어간다고 할

때 굉장히 반대했잖아. 처음에는 왜들 그러실까, 하고 이해를 못했는데

......... 이제는 알 것 같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그래도 로이가 나와 같은

카스틸리아에 왔을 때는 정말 좋았는데.”

제시는 푸념조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런데 리리아가 갑자기 제시를 푹

찔렀다. 수잔나도 리리아가 턱짓을 하는 곳을 보고는 입을 합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로웨나도 그 쪽을 보아야 했다.

“너.......... 정말 그만두는 거니?”

에닌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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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잡설: 아하핫.............. 정말 몸둘바를 모르는 아울입니다;;;

늦어서 정말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다음편은............. 제가 17일날 이사가거든요;; 이사가서 집정리하고

인터넷 선 연결하고 하면.......최소 다음주 월요일 까지는 못 올릴 것 같

습니다;; 죄송합니다!!

일단은 계속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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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염의 성좌]

제43장 인연의 교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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