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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공작가의 막내도련님은 암살자-91화 (91/325)

제91화. 힘의 조건 (1)

군터의 요구는 간단했다.

그 로이라는 꼬맹이를 살리고 싶다면, 제시한 시간까지 폐기물 장으로 와라.

오지 않을 시 뒷일은 알아서 생각해라.

의도는 뻔히 보였다.

투기장의 일을 복수하려는 것.

허나 정상적으론 안 된다는 걸 알았는지, 되도 않는 수작을 부린 것이다.

참 어이가 없어 말도 안 나오네.

“불안 불안하다 싶더니 결국 이런 짓을, 군터 이 쓰레기 같은 자식!”

정작 제일 흥분한 건 매니저였다.

“죄송해요 손님! 이 일은 저희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손님께선 걱정 마시고…….”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문 쪽으로 나갔다.

“지,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설마 거길 가시려는……?”

“꼬맹이 쪽은 맡기도록 하지.”

깜짝 놀란 그녀가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미치셨어요? 지금 이거 누가 봐도 함정이잖아요! 가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구요!”

함정, 함정이라…….

굳이 정의하자면 남을 어려움에 빠트리려는 계략을 비유한다지?

확실히 간다 해서 좋은 꼴을 보진 않을 것이다.

근데 달리 말하면 내가 간다 해서 어떤 어려움에 빠질 거란 생각도 안 든다.

나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폐기물 장으로 향했다.

* * *

전생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때는 우시프 제국과 가람 왕국 간의 전쟁이 한창 지속되던 무렵,

다소 수세에 몰렸던 가람 왕국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한 계책을 실행한 적이 있었다.

바로 베르트가의 장자인 라르쉘 베르트를 납치하는 것.

베르트가의 장자라면 뭘 뜻하겠는가?

바로 당시 가주였던 에쉘의 아들임을 의미했다.

황실의 혈육은 아니지만 제국 실세의 자식이었던 만큼, 볼모로 잡을 가치는 충분했던 것이다.

이에 제국 내에선 그를 구할지 말지에 대한 여러 설전이 오갔지만, 정작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에쉘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잠자코 기다렸을 뿐.

하지만 내 예상과 달리, 그는 오히려 내게 길을 물었다.

자기가 어찌하면 좋겠냐고.

난 말했다.

나를 보내만 준다면 라르쉘을 구하는 것은 물론, 작당한 이들까지 모두 괴멸시키고 오겠다고.

인정하긴 싫지만 난 그때 매우 분노한 상태였다.

감히 같잖은 수작을 부려 그를 곤란하게 만든 것에 화가 났고,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작 놈의 아들을 구하는 것보다, 그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했던 것 같다.

어떻게 생각하든 참 한심했던 일이지.

근데 인생은 돌고 돈다고, 지금 내 앞에 또 비슷한 상황이 찾아와 버렸다.

담배 팔이 꼬마?

솔직히 아무 상관없다.

이번 임무와 연관도 없을뿐더러, 죽는다 해서 뭔가 달라지는 것도 없다.

그냥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거리의 부랑아 중 한 명이 우연히 나와 마주쳤을 뿐.

조금의 도움은 줬을지언정, 거기서 끝이다.

더 이상 내가 뭘 해줄 의무는 없다.

그래, 없지, 없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의 내 감정은,

그때 느꼈던 감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이유고, 상관이고 그런 것들은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난 그 같잖은 폐기물 장의 버러지를 죽여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

한걸음, 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냄새가 풍겨온다.

정확히 두 종류의 냄새다.

하나는 버려진 폐기물들의 역한 쓰레기 냄새.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내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인간의 피 냄새.

다만 비릿한 느낌이 평소와 다르게 매우 진했다.

뭔지는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내게 있어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닐 테니.

의식은 안 했지만, 지나오는 동안 꽤 많은 인간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인지했다.

허나 섣불리 나서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참 아이러니하단 말이지.

저런 하찮은 잡배들도 두려움이란 걸 느끼고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정작 팔까지 하나 잃은 놈이 아직 제 주제도 파악 못 한 채 깝죽거리는 꼴이라니.

의미 없는 잡생각을 하며 나아가다 보니, 어느새 초대받은 공간에 이르렀다.

“왔네?"

폐기물 위에 거만하게 앉아 나를 지켜보던 군터가 만족스런 미소를 보였다.

“솔직히 좀 놀랐어! 오라고 말은 했다지만, 정말 그 꼬맹이 하나 때문에 이곳까지 와줄 줄은! 보기보다 정이 많네?”

정작 놈은 둘째 치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보았다.

용도를 알 수 없는 금속 폐기물들이 산을 이룬 공간.

희한한 건 폐기물은 아닌데,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하얀 조각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는 것이었다.

사실 뭔지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뼈.

한둘이 아닌 족히 수백은 넘을 듯한 양이었다.

공동묘지도 아닌데 왜 사람의 뼈가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선 아마 저놈이 알고 있겠지.

“눈을 보니 벌써 알았나 보네? 왜 여기 인간의 뼈가 있는지 궁금한 거지?”

나는 지껄여보라는 의미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너 폐기의 뜻이 뭔 줄 아냐? 간단해! 못 쓰게 된 걸 버린다는 의미야. 이곳은 그런 못 쓰게 된 걸 처분하는 장소지.”

녀석은 아직 남아있는 한쪽 팔을 자랑스럽게 펼쳐냈다.

“전에 말한 대로, 난 램버스타 케이지를 제패했지만 경기 도중 사람을 죽인 일로 인해 그곳에서 쫓겨났다. 미련은 없었어. 딱 즐길 만큼 즐겼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나올 때도 기쁜 마음으로 나왔지!”

그의 눈빛이 악랄하게 빛났다.

“근데 나오자마자 낯선 놈들이 날 반겨주더라고! 한 놈은 한쪽 팔이 없고, 한 놈은 한쪽 무릎이 뭉개진 데다가, 또 한 놈은 아예 얼굴이 찌그러져 있는! 기억은 안 나는데 전부 내가 그랬다 하더라고?”

하기야 저렇게 살면서 적이 없는 게 이상한 거겠지.

“그러면서 나한테 복수를 하겠다더군! 나 때문에 지들 인생이 쓸모가 없어졌다나 뭐라나? 그걸 들은 난 이런 생각을 했지! 쓸모가 없어지면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 폐기물들처럼 말이야? 인간이라고 다를 게 뭔데?”

그는 손에든 백골을 폐기물들 사이로 던져버렸다.

마치 저들과 다를 게 없다는 듯이.

“그러면서 또 이런 생각도 들더군. 이놈들 외에도 쓸모없어진 인간들을 폐기하는 건 어떨까? 어차피 계속 살아봐야 아무 의미 없잖아? 어찌 보면 내가 좋은 일을 해주는 거 아니겠어?”

계속 듣다 보니 어이가 없어 한마디 던졌다.

“그건 네놈 기준 아닌가?”

“그럼 물어보지! 애초에 그런 기준은 누가 세우는 거냐? 있는지도 모르는 신들이 세우는 건가? 그렇게 따지면 이 폐기물장 안에선 내가 신인데? 내가 스스로 판단해서 인간을 폐기시키겠다는 데 누가 말리겠어? 안 그래?”

대충 투기장에서 잡소리 할 때부터 예상은 했다.

쓸모없어진 쓰레기는 폐기해야 한다.

그러니 쓸모없어진 인간들도 이 세상에서 폐기해야 한다.

참 단순하면서도 같잖은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네 말에 따르면 한쪽 팔이 없어진 너도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거로군. 그럼 너 역시 똑같이 폐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한쪽 팔이 없어? 누가? 내가? 무슨 소리야!”

-우우웅

그는 남아있는 손으로 마나를 발현해 텅 빈 반대쪽 어깨로 가져다 대었다.

“창조: 자연의 손(Hands of Nature)!”

-꾸득꾸득

주문과 함께 생성된 마법진에서 고운 흙이 나타났다.

마치 흙인형을 빚어내듯 점차 형태가 갖춰져 새로운 팔을 만들어나갔다.

어이가 없군.

쓸모없어진 건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놈이 창조 마법을 자연스레 구사하다니.

고개를 젓는 것조차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처음부터 네게 악감정은 없었다. 그냥 쓰레기에 찌든 날 깨워줄 좋은 상대가 될 거라 보았지! 하지만 네놈의 눈빛을 보고선 생각이 바뀌었다! 상대를 능멸하다 못해 하찮게 여기는 듯한 그 눈빛! 그 지랄 맞은 여편네랑 아주 똑같아!”

그는 새로이 창조된 팔을 내게 보란 듯이 내밀었다.

“팔 좀 새로 만든 거로 날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물론 아니지! 나도 인정하긴 싫은데, 넌 내가 본 남자 중 가히 최강인 건 맞아! 차마 어떻게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은 안 들더라!”

그걸 아는 놈이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

“근데 그거 아냐? 싸움의 끝은 결국 누가 살고, 누가 죽었냐에 따라 달렸다는 걸! 내가 살고, 네가 죽는다면 결국 최후의 승자는 내가 되는 거라고!”

-까딱

그가 손짓으로 뭔가 신호를 보내니, 주위에 숨어있던 잡배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손엔 각각 의도를 알 수 없는 금속의 장치가 들려있었다.

그들은 주저할 것 없이, 그 장치를 바로 실행시켰다.

-기이잉

“……!”

갑자기 주변 공기가 무거워지나 싶더니, 이내 몸을 짓누르는 듯한 엄청난 압력이 느껴졌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마법이 아닌 ‘중력 존(Gravity Zone)’이라는 아티팩트의 능력이다.

일정 공간의 중력을 높여 움직임을 극도로 제한시키는 효과.

사실 보통 인간이라면 서 있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엄청난 고통을 받을 것이다.

“이야? 꽤 잘 버티네? 사실 널 위해 쓰려했던 건 아닌데, 너한테 써도 아깝진 않을 것 같아.”

인정은 해야겠네.

나를 위해 꽤 괜찮은 함정을 준비해 놨어.

“난 지금부터 멀쩡한 네놈을 쓸모없는 폐기물로 만들 거야! 그럼 너 또한 여기 쌓여있는 백골들처럼 고이 잠들게 되겠지! 그래도 쉽게 끝나는 건 싫으니까 어디 한 번 전력으로 버텨봐!”

전력?

나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전부터 최선이니, 전력이니 하는 이상한 말들로 날 강요하는데,

참 웃기지 않은가?

고작 이런 놈들을 상대로 내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게?

애초에 이곳은 벨리아스도 아니고, 아카데미도 아니다.

녀석조차 나를 시온이라고 부르는 마당에, 이곳에서 내가 시안 베르트라는 것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단 한 명을 빼고선.

[도와줄까?]

케이람이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

굳이 그녀를 쓸 필요도 없지.

전력을 다하라 했나?

아쉽지만 이 땅에서 내가 전력을 다해 상대하고 싶은 이는 한 명 밖에 없다.

대신 최선을 다할 순 있겠지.

최선을 다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극악의 고통을 그에게 선사할 것이다.

늘 그랬듯이.

-탓

마침내 준비를 마친 그가 자리를 박차고 뛰어들었다.

확실히 투기장에서 보여줬던 움직임보다 두 배 아니, 세 배 이상은 빠른 속도였다.

몸은 곰 만한데 속도는 화살과도 같으니, 가히 파괴적인 움직임이라 할 수 있지.

그럼 뭐하겠는가?

내 앞에선 굼벵이가 움직일 뿐인데.

나는 손바닥에서 생성된 마나 구체를 움켜쥐고선, 뒤로 빼 들었다.

-스윽

내가 취할 것은 별거 없다.

인간이 몸을 단련할 때 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자세. 정권 지르기.

파죽지세로 달려오는 녀석을 향해 나는 평온한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쾅!

자연스레 맞닿은 두 개의 주먹.

강한 충격음과 함께 사방으로 거센 파장이 일었지만, 그 파장은 머지않아 한쪽으로 기울었다.

“……!”

-콰직

균열이 일어날 것도 없었다.

녀석의 팔은 내 주먹에 닿은 순간, 바로 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파동을 버티지 못한 그의 신체는 곧바로 폐기물들 속으로 튕겨 나갔다.

-쿵

교육은 끝났다.

폐기물 속에 처박힌 그의 얼굴이 모든 걸 말해주고 있으니.

불과 5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그야말로 절망에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말이 돼?”

사람은 본디 한계를 맞닥트리면 그 누구보다도 쉽게 절망하는 동물이다.

아마 녀석도 그걸 알고 내게 전력을 다하란 것이 아닐까 싶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의 한계를 보여주고 극도의 절망감과 허무감을 안겨줄 요량이었겠지.

보다시피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이건 경지 자체가 다르잖아! 내가 아무것도 못 하고 당한다는 게 말이 돼?”

절망과 의문이 교차한 부정의 얼굴.

내가 정화 작업을 하면서 봐왔던 이들은 하나같이 다 저런 표정을 지었다.

비록 내가 당주로부터 지시받은 대상에 이놈은 없었지만, 하나 추가한다 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녀석을 내려다보며 나직이 물었다.

“몇 명이었어?”

“…….”

그는 말이 없었다.

“네가 여태 폐기했다던 인간들 말이야. 몇 명이나 됐냐고?”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님 그사이에 벙어리가 된 건진 몰라도,

대충 주위에 널린 백골들의 수를 보자니, 천 명은 되지 않을까 싶다.

-우우웅

나는 품에서 케이람을 꺼내들며 말했다.

“딱 천 조각으로 나누어줄게.”

그런 다음 쓰레기 속에 던져버리면 알아서 폐기되겠지.

머지않아 고통에 몸부림치는 한 남자의 비명이 폐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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