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진면 (1)
편한 걸음으로 유적을 여유롭게 활보하고 있는 흑발의 남성.
뭔가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는지 입가엔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그런 그의 앞에 대뜸 작은 모래 소용돌이가 생성되더니, 곧 사람의 형태를 갖추며 앞길을 가로막았다.
이에 남성은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왜 그런 죄인 보는 얼굴로 나를 보고 계신 걸까?”
(인과율을 망치는 짓은 하지 말라고 내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요란하진 않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주변에 은은하게 퍼졌다.
“착각하지 마시지 모래 양반? 난 당신의 말을 들어야 하는 하수인이 아니야. 내가 위험에 빠진 어느 숙녀 하나 구하는 것도 당신의 허락을 받아야 하나?”
(주인도 없는 놈이 잘도 입을 지껄이는군.)
남성은 미간만 찌푸릴 뿐, 딱히 반박하지 않았다.
(잡설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검은 안개 신의 계승자가 지금 이 유적에 있다는 거, 알고 있겠지?)
“모른다고 하면 거짓말이라 할 거잖아? 뭐 환영 파티라도 해주시려고?”
(죽일 거다.)
남성의 눈동자가 순간 미세하게 떨렸다.
(명분은 충분하다. 나의 유적에 찾아와 소란을 피운 죄. 유적의 주인으로서 처벌하는 것이 마땅하지.)
“그걸 굳이 나한테 말해주시는 이유는? 협조라도 해달라는 건가?”
(그 반대다. 계승자를 죽이는 것에 대해 네놈은 일절 관여하지 마라.)
“하?”
목소리의 주인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네 말마따나, 네놈이 무가치한 인간 하나를 구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허나 이번엔 얘기가 다르지. 내가 아에르의 계승자를 죽이는 것에 대해 네놈은 작은 신경조차 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개입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보인다면?”
(신계의 규칙을 어긴 것으로 간주되어 소멸할 것이다. 이곳에 없는 네놈의 본체까지도…….)
남성은 상관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오죽했으면 이 땅의 주인께서 나를 협박까지 하면서 막으려 드실까? 그래서 뭐, 어떻게 죽이실 건데? 직접 나타나서 목이라도 베시려고?”
(그럴 순 없지. 이 유적을 찾아온 내 일족에게 지시를 내려 대신 죽이게 할 거다.)
“성격 참 괴팍하시네. 이렇게 된 이상 나도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겠는데? 그 계승자 놈은 뭐 때문에 죽이시려는 거요?”
(위험하기 때문이다.)
간단하면서도 명료한 대답이었다.
(그 추방자가 대체 어디서 그런 인간을 구한 건진 몰라도, 그 계승자는 자칫 이 세계의 인과율을 크게 뒤집을 수 있는 굉장히 위험한 존재다.)
“좀 오버하는 거 아니야? 내 소환수를 처리하긴 했어도, 그건 녀석한테 마검이 있어서…….”
(마검을 제어한 자다.)
“……!”
그 한마디에 남성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게 뭘 뜻하는지 네놈이 모르진 않겠지? 마서 레미하람?)
* * *
“와 고새 사라졌네? 시안 이 녀석 대체 어디로 간 거야?”
길이라곤 갈림길 하나 없는 외길이었지만, 번개도 저리 가라 할법한 속도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쫓는 걸 포기한 세트는 뭔가 허탈함을 느꼈는지 그 자리에서 대뜸 몸을 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그 마법사 놈들이나 붙잡을 걸 그랬나? 무슨 꿍꿍이를 갖고 있었는지 심문이라도…….”
(내 목소리 들리는가? 샤하르칸 일족이여…….)
순간,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희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들리면 대답해라.)
다소 무례하면서도 가차 없는 말투였다.
“뭐야? 당신 뭔데 남의 머릿속에다 대고 소리를 울려?”
(……문제없는 것 같군.)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다짜고짜 나타난 것도 모자라,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진 것에 화가 났는지 세트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너 그놈이지? 이따금씩 나타나 내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던 놈! 언제 한 번 걸리기만 해라? 내가 아주 작살을…!”
사방에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난동을 부리던 것도 잠시, 석화 마법이라도 걸린 듯 세트의 몸이 한순간 멈춰버렸다.
“후…….”
차분하게 내쉰 한숨과 함께 그의 주변으로 모래바람이 일었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와 벌어진 입술.
마치 영혼 빠진 껍데기마냥 허공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 것도 잠시, 세트의 시선이 다시금 정면으로 향했다.
-씨익
거친 모래 알갱이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비열한 웃음.
그 의미 불명한 웃음을 머금은 채, 세트는 앞으로 나아갔다.
* * *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거였다.
이 황당하고도 해괴한 상황에서 난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꿀 먹은 석고상이 되셨나? 어째 말이 없네 우리 주인?]
케이람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된 목소리로 나를 조롱하고 있었다.
이제 와 부정하거나, 잡아떼는 건 무의미하겠지.
이 당돌한 후배님은 이미 다 캐치했을 것이다.
겉으론 새삼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가, 속으론 무척이나 당황했다는 것을.
아카데미에서 납치당한 자신을 구해주고, 성장을 억제시키고 있던 하트 커브를 해제시켜준 장본인이 누구였는지.
저 확신에 찬 표정에서 그녀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 말이라도 해주세요. 계속 이렇게 껴안고만 있으실 게 아니라면요.”
슬그머니 손을 빼 그녀의 몸을 놔주었다.
“아쉽네요. 사실 이편도 나쁘진 않았는데…….”
루나브는 먼지 묻은 몸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문이 닫힐 만큼 당황하는 것도 잠깐이면 족하다.
애초에 내가 말할 이유가 있나?
내가 힘을 숨긴 회귀자라서 구할 수 있었고, 되도 않는 동정심이 생겨 수명을 연장시켜 줬다고 구구절절 설명이라도 해줘야 해?
그럴 필요 없다.
내 마음이 결정해서, 내 손으로, 내가 직접 운명을 바꾼 여자다.
그 바뀐 운명의 여로가 나에게 위협이 된다면,
더 망설일 것 없이 죽여야겠지.
원래 나아갔어야 할 운명으로 다시 뒤틀어버리면 그만이다.
“눈빛이 바뀌셨네요? 절 죽이기라도 하실 건가요?”
하여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
그러면서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요? 전 선배의 비밀을 아무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는데? 선배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전 죽어야 하나요?”
발설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알고 있다는 게 문제인 거지.
뭐라 할 생각은 없다.
그저 내 같잖은 동정심이 꼬리를 물고 늘어져 지금의 사태를 만들어낸 것이니.
이것은 전적으로 내 책임.
그러니 내가 해결하겠다는 것이다.
“조금 억울한데요? 겨우 이 정도 알았다 해서 죽을 거였으면, 차라리 선배가 가진 비밀을 더 캐볼 걸 그랬어요. 난 아직 선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전 선배 손에 죽어야만 하는 건가요?”
“……뭐가 궁금한데?”
한 번 떠들어보란 식으로 나지막이 물었다.
“저 왜 구해주셨어요?”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어차피 죽일 거였으면, 왜 저를 납치범들로부터 구해주시고, 왜 제 몸에서 하트 커브를 떼어주셨으며, 왜 제 인생을 바꿔주셨나요?”
조곤조곤하면서도 명료한 목소리로 그녀가 나를 몰아붙였다.
왜 구해줬냐고?
그래, 솔직히 말하면 너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나에겐 아무런 이득이 없었지.
학회라고 하는 울타리에 평생 갇혀 무슨 실험을 당하든 내 알 바 아니었으며, 반대파 세력에 납치되어 무기력하게 끌려가든 말든 그것도 내 알 바 아니었지.
하다못해 조금 전 카론의 말마따나, 널 못 본 척 조용히 지나갔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
왜냐고?
애초에 너랑 난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아무런 접점이 없었으니까.
길을 내어줬을 뿐이라는 명목으로 지금껏 네게 해주었던 모든 일은,
그저 내 하찮은 변심에서 시작했을 뿐이다.
너는 처음부터 내게 그저 그런 존재였을 뿐.
내 육신을 던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하는 그런 소중한 존재가 아니다.
“아무 이유 없어.”
“…….”
기대했던 답변이 아니었는지,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세워졌다.
“나조차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니까.”
“……최악의 답변이네요.”
절대로 듣고 싶지 않은 대답을 들어서일까?
루나브는 맥 빠진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늘 말하지 않았는가? 난 구원자가 아니라고.
길을 내어줬다 해서 올바르게 가라고 인도하진 않는다.
내게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원했는진 모르지만, 난 너희가 바라는 소망 따위를 절대로 이뤄주지 않는다.
내 진면은 어둠을 밝혀주는 빛이 아닌, 그런 빛을 가려주는 어두운 안개와도 같으니까.
-쿵쿵
머리가 복잡해지는 와중 뒤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이 아닌, 마수가 걸어오는 듯한 묵직한 발소리.
허나 느껴지는 인기척이 굉장히 익숙했다.
지금 이 유적 안에 있는 인간 중 저런 발소리를 낼법한 자는 한 놈밖에 없겠지.
“…….”
발소리만 들렸을 땐 그냥 놈이 오는구나 싶었는데, 통로 어둠 속에서 드러난 녀석의 완전한 모습을 본 순간,
“……?”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저게… 바보 왕자라고?
“세, 세트 선배?”
루나브 또한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발록을 조우했을 때만 해도 쾌활했던 녀석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진 상태.
지금 저 육중한 몸에서 느껴지는 건.
누군갈 죽이고자 하는 지독한 살기뿐이었다.
-쐐액!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녀석이 나를 향해 질주했다.
-쾅!
바위끼리 부딪쳐도 이런 소리는 안 날 것이다.
힘과 체중이 실린 무지막지한 주먹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으며, 나는 그 즉시 손을 들어 올려 방어했다.
“선배!”
이 무지성 바보 왕자의 힘이 어마무시하다는 알고 있었지만, 어째 생각했던 것 이상이다.
이건 인간이 단순히 육체를 단련해서 이끌어 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다.
근력도, 마력도 아닌 또 다른 미지의 힘이 지금 녀석의 주먹에 담겨 있었다.
-휘릭
잡은 주먹을 비튼 뒤, 그대로 튀어 올라 오른발로 그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아무런 방어수단 없이 정통으로 얻어맞은 녀석의 몸이 그대로 벽에 처박혔다.
-후두둑
벽이 부서지면서 잔해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죽진 않았을 거다.
적어도 저놈의 머리가 저 유적의 벽보단 단단할 테니.
“…….”
아니나 다를까 바로 일어났다.
주먹을 휘둘렀을 때부터 알았지만, 이 바보 왕자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학회 놈들에게 정신지배라도 당한 걸까?
허나 그렇다고 하기엔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지? 저 육중한 머리 위로 돌이 떨어지기라도 했나?
이건 뭐 가뜩이나 정상이 아닌 놈이 더 이상해진…….
“성스러운 빛의 은총이 우리를 지킬 것이니…….”
등 뒤에서 들려온 주문과 함께 세트의 앞으로 새하얀 마법의 벽이 드리워졌다.
나는 뭔가에 이끌리듯 바로 고개를 돌렸다.
“세트 선배.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죠?”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은 무덤덤한 얼굴로 마법을 시전 중인 상태였다.
“뭐하는 거야? 너 남아있는 마나도 없잖아.”
“한숨 자고 났더니, 어느 정도 회복됐어요. 뭐 풀 컨디션이었다 해도 저 바보 선배의 괴력을 막아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거짓말이다.
저 부들대고 있는 손을 봐라.
아까와 마찬가지로 적게나마 회복된 마나를 전부 끌어 모은 것이다.
저러면 얼마 가지 않아 또 기절하게 될 것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세트 선배는 저희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죠? 막지 않으면 꼼짝없이 당할 것 같고요.”
“…….”
“일단 세트 선배부터 막는 게 어떨까요? 절 죽이는 거에 대해선 조금 있다 생각하시고요. 어차피 죽을 거라면 차라리 세트 선배 손에 죽는 것보다, 선배 손에 죽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어이가 없어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도 참 한결같은 후배님이로군.
그녀는 뭐가 문제냐는 듯 나를 향해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