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5화. 그를 위한 흐름 (5)
“…….”
뭔가가 볼살을 찌른 듯한 묘한 느낌에 정신이 확 깼다.
지금 기분을 표현하자면 바닥이 안 보이는 심해 깊은 곳에 홀로 떨어지는 느낌?
실로 공허하면서도 무기력한 기분이다.
주변에 뭐가 있는지 눈을 떠서 확인해봐야 하는데, 딱히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떠봐야 달라지는 게 뭐 있겠는가?
성검의 아공간을 부수느라 정신이 극도로 망가져 버린 상태에서 마왕과 싸우는 건 누가 봐도 무모한 짓이었다.
케이람이 나무라는 것도 당연했지.
하지만 난 가야 했다.
내가 안 가면 결국 마왕은 다른 인간들을 죽일 것이며, 그 학살을 끝낼 수 있는 이는 나 아니면 없었다.
나름 아무 생각 없이 간 것도 아니다.
이래 봬도 그 최악의 상황에서 나름 플랜을 다 세운 거 아니겠는가?
마왕이 내 목숨을 끊으려는 절명의 상황에서 난 케이람에게 내 영혼을 바치고, 육체를 그냥 떠넘겼다.
마지막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못 본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굳이 신경 써봐야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젠 내 몸도 아닌데.
난 분명히 케이람과 약속도 지켰다.
그녀를 절대 희생시키게 하진 않을 거라 했던, 바로 그 약속을 말이다.
내 몸 자체를 그냥 완전히 주었으니, 이후엔 뭐 알아서 싸울 거라 본다.
마수의 피로 다져진 육체, 암살자의 감각, 검은 안개 신의 힘까지 그녀의 주도하에 전부 다룬다면, 제아무리 사검을 지닌 마왕이라 해도 못 이기진 않을 것이다.
“…….”
근데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분명 내 영혼을 먹어 치우라고 했을 텐데, 난 왜 아직 정신이 남아있는 거지?
이거 내가 몸을 안 움직이려 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움직일 수도 있다.
봐라.
이렇게 양팔, 양다리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가?
거기에 눈꺼풀로 닫혀 있던 눈동자 너머로 짤막한 빛이 발하는 것까지 느껴졌다.
그 빛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떴다.
“…….”
어, 그러니까 여긴.
암만 봐도 마계는 아니다.
불어오는 공기 자체가 확연히 다른 이곳은 엄연한 인계.
익숙한 장소는 아닌데, 그리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도 아니었다.
-휘이잉
처량하게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메마른 피 냄새가 풍겨왔다.
익숙한 냄새를 따라 자연스레 앞으로 나아갔지만, 몇 걸음 안 가 바로 멈췄다.
아, 기억났다
여기는 전현생을 통틀어 가장 최악의 장소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우시프 제국의 수도 세벨리너스 근교.
주변이 푸른 잎으로 뒤덮인 이름 없는 숲 한가운데.
왠지 모르게 낯익은 시체 한 구가 보였다.
두 손목이 절단된 채, 전신에서 피를 흘리며 쓸쓸하게 쓰러져 있는 남자.
바로 나다.
주변엔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내 시체 하나만 비참하게 놓여 있었다.
뭘까?
내가 지금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그렇다기엔 너무 생생한데?
일단 정체가 뭐든 간에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이란 건 알겠다.
나를 습격했던 수많은 기사, 암살자, 마법사들도.
그들을 지휘했던 보리스도,
내 숨통을 직접적으로 끊었던 성검과 그의 주인까지.
그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날 죽인 이후에 처리도 안 하고 그냥 방치한 건가?
뭐 절대 좋은 의도로 내버려두진 않았겠지.
지나가는 짐승들이 처리하도록 놔뒀거나, 아님 제국의 기사가 괴한에게 암살당했다는 거짓 사건을 꾸며, 또 다른 누군가를 처리하는 데 이용했을 것이다.
그 악마라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그래서 지금 의문은 이 처참한 기억이 왜 내 앞에 펼쳐져 있냐는 거다.
사람은 죽기 전 평생의 기억이 바람처럼 지나간다는데, 지금 그 상황이 펼쳐져 있는 건가?
이걸 대체 뭐라고 봐야…….
-스슥
불현듯 내 시체가 자리하고 있는 반대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나무 한쪽에 몸을 숨겼다.
이내 전신에 망토를 두른 낯선 누군가가 내 시체 곁으로 다가왔다.
얼굴까지 후드로 가리고 있어 정체를 파악할 순 없었다.
하지만 걸음걸이로 보나, 전체적인 외형으로 보나, 평범한 체구를 가진 여인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누구지?
내 시체를 뒤늦게 처리하기 위해 보낸 마법사인가?
그렇다면 혼자 오진 않았을 텐데?
혹여 주변에 다른 수호 기사나 동행인은 없는지 살펴봤지만, 딱히 보이진 않았다.
그녀는 내 시체를 태운다거나, 아님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거나 하지 않은 채, 한 1분 정도 멀뚱히 내 시체를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대뜸 털썩 주저앉는가 싶더니,
“……!”
내 시체를 부여잡으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당황스럽다.
뭐야 저 여자?
누군데 남의 시체를 부여잡고선 저리 서럽게 우는 거야?
딱히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난 저 당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만한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부인은커녕 애인도 없었지.
당장 평생을 헌신했던 형제에게 뒤통수까지 맞은 마당에 대체 누가 나를 위해 저리 운단 말인가?
이것이 정말 전생의 내가 죽은 이후에 벌어진 상황인지, 아님 악몽과도 같은 환상인진 모르겠지만,
저 여인의 얼굴을 꼭 확인해보고 싶단 생각이 내면에서 강하게 피어올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성큼성큼 아예 대놓고 기척을 내며 다가갔지만, 그녀는 내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있다는 의식 자체를 못 하는 듯 보였다.
이에 몸을 숙여 내 시체에 파묻은 그 얼굴을 확인하려는 순간,
“도련님…….”
전혀 예상치 못한 소리를 듣고선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뭐야?
이 여자,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정말 죄송해요. 도련님…….”
도련님. 도련님이란다.
전생에서 베르트가 저택을 떠난 이후, 나를 도련님이라고 부를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었는데?
이 정체 모를 여자는 분명 내 시체를 안으며 도련님이라고 말했다.
아니지.
이쯤 되면 정체를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이 익숙한 목소리, 이 익숙한 울림, 이 익숙한 분위기.
이 여자는 분명…….
“에밀리?”
내 당혹스러운 부름에도 그녀는 나를 봐주지 않았다.
그저 차갑게 변색 된 내 시체를 보며 한없이 흐느낄 뿐.
* * *
-후우웅
“여기는?”
“다시 돌아온 모양이에요.”
전이 마법을 통해 다시 아렘에 돌아온 세 여인.
딱 전이되기 전, 나겔과 마주쳤던 바로 그 지점이었다.
-퍼엉!
상황을 정리할 새도 없이, 주거지 중심부에서 강한 폭음이 들렸다.
뭔 일이 벌어졌는진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세 여인은 직감적으로 시안 혹은 마왕과 관련된 일이라고 확신했다.
“파파가 왔나 봐!”
시안의 기운을 가장 먼저 감지한 나나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루나브 역시 시안의 냄새를 맡고선 눈을 선명하게 밝혔다.
“얼른 가자 언니!”
“자, 잠깐 기다려 나나야!”
아린이 말릴 새도 없이 나나는 부리나케 시안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쿵
하지만 얼마 못 가 뭔가에 부딪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괜찮아?”
나나를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뒤따라온 루나브는 허공에 투명한 장막이 일렁이는 것을 보고선 눈살을 찌푸렸다.
“제한 결계에요.”
정황상 나겔이 데빌 드래곤들에게 지시했던 그 결계로 보였다.
“피해가 번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아무래도 이중으로 생성한 모양인데, 공교롭게도 저희 앞에서 딱 막혀버렸어요.”
“해제할 순 없는 거야?”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좀 걸려요. 드래곤의 결계면 못 해도 몇 시간이…….”
-피잉
그 순간, 앞을 막고 있던 결계에서 짤막한 빛이 일었다.
물결 퍼지듯 번지는가 싶더니, 이내 사람 한 명이 통과할 만큼의 작은 틈이 생성되었다.
“이제 들어갈 수 있는 거지?”
아린과 루나브는 놀란 눈으로 나나를 쳐다보았다.
“어, 어떻게 한 거야 나나야?”
“몰라? 그냥 혹시나 해서 손을 대봤는데 알아서 열리네?”
나나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빨리 가자! 파파가 기다려!”
“기다려요.”
또 다시 급하게 나아가려는 나나를 루나브가 팔을 잡으며 말렸다.
“무턱대고 가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정말로 선배가 저 안에서 마왕과 싸우고 있다면, 가서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는 확실하게 정하고 가야 해요. 정말 방해라도 되지 않으려면…….”
“우리가 어떤 식으로 도울지 미리 정하고 가자는 거지?”
“방향을 어떻게 정하냐에 따라 선배를 도울 방법도 달라지겠죠.”
“방향?”
“선배를 구해 다 같이 살아나가는 쪽으로 갈지, 아님 선배를 도와 마왕을 죽이는 쪽으로 갈지……. 그거부터 정하는 게 우선이겠네요.”
마왕을 죽인다는 말에 아린은 몸을 흠칫 떨었다.
“굳이 따진다면 두 번째가 더 가능성 있어 보여요. 애초에 그 마왕이 살아있는 상태에서, 온전히 인계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까.”
그마저도 사실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이미 마왕과 직접 대면하면서 느끼지 않았는가?
마주 선 것만으로도 죽음 이상의 공포가 느껴지는 그의 엄청난 기세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순 없는 걸까? 그 누구도 다치지 않고?”
“지금 상황에서 그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호, 혹시 루나브님이십니까?”
자신을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에 루나브는 바로 고개를 돌렸다.
“……!”
익숙한 누군가를 발견한 루나브는 눈을 의심한 나머지 미간을 찌푸렸다.
아린과 나나도 덩달아 고개를 돌렸지만, 루나브와 다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세 여인이 있는 곳으로부터 정확히 스무 걸음 떨어진 위치.
거기에 마왕성의 총지배인 로저스와,
“베스티?”
벨카리온의 반려자 베스티가 자리하고 있었다.
* * *
-쾅! 쾅! 쾅!
이전보다 훨씬 더 빨라진 속도, 강해진 힘, 흘러나오는 분위기까지.
각성한 시안은 그야말로 완전 다른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검이 부딪힐 때마다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허나 두 남자의 입에선 하나 같이 희열에 젖은 미소가 가득했다.
“무검(霧劍): 검은 선혈의 가무(歌舞)!”
몸을 되찾은 안개의 무희가 검과 함께 허공에 매혹적인 곡선을 그리니, 그 곡선은 곧 수십 개의 검기가 되어 벨카리온의 전신을 덮쳤다.
빠르게 엄습하는 검기를 마왕은 사검으로 전부 걷어냈다.
-우우웅
방어에 멈추지 않고, 벨카리온은 바로 반격을 이었다.
몸에서 생성된 어마어마한 양의 마기를 사검에 전승했으며, 태양처럼 붉게 타오르는 그 검을 케이람을 향해 매섭게 휘둘렀다.
케이람은 피하지 않고 그 일격을 받아주었다.
-쾅!
그 맹렬한 격돌에 주변에 거센 파장이 일었다.
“인계에 너 같은 놈들이 널려 있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니? 지 한 몸도 제대로 간수 못 해 빌빌대는 머저리들 천지지. 얘가 특별한 거야.”
“너 암만 봐도 시안 같지 않은데? 지금 네 몸엔 누가 있는 거냐?”
“네 손에 쥐고 있는 그 잘난 검에게 물어보지 그래?”
케이람은은 살벌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좀 전에 말했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고. 너라는 같잖은 놈 하나 때문에 내가 이럴 수밖에 없었단 사실이 너무 짜증 나!”
감정에 동요된 시안의 손에서 미약한 떨림이 일었다.
“그냥 끝내자 빨리. 이 누나가 끝을 내줘야 하는 놈들이 지금 너 하나만 있는 게 아니거든?”
검을 튕겨낸 케이람은 잠시 뒤로 물렀다.
이내 그녀가 잠식한 시안의 몸에서 또 다시 다량의 검은 안개가 분출되었다.
이에 질세라 벨카리온 역시 더 강한 마기를 끌어 올렸다.
마지막 일격을 위한 최후의 준비를 서로 시작한 것이다.
서로의 눈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렇게 승부를 결정지을 마지막 일격이 이루어지려는 순간,
“시안!!”
“벨카리온!!”
서로를 향한 간절한 외침에 그들은 거짓말처럼 동작을 멈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