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자신을 미끼로 적을 유인하려는 한수호의 계획은 절반만 적중했다.
놈들도 특급 이상의 마공사인데다가 그중에는 탐색 특성을 가진 자도 포함되어 있기에 멀리서도 한수호 가족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가족 중 누군가가 혼자 떨어져 나오자 당연히 한철형이라고 생각했는지 15명이 일제히 방향을 꺾어 그 인물을 뒤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머지 11명은 여전히 가족의 뒤를 쫓았다.
‘이 정도면 충분해.’
좀 더 많은 인원이 이쪽으로 움직이지 않은 것이 조금 아쉬웠지만, 부모님이라면 11명의 추격을 충분히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한수호는 가족이 움직이는 방향과 정반대로 움직였다.
누가 봐도 어그로를 끄는 뻔한 움직임. 하지만, 적들은 어그로를 끄는 인물이 한철형이라고 확신하는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뒤쫓고 있었다.
한수호가 쉬지 않고 뛰기 시작한 지 벌써 10분.
이제 20분만 더 지나면 광폭화는 풀리고, 지금과 같은 속도로 도망칠 수 없게 된다.
그때가 되면 정말 죽음을 각오해야 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은 없다.’
한수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자신이 죽고 가족 모두가 산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행복한 결말이었으니까.
그렇게 다시 5분여가 흘렀을 때, 한수호는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적들과 조우해야 했다.
사사삭
멀지 않은 곳에서 풀잎을 스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벌써 여기까지 왔어?’
살짝 놀랐지만 그렇다고 경악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라도 죽인다!’
자신을 따라온 적들을 최대한 이곳에 붙잡아 놓고, 혹시 한둘 정도라도 쓰러뜨릴 수 있다면 그 또한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몸은 9살의 것이지만, 그 안에 든 영혼은 26살의 노련한 진급 마공사였기에 암습자 한둘 정도는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17년 뒤인 2057년. 원래 한수호는 코드네임 777로 불리는 지원 요원에 불과했다.
하지만, 실질적인 능력으로 따지면 당시 최강의 요원으로 인정받던 코드네임 111과 대등하다는 평가를 받던 한수호였다.
게다가 이곳의 적들은 한수호를 한철형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뒤통수를 치기에도 딱 좋았다.
한수호의 아버지, 한철형의 코드네임은 311.
전투 요원이라는 의미의 3과 고유 번호 1, 그리고 근접 전사형 요원을 뜻하는 1의 코드네임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한철형이었다.
보통 전투 요원은 작전지휘부의 지시를 받아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르기 때문에 암습이나, 은폐, 함정 같은 것에 서투르기 마련이다.
경험은 무시할 수 없지만 근접 전투만을 해온 한철형이기에 적들은 상대하기 쉬울 거라고 오판하고 있으리라.
‘그때도 아버지가 저돌적으로 덤비지만 않았어도….’
17년 전의 과거, 한철형은 적을 유인하기 위해 미끼를 자처했지만 너무 직선적인 움직임으로 인해 쉽게 적들에게 포위당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쫓기는 건 한수호였고, 그의 움직임은 한철형처럼 직선적이지 않았으니까.
* * *
우득
나무 위에서 뚝 떨어진 검은 그림자에게 목이 반대로 꺾인 가면 사내가 풀썩 쓰러졌다.
‘이제 둘.’
가면을 벗겨봤지만 역시나 전혀 모르는 얼굴이었다.
작은 그림자는 시체의 몸에서 몇 가지 무기를 챙기고 재빠르게 그 자리를 떴다.
그가 떠나자마자 그 자리로 세 개의 인영이 나타났다.
“시발, 한철형이 이런 짓거리를 한다고?”
이마에 붉은 꽃잎 두 장이 그려진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사내 하나가 목이 부러진 시체를 살피며 욕설을 퍼부었다.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거 같다.”
또 다른 가면 사내의 말.
그는 먼저 말했던 사내와 달리 가면에 붉은 꽃잎 세 장이 그려져 있었다.
“잘못 생각했다고?”
“우리가 쫓는 자는 한철형이 아니라 이태희인 것 같군.”
“이태희라니? 한철형, 그 고지식한 놈이 자기 아내를 미끼로 내몰았다 이거야?”
꽃잎 두 장의 사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발자국을 보면, 발이 작고 보폭도 너무 좁아. 190이나 되는 큰 덩치가 절대 아니라는 소리지.”
“그건 얼마든지 그렇게 꾸밀 수 있습니다. 우릴 헷갈리게 만들려는 작전이 아닐까요?”
이번엔 꽃잎 한 장이 그려진 가면인의 말이었다. 그런데 여인의 음성이었다.
“놈은 검을 쓰지도 않고 있다. 소리를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단숨에 절명시키는 수법을 썼지.”
무기로 적을 죽이려면 소음이 날 수밖에 없다.
심장을 찌르거나 목을 벤다고 해도 죽기 전에 비명을 남길 여지가 충분히 있으니까.
정말 은밀하게 접근해 상대의 입을 틀어막고 검으로 목을 베는 게 아니고서는 목을 한 번에 비틀어 죽이는 게 가장 조용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기도 했고.
“우리가 쫓는 게 이태희라면, 저쪽에 인원을 보충시켜야 해.”
“그럴 필요 없다.”
“….?”
꽃잎 두 장의 사내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꽃잎 세 장의 사내가 조용히 속삭였다.
“그쪽으로는 그분이 가셨다.”
“오! 그럼 다행이군.”
“그러니 우린 이대로 이태희를 잡아 죽이면 되는 거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귀신처럼 사라졌다.
잠시 후, 무성한 수풀이 슥 벌어지며 작은 그림자가 빠져나왔다.
온 얼굴과 손은 물론 이빨까지도 잔뜩 검은 칠을 한 한수호였다.
그는 그곳에서 사라지는 척하고 다시 돌아와 가면인들의 동태를 살폈던 것이다.
‘그분? 그분이 대체 누구지?’
가면인들이 말한 그분이라는 인물이 이 암살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급한 일이 있었다.
‘가족이 위험해!’
가면인들이 지원 병력을 보내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는 건, 그분이라는 존재가 굉장한 강자라는 의미였다.
한수호는 다시 방향을 틀었다.
이제는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위험을 알려야 했다.
그런데, 그런 한수호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이 있었다.
휘휘휙
발길을 되돌린 지 몇 분 되지도 않았는데, 한수호가 향하는 길목에 적들이 미리 매복하고 있었던 것.
“허. 요것 봐라? 한철형도 아니고, 이태희도 아니었네?”
꽃잎 두 장이 그려진 가면인이 한수호를 흘겨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조장님 말씀처럼 정말로 방향을 돌렸네요. 이런 꼬맹이가 우리 이야기를 숨어서 엿듣고 있을 줄은 정말 몰랐는데….”
이번엔 꽃잎 한 장짜리 여인의 말이었다.
‘당했어.’
한수호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들은 평범한 암습자들이 아니었다.
한수호가 한 수를 내다보고 있을 때, 이들은 두 수를 내다보며 오히려 함정을 팠다.
적을 너무 쉽게 본 한수호의 명백한 실수였다.
“어린놈이 대단하군. 저 나이에 우리의 추적을 따돌리고 역습까지 가하다니. 이미 자연 각성을 한 모양이야.”
꽃잎 세 장짜리 가면인은 한수호를 보며 감탄 어린 말을 내뱉었다.
“자연 각성? 그건 불가능해. 옛날이라면 모를까, 최근 10년 동안 자연 각성한 마공사는 등장한 적이 없다고. 눈깔이 빨갛고, 나이에 비해 몸이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걸 보니, 육체 강화 쪽 포션을 마신 모양인데?”
“흐음. 그런가?”
이들은 한수호를 이미 낚아 올린 물고기라고 생각하는지 이리저리 뜯어보며 각자 의견을 내놓고 있었다.
모두 똑같은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지닌 무기는 각양각색이었다. 그리고 가면에 그려진 꽃잎의 개수가 모두 달랐다.
꽃잎의 개수가 많을수록 높은 위치에 있는 인물인 것으로 보였다.
쫓고 있던 적이 9살의 꼬마라는 걸 알아서일까? 가면인들의 주의력이 한순간 흐트러졌다.
‘기회다!’
한수호는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13명의 포위망 속에서 가장 약한 곳을 빠르게 파악했다.
파박
한수호는 지체 없이 한쪽을 향해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곳엔 꽃잎 한 장이 그려진 가면인이 있었다. 그는 다른 가면인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듣다가 한수호의 기습을 받고 말았다.
고작 9살의 꼬마 한수호.
하지만 광폭화 2단계로 기존의 두 배나 되는 마나력에 강력한 육체까지 얻은 한수호의 힘은 특급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가면인이 머리를 향해 날아드는 주먹을 막기 위해 급히 손을 올려 방어한 그 순간.
퍼억
엉뚱하게 그의 낭심에 큰 충격이 가해졌다.
“흐억!”
가면인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 틈에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려는 그때.
“재롱은 거기까지.”
어느새 꽃잎 세 장짜리 가면인이 한수호의 정면에 나타나 기이한 검술을 펼쳐냈다.
촤라라라락
전방을 모두 뒤덮는 수많은 검의 꽃.
본능적으로 어떤 검부터 막아야 하는지 느낀 한수호는 적에게 빼앗은 무기를 벼락처럼 휘둘렀다.
카가가가강
어둠 속에서 쇠와 쇠가 부딪치며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상대의 힘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멀리 튕겨 나가 바닥을 나뒹굴고 말았다.
너무도 강력한 파괴력에 손아귀가 찢어졌지만, 한수호는 벌떡 일어나 구멍 난 포위망 쪽으로 내달렸다.
“조장! 뭐해? 놈이 튄다고!”
한 가면인이 외치자 잠시 멍하니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꽃잎 세 장의 가면인이 고개를 흔들며 소리쳤다.
“당장 잡아 죽여! 절대 살려두지 마라!”
사내는 무서운 속도로 한수호의 뒤를 뒤쫓았다. 그런 가면인의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했다.
‘9살짜리가 내 특성, 매화만개를 버텨냈어?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살심이 진하게 피어올랐다.
원래 그는 이번 작전에 반강제로 투입된 상태였고, 이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급 이상의 마공사 26명이 한 가족을 무참히 살해해야 하는 작전인데 그라고 어찌 마음이 편할까.
하지만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
방금 전 아이를 상대로 3할의 마나력만 사용했지만, 그건 특급 마공사라 할지라도 가볍게 받아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9살짜리 소년이 그걸 받아내고도 멀쩡한 모습으로 도망을 쳤다.
‘싹을 잘라야 해.’
이 녀석을 살려뒀다간 엄청난 마공사로 성장할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전에 없던 살심이 사내의 정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 * *
“크헉!”
꽃잎 한 장이 그려진 가면인이 답답한 신음성을 흘리며 푹 고꾸라졌다.
그의 가슴에 꽂힌 장검 하나가 등을 뚫고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그 사내 앞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9살 소년.
소년의 옷은 잔뜩 찢겨나갔고, 손과 발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왔다.
“헉, 헉….”
한수호는 결국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애초에 이 유인 작전에서 멀쩡히 살아날 거라고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었다. 사실 적 세 명을 자신의 힘으로 쓰러뜨린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여기까지구나.’
한수호는 피를 흘리면서도 웃었다.
가족이 안전하다는 걸 확인한 건 아니었지만, 부모님이라면 11명의 가면인들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다만, 이들이 말한 ‘그분’이 얼마나 강력한지가 걱정될 뿐.
“지독한 꼬맹이군.”
꽃잎 두 장의 가면인은 가면을 살짝 들어 올려 퉤 하고 핏물을 내뱉었다.
한수호의 마지막 발악에 얼굴을 정통으로 얻어맞아 피가 고인 것이다.
“이놈의 꼬맹이는 도대체 뭔 놈의 포션을 마셨길래 이 정도야?”
가면인은 어느새 본래의 작은 체구로 돌아온 한수호를 노려봤다.
이것이 광폭화 특성에 의한 것임을 모르는 그는, 그저 한수호가 특별한 포션을 먹고 잠시 힘을 얻었다가 다시 잃어버린 거로 생각했다.
“포션이 아닐 수도 있다.”
“자연 각성 아니라니까 그러네. 아, 됐고. 빨리 처리하고 합류나 하자고.”
“마무리는 내가 짓지.”
꽃잎 세 장이 그려진 가면인은 예의 그 장검을 들고 한수호에게 다가섰다.
“네 저승길이 외롭지 않게 가족들도 곧 보내주마.”
이 말에 한수호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아직 모두 살아있구나!’
누군가 하나라도 죽었다면 사내가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들도 곧 저승으로 보내주겠다는 말은, 반대로 그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의미였으니까.
한수호의 눈빛에서 이상함을 느낀 가면인은 더는 말하지 않고 손을 벼락처럼 휘둘렀다.
목표는 소년의 목.
고통 없이 목을 잘라 깨끗하게 보내주려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작스럽게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더니 가면인의 바로 앞으로 강렬한 뇌전이 떨어져 내렸다.
콰지직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에 검을 쥔 손이 크게 흔들렸고, 검은 한수호의 목이 아닌 어깨를 세차게 긋고 지나갔다.
“악!”
한수호가 어깨를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뼈까지 상하진 않았지만 어깨의 살이 뭉텅이로 베인 건지 손가락 틈으로 진득한 핏물이 후두둑 쏟아져 내렸다.
바로 그 순간, 이곳에 있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엄청난 속도의 뭔가가 한수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한수호가 사라졌다.
“뭐, 뭐야? 놈이 사라졌어!”
“빨리 찾아!”
가면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꽃잎 세 장이 새겨진 가면인이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 쥔 채 크게 소리쳤다.
“반드시 찾아라. 무슨 수를 써서든 놈을 찾아 죽이라고!”
가면인은 흉악한 눈빛이 되어 새까맣게 타버린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어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