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20분 정도가 지났을 때, 창고 문이 열리며 화사한 외모를 지닌 젊은 여자가 뛰어 들어왔다.
“기환 씨! 외부인을 왜 여기까지 데려왔어요?”
창고 안에 한수호가 있는 걸 보더니 바로 소리부터 친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한수호가 내놨다.
“제가 찾아온 거니 화내지 마시죠.”
이민경은 한수호를 빤히 바라봤다. 얼굴을 살피고 몸을 훑더니 입꼬리가 살짝 휜다.
은밀하게 혀로 입술을 핥기까지 했다.
“어린 학생 같은데, 학교에서 공부는 안 하고 기환 씨는 왜 찾은 거지?”
언행 불일치.
말은 그랬지만 눈은 끊임없이 한수호를 훑고 있었다.
“몬스터봇에 쓰이는 아크로 기술을 배워볼까 해서요. 누나는 모르나 보네. 기환이 형의 아크로 기술이 하이테크 바닥에서 얼마나 유명한지.”
“유명? 웃기는 소리 하지 마. 기환 씨가 만든 봇은 특무부 한 곳하고만 거래되고 있고, 제작자가 누구인지는 철저히 비밀로 하기로 약속….”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문다.
한수호의 묘한 웃음에서 자신이 말장난에 넘어갔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한편, 한수호는 이민경을 바라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역시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이민경은 일반인이 아니었다.
신체 각 부위의 수치가 적은 곳은 50이고, 높은 곳은 60이 넘는다.
결정적으로 심장이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특급 마공사.
22살밖에 안 된다고 하는데 벌써 특급이라니.
그렇다고 아카데미 학생도 아니다.
젊은 특급 마공사가 힘을 숨긴 채 동사무소에서 일한다?
여기서부터 크게 잘못되어 있었다.
“이제 정체를 밝히는 게 어때요? 당신…. 정체가 뭡니까?”
상대가 정체를 숨긴 마공사이고, 한수호가 상상하는 그런 쪽 인물이라면 꽤 위험하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힘숨찐, 뭐 이런 건가? 아니면, 기력 좋은 사내 하나 옆에 끼고 맘 편하게 마음껏 기력을 빨아먹는 흡정귀 같은, 그런 거?”
“…?”
이민경은 아무 대답 없이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에 사기환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이민경을 바라봤다.
“아니지? 이 학생 말처럼 마공사면서 아닌 척 신분을 숨기고 날 가지고 놀았다는 거…. 착각한 거 맞지?”
한수호는 사기환의 몸 상태를 체크한 뒤 이민경을 기다리며 예상되는 시나리오를 미리 알려줬다.
당연히 사기환은 믿지 않았고, 직접 지켜보라는 말에도 잠자코 있었다.
그런데 한수호가 정체를 밝히는데도 아무런 말이 없다.
사기환은 이민경이 사실을 인정한 게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기환 씨. 설마 이 어린 학생이 제 맘대로 떠드는 소릴 믿는 거야? 나 이민경이야. 기환 씨랑 2년을 함께 살아온 평범한 이민경이라고!”
이민경은 끝까지 정체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한수호에겐 그녀의 정체를 밝힐 방법이 있었다.
“정 그렇다면야 할 수 없네요.”
한수호가 웃으며 이민경 쪽으로 한발 슥 내밀었다. 순간.
슉
한수호의 모습이 잔상을 흘리며 미끄러지듯이 이민경에게 다가갔다. 더불어 그의 주먹이 이민경의 얼굴을 향해 섬전처럼 날아갔다.
이를 본 이민경의 눈이 확 커졌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꿍꿍이인지 아무 대응 없이 눈을 꽉 감아버렸다.
한수호의 주먹은 그녀의 얼굴 한 치 앞에서 딱 멈췄다.
주먹은 멈췄지만 공기가 훅 밀려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역시 이 정도로는 소용없다 이거군.’
한수호는 위협적인 공격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 이민경의 대담함에 살짝 감탄했지만 진짜 공격은 따로 있었다.
그대로 이민경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손목을 통해 벼락의 힘을 밀어 넣었다.
빠지직
이민경의 손목에서부터 팔뚝까지 스파크가 팍 튀었고 그녀는 억지로 참아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이 힘은 마나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을 안겨준다.
빠지지직
더욱 강한 스파크가 그녀의 머리에까지 도달하자, 그녀는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한수호를 노려봤다. 그리고, 결국 본성이 드러났다.
“내 몸에서 손 떼!”
악다구니를 내지르며 이민경이 한수호의 손을 뿌리쳤고, 귀신 같은 움직임으로 주르륵 미끄러지며 물러났다.
이를 본 한수호는 씨익 웃음을 그렸다.
어김없이 그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
이민경은 낭패한 표정으로 손목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치잇, 애송이 때문에 다 망쳤어. 그동안 잘 숨겨왔는데 하필이면 오늘 마공사 꼬맹이를 만날 줄이야…. 뭐, 어쩔 수 없지. 이놈 저놈 갈아타지 않고 한 놈한테 붙어서 편하게 좀 살아 보려고 했는데 아쉽게 됐어.”
이민경이 드디어 가면을 벗어던졌다.
몸을 비비적대는 교태로운 몸짓을 보이며 음탕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이민경.
“역시, 흡정귀였군.”
“나 같은 미인한테 흡정귀라니. 그건 실례란다, 애송아.”
“마나력이 그쪽으로만 발달돼서 이성의 기력을 빨아먹으며 살아가는 괴물이 흡정귀지, 뭐 다른 건가?”
흡정귀는 사람이되, 사람이 아니다.
원래는 사람이었지만 ‘흡정’과 관련된 기술을 습득해 살인귀로 거듭난 자들이 바로 흡정귀다.
흡정.
쉽게 표현하면 기력을 빨아먹는 것.
스스로 단련하면서 능력을 성장시키는 게 아니라, 이성과 잠자리를 가짐으로써 기력을 빨아 마나로 정제하는 게 바로 흡정이었다.
이 흡정의 능력은 전투 시에도 활용도가 높다.
잠자리를 가지는 것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단순히 신체에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기력을 빨아버릴 수가 있었다.
흡정은 특성이 아닌 기술에 속하는 거라 일반인도 흡정귀가 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어린 녀석이라 그런지 사람 볼 줄 모르네. 흡정귀는 하위 버전. 나는 상위 버전. 흡정귀하고 비교당하면 내 기분이 더러워지잖니?”
이민경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흡정귀의 상위 버전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니 일정 수준 이상을 흡수해 한 단계 위로 올라선 ‘흡정마’인 모양.
흡정귀는 요귀라 불리지만 능력 자체는 높지 않아 쉽게 처리가 가능하지만, 흡정마라면 얘기가 다르다.
단순한 접촉만으로도 기력이 아닌 마나를 쭉쭉 빨아들이고, 자칫 잘못해 등 뒤라도 잡히는 날엔 단숨에 50% 수준의 마나를 빨린다.
‘사기환을 죽인 게 친구가 아니라 이 요망한 년이었구나.’
회귀 전의 세상에서 지닌 능력을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하고 쓸쓸하게 죽어갔을 사기환을 생각하니 이민경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껏 네가 몇 명이나 잡아먹었는지는 모르겠다만, 더는 그 요망한 엉덩이를 흔들어대지 못하게 해주마.”
“푸흡! 어린놈이 못 하는 말이 없네? 네가 보기에도 내 엉덩이가 요망해 보이나 봐?”
이민경은 한수호 쪽으로 큼직한 엉덩이를 내밀며 씰룩거렸다.
“내가 좀 바빠서 길게 놀아줄 여유가 없는 게 아쉽군.”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수호가 꺼지듯 사라졌다.
“어?”
이민경은 한수호를 완전히 놓쳤다.
상대가 어린 학생임을 알아보고 좋은 먹잇감이 또 하나 생겼구나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수호의 움직임을 놓치자마자 이민경은 곧바로 자신의 특성을 발휘했다.
그녀의 특성은 유체화.
이는 공격과 방어에 매우 효과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특성으로, 자신이 원하는 장소까지 유령 같은 유체의 상태로 단숨에 이동이 가능했다.
특성을 발휘하자마자 몸이 반투명한 유체 상태가 되기 때문에 어떤 물리적인 타격도 불가능해진다.
더구나 벽도 그냥 통과할 수 있으며, 10미터 정도 높이는 자유자재로 오르내릴 수 있었다.
쿨타임 때문에 7초에 한 번씩 3초 동안은 반드시 본체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제약이 있긴 하지만 그 타이밍을 맞춰 그녀를 공격하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슈우우우우
이민경의 몸이 정말 유령처럼 변해 뒤로 쭈욱 물러났다.
한수호가 측면에 나타나 나이프로 목을 그었지만 유체 상태라 공기를 베듯 그냥 통과해버렸다.
“호호호. 넌 나를 못 죽여.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면 목숨만은 살려주지. 대신 네 몸을 나에게 바쳐야겠지만.”
이 상황에서도 이민경은 한수호의 몸을 탐하려 했다.
이에 한수호는 아무 대답 없이 이민경의 유체를 쫓아 미끄러졌다.
“소용없다니까?”
이번엔 이민경이 위로 붕 떠올랐다.
정말 공기라도 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모습에는 한수호도 살짝 기가 막혔다. 더불어 이와 유사한 특성을 지닌 요마 하나를 떠올릴 수 있었다.
요마 지소연.
회귀 전, 수많은 마공사를 밥 먹듯이 잡아 죽인 요마 중의 요마.
그리고 그녀는 사대광마의 한 자리를 차지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녀의 특성은 ‘유령’으로 언제 어디서든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일 수가 있었고, 그로 인해 그녀는 모든 마공사에게 공포로 자리 잡았다.
그 유령이라는 특성과 지금 이민경이 보이는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상당히 비슷했다.
게다가 남자의 기력을 빨아먹는 흡정 기술을 사용하는 것까지도 유사했다.
‘요마와는 무슨 관계지?’
회귀 전, 요마는 50대 중반의 나이였다.
외모로는 30대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이민경과는 얼굴이 달랐다.
이민경에 대한 건 기억에 없다.
회귀 전의 삶에서 사기환을 죽였을 것으로 예상되긴 하지만, 그녀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모르겠고. 일단 죽여놓고 보자.’
복잡한 생각을 떨쳐낸 한수호는 이민경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7초에 한 번 아주 잠시 본체로 돌아온다는 걸 알아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3초에 한 번, 5초에 한 번씩 본체로 돌아오며 도발했지만, 한수호는 자의로 본체화하는 것과 쿨타임으로 본체화하는 것의 차이를 정확하게 구분해 냈다.
‘7초에 한 번씩 본체화할 때는 3초의 쿨타임이 필요하다 이거군.’
3초, 5초가 지나서 본체화할 때는 불규칙한 시간이었지만 7초마다 본체화할 땐 정확히 3초의 시간을 지켰다.
이민경은 한수호가 정신없이 자신을 쫓으며 공격을 하는 와중에도 이걸 모조리 계산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답을 알았으니 남은 건 쓰러뜨리는 것뿐.
지금 당장은 굳이 전력을 내보이면서까지 이민경을 잡아 죽일 필요는 없었기에 본래 마나력의 삼 할가량만 사용했다.
터엉
한수호가 바닥을 박차며 유체화한 이민경에게 달려들었을 때, 그녀는 다시 미끄러지듯 도망쳤다. 그리곤 본체화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애송이네?”
그리고는 1초 만에 다시 유체화하여 한수호의 등으로 접근했다.
“어딜!”
스승의 파랑격을 담아 나이프를 휘둘렀지만 바닥에 물결 모양만 새겨졌을 뿐, 이민경은 아무렇지 않게 물러났다.
“그냥 포기하고 나한테 몸을 맡겨. 최고의 쾌락을 선물로 줄게.”
이번엔 5초 만에 본체화했고, 2초 뒤 다시 유체화했다.
터엉
다시 도약한 한수호가 수직 베기로 이민경의 몸을 갈랐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에도 유유히 빠져나가 멀찍이 물러섰다.
한수호의 공격에 방패로 삼으려는지 몬스터봇 사이로 물러난 이민경.
그녀의 유령 같은 몸이 몬스터봇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더니 7초 만에 다시 본체화했다.
“기환 씨랑 너, 둘 다 내 펫이 되어 살면 행복하겠다, 그렇지?”
이민경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오거봇의 탄탄한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때, 한수호의 눈에서 빛이 번쩍했다.
‘지금!’
이번엔 오 할의 마나력을 끌어올렸다.
꽝
바닥을 내딛는 소리부터 다르다.
몬스터봇의 무게를 견디게 하려고 금속으로 깔아둔 바닥이 움푹 꺼졌다.
한수호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로 뇌전의 기운이 빠지직 흘렀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이민경이 급히 회피 동작을 취했지만, 아직 3초 쿨타임이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머리를 옆으로 비틀었다.
후웅.
아슬아슬하게 주먹이 귓불을 스쳤다.
빠직
주먹엔 뇌전의 힘이 담겼다.
퍼억
뇌전에 살짝 닿았을 뿐인데 귀 하나가 터져나갔다.
“악!”
놀란 이민경이 비명을 토하며 오거봇을 방패로 썼다.
하지만 그건 한수호를 무시하는 처사.
그의 주먹은 오거의 몸통을 그대로 꿰뚫었고 그 뒤에 숨은 이민경의 머리채를 콱 움켜쥐었다.
쾅
머리채를 힘차게 잡아당기자 오거봇에 머리를 부딪친 충격에 이민경이 비틀거렸다.
그 사이 오거봇의 뒤로 돌아간 한수호는 뇌전이 번쩍거리는 주먹을 한껏 뒤로 젖혔다.
“끝이다, 이년아.”
그녀는 멱살을 잡아 쥔 왼손 때문에 쿨타임이 끝났음에도 유체화를 쓸 수가 없었다.
“사, 살려….”
그녀가 애처로운 눈으로 목숨을 구걸하는 그때.
“안 돼!”
사기환이 수련급에 이르는 다리 힘으로 번개처럼 달려와 이민경을 껴안아버렸다.
갑작스러운 방해.
한수호는 이민경의 안면을 향해 뻗어내던 주먹의 방향을 급하게 틀었다.
후웅
주먹은 사기환의 머리를 스쳐 오거봇의 등 뒤 한 치 앞에 멈췄다.
빠지직
주먹에 담긴 뇌전이 오거봇을 휘감았다.
지이이이잉
뇌전의 힘 때문인지 오거봇의 아크로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기환은 이민경의 머리를 품에 감싼 상태로 눈물을 흘렸다.
“민경아….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다른 사람 손에 죽는 건 차마 볼 수가 없구나.”
뭔가 한이 담긴 중얼거림.
안 좋은 느낌이 든 한수호는 사기환을 이민경에게서 떼어내려 했다.
그때, 사기환이 어디서 난 건지 모를 강력한 힘으로 한수호를 확 밀쳤고 구멍 난 오거봇의 몸통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같이 가자. 너 없는 세상은 나도 살기 싫어.”
“저리 가, 이 새끼야! 내가 왜 너랑 죽는데!”
이민경이 발작적으로 소리친 그 순간, 사기환이 손에 쥔 아크로를 힘껏 움켜쥐었다. 그리고.
꽈르르르르릉
콰지지지직
폭발과 뇌전이 창고 전체를 휘감아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