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아침 6시.
삼척 터미널의 대합실에서 부스스한 얼굴로 잠에서 깬 한수호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새벽 4시가 넘어서 삼척에 도착한 터라 따로 잘 곳을 찾지 않고 대합실 벤치에 누워 쪽잠을 청했다.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서 몸이 찌뿌듯했지만, 머리만은 맑고 가벼웠다.
대합실 옆에 위치한 화장실에서 대충 세면을 마친 그는 매점에 들러 간단한 아침거리를 샀다.
삼각김밥에 컵라면, 그리고 생수 한 통을 사서 터미널 바로 앞에 있는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여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구나.’
회귀 전, 한수호는 삼척에 두 차례 들른 적이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으로 있을 때, 삼척시 봉황산에 위치한 8급 게이트에서 두 번이나 실전 테스트를 받았던 것.
그때나 지금이나 삼척시는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2045년.
처음 이곳에 게이트가 생성되었을 때는 사상자가 꽤 많이 나와 다들 5급이나 6급 정도는 될 거라 여겼었다.
게이트가 열리면서 수십 마리의 노옴과 고블린들이 뛰쳐나왔고, 놈들이 힘없는 시민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것.
당시 삼척시에 배치되어 있던 특무부의 요원은 불과 여섯 명.
그들은 사건 발생 직후 출동해 몬스터들을 상대했지만, 이미 몬스터가 사방으로 흩어져 시내를 헤집고 다니는 통에 빠른 수습은 불가능했다.
결국 정의국과 대한맹이 지원을 하고 나서야 노옴과 고블린들을 모두 해치우고 상황을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게이트는 폐쇄되지 않았다.
많은 마공사들이 게이트를 넘어 몬스터들의 세상으로 가서 확인한 결과, 이 게이트는 8급이라는 것이 확실하게 증명되었기 때문.
그들은 게이트를 중심으로 반경 10킬로미터 내에는 노옴이나 고블린 같은 약한 몬스터들밖에 서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기본적인 안전이 보장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었다.
결국 이 게이트는 폐쇄 없이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 났다.
게이트 너머의 세상에서 몬스터를 잡아 사체를 가져오면, 그 사체로 각종 아티팩트며 물약 같은 귀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니까.
대신 몬스터들이 함부로 게이트를 넘지 못하도록 몬스터들 세상에 생겨난 게이트 앞에 군부대를 주둔시켰다.
사람들은 게이트 너머의 세상을 ‘뉴에르다’라고 불렀다.
새로운 지구라는 뜻의 뉴에르다에서는 아직까지 인간을 발견하지 못했다.
세계 곳곳에 열려있는 수많은 게이트를 모두 탐색해봤지만, 그곳에서 마주친 생명체는 모두 흉악한 몬스터뿐이었다.
때문에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게이트를 통해 뉴에르다로 건너가 그곳의 땅을 먼저 차지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자원 고갈을 걱정하고 있는 지구인 입장에서 뉴에르다는 새로운 자원 보급처였고, 개간되지 않은 황금의 땅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게이트 앞에 대규모의 군부대가 자리를 잡고 진영을 구축하기 시작하면, 엄청난 숫자의 몬스터들이 대규모 공격을 해왔다.
하지만 중대 병력 수준으로 유지할 경우엔 소규모 국지전만 일어날 뿐, 대규모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하여 뉴에르다의 게이트 앞에는 항상 중대 규모의 병력만이 진을 치게 되었다.
아무튼, 과거의 한수호는 삼척 게이트 안에서 몬스터들과 몇 차례 전투를 치르고 별 성과 없이 귀환했었다.
그때는 이 게이트 안에 비밀 유적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그곳에 전설의 무기 ‘라뮬’이 숨겨져 있다는 걸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라뮬은 내 것이 되는 거지.’
한수호는 서둘러 음식을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서 게이트가 있는 봉황산까지는 걸어서 10분 정도밖에 안 된다.
배낭을 둘러메고 후드를 깊숙이 눌러쓴 뒤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가는 동안 공법폰을 이용해 최신 뉴스를 검색해봤다.
지난밤 이대성이 죽었고 놈의 친구들 또한 경찰에 넘겨졌을 테니 그 내용이 기사화됐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 내용도 없다.
‘서령 그룹에서 손을 쓴 건가?’
서령 그룹 회장, 이재춘의 손자이자 대한맹의 맹주 이자웅의 아들이 죽은 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닐 터.
아무리 서령 그룹이라고 해도 그 사건에 대한 것을 완벽하게 숨길 수는 없어야 정상이다.
‘그래도 기사가 한 줄 정도는 나왔어야 하는데….’
재계와 마공 세계의 이름있는 황태자가 죽었음에도 세상이 너무도 조용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숨겨봐야 이대성이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에 더는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는 동안 한수호는 벌써 봉황산 입구에 도착해 있었다.
꾸불꾸불한 나무 계단이 보이고, 산 중턱에 집터 정도 되는 규모로 높은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삼척 봉황산 게이트. 이로써 세 번째로구나.’
지구 쪽 게이트 입구 주변은 1개 소대 병력이 철저하게 감시 중이었다.
마공사 라이선스가 있거나, 국가가 인정하는 출입증이 없는 경우엔 누구도 게이트에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한수호에겐 방법이 있었다.
‘8급 게이트로 판명 난 지가 벌써 6년이야. 그런 곳을 병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리가 없지. 검문도 심하지 않을 테고.’
한수호는 공법폰을 이용해 자신이 마공 아카데미 학생이라는 가짜 전자 서류를 만들었고, 거기에 정부의 인증 마크가 있는 출입 승인 코드까지 준비했다.
만드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공법폰 자체에 그런 기능이 있는 데다가 네트웍이라는 거대한 정보의 바다에서 서류와 출입증 예시 이미지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으니까.
‘여기에 한 가지만 더하면 무사통과지.’
한수호는 후드를 내리고 당당한 걸음으로 게이트를 향해 다가갔다.
계단을 오르다 철조망이 쳐진 위치에서 방향을 틀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군인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중 고참으로 보이는 한 군인이 한수호를 위아래로 슥 살피더니 손을 내밀었다.
“여긴동 출입증 없이는 통과할 수 없다.”
한수호가 어려 보이자 바로 반말이었다.
“여기, 승인 코드 확인해보시죠.”
한수호는 공법폰을 내밀었고 군인은 그 폰을 스캐너로 찍었다.
“승인 번호 KSTB20500217098. 확인 완료. 그런데 너, 아카데미 학생이구나? 혼자서 게이트에 들어가려고?”
승인 번호가 확인되자 군인은 굳었던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제가 마공사 지원학과라서요. 뉴에르다의 지질 성분을 정밀 분석하는 과제를 받았는데, A+ 받으려면 직접 채취해 오는 게 정석이니까요.”
“그래도 그렇지. 여기가 8급이긴 해도 학생 혼자 돌아다닐 만큼 어설픈 곳은 아니다. 일단 상부에 보고해둘 테니 보호자 동반해서 다시 오렴.”
“에이. 시간도 없는데 언제 그러고 있어요? 뉴에르다에 도착하면 그쪽 경비 부대에 보호 요청할 테니 걱정 마시죠. 이건 이따 저녁에 분대원들끼리 좋은 시간 보내시라는 의미로….”
한수호는 CCTV가 비추지 못하는 방향에서 슬쩍 돈뭉치를 찔러 넣었다.
그걸 본 군인의 눈이 탐욕으로 빛났다.
“크흠. 뭐, 너도 다 큰 학생이니 자기 몸은 충분히 돌볼 수 있겠지. 내가 협조 요청서 써줄 테니까 게이트 넘어가면 중대장님 꼭 보여드려라.”
군인은 히죽 웃으면서 한수호를 바로 안쪽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잠시 후, 한수호는 군인이 써준 요청서와 현장에서 발급된 출입 허가증을 들고 게이트 앞에 섰다.
게이트는 막사 뒤쪽에 세워진 커다란 벽에 거울처럼 붙어있었다.
보기엔 그냥 동그란 모양의 구멍에서 물이 회오리치는 듯한 모습.
그 주변엔 각종 중화기가 그 구멍을 향해 포구를 겨냥하고 있었다.
언제라도 몬스터가 게이트를 넘어오면 그대로 쏴죽이겠다는 살벌한 분위기였다.
“사흘 안에는 귀환해야 하는 거 알지? 시간 넘기면 상부에 보고 들어가니까 주의하고.”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한수호는 꾸벅 인사를 한 뒤 머뭇거림 없이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가장 먼저 발이 게이트에 닿았고 뒤이어 팔이, 얼굴이, 몸통이 모두 게이트에 들어섰다. 순간.
츄아아아아악
얼음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것 같은 기분과 함께 주변이 순식간에 뒤로 사라져버렸다.
아주 잠깐 사방이 어둠 속에 잠긴 듯했지만 어느새 한수호는 전혀 다른 장소에 와 있었다. 그리고.
철컥. 철컥.
사방에서 한수호를 겨냥하는 소음이 들려왔다.
“허가증.”
게이트 밖과는 다르게 군기가 바짝 든 군인이 다가왔다.
“여기요.”
한수호가 출입 허가증을 내밀자 군인은 빠르게 확인한 뒤, 그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한수호의 눈에 비친 주변은 여전히 막사였다.
약 5미터 높이의 천막이 게이트 주변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고, 출구는 정면의 한 곳뿐이었다.
그곳을 나서자 그제야 뉴에르다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순록의 평원이 펼쳐졌다.
100미터 거리에 두꺼운 철책이 겹겹이 둘러쳐져 있었지만, 그 너머의 세상은 탁 트인 평원 지대였다.
저 멀리 숲이 사방을 감싸고 있는 게 보인다.
이렇게 멀리에서 봐도 나무의 높이가 상당한 걸 보니, 실제로는 엄청나게 큰 나무들인 게 분명했다.
지구의 것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10년 만에 마주한 뉴에르다의 풍경.
회귀 전, 수많은 게이트를 돌아다니며 몬스터들과 피 튀기는 전투를 벌였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번엔 하나도 남김없이 게이트를 폐쇄시킬 테다.’
인간의 욕심으로 폐쇄하지 않았던 평범한 게이트가 훗날 악몽급 게이트로 진화할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었다.
한수호에게 다시 기회가 온 이상,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상념을 접은 한수호는 군인을 따라 다른 막사로 이동 중이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정도의 첨단 기기가 판을 치는 세상에 이런 허접한 막사를 쳐놓고 진지로 삼다니.
뭔가 말이 안 되는 듯하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구에서 가져온 시멘트 같은 단단한 구조물을 이곳에 세우기만 하면 몬스터들이 나타나 무조건 때려 부순다.
뉴에르다에 요새를 지으려고 수십, 수백 번을 시도해봤지만 번번이 실패.
그래서 인력을 동원해 뉴에르다에 있는 돌을 이용해 건물을 지어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결과는 똑같았다.
마치 이곳에 튼튼한 요새를 짓지 못하게 하려는 듯한 몬스터들의 강한 의지가 느껴졌고, 그로 인해 주둔 부대는 철책과 막사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방어로는 몬스터들의 대규모 공습은 절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즉, 이곳 주둔 부대는 몬스터들의 공습을 아주 잠깐 지연시키는 방해물 역할밖에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에 주둔하는 군인들은 빨리 복무 기간을 끝내고 지구로 귀환하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으로 가득 차있었다.
“어린 학생이 이 위험한 곳엔 뭔 일이냐?”
중앙의 큰 막사에 들어가니 그곳에서 사무를 보고 있던 중후한 인상의 사내가 질문을 던졌다.
“아카데미 과제 때문이에요. 뉴에르다의 토양 분석을 통한 서식 몬스터의 군락 이동로의 파악이랄까요?”
“복잡한 소린 됐고. 허가증은 확인됐으니 빨리 볼일 보고 귀환이나 해라. 내가 애들 둘 붙여줄 테니.”
“바쁘신 분들인데 수고를 끼칠 수는 없죠. 제가 알아서 볼일 보겠습니다.”
한수호에게 붙이려는 인원은 보호의 목적도 있지만 감시의 목적도 있었다. 이에 중대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선 일체의 개인행동을 불허한다. 그게 싫다면 당장 돌아가든가.”
“중대장님. 잠시만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
한수호가 은근한 어조로 중대장을 부르자 그제야 서류 뭉치에서 시선을 뗐다.
“말해.”
“저랑 거래 하나 하시죠?”
“거래?”
중대장은 피식 웃었다.
이 어린 학생이 인생의 쓴맛 단맛 다 경험한 자신을 상대로 거래를 요구하다니.
“어린놈이 못된 것만 배웠구나. 요즘 아카데미에선 인성은 뒷전이고 쓸데없는 것만 가르치는가 보군. 됐으니, 그만 나가 봐.”
“각성석.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중대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 * *
거래는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한수호는 회귀 전, 이 게이트에 들어와 중대장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한수호는 아카데미 2학년생이었는데, 그런 어린 한수호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각성석에 대한 중대장의 욕심은 대단했었다.
각성석은 오직 뉴에르다에서만 구할 수 있는 마나 응집체로, 특별한 몬스터의 심장에서만 생성되는 일종의 보석이었다.
특정 몬스터들, 그것도 암놈의 심장에서 나오는 이 각성석은 아카데미 학생들을 마공사로 각성시킬 때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사람들이 각성을 위해 1억을 낸다는 건, 바로 이 각성석을 돈 주고 사는 거나 다름없었다.
특정한 암놈 몬스터를 죽이고 각성석을 꺼내 섭취하게 되면, 섭취자의 몸에 마나의 고리가 형성되면서 온몸에 마나가 휘돌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각성석에 내재된 자극적인 냄새가 온갖 종류의 몬스터들을 끌어들이게 된다. 마치 페로몬처럼.
처음엔 한 놈, 그놈을 물리치면 두 놈, 그 뒤엔 세 놈, 네 놈이 끊임없이 달려든다. 그리고 이 무의미한 전투는 각성석 섭취자가 각성하거나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섭취자는 삶과 죽음의 기로를 오가는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고, 한계에 놓인 육체와 정신이 각성이라는 결과로 재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각성을 위한 튜토리얼이었다.
이곳의 중대장은 바로 이 튜토리얼을 스스로 경험해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는 각성석을 품고 있는 암놈 몬스터를 쉽게 찾을 수 있는 스캔 장치를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소속의 채굴꾼들이 그걸 들고 틈나는 대로 게이트를 드나들며 각성석을 채취하는데, 그 각성석은 암암리에 수억을 호가하는 가격으로 암시장에 팔리기도 한다.
하지만 중대장은 그만한 돈이 없는지라 대신 중고의 각성석 스캐너를 그나마 싼값에 구매했다.
그런데 정작 그 스캐너를 들고 게이트를 뒤지고 다녀도 각성석을 품고 있는 몬스터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로서는 거금인 1천만 원을 내고 구매한 스캐너이니 그게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의 중대장은 그로 인해 굉장히 예민해져 있었으며, 애가 타는 상태였다.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아는 한수호였기에 그에게 거래를 제안한 것이다.
사실 각성석을 품은 몬스터는 마나를 제대로 다를 줄 아는 마공사라면 얼마든지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한수호는 이미 두 개의 특성을 지닌 마공사였고, 상당한 양의 마나를 축적한 상태라 각성석을 찾아내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가 내놓은 제안은 매우 간단했다.
한수호가 각성석을 품은 몬스터를 찾아서 알려주는 대신, 그에게 이곳에서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달라는 것.
처음엔 믿지 않았던 중대장은 한수호가 마나력을 일으켜 손바닥 위에 빛의 구체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고는 바로 제안을 수락했다.
단순히 빛만 일으켰다면 평범한 마공사겠지만, 빛을 구의 형태로 뭉쳐 허공에 떠오르게 하는 건 특급 이상의 마공사만 가능했으니까.
어쨌든, 하루 안에 각성석을 품은 몬스터의 위치를 파악해주기로 약속한 한수호는 바로 부대의 철책 방어선 밖으로 빠져나갔다.
철책 밖은 공기부터 달랐다.
지구와는 다른 찐득한 마나의 기운이 사방에서 넘실거렸다.
이상하게도 철책 안에서는 이 마나의 기운이 희미한데, 몇 걸음 차이로 밀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한수호는 중대장에게 지원받은 무음 산악 바이크를 몰고 평원을 달렸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몬스터들의 이목을 끈다는 사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무음 산악 바이크였다.
그 덕에 한수호는 여기서 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까지 단숨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방이 암석으로 가득한 곳.
다행히 오솔길 같은 것이 있어서 바이크를 모는 데 문제는 없었다.
그러다 바이크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이 가리키고 있는 최후 경계 지역에서 멈춰 섰다.
내비게이션에 그려진 맵의 막다른 곳.
시야로는 그 너머로도 계속 풍경이 이어지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맵의 한계선을 더 이상은 넘어갈 수가 없었다.
손으로 한계선 부근을 더듬자 투명한 벽이 만져진다.
그 벽은 좌우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게이트를 중심으로 반구 형태의 돔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가 정확히 10킬로미터 지점이야.’
분명 아무것도 없는데 그곳이 벽으로 막혀있다니.
아직 지구에도 이런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건 기술이 아니고 마나력을 이용한 마법이니까.’
쉽게 말해 결계였다.
마공사 중에도 아주 드물게 결계 특성을 가진 경우가 있는데, 그들이 발휘하는 특성 효과가 이 투명한 벽과 매우 흡사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이렇게나 거대한 범위를 뒤덮고 있는 결계를 만들어낸 인물은 과연 누굴까?
이를 근거로 수많은 마공사들은 뉴에르다에 마나력을 쓸 수 있는 강력한 마공사가 존재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 마공사가 인간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을지, 아니면 몬스터와 같은 흉측한 외모를 갖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이다.
‘투명 막을 따라 암석 지대를 훑다 보면 그곳이 나온다고 했지?’
한수호는 전설의 검 라뮬을 찾기 위해 진무현이 남긴 이야기를 좇아 이곳에 온 것이다.
진무현은 그가 가장 믿는 친구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술에 취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때 난 운명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지. 살려면 결계를 넘어가야 하는데 내 힘으로는 도저히 결계를 부술 수가 없었거든. 그래서 결계를 따라 죽어라 달렸어. 암석 지대를 미친 듯이 기어 올라가다가 운명처럼 그 구멍을 발견한 거라고.’
그가 말한 구멍.
그 구멍 안이 바로 숨겨진 유적지라고 했다.
당시 그 이야기가 소문처럼 퍼져나가자 이 삼척 게이트는 수많은 마공사들로 넘쳐흘렀다.
너도나도 그 유적지를 찾아가 또 다른 기연을 얻고자 뛰어들었지만, 그들 중 대부분은 두 번 다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곳에서 가까스로 살아나온 극소수의 마공사들에 의하면, 구멍 안은 유적지가 아니라 죽음의 장소였다고 한다.
발을 디디는 곳곳마다 함정이요, 어딜 가든 흉악한 몬스터들을 마주칠 수밖에 없는 극악의 장소라는 것.
하지만 누구도 진무현에게 왜 거짓말로 사람들을 속여 헛되이 목숨을 잃게 만들었냐고 따질 수 없었다.
진무현이 한 이야기는 소문으로만 돌았을 뿐, 정말 진무현이 한 말이 맞는지 사실 여부는 전혀 밝혀지지 않았으니까.
한수호는 그 이야기의 진실을 안다.
사실 암석 지대에 있는 구멍은 미궁으로 빠지는 함정이었고, 진짜 유적지는 그곳에 있는 폭포수 중간에 있는 동굴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한수호는 이 사실을 유대룡에게서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유대룡은 진무현을 제자처럼 여기며 가깝게 지냈고 누구보다도 빠르게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사실은 잘못된 소문도 진무현이 일부러 퍼트렸다.
노력 없이 욕심만 부리는 마공사들에게 내리는 일종의 경고의 의미.
하지만 그조차도 그 구멍 아래에 죽음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며 거짓 소문을 퍼트린 걸 굉장히 후회했다고 한다.
‘저기구나.’
지세가 험해서 바이크는 아래에 놓고 두 발로 암석 지대를 올랐다.
거의 정상에 다다르자 여기저기에 많은 구멍들이 보였는데, 안을 슬쩍 보니 시커먼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긴 함정인 거고.’
고개를 돌려 비탈길을 조금 더 내려가자 폭포수가 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폭포수는 결계 지대와 아슬아슬하게 겹쳐져 있었다.
폭포의 물이 결계 막에 부딪쳐 허공에서 튕겨지고 있었다.
‘저 중간 어딘가에 동굴이 있다는 건데….’
이곳에서는 눈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일단 폭포수의 위치만 확인한 한수호는 곧바로 발길을 돌렸다.
‘이제 각성석을 품은 놈을 찾으러 가볼까나?’
근처엔 고블린 부락이 하나 있을 터였다.
진무현을 이곳으로 몰이사냥 했던 고블린들.
그놈들 중엔 각성석을 품고 있는 놈이 하나쯤 있을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