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이 방의 열쇠는 어김없이 그랑이었다.
한수호는 머뭇거림 없이 그랑을 구멍에 끼워 돌렸고, 문은 전처럼 스르륵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막대한 압박감이 한수호를 짓눌렀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마주하기도 힘들 정도의 압도적인 기운이 방 안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한수호는 걸음을 옮겼다.
방에 들어선 순간, 또다시 음성이 파고든다.
[용기. 세상을 어둠 속에서 구해내는 용사가 가져야 할 궁극의 힘은 바로 용기. 세상을 뒤덮는 화염과 모든 생명을 얼리는 빙염의 끝에서 너를 기다리는 건 오직 죽음뿐. 너의 용기가, 너의 결단이 그 죽음을 되돌릴 열쇠이리니.]
음성이 끝나자마자 한수호의 눈앞에 보기만 해도 다리가 후들거리는 막강하고도 또 막강한 생명체 하나가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집채만 한 머리.
빌딩보다 거대한 덩치.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길게 펼쳐진 날개.
드래곤.
처음 보는 생명체였지만, 그것이 드래곤임을 깨닫는 데는 1초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크르르르
드래곤이 한수호를 똑바로 노려보며 입을 살짝 벌렸다.
[힘을 원하는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멘트.
이 질문에 응한다면 뜬금없이 가공할 능력을 얻게 되고, 어디서든 마음껏 깽판을 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
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마주한 거체의 생명체가 뿜어내는 기운에 몸이 컨트롤되지 않았다.
[삶을 원하는가?]
질문이 바뀌었다.
여전히 한수호는 대답을 할 수 없는 상태.
[죽음을 바라는가?]
세 번째 질문.
머릿속을 직접 울리는 음성엔 지상 최강의 생명체가 가지는 포효가 담겨있었다.
몸이 굳고 정신이 얼어붙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아무것도 못 하고 심연의 나락 속에 파묻혀 버릴 것만 같았다.
[대답하라. 넌 나에게 무엇을 바라는가?]
드래곤은 계속해서 대답을 요구했다.
하지만 한수호는 드래곤의 포효에 완전히 압도되어 대답을 할 수조차 없었다.
그가 지닌 마나력도, 10년을 익힌 파랑격과 벽력권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찮은 인간. 버러지처럼 약해빠진 생명체. 네 몸에 허락된 모든 힘의 제약을 풀어주겠다. 그러니 대답하라.]
크아아아아앙
온몸의 털이 모조리 곤두설 정도의 엄청난 포효.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지만 여전히 몸은 한수호의 컨트롤을 거부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
허무했다.
자신이 이토록 나약한 인간이었나 싶고, 고작 이러려고 죽음을 넘어 회귀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드래곤이 대답을 원한다면 대답을 해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육체의 제어권을 다시 가져와야 했다.
‘내 몸을 옭아매고 있는 건, 놈의 피어다.’
드래곤의 피어.
드래곤보다 강력한 힘을 가지지 못했거나, 피어를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이 없다면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게 되는 드래곤의 권능.
한수호는 그걸 이겨내고자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되짚어 봤다.
마나력을 한껏 끌어올려 보고, 파랑격과 벽력권을 펼쳐내려고 안간힘도 써봤다.
하지만 모두 소용이 없다.
결국 광폭화까지 사용했다.
모든 제어 효과를 없애주는 광폭화라면 드래곤의 피어도 비껴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3단계의 광폭화로도 피어의 속박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남은 건 개조 특성뿐.
그런데, 개조 특성을 살피던 한수호의 눈앞에 새로운 내용이 나타났다.
[특성: 개조]
-3단계 효과: 무형 개조에 해당하며, 형태가 없는 감각적인 능력의 스탯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아직 2단계조차 제대로 활용을 못 하는데 3단계가 열렸다.
‘드래곤이 제약을 풀어준 거구나!’
잠시뿐이겠지만 3단계가 열린 이상 활용을 안 할 수는 없었다.
3단계에는 인체 해부도가 아닌 원형의 그래프가 등장했다.
세 개의 칸으로 나눠진 그래프에는 정신, 초감각, 면역이 표시되어 있었고 각 표시에는 동일하게 5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한수호가 그걸 인지한 순간.
꿈틀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여졌다.
[대답하라.]
계속되는 드래곤의 피어.
그런데 피어의 속박력이 약해졌는지 이젠 발가락까지 움직여졌다.
[대답하라.]
집요한 추궁.
한수호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고자 했다.
“나느… ㄴ.”
아직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목소린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런 한수호의 눈앞으로 특별한 단어가 크게 와닿았다.
‘스탯 조정!’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백했다.
한쪽 스탯을 낮추고, 대신 다른 스탯을 높일 수 있다는 말.
이미 10년 전에 한수호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신체 스탯을 조정한 적이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3단계 스탯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초감각과 면역을 1로 낮춘다.
대신 정신에 8을 추가하여 13으로 올려버렸다.
바로 그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머릿속에서 꽝 하는 폭음이 들리는가 싶더니 몸을 묶고 있던 무형의 힘이 한순간에 풀려버렸다.
자유.
속박은 더 이상 없었다.
[마지막 기회다. 대답하라.]
다시 드래곤의 음성이 들렸을 때, 한수호는 드디어 입을 열 수가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건….”
한수호는 말을 하면서 드래곤의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그리고 속으로 끝없이 외쳤던 말을 힘껏 내뱉었다.
“너를 나에게 바치는 것!”
광오한 요구.
드래곤도 놀랐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초가 하루처럼 느껴지는 영겁의 시간.
드디어 드래곤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네가 원하는 건…. 나인가? 내가 가진 힘인가?]
“둘 다.”
한수호의 대답엔 거침이 없었다.
[나를 소유하고자 한다면, 자격을 증명하라.]
거절이 아니다.
자격의 증명.
그것을 보이면 드래곤을, 그리고 드래곤의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말.
“내가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건.”
한수호는 개조 특성의 1단계 인체 해부도를 불러들여 신체의 모든 스탯을 오른손으로 집중시켰다. 7개 부위 중 6개를 모두 1로 만들고 모든 스탯을 오른팔에 때려 박았다.
[오른팔]: 589
오른팔의 수치가 99를 넘어 589까지 치솟았다.
“바로 이 한 방이다!”
한수호는 허리를 비틀었다.
한껏 잡아당긴 팔에는 핏줄이 툭툭 불거졌고.
쿠아아아아아
주먹에선 눈부신 빛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그리고, 허리가 용수철처럼 튕겨졌을 때, 그의 주먹이 번쩍하는 섬광을 일으키며.
꽈앙
드래곤의 이마 정중앙에 깊숙하게 쑤셔 박혔다.
콰지지직
드래곤의 머리에 균열이 생겼다.
마치 해머에 얻어맞은 석상처럼 콰드득 부서져 내렸다.
슈우욱
세상이 주먹을 향해 빨려 들어간 직후.
파아아아아앗
저수지의 물이 댐에서 방출되듯 엄청난 양의 빛무리가 주변을 뒤덮었다.
그리고 한수호의 세상이 되돌아왔다.
이번에도 방이다.
다만 전과는 달리 정면의 벽을 꽉 채우고 있는 건 거대한 드래곤의 머리였다.
재질을 알 수조차 없는, 단단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두상.
한수호의 주먹은 드래곤의 두상 정중앙을 파고든 상태였다.
쩌저적
방금 본 장면이 오버랩되며 드래곤의 두상이 갈라졌다.
쿠궁. 쿵쿵쿵.
수백 조각으로 쪼개진 금속이 바닥에 떨어져 내리자 그 안에서 진열대가 나타났다.
투명한 유리관 속에 담긴, 새하얀 단검 하나.
허공에 둥실 떠올라 있는 그건 보기만 해도 몸이 움찔할 정도로 강력한 예기를 담고 있었다.
라뮬이나 그랑보다는 작고, 모양도 완전히 달랐다.
길이는 30센티 정도. 칼막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언뜻 보면 그냥 큰 송곳 같은 형태.
‘로크?’
이번에도 한수호는 단검 아래에 새겨진 알 수 없는 글자를 자연스레 읽어버렸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을 뻗었고 가볍게 유리관을 부수고 검의 손잡이를 거머쥐었다.
빠지짓
강력한 전기가 손을 타고 온몸을 감전시켰다.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검을 쥔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저릿함은 빠르게 사라졌다.
한수호는 로크라는 이름을 지닌 검의 손잡이와 검집을 쥐고 힘껏 잡아당겼다.
파짓. 파지짓.
또다시 전격이 피어오르며 한수호의 손에 고통을 퍼부었다.
이를 악물고 더욱 강한 힘을 주어봤지만 검은 뽑히지 않았다.
검은 검집에서 단 1밀리도 움직이지 않은 채였다.
‘지금은 뽑을 수 없다는 건가?’
한수호는 억지를 부리지 않았다.
뽑을 수 있는데 힘이 부족해 뽑지 못하는 것과 아예 뽑을 수 없어 꿈쩍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구분은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 검을 소유할 수만 있을 뿐, 뽑아서 사용할 수는 없는 거였다.
라뮬, 그랑, 로크.
세 개의 검과,
불, 얼음, 번개.
세 가지 강력한 힘.
한수호는 하나를 얻고자 했으나 세 가지를 얻었다.
‘이곳부터 찾아오길 잘한 거 같구나.’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회귀 전, 진무현도 이 세 가지 검을 모두 얻은 것 같지는 않았다.
수많은 마공사들을 희생시켰던 용인의 2급 게이트가 발발했을 때도 진무현은 불꽃의 검, 라뮬 외에는 사용하지 않았었다.
만약 그랑이나 로크가 있었다면 사용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 게이트는 무시무시했으니까.
한수호는 한 번 더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스럽게도 더 이상 문이 나타나는 일은 없었다.
발길을 돌린 그는 신전으로 올라왔고 뒤로 젖혀진 의자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쿠궁.
기계음과 함께 지하로 향했던 공간이 완벽하게 사라졌다.
한수호는 텅 비어버린 왕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시간을 보니 신전에 들어온 지 하루가 지났다.
세 번의 시련을 겪은 시간이 생각보다 굉장히 길었던 모양.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
얼른 나가서 밥부터 챙겨 먹기로 한 한수호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런데, 신전 입구를 향해 걸어 나가던 그의 시선에 올 때는 보지 못했던 독특한 석상이 보였다.
모든 석상은 몬스터의 형상이었지만 그 석상만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게다가 크기마저 딱 인간 크기.
그런 석상은 좌우로 하나씩, 두 개가 존재했다.
하나는 양손으로 등에 멘 두 개의 단검을 뽑아내며 앞으로 달려드는 역동적인 모습의 사내였다. 양쪽 허벅지에도 굉장히 짧은 단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사내의 복장이 굉장히 현대식이다.
특수 부대 요원들이 입는 슈트 같은 차림이었고 신발도 현대식이다.
‘그런데 이거 너무 똑같은데?’
놀랍게도 사내가 등에 엑스자로 메고 있는 단검은 라뮬과 그랑이었으며, 오른쪽 허벅지에 찬 단검은 다름 아닌 로크였다.
하지만 왼쪽 허벅지에도 단검이 하나 더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단검 손잡이 부분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 샬?’
괴이한 이름.
그 단검은 조금 다른 형태였다.
30센티 크기의 단검이긴 한데, 칼날의 면적이 굉장히 넓고 두꺼웠다.
마치 두꺼운 양손 대검을 길이만 5분의 1로 확 줄여놓은 듯했다.
‘저건 어디서 구하는 거지?’
상황으로 봐서는 석상의 사내가 지닌 네 개의 단검은 세트처럼 보였다.
그런데 한수호가 신전 아래에서 얻을 수 있었던 건 세 가지뿐.
나머지 한 개, 나샬이라는 이름의 단검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한수호는 다시 돌아가 나샬을 찾지 않았다.
‘더 이상의 욕심은 버리자.’
이미 세 개로도 충분했기에.
한수호는 과감히 나샬에 대한 관심을 끊을 수 있었다.
나샬에서 시선을 떼자 이젠 단검들을 몸에 착용할 수 있게 해주는 착용구에 관심이 갔다.
처음엔 착용구도 돌로 만들어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건 진짜 가죽이네?’
놀랍게도 착용구는 실제 사용이 가능한 상태였다.
한수호는 등에 엑스자로 검을 착용할 수 있게 해주는 엑스반도와 양쪽 허벅지에 있는 착용구를 떼어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착용해봤다.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 방치되어 회백색으로 탈색되었지만 사용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단검을 배낭에 담아 다니기엔 꽤 불편했는데 마침 잘 됐어.’
다행히 단검들 모두 50센티보다 짧기 때문에 마공사 라이선스가 없어도 문제없이 차고 다닐 수 있었다.
엑스반도와 허벅지용 착용구를 차고 나니 뭔가 노련한 마공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라뮬과 그랑이 엑스반도에 끼워지면서 단검의 화려함이 어느 정도 가려지는 효과도 있어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한 가지가 문제였다.
‘나샬은 없는데, 이것까지 굳이 차고 다닐 이유가 없잖아?’
왼쪽 허벅지에 찼던 착용구를 벗으려다가 자신에게 다른 단검이 두 개나 더 있다는 걸 떠올렸다.
직접 마공사 전문 샵에 들러 구매한 세라믹 나이프와 이대성의 똘마니가 사용하던 나이프까지.
한수호는 그 나이프를 꺼내 착용구에 달았다.
원래 두껍고 넓은 나샬을 찰 수 있게 제작된 착용구라 그런지 단검 두 개도 문제없이 착용이 가능했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모습을 보니 몸 여기저기에 무기를 달고 있는 게 꼭 무기 방문 판매상처럼 보였다.
‘허벅지 쪽 무기는 좀 가릴 수 있게 옷을 맞춰야겠는데?’
지금의 모습은 너무 눈에 띄는지라 살짝 부담스러웠다.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허벅지용 착용구는 바지 안쪽에 차고, 바지 주머니를 조금 찢어 손잡이를 잡아 뺄 수 있게 했다.
그제야 허벅지에 찬 단검 세 자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름 만족한 한수호.
언뜻 건너편에 세워진 기둥을 바라보니, 거기엔 저격수로 보이는 여인이 허리에 검을 찬 상태로 총구를 겨냥하고 있는 석상이 새겨져 있었다.
단순히 석상인데도 예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근데, 여기에 왜 저격 총을 든 여자가 있냐고.’
한 사내와 한 여인의 석상.
사내는 전투용 슈트를 입고 있고, 여자는 저격 총을 지녔다.
분위기로 봐서는 이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영웅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 놓은 석상 같은데, 영웅의 모습이 지구의 현대인 모습과 너무나 닮았다.
‘뭐가 뭔진 모르겠지만 이 세계에서 존경받던 영웅의 무기 세 개를 얻었다는 게 중요한 거지 뭐.’
한수호는 굳이 머리 아프게 유적지의 사연까지 깊게 알아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잘 챙겨 갑니다.’
나샬 단검이나 여자가 지닌 저격 총에 대한 궁금증은 가볍게 내다 버린 한수호는 그제야 신전을 나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