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지이잉-
경기장 주변으로 보호막이 가동됐다.
비눗방울처럼 투명한 막이 경기장을 둘러싼 이상, 둘 중 하나가 패배를 선언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올 수 없다.
물론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 언제든지 그 막을 해제할 수 있긴 하지만, 보호막을 해제하고 위험 요소를 처리하기까지는 최소한 5초의 시간이 필요했다.
즉, 순식간에 사고가 터진다면 누구도 경기장 안쪽의 상황을 커버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유나야. 이 대결 중에는 네 특성을 쓰면 안 된다. 잘 알지?”
“물론이지, 아빠. 내가 뭐 이런 대결 한두 번 해보나?”
송유나는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제자리에서 통통 뛰며 몸을 풀었다.
이에 반해 이현승은 그녀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었다.
“무기는 안 쓸 건가?”
“난 됐어요. 그쪽은 써도 되니까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럼 사양하지 않고 써주지. 아무래도 내가 쫄리는 쪽이니까 말이야.”
두 사람 모두 준비가 되었을 때, 송혁의 아들 송지문이 제어판 위의 둥그런 버튼을 꾹 눌렀다.
때엥-
시작을 알리는 벨 소리가 울렸고 경기장 위쪽 천장에는 5분의 시간이 카운트다운 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이현승이 먼저 달려들었다.
그는 날이 없이 길게 뻗은 검 한 자루를 허리에 차고 있었다.
장한성에게 쾌검의 비법을 그런대로 전수받았는지 움직임은 꽤 깔끔했다.
좌우로 몸을 흔들며 순식간에 송유나에게 접근한 이현승은 그녀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회피하려는 순간, 검을 뽑았다.
쐐액
소리가 들렸을 때, 검은 이미 송유나의 가슴을 베고 있었다.
엄청난 쾌검.
생각보다 빠른 속도에 송유나는 흠칫했지만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
상체를 비틀어 일격을 피한 뒤, 오히려 한발 앞으로 달려들며 손목을 비틀어 회전시킴과 동시에 이현승의 턱을 올려 쳤다.
이현승은 그녀의 동물적인 반격에 놀라며 머리를 뒤로 젖혀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송유나의 공격은 이제 시작이었다.
손바닥이 허공을 팍 찍는 순간, 방향을 확 뒤틀더니 그대로 이현승의 가슴팍을 찍어 내렸다.
이에 이현승도 재빨리 상체를 비틀었고 동시에 벼락같은 회전 베기를 시전했다.
너무 뻔한 공격이어서일까?
송유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가볍게 베기를 피해내고는 자세를 확 낮춰 왼발을 축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이현승의 하체를 휘돌려 찼다.
뻐억
하체의 타격에 이현승의 몸이 그대로 기울어졌고, 그런 그의 가슴팍을 향해 송유나의 양 손바닥이 쭉 뻗어나갔다.
누가 보기에도 기가 막힌 한 수.
그 한 수가 패도송가에서만 전해지는 ‘쌍장포’의 수법이라는 건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이현승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모두가 이대로 대결이 끝나는 거라 생각한 바로 그 순간.
번쩍
이현승이 눈에서 빛을 뿜어냈다.
그 빛은 송유나의 두 팔을 강력한 중력의 힘으로 찍어 눌렀다.
그로 인해 쌍장포의 타격점이 이현승의 하체로 틀어졌다.
하필이면 이현승의 사타구니 쪽을 향하게 되었고, 당황한 송유나는 급히 손을 회수했다.
아무리 노련한 마공사라고는 해도 송유나는 이제 1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다.
대결 중에 벌어진 일이지만 남자의 사타구니 쪽에 쌍장포를 때려 박을 수는 없었기에 억지로 공격을 끊고 뒤로 물러서려 했다.
이현승은 바로 그 순간을 노렸다.
떠올랐던 몸을 바로 세우자마자 빠르게 파고들며 뭉툭한 쇠 검을 아래에서 위로 확 올려 쳤다.
검이 송유나의 상의 속을 파고들었고 그대로 목 쪽으로 튀어나왔다.
머리를 비틀어 검에 턱을 얻어맞는 사고는 피했지만 차가운 검이 옷 속을 파고들어 맨살에 닿는 기분은 너무나 끔찍했다.
처음 당해보는 상황에 몸을 움츠린 송유나.
이때다 싶어 이현승이 비열한 웃음을 흘리며 쇠 검을 확 잡아당겼다.
이대로라면 쇠 검이 옷을 뜯어내 송유나의 속살이 고스란히 드러날 상황.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빠지지짓
경기장의 보호막 한쪽에서 강렬한 뇌기가 몰아치는가 싶더니.
콰직
진급 마공사도 쉽게 부수기 힘든 보호막 한쪽이 왕창 깨져나갔다.
그리고 바람이 훅 불며 누군가가 비조처럼 날아와 이현승의 팔을 콱 움켜쥐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끼어든 방해꾼에게 화가 치민 이현승은 또다시 심장에 축적된 힘을 이용해 주변 중력을 3배로 높였다.
후웅
한순간 주변 공기가 묵직해지며 강력한 중력장이 형성됐다.
그런데, 상대는 이미 그럴 것임을 알았는지 그 힘에 반항하지 않고 순응했다.
오히려 자세를 낮추며 이현승의 팔을 아래로 당겼고, 그로 인해 송유나의 상의 속을 파고들었던 쇠 검이 자연스럽게 밑으로 빠져나왔다.
“이런 씨….!”
욕을 하려는 찰나 상대는 이현승의 손목을 비틀어 쇠 검을 낚아채더니 손등으로 가볍게 툭 밀쳐냈다. 그런데.
쾅
가벼운 수법에 폭탄 터지는 소리가 울렸고, 이현승은 그 한 수를 버텨내지 못하고 쿵쿵 소리를 내며 다섯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가 이를 악물며 재차 공격을 가하려고 할 때.
뇌를 울리는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검은 쇠 검이 날아와 그의 귓불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콰직
쇠 검이 이현승 뒤쪽의 보호막에 깊숙이 박혀 들었다.
이현승은 방금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걸 확실히 느꼈다.
만약 상대가 쇠 검을 2센티만 더 옆으로 던졌어도 보호막이 아닌 그의 머리에 박혔을 것이다.
“너 이 자식….”
상대가 누군지 알아본 이현승이 온몸에 힘을 꽉 주며 부르르 떨었다.
방금 자신을 방해하고 쇠 검을 빼앗아 던진 자는 한수호였다.
그는 어느새 재킷을 벗어 송유나의 상체를 덮어주고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박살 난 보호막 쪽으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 * *
송유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너무도 멍청하게 이현승의 더러운 수법에 말려들었고, 아버지 송혁의 명예마저 깎아버릴 수 있는 창피한 상황을 만들 뻔했다.
각성도 못한 아카데미 예비 학생에게 당한 것만으로도 이미 체면은 구겼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옷이 찢겨나가 알몸을 보이지 않은 건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그걸 가능하게 해 준 사람이 바로 자신을 안아 든 학생이다.
그녀가 아는 그 학생의 이름은 장태산.
비돈귀살 부부의 양자로 알고 있어 별 기대도 안 했지만 막상 직접 보니 외모가 엄청났다.
송유나가 아버지 몰래 덕질을 하고 있는 아이돌보다 훨씬 잘생기고, 멋진 체형을 가진 청년.
그를 처음 봤을 때, 설렘을 숨기기 위해 일부러 이상한 소리까지 해댔는데 그가 자신을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게다가 살짝 찢긴 상의로 속살이 보이기라도 할까 봐 자기 옷을 벗어 가려주는 섬세함까지 지녔다.
송유나는 그의 재킷을 꼭 여미며 한수호의 잘생긴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이현승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방금 일은 명백히 저희 잘못입니다.”
한수호는 송유나를 내려주고는 송혁에게 사과했다.
웃음기가 사라진 송혁에게선 엄청난 기세가 솟구쳤으나 송유나가 무사하자 빠르게 갈무리됐다.
“좋지 않은 상황이 될 뻔했는데…. 아무튼 고맙구나.”
“이에 대한 처벌을 원하신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한수호는 이왕 나서기로 한 것 확실하게 해보기로 했다.
그는 진작부터 이현승이 일부러 빈틈을 보이고 송유나의 공격을 유도하는 걸 알아챘고, 미리 보호막에 손바닥을 대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던 상황이 터졌을 때, 한순간도 머뭇거리지 않고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경기장의 보호막은 강력한 내구력을 지니고 있지만 한 점으로 집약되는 힘에는 상당히 약하다.
이를 알고 있던 한수호이기에 벽력권으로 보호막을 깨부술 수 있었고 경기장에 난입할 수가 있었다.
난입과 동시에 파랑격의 묘리를 이용해 접근했고, 미리 예측한 이현승의 중력 기술을 역이용해 상황을 쉽게 모면할 수 있었다.
위기에서 송유나를 구해냈으니 송혁과 스승 부부의 관계가 틀어지는 일은 없을 테지만, 혹시 모르니 좀 더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었다.
송혁은 인덕이 높은 사내다.
딸을 끔찍하게 아끼기도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솔직히 인정하고 책임을 지려는 사람을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한수호는 이번 일로 스승 부부에게 조금의 영향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혼신을 다한 연기를 펼쳐 보였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설마 책임을 묻겠다고 하진 않겠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던 한수호를 향해 송혁이 입을 열었다.
“장태산…. 넌, 저 아이들과는 확실히 다르구나.”
“스승이 훌륭한 덕분입니다.”
“그래, 스승. 지금 이 자리에선 부모가 아니라 스승이라 부르는 게 옳지. 그 또한 마음에 드는군.”
송혁이 거칠게 들끓던 기세를 완전히 접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보니 송혁이 미소를 머금고 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었다.
스승 부부도 달려와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송혁은 손사래를 쳤다.
큰 사고가 날 수 있었으나 한수호 덕에 수월하게 마무리되었으니 사과는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것일까?
멍청한 얼굴로 분노를 삭이고 있던 이현승이 뒤늦게 뛰어와 송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조금이라도 해보려는 과한 욕심에 그만…. 죄송합니다. 어떤 벌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됐다. 하나 이것만은 알아두거라. 한번은 실수로 이해해줄 수 있다만, 그것이 두 번 세 번 반복된다면 그건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말을 하는 송혁의 시선이 조훈과 안서윤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건 경고였다.
만약 다음 대결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건 명백히 고의이며,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엄중한 경고.
그 말에 조훈과 안서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가, 감사합니다.”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이현승은 어물쩍거리며 일어섰다. 그런데 이번엔 송혁의 아들인 송지문이 이현승 앞으로 다가갔다.
“네 테스트는 끝났다. 그러니 이만 꺼져. 넌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자격이 없으니까.”
“그게 무슨….”
“네가 어느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을지, 혹은 입학이 거부될지는 모르겠지만 그 결과는 네 스승님들 쪽으로 통보하겠다.”
단호한 축객령.
송혁만큼이나 송유나를 아끼는 송지문이 말만으로 끝냈다는 건, 그만큼 대단한 인내심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떠나지 않겠다고 하면, 송지문에게 어떤 굴욕을 당할지 모른다.
이현승은 그래도 머리가 나쁘지 않았기에 이 상황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떠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비돈귀살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목에 걸고 있던 열쇠를 팍 잡아 뜯었다.
그걸 장한구에게 넘기는 듯하더니, 갑자기 주먹을 꽉 움켜쥐며 힘을 끌어올렸다.
사용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뭉그러진 열쇠. 그걸 장한구의 손에 던지듯 넘겨버렸다.
“그동안 두 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럼 먼저 가지요.”
이현승은 비돈귀살에게 비웃음을 그려 보이고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장한구는 그런 이현승을 향해 아까 받은 쇠 상자를 내밀었다.
“이현승. 이건 이제 필요 없….”
“스승님, 잠시만요.”
갑자기 한수호가 끼어들어 상자를 낚아챘다.
“두 분의 노고를 생각해서 준 선물인데, 다시 돌려주는 건 정성을 모욕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건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그는 이 상자 안에 혈맥보공법이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 혈맥보공법이 스승 부부가 반드시 얻고 싶어 하는 소중한 물건이라는 것도 잘 안다.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한수호가 보기에 이건 스승 부부가 원하는 그 혈맥보공법이 아닌 것 같았다.
회귀 전, 이 자리에 한수호는 없었고, 아마도 송유나가 이현승에게 크게 낭패를 당했을 것이다.
당연히 스승 부부와 송혁 사이는 완전히 틀어졌을 터.
그렇다면 이현승이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를 스승 부부에게 정상적으로 넘겼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회귀 전에 한수호가 마주했던 스승 부부는 혈맥보공법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당시를 회상해보니 스승 부부는 뭔가 크게 뒤틀린 상태의 마나공법을 운용했던 것 같다.
한수호는 그 뒤틀림의 원인이 바로 이 상자 속에 담긴 혈맥보공법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어쩌면 스승 부부께서 그런 악인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을 수 있어.’
한수호는 쇠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은 배낭에 얼른 쑤셔 박았다.
“흥.”
이를 본 이현승은 비웃음을 흘리며 그 자리를 떠났다.
어차피 열쇠가 없으면 못 여는 상자다.
그리고 혹시 연다고 해도 문제 될 건 하나도 없었다.
“다음은 제가 나가서겠습니다.”
이현승이 사라지자, 송지문이 경기장 위로 올랐다.
“이번엔 조훈, 네 차례구나.”
장한구의 말에 조성훈이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경기장으로 향했다.
이번엔 송유나가 패널을 조작했고, 보호막은 어느새 복구되어 다시 경기장을 휘감았다.
송지문과 조훈의 대결.
그런데 이 둘의 대결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