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이틀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 사이 한수호는 두 번의 미션을 더 완수했고, 13.2포인트를 적립했다.
현재 왼팔과 오른팔의 스탯은 각기 50.
20포인트를 꽉 채워 한 팔에 10포인트씩 두 팔에 배분하며 알싸한 고양감을 느껴보고자 아직도 쌓아놓는 중이었다.
한수호는 괜히 남들의 이목을 끄는 걸 원치 않아서 아예 느지막한 시간에 공원을 찾았다.
혹시라도 며칠 전의 그 여학생을 또 만나 엮이게 될까 봐 일부러 훈련 장소까지 옮겼다.
다행히 이틀 동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
낮에는 7급 게이트가 발생할 예정인 월미도를 방문했다.
월미도라는 것만 알지 월미도 어디에서 게이트가 열리는지는 모른다.
그나마 월미도가 그리 큰 곳이 아니라서 몇 바퀴 정도 돌며 주변 구조를 눈에 익숙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삼 일째가 되는 날.
한수호는 이날 몇 시에 게이트가 터지는지 몰랐기에 이른 시간부터 월미도를 찾아갔다.
시간이 지나자 월미도 놀이기구를 타려는 사람들로 점차 붐비기 시작했다.
특무부 쪽에는 익명으로 월미도 게이트 발생에 대한 경고를 보냈지만,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없다.
하다못해 평급 마공사라도 하나 보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려는 움직임조차 없다.
이 시기의 유대룡은 국내보다 국외에서 발생하는 게이트에 지원을 나가느라 정신없이 바빴으니 한편으로는 이해는 한다.
그가 국내에 없기 때문에 특무부의 기강이 무척이나 해이해진 상태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내가 그놈의 기강 잡느라 고생했던 것만 생각하면….’
회귀 전, 특무부 지원 요원으로 투입된 한수호는 유대룡이 부재중일 때마다 기강이 해이해지는 문제를 바로잡고자 꽤나 노력했었다.
고작 넘버 7의 지원 요원 따위가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기강을 따진다며 얼마나 많은 굴욕과 멸시를 받았던가.
그나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선배 요원 몇몇이 한수호의 의견을 수용해 주어 작은 변화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김재우 선배가 가장 헌신적이었는데.’
문뜩 떠오른 김재우.
그는 넘버 1의 지휘 요원으로 특무부 내에서 꽤나 영향력이 있었다.
하지만 2056년 겨울, 3급 게이트 폐쇄 작전에 투입되었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소문으로는 3급 게이트 안에서도 강력한 서열에 있는 몬스터 ‘반크’에게 급습을 받아 시체도 못 남기고 씹어 먹혔다고 한다.
하지만, 한수호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김재우의 직군은 지휘.
후방에서 다른 현장 요원들의 지휘를 맡아야 하는 인물이 왜 근접 전투형 몬스터인 반크의 습격을 받아야 했을까?
이는 현장 요원들이 김재우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거나, 몬스터의 역습으로 지휘 본부까지 밀려서 처치 불가능의 상황에 놓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날 작전에 참여한 요원들 중 희생자는 김재우 한 명뿐이었다.
적어도 지휘 본부까지 몬스터에게 밀려버린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특무부에서 열심히 구르고 계시겠네요, 선배.’
이 시점의 김재우는 특무부 요원 2년 차 정도로 열심히 하급 게이트를 돌며 경험을 쌓고 있을 때였다.
만약 5년 후까지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김재우가 투입될 작전에 한수호가 직접 따라나설 생각까지 있었다.
‘그땐 그때고…. 일단 내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야지.’
한수호는 상념을 접었다.
아직은 추운 날씨인데도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월미도의 명물, 디스코 팡팡이 신나게 꿀렁대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연인끼리, 친구끼리, 때로는 가족끼리 둥그런 기계장치에 앉아 음악에 맞춰 퉁퉁 튀는 움직임을 온갖 몸 개그로 버티려는 사람들을 보니 절로 미소가 그려진다.
‘난 한 번도 가족하고 월미도에 와 본 적이 없구나.’
서울에서 월미도까지 얼마 멀지도 않지만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형과 자신은 가족들과 함께 있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았었다.
형은 사춘기였으니 혼자 있는 걸 즐겼다고 하지만, 자신은 왜 가족이 함께 있는 걸 불편해했던 걸까?
‘내가 너무 조숙했나?’
괜히 후회스럽다.
회귀 전이었다면 가족 모두를 잃었을 상황이니 후회해도 늦었겠지만, 지금은 아버지만 빼고는 모두가 살아 있지 않은가.
언젠가 꼭 다시 한번 가족여행을 하고 싶었다.
눈앞에 보이는 저 가족처럼 서로를 마주 보며 웃음 짓고, 몸 개그도 하면서 하하 호호 웃어보고 싶다. 그때.
‘어?’
그 가족을 빤히 보던 한수호는 거기서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양 갈래로 땋은 긴 머리카락이 퉁퉁 쳐올리는 기계에 맞춰 위아래로 요동친다.
동그란 안경이 묘하게 어울리는 순진해 보이는 얼굴을 한 소녀.
한수호는 그 얼굴을 단숨에 알아봤다.
‘황가련!’
염의 마녀, 황가련.
사진으로만 봤지만 지금의 얼굴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동그란 안경을 지우고 날카로운 눈매에 좀 더 오뚝 솟은 코를 덧씌워 보니 사진 속 황가련과 완전히 똑같다.
그녀가 지금 가족과 함께 디스코 팡팡을 타며 행복한 미소를 그리고 있다.
게이트 웨이브가 터져서 정신없을 와중에 황가련을 찾으러 돌아다니지 않게 돼서 다행이었다.
이제 저 가족을 몬스터들로부터 보호하면 미래의 그 악녀는 등장하지 않게 될 터였다.
‘지금 바로 여기서 빼낼까?’
그편이 가장 낫겠지만 무슨 구실로 저 행복해하는 가족을 월미도 밖으로 데리고 나갈 수 있을까?
‘불이라도 질러?’
일부러 화재를 일으키는 것도 방법이다. 하지만 그랬다가 때맞춰 웨이브가 터지기라도 하면 더 큰 낭패다.
강제로 데리고 나가도 되긴 하지만 그랬다가 회귀 전과 다르게 웨이브가 터지지 않기라도 한다면 괜히 납치범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이러나저러나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한수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쩌엉-
거대한 범종이 울리듯 사방으로 큰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사람들은 그대로 주저앉아 귀를 막느라 난리였다.
한수호는 곧장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쩌저적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우연찮게도 균열은 한수호가 있는 곳에서 멀지 않았다.
약 50여 미터 떨어진 장소.
바이킹 놀이기구가 열심히 진자운동을 하고 있는 그곳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기더니 점차 틈을 넓히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악!”
“균열이…!”
“게이트다!”
“다, 당장 기구를 멈춰!”
“빨리 도망치라고!”
폭주하는 군중들.
균열을 보자마자 털썩 주저앉는 사람도 있고, 가족과 친구를 데리고 무작정 뛰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도.
그 자리에 멈춰서서 휴대폰을 꺼내 균열을, 찢어져 나가는 공간을 촬영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역사적으로도 호기심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지만, 그걸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니 왜 그런 말이 생겼는지 이해가 갔다.
“와, 씨! 게이트가 저렇게 나타나는 거구나?”
“어머어머! 저거 점점 크기가 커지잖아? 9급이 아닌가 봐?”
“호우! 9급이 뭐야, 8급도 넘겠는데?”
저러고 떠들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도망쳤다면 5백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할 일도 없었으리라.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건 차후 문제다.
일단은 황가련과 그녀의 가족을 여기서 빼내는 게 최우선이었다.
한수호는 큰 소란이 벌어진 틈에 마스크를 착용한 뒤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며 은근슬쩍 황가련의 가족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그녀와 가족들은 그다지 호기심이 없는 편인지, 뒤도 안 돌아보고 반대편을 향해 뛰는 중이었다.
‘뭐야? 내가 나서서 구해줄 필요가 없겠는데?’
이대로라면 아무 문제 없이 황가련과 가족들을 무사히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한수호의 짧은 바람일 뿐이었다.
“쿠웩!”
게이트에서 뭔가가 툭 튀어나왔고, 하필이면 때를 맞춰 진자운동을 하던 바이킹의 선수에 거칠게 부딪혔다.
그 뭔가는 힘차게 하늘을 날았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도망치던 사람들 앞에 쿵 하고 떨어졌다.
바닥을 나뒹구는 거구.
그건 다름 아닌 오크였다.
놈은 꽤 먼 거리를 튕겨 아스팔트 위를 나뒹굴었음에도 너무나 멀쩡했다.
툭 튀어나온 하관에는 위로 날카로운 송곳니 두 개가 치솟아 올랐고, 초록색 몸뚱이는 헬스로 벌크업 한 헬창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두껍고 단단해 보였다.
쇠로 된 치마바지 같은 거 하나만 달랑 걸친 놈의 손엔 수많은 가시가 박힌 메이스가 꽉 쥐어져 있었다.
“꾸웨에엑! 꾸엑!”
돼지 멱 따는 소릴 내지르던 놈이 드디어 황가련과 그녀의 가족을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도 많은데 마치 짠 것처럼 그 가족에게 가장 먼저 눈길을 준다.
‘젠장. 쉽게 끝날 리가 없지.’
한수호는 허벅지에서 세라믹 나이프를 빼 들고 놈을 향해 달렸다.
“도, 도망쳐, 얘들아!”
황가련의 아버지가 가족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여보!”
“아빠!”
가족의 비통한 외침.
그들은 공포에 절어 움직일 수조차 없어 보였다. 그때, 오크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꾸웨에에엑!”
단숨에 10여 미터를 좁혀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
오크가 고블린보다 느리다고는 하지만, 일반인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웬만해선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오크의 평균적인 능력치는 수련급 마공사에 맞먹는다.
또한 오크의 종특상 이놈들은 단독 행동을 잘 하지 않는다.
“꾸웨엑!”
“꾸웩!”
추가로 두 마리 오크가 달려오고 있다.
게이트에서는 끊임없이 오크들을 토해내고 있었고, 벌써 사방이 오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동료들이 달려오자 더욱 기세가 등등해진 오크는 가족 앞을 막아선 황가련의 아버지의 머리를 향해 메이스를 힘껏 내리쳤다. 순간,
푹
섬뜩한 나이프가 놈의 목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오크의 품으로 파고든 한수호가 놈의 팔을 위로 쳐올리며 나이프로 목을 찍어버린 것.
“쿠륵?”
고통과 함께 핏물이 뿜어지자 오크는 제 목을 감싸며 비틀거렸다.
“지금입니다. 빨리 도망쳐요!”
오크의 목을 단숨에 잘라버릴 수도 있었지만, 무력을 아꼈다.
얼마나 많은 오크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데, 처음부터 전력을 쓸 필요는 없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감사해요!”
황가련과 그의 가족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크에 비해 굉장히 느린 속도였기에 한수호는 그 가족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 전에, 구멍 난 목을 붙잡고 꽥꽥거리는 오크의 안면을 잡아 붕 날았다가 바닥에 찍어버렸다.
놈의 뒤통수는 아스팔트의 튀어나온 부분에 정확히 떨어졌고,
콰직
두개골이 함몰되며 새빨간 뇌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 마공사다!”
“여기 마공사가 있습니다!”
“모두 이쪽으로 도망치세요!”
한수호의 활약을 알아본 시민들이 소리쳤고, 방향도 없이 도망치던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렸다.
‘이거 안 좋은데.’
사람들이 몰리자 오크들도 몰렸다.
부챗살처럼 퍼져나가던 오크들이 이쪽 방향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일단, 뛰세요! 절대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도 말고!”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는 동안 한수호는 그들의 뒤에 남아 오크를 상대했다.
가장 가까운 곳에 두 마리.
그 뒤로 십여 마리가 더 뛰어오고 있다.
‘일단 앞선 두 놈부터.’
한수호는 두 마리 오크를 향해 몸을 날리며 주변 가게에 설치된 CCTV를 힐끗 돌아봤다.
19살짜리 학생이 9급도 아닌, 7급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오크를 마구잡이로 때려잡는 모습은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하려면 자연 각성한 마공사여야 했고, 그게 세상에 알려지면 앞으로의 행보에 차질이 클 수밖에 없다.
이제 막 아카데미에 입학한 학생이 튜토리얼도 거치기 전에 너무 큰 활약을 해버리면 분명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후….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비돈귀살의 제자라는 건 밝혀질 수밖에 없겠지.’
그건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비돈귀살의 제자 장태산.
그게 앞으로 한수호가 살아가야 할 새로운 이름이었으니까.
“꾸에에엑!”
한수호의 단검에 턱 아래가 정확히 꿰뚫린 오크가 비명과 함께 풀썩 쓰러졌다. 그 옆에 있던 오크는 벼락같은 발차기에 목이 팽이처럼 돌아갔고, 혀를 길게 빼문 상태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눌린 돼지머리에 박쥐와 같은 얼굴을 한 오크들의 면상을 보니 이곳을 찾아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놈들 한 마리에 70만 원은 하던가?’
오크의 질긴 피부는 마공사의 보호구를 만들기에 꽤 적합하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부위가 가슴팍의 극히 일부분뿐이라서 대량으로 구하는 건 매우 어렵다.
오크를 가장 쉽게 잡는 방법은 심장에 구멍을 내는 것.
다른 곳은 웬만해선 치명상을 입히기 어렵기 때문에 흉부가 멀쩡한 오크의 사체는 구하기가 힘들었다.
한수호는 주변 CCTV를 용돈 마련에 이용해 먹기로 했다.
최대한 본 실력을 감추면서 오크를 잡으면 그 장면이 고스란히 CCTV에 기록될 것이고, 나중에 그걸 근거로 오크 사체의 주인임을 주장할 수가 있었으니까.
‘벌써 세 마리니까…. 앞으로 딱 17마리만 더 잡자.’
총 20마리.
사체를 현금화하면 1,400만 원은 벌 수 있다.
세금 7%를 뗀다 해도 1,300만 원은 손에 쥘 수 있으니 꽤나 쏠쏠하지 않은가?
오크는 많다.
특무부나 정의국, 대한맹 소속의 마공사들이 이곳에 당도하려면 적어도 10분은 걸릴 것이고.
그사이에 17마리를 잡기 위해선 조금 빨리 움직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