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이틀 뒤.
아카데미의 정식 수업 시작을 하루 남겨둔 시점.
한수호는 오늘도 체력단련실에서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의 일일미션은 ‘스쿼트 3만 회’.
간만에 매우 쉬운 미션이 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후드티를 눌러쓰고 입으로 뜨거운 입김을 훅훅 불어내며 스쿼트 3만 회를 끝마쳤다.
온몸이 땀에 절었지만 미션을 완수하고 얻게 되는 포인트를 확인하면 늘 뿌듯함이 느껴진다.
-보유 포인트: 16.8NP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몬스터봇을 임의로 사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것만 가능했어도 벌써 20포인트를 채우고도 남았을 텐데.
‘적당한 놈 붙잡아서 대련이라도 해볼까?’
대련을 하면서 티 안 나게 살짝 벽력권을 운용한다면 1포인트 정도는 충분히 빼먹을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상대가 마나력에 민감한 사람일 경우엔 마나력을 빼앗겼다는 걸 바로 눈치채겠지만, 대부분은 눈치채기 어려울 터.
대련 중에 1퍼센트도 안 되는 마나력이 소실되는 걸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았으니까.
그런 한수호의 바람을 하늘이 알기라도 한 걸까?
때마침 단련실 문이 열리고 몇 사람이 우르르 들이닥쳤다.
대부분은 모르는 얼굴.
하지만 그중 두 명의 얼굴은 익숙했다.
박창수와 유재형.
박창수야 워낙 또라이 기질이 심해서 어딜 가도 티가 나기 마련이지만, 유재형은 조용한 타입이라 눈에 잘 띄지 않는다.
하지만 한수호는 누구보다도 유재형을 잘 안다.
‘재형이 형….’
그는 유대룡의 친자식이자 회귀 전의 한수호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던 가족 같은 존재였다.
“뭐야? 아직 정식 수업 시작도 하기 전인데 벌써 단련실을 이용하는 신입생이 있었네?”
박창수가 한수호를 훑어보며 묘한 표정을 내보였다.
이들은 5학년 졸업반 학생들로 아카데미 내에서 꽤 잘 나가는 무리였다.
나이는 모두 24세.
이미 4학년 때부터 실습으로 특무부 요원 일을 경험한 상태라 행동이며 말에 여유가 철철 넘쳐흘렀다.
“어이, 신입. 선배가 말하면 공손한 자세로 서서 들어야지 않겠냐?”
“창수야. 또 시작이야?”
유재형이 이번에도 박창수를 말렸다.
하지만 오늘은 송지문이 없어서인지 박창수는 멈추지 않았다.
“야, 장태산이. 너 섬 출신이라며? 이 선배들을 위해서 고기 잡는 법 좀 강의해봐라. 조만간 바닷가로 작전 나갈 일이 있는데, 가서 낚시나 좀 하게 말이야.”
“….”
한수호는 무표정하게 박창수를 돌아봤다가 피식 웃고는 그들 옆을 지나쳤다.
미션도 끝났겠다 단련실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
“이 새끼 봐라? 선배 말이 말 같지 않다 이거냐?”
박창수의 말이 무시당하자 다른 녀석이 한수호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한수호가 몸을 휙 돌린 순간,
후욱
그의 주먹 쥔 손등이 어깨를 잡은 학생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아무 반응도 못 하고 어? 하며 그 손을 바라보는데,
손이 우뚝 멈췄다.
뺨에서 불과 1밀리 정도 떨어진 위치.
한데 손이 날아든 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닿지도 않았는데 뺨이 풍압에 밀려 출렁거린다.
“뭐, 뭐야!”
한수호를 돌려세운 학생은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파리. 그것도 똥파리가 뺨에 앉아 있길래.”
“무슨 소리야! 어디에 파리가 있다고!”
“아, 이런. 점이었어? 생긴 게 꼭 파리같아서. 그럼 실례.”
한수호는 히죽 웃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때, 박창수가 한수호를 불러세웠다.
“어이, 장태산. 우리 내기 하나 할까? 비싼 걸 상품으로 걸고 말이야.”
내기라는 말에 한수호는 우뚝 멈춰서 박창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기?”
“그래, 내기. 네가 이기면 이걸 너한테 주지.”
박창수가 꺼낸 건 붉은색의 작은 보석이었다.
각성석.
붉은색이면 한수호가 삼척 게이트에서 챙긴 노란색보다 두 단계 아래지만 암시장에서 3억 정도에 거래되는 비싼 물건이다.
내기 한 번에 저 비싼 각성석을 내놓는다?
제정신인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만큼 박창수가 이 내기에 자신이 있다는 의미였다.
한수호는 그냥 무시하고 가려던 생각을 바꿨다.
‘이 새끼…. 오늘 담근다.’
놈을 제대로 털어버릴 기회가 왔으니 잡으면 된다.
“무슨 내기를 하자는 거지?”
한수호가 관심을 보이자 박창수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간단해. 서로 한 방씩 교환하는 거지. 먼저 쓰러지는 쪽이 지는 거고.”
“….”
말도 안 되는 소리에 한수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표면적으로 한수호는 미각성자였고, 박창수는 각성한 지 5년이 다 되는 베테랑 마공사다.
이는 일반인 보고 날아드는 칼을 맨손으로 잡으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마나력은 담지 않을 테니 쫄지 말고. .”
“마나력을 담는지 안 담는지는 어떻게 확인하지?”
“소심하기는. 유재형. 너 그거 가지고 있지?”
박창수가 부르자 유재형이 잠시 머뭇거리다 안경 하나를 꺼내 들었다.
“창수야. 신입한테 이러는 거 별로다.”
“넌 새끼야, 입 다물어. 넌 그냥 그 안경으로 내가 마나력을 쓰는지 안 쓰는지 확인이나 잘하라고.”
안경은 측정용 아티팩트였다.
마공사들이 몬스터들을 상대할 때, 놈들이 얼마나 강한지 대충이라도 확인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안경을 쓰고 목표를 바라보면 마나력을 사용하는 사람의 심장에서 빛이 나는데, 백색 마력은 하얗게, 흑색 마력은 검게 보인다.
빛이 나지 않는다면 마나력을 쓰지 않는 것이니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
이에 한수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마나력 없이 주먹 교환이라…. 뭐, 공짜로 각성석을 주시겠다는데 마다할 필요는 없겠네.”
마나력이 담겨도 상관은 없다. 대충 한 대 맞아주고 각성석을 얻는다면 확실히 남는 장사다.
박창수의 주먹이 자신을 어찌할 수 없음을 빤히 아는데 피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공평히 한 대씩 주고받는 것이니 손해 볼 것도 없고.
“이 병신이, 처웃네? 내 주먹에 맞아 자빠져버리면 각성석이고 뭐고 없어.”
“날 눕힐 자신은 있고?”
“오크도 내 주먹은 감당 못 하는데 너 따윈 껌이지. 근데, 나이도 어린놈이 말이 좀 짧다?”
박창수가 인상을 팍 쓰며 눈을 부라리자,
“어이쿠, 무서워라. 이거 무서워서 내기하겠나?”
한수호는 짐짓 놀라는 척을 했다.
“깝치지 말고 이 내기 꼭 해야 할 거다. 거절하면 앞으로 너의 아카데미 생활은 굉장히 힘들어질 테니까.”
협박하는 폼이 꽤나 귀엽다.
꼬맹이 일진들이 자기보다 약한 친구를 상대로, 학교에서 왕따 안 당하려면 자기 말 잘 들으라고 엄포를 놓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한수호는 유재형을 바라봤다.
박창수 눈치를 살짝 보며 한숨을 푹 내쉰다.
‘유재형이 박창수 눈치를 본다고?’
그런데 참 이상하다.
회귀 전의 삶에서 유재형은 특무부 최고 명령권자인 유대룡 본부장을 닮아 굉장히 강단 있고, 약자를 보호할 줄 아는 사내다운 인물이었다.
그런데 지금 삶에서 다시 만난 그는 망나니 같은 박창수의 눈치를 살피는 보잘것없는 인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에는 유재형이 박창수와 어울려 다니는 모습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왜 달라진 거지? 내가 회귀하면서 뭔가 영향을 끼친 걸까?’
회귀 전과 지금의 유재형이 완전히 달라진 건, 어쩌면 유재형의 성장에 한수호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번 삶에선 한수호가 유대룡에게 거두어지지 않았으니 혼자서 성장했을 것이고, 그것이 유재형의 성장 과정에 있어 악영향을 끼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의 본질이 달라진 건 아니겠지.’
한수호 생각에 본성마저 달라졌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재밌겠군. 그 내기 수락하지.”
“시원해서 좋네. 지금 네가 한 말은 모두 영상으로 녹화까지 됐으니까 나중에 다른 소리 하진 마라.”
박창수는 손까지 비벼대며 앞으로 나섰다.
한수호도 그를 마주해 앞으로 다가섰고, 목과 어깨를 돌리며 살짝 몸을 풀었다.
“선공은 양보할 테니 먼저 쳐 봐.”
상대를 무시하듯 피식거리며 하는 말에 박창수는 이를 뿌드득거리며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얼굴 씹창났다고 처울지나 마라, 새끼야!”
파악
박창수가 바닥을 박차고 빠르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5미터.
마나력을 쓰지는 않았지만 베테랑 마공사인 박창수의 움직임은 눈으로 좇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한수호에겐 엄청난 동체 시력이 있었다.
‘머리만 69에 나머진 죄다 50 좌우. 그냥 대충 맞아줘도 상관없겠군.’
한수호는 얼굴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드는 주먹을 똑바로 바라봤다.
어느 방향, 어느 각도로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지니고 날아드는지가 눈에 빤히 보인다.
순식간에 날아든 주먹이 왼쪽 뺨을 후려치는 그 순간.
한수호는 박창수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오는 걸 봤다. 그리고 주먹에 실린 힘의 강도가 한순간 확 증폭되는 걸 느꼈다.
‘이 새끼 봐라?’
마나력을 안 쓰겠다고 장담하더니 마나력 대신 특성을 썼다.
놈의 특성은 분노 폭발.
분노의 감정을 특정 행위에 담게 되면, 그 행위가 갖는 파괴력이 두 배까지 확 치솟는 특성이었다.
특성을 다리에 실으면 수십 미터가 넘는 점프력을 갖게 되고, 검을 쥔 손에 힘을 특성을 담으면 쇠도 가르는 절삭력을 갖게 된다.
이 특성이 갖는 한 가지 단점은, 너무 자주 이 특성을 사용한다면 감정 조절을 쉽게 못 한다는 것.
역시나 박창수는 지금 감정을 전혀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주먹이 얼굴에 닿는 순간, 한수호는 그냥 맞아주려던 생각을 접었다.
주먹을 뻗어내고 있는 박창수의 팔에 담긴 스탯은 88.
제대로 맞으면 한수호라고 해도 다소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수치였다.
때문에 한수호는 주먹이 닿는 순간에 딱 맞춰 고개를 살짝 틀어 각도를 조절했고, 타격점이 빗나가게끔 머리를 미세하게 뒤로 물렸다. 순간,
뻐억-
강력한 타격음이 일었다.
쿵
한수호가 한 발을 뒤로 빼며 바닥을 거칠게 찍었다.
주먹에 맞은 얼굴이 반쯤 돌아갔지만 신음 하나 흘리지 않았다.
“….!”
이를 본 박창수의 눈이 커졌다.
마지막 순간에 아무도 모르게 특성까지 사용했는데, 한수호가 그걸 한 발 물러서는 정도로 버텨냈다.
아무리 마나력을 운용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 정도면 주먹에 맞아 바닥을 나뒹굴었어야 정상이었다.
손은 뻗어낸 상태 그대로 한수호의 뺨에 닿아 있었다.
“끝났으면 손은 치우지?”
한수호가 자세를 바로 하며 박창수의 주먹을 손가락으로 스윽 밀어냈다.
그런데 그 가벼운 동작에 팔이 밀려난다.
버텨보려고 했지만 손가락에서 밀려드는 힘이 너무 엄청났다.
빠짓
손가락에서 짧게 스파크가 튀었다.
따끔함에 손을 빠르게 회수한 박창수는 한수호를 무섭게 노려봤다.
“너 마나력 사용했지?”
“친구한테 확인해 보던가.”
박창수는 유재형을 바라봤고, 그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럴 리가 없어…. 네가 어떻게 그 주먹을 마나력도 안 쓰고 받아낼 수 있는 거냐고!”
“내가 맷집이 좀 좋거든. 그런데 내가 막아내지 못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봐?”
“두 번째 공격은 절대 버티지 못할 거다!”
박창수는 한수호의 주먹을 손쉽게 받아낼 거라 확신하는지 가슴을 펴고 어서 때려보라는 듯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그럼…. 내 차롄가?”
한수호는 주먹을 꽉 쥐면서 산책하듯 한 걸음 내디뎠다. 그 순간 그의 몸이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면서 눈부신 속도로 어퍼컷을 날렸다.
후우웅
묵직한 소리.
박창수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날아오는 어퍼컷을 빤히 노려봤다.
그 주먹이 명치 아래에서부터 치솟아 올라 턱을 향해 날아들 때, 주먹이 지닌 풍압에 상의가 말려 올라갔고 아직 닿지도 않았는데도 턱이 얼얼해졌다.
한수호의 주먹이 유난히 커 보였다.
마치 쇳덩이처럼 단단해 보였고, 벽이라도 때려 부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해 보였다.
‘저거 맞으면 뒤진다!’
불현듯 떠오른 불안감.
버티는 내기인 이상 피하지 않아야 했지만 몸이 먼저 반응해 버렸다.
박창수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파앗
방금 전까지 박창수의 턱이 있던 공간에 주먹이 딱 멈춰 섰다. 그런데,
촤아악
칼에 잘린 것처럼 상의가 세로로 찢어졌고, 턱이 뭔가에 살짝 베였다.
작은 핏방울이 튀는 걸 본 박창수.
턱에서 오는 따끔한 고통과 옷마저 찢어내는 강력한 풍압에 놀란 그는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차 싶어 바로 일어섰지만 그가 피하면 안 된다는 룰을 어긴 데다가 바닥에 주저앉았다는 건 이곳의 모두가 지켜본 뒤였다.
한수호는 입가에 미소를 걸며 주먹을 회수했다.
“이런. 내가 이겼네?”
한수호가 각성석을 내놓으라며 손을 내밀자 박창수는 그 손을 탁 쳐냈다.
“못 줘, 이 새끼야! 야, 유재형! 녹화 끄고 영상 바로 삭제해. 시발, 신사답게 손 봐주려고 했더니 안 되겠네. 내기는 무슨!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쥐어패는 게 최고라니까?”
박창수는 스스로 한 약속을 깨고 아예 마나력까지 사용해 한수호를 두드려 패려 했다.
이에 한수호는 혀를 끌끌 찼다.
“쯧. 이럴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당해 보니 기분이 존나 나쁜데?”
“야! 단련실 문 잠가! 이 새끼 오늘 여기서 끝장낸다!”
박창수가 소리치며 마나력을 힘껏 끌어올렸을 때, 한수호는 주먹을 다시 움켜쥐었다.
“끝장나는 건 내가 아니야…. 바로 너지.”
한수호가 한 발 크게 내디디며 투구하듯 주먹을 날렸다.
너무도 평범한 움직임이라 막아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어디서 재롱을….”
한수호의 주먹을 팔로 쳐내려던 박창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빠각
박창수의 팔이 기이한 각도로 꺾이며 튕겨 얼굴 앞 공간이 훤히 열렸다.
한수호의 주먹은 박창수의 방어를 단번에 꿰뚫어 버리며 그대로 안면을 후려쳤다.
꽝
빛이 번쩍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화려한 이팩트.
“컥!”
박창수의 거구가 그대로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십여 미터 뒤쪽에 있는 단련실 벽에 부딪혔다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창수야!”
“박창수!”
그의 친구들이 급히 달려가 박창수를 부축했다. 하지만 박창수는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게거품까지 물고 있었다.
눈은 반쯤 뒤집혀 있는 것이 이미 정신을 잃은 모양.
박창수의 상태를 본 친구들은 한수호를 향해 분노를 표출했다.
“신입생이 감히 선배를 때려? 학생 위원회에 이 사실을 알려서 널 퇴학시키고 말겠어!”
“저 새끼, 아무래도 약물을 주입한 게 틀림없어. 시발, 각성도 못 한 새끼가 주먹질 한 번에 어떻게 창수를 날려 보내냐고!”
한수호는 그들이 뭐라고 말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유재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주시죠.”
“뭐, 뭐를?”
“녹화 파일이요. 그거 지우면 그쪽도 같은 놈 된다는 거…. 잘 알죠? 그러니까 나한테 넘겨요.”
한수호는 유재형의 본성이 달라진 게 아니길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콰직
유재형은 들고 있던 녹화 장치를 손으로 우그러뜨렸다.
“파일은 못 줘. 남겨놓지도 않을 거고.”
“….”
한수호는 망가진 기기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발로 밟아 더욱 망가뜨리는 유재형의 모습에 안타까운 눈빛을 보였다.
‘본성이…. 달라졌구나.’
그가 아는 유재형이 아니었다.
“넌 방금 아무 이유 없이 선배를 공격한 거고, 그 사실은 모두가 목격했어. 더 이상 아카데미를 다닐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흘러나오는 말들.
한수호는 지금 이 상황이 오히려 유재형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단련실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내가 불쑥 들어섰다.
“어이구야. 완전 떡실신이네. 학교 폭력인가 싶어서 몰래 촬영했는데, 그러길 정말 잘했는걸? 안 그랬으면 엉뚱한 학생이 가해자가 될 뻔했구만.”
사내는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고 그 휴대폰의 카메라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박창수를 향하고 있었다.
그를 본 한수호는 꽤나 놀라고 말았다.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고 싶었던 한수호의 특무부 선배이자 그에게 많은 걸 가르쳐 줬던 그리운 사수, 김재우가 느닷없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