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한수호는 뼈로 가득한 벽을 그랑의 방패로 모두 튕겨냈다.
방패에 닿는 모든 걸 가루로 만들다가 되었다 싶은 순간에 오른손을 한껏 뒤로 젖혔다.
파치이이이잉
건틀릿이 눈부신 빛을 머금었다.
빠지직. 빠지지직-
한껏 응축된 뇌전이 건틀릿에서 뿜어지기 직전.
콰아아아아아.
한수호는 주먹을 뻗어냈고 앞에 있는 모든 걸 부숴버렸다.
오른손의 스탯은 83. 거기에 로크의 건틀릿이 지닌 효과로 83이라는 스탯이 더해진 놀라운 괴력이었다.
쿠아아앙
결국 벽이 뚫렸다.
뻥 뚫린 벽 너머에 그가 있었다.
쉘턴 헷지.
그는 절대 마볍을 꿰뚫어 버린 한수호의 무력에 경악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건 말도 안 돼!”
한수호는 비명 같은 소릴 내지르는 쉘턴 헷지가 앞을 향해 쭉 뻗어낸 손바닥에 건틀릿을 쑤셔 박았다.
콰앙
우득
충격파가 터짐과 동시에 그의 팔이 한순간에 우그러졌다.
그러고도 모자라 한수호의 주먹은 쭉쭉 뻗어 나가 그의 가슴을 후려쳤다.
콰직
주먹이 박혀 들며 뼈 갑옷을 부수고 놈의 갈비뼈를 박살 냈으며.
퍼엉!
심장까지 터트린 강력한 힘이 놈의 등을 뚫고 나와 허공으로 확 뿜어져 나갔다.
“커억!”
답답한 신음성.
쉘턴 헷지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놀랍게도 서서히 기운을 차리더니 구멍 난 가슴을 빠르게 수복하기 시작했다.
“난 불사의 존재…. 너 따위에겐 결코 죽지 않는…?”
뭔가를 말하다가 놈이 크게 휘청했다.
그의 눈에 비친 한수호가 허벅지에서 두 개의 단검을 연달아 뽑아 어딘가로 내던지는 걸 본 것이다.
“설마!”
쉘턴 헷지는 자신도 모르게 그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단검이 날아가는 방향의 끝에 있는 조정석을 바라봤다.
그가 끌어안고 있는 대검.
그 검의 손잡이 중앙에서 부릅뜨고 있는 눈알.
그 모든 것이 슬로우 비디오처럼 보인 순간,
쩌엉-.
날아든 단검이 눈알의 1밀리 앞에서 벽에 막힌 듯 콱 멈춰졌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지만 단검의 날이 투명한 벽에 박혀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때, 두 번째 단검이 정확히 첫 번째 단검의 손잡이 끝에 꽂혀 들었다.
쾅
강한 폭음과 함께 앞서 꽂혔던 단검이 벽을 완전히 뚫고 눈알을 파고들었다.
끼아아아아아악
귀를 찢는 듯한 비명이 터졌다.
눈알에서 새빨간 핏물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더니.
콰지지직
균열을 만들어 내다가 결국.
퍼어어엉-
그대로 터져버렸다.
“크아아아아악!”
이에 쉘턴 헷지가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사방을 뒤덮고 있던 해골들과 뼛조각들이 부스스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놈의 온몸을 휘감고 있던 뼈 갑옷도 산산이 조각나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뼈 갑옷 속에 감춰졌던 후드를 걸친 검은 존재가 드러났다.
하지만 그 또한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노쇠한 노인의 모습으로 변한 채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조정석을 향했다.
“가…라, 나의 마지막…. 종…. 이여.”
풀썩.
허물어진 쉘턴 헷지의 육체는 단숨에 먼지로 변해 흩날려졌다.
바로 그때, 대검을 들고 있던 조정석이 돌연 몸을 일으키더니 허공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순간,
우우우웅
손을 중심으로 푸른 물결이 일어나더니 게이트가 나타났다.
조정석은 그 게이트 속으로 뛰어들었다.
크게 놀란 한수호가 그쪽으로 달려가려 했지만,
피슛
게이트는 조정석을 삼키고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런 젠장!”
아직 끝난 게 아닐 것 같은 불안감.
그런 한수호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던전 공략 완료 - [네크로맨서 쉘턴 헷지의 소멸]
>>던전이 보유한 포인트 30,000LP를 획득합니다.
>>감지 스탯이(+2) 상승합니다.
>>60초 후 원하는 장소로 이동이 가능한 게이트가 열립니다.
드디어 공략이 끝났다.
마치 게임과 같은 메시지였지만 이건 엄연한 현실.
한수호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 지친다.’
정말 모든 걸 쏟아부었다.
광폭화 특성 하나만 빼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사용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조정석이 갑자기 사라진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던전 공략은 끝났으니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역시, 보상 같은 건 없나 보네.’
공략 완료라고 하길래 보상이라도 나올까 싶었는데 그런 건 없나 보다. 그래도 3만 LP에 새롭게 감지 스탯까지 2포인트를 얻었으니 큰 이득이었다.
그때 한수호의 눈으로 특이한 물건이 보였다.
쉘턴 헷지가 가루로 변해 소멸한 자리에 손바닥만 한 주머니 하나와 엄지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검은 보석이 놓여 있었다.
‘이건 또 뭐야?’
한수호는 무심코 그 물건들을 주워 들려다가 움찔했다.
‘시발, 또 함정에 걸리는 거 아니야?’
이미 당한 게 있다 보니 괜히 조심스러워졌다.
그래서 손으로 잡기 전에 개조 특성을 이용해 정보부터 살폈다.
혹시라도 포인트가 있는 물건이면 정보를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포인트가 있었다. 그것도 둘 다.
[쉘턴 헷지의 보물창고]
-보유 포인트: 20,000LP
-쉘턴 헷지가 수집한 각종 아티팩트가 숨겨진 대형 아공간 주머니다.
>>포인트를 흡수하여 아티팩트를 파기하겠습니까? YES/NO
[특성석]
-보유 포인트: 10,000LP
-쉘턴 헷지가 소멸하며 그의 특성과 기술이 집약된 새로운 특성이 구성되었습니다.
-규격외 특성, ‘약탈[1]’이 새겨져 있습니다.
>>특성을 흡수하고 포인트를 획득하겠습니까? YES/NO
입이 절로 벌어질 정도의 굉장한 보물이었다.
한수호는 조금은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와 특성석을 주워들었다.
‘완전 대박인데?’
방금 전까지 지쳐 있던 한수호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이 두 개의 보물을 손에 쥔 순간, 그동안 누적됐던 피로감과 몸에 새겨진 자잘한 상처들까지도 모두 멀쩡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때 한수호의 등 뒤로 작은 파동이 일었다.
우우우웅
허공의 한 점에서 시작된 작은 떨림이 이내 커다란 물결로 바뀌더니 완전한 하나의 게이트를 만들어 냈다.
‘이걸로 여길 나갈 수 있는 거구나?’
한수호가 게이트에 다가서자 또다시 떠오르는 메시지.
>>이동을 원하는 장소를 떠올리면 그곳으로 게이트가 연결됩니다.
‘원하는 장소?’
막상 떠오르는 곳은 자신의 기숙사 방이었다.
그곳을 떠올리며 게이트에 들어선 순간.
슈욱
순식간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주변 풍경이 확 바뀌었다.
꽤 빠른 변화에 얼떨떨해하던 그는 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그리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어라?”
게이트를 통해 이동한 장소를 살펴보던 한수호는 꽤 어이없어했다.
자신은 분명 그다지 넓지도, 화려하지도 않은 초라한 자신의 방을 떠올린 것 같은데, 막상 도착한 곳은 전혀 다른 곳이다.
엄청 넓고, 화려한 장식이 가득했다.
그런데 방의 구조며 가구들이 왠지 꽤 눈에 익다.
‘뭐야? 왜 내가 여기로 온 건데?’
이곳도 한수호의 방이 맞기는 맞다.
문제는 지금이 아닌, 회귀 전에 한수호가 사용했던 특실이라는 점이다.
한수호가 그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바로 그때였다.
쐐애애액
섬뜩함이 느껴지는 길쭉한 뭔가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난데없는 기습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한수호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피해냈다. 그리고 가슴 어림을 스쳐 가는 그걸 손으로 덥석 잡아챘다.
‘칫솔?’
한수호가 낚아챈 건 칫솔이었다.
“당신, 누구야?”
누군가의 앙칼진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온 듯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돌핀 팬츠에 얇은 박스 티 차림이었다.
새하얀 허벅지를 대부분 드러낸 채, 목에 수건을 걸고 있는 여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본 순간 한수호는 살짝 놀라고 말았다.
엄청난 미모.
천상계 미모라며 사람들이 극찬을 마다하지 않던 장한설이라는 여자보다 지금 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훨씬 아름다웠다.
“누구냐고 묻잖아?”
여자는 그린 듯한 눈썹을 찌푸리더니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마치 강도처럼 눈 아래를 수건으로 가린 모습에 한수호는 짧게 탄식을 흘렸다.
‘빛이 사라진 느낌이네.’
여자에 관심갖지 않는 한수호조차 그녀의 얼굴을 더 볼 수 없게 된 것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그런 감상은 2초도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아, 미안. 좌표가 잘못 찍힌 것 같다.”
한수호는 엉뚱한 소릴 하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좌표? 너 마법형 마공사야?”
좌료라는 단어를 쓸 사람은 마법형 특성을 지닌 마공사들 뿐이기에 당연한 질문이었다.
“뭐, 비슷해. 뭘 좀 연습하다가 잘못해서 여기로 튕겨버렸네. 아무것도 건드린 거 없으니까 그냥 가봐도 되겠지?”
원소의 힘을 다루는 얼음불 특성이 있으니 마법형 마공사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잠깐.”
여자는 한수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막 샤워를 마치고, 짧디짧은 돌핀 팬츠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가까이 다가서니 향긋한 내음이 코를 자극했다.
한수호는 괜히 민망해져서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그 행동에 그제야 자기 차림을 의식했는지 여자가 몸을 움츠리며 티를 아래로 쭉쭉 끌어내려 허벅지와 가슴을 가리려 했다.
이에 한수호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훔쳐볼 생각 없으니까 안 그래도 된다.”
“어? 음. 그래. 고마워.”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말. 그런데 왠지 그 말에 아쉬움이 실렸다.
‘봐달라는 소리야, 뭐야?’
한수호는 다시 시선을 내려 눈앞의 어린 소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촉촉하게 젖은 생머리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17세 정도로 보이는 소녀다.
이런 소녀가 아카데미에 있었던가를 떠올리던 한수호는 입학식 때 최연소 입학생으로 소개되었던 한 소녀를 떠올릴 수 있었다.
‘이름이 이하윤이었던가?’
장한설이 수석 입학생으로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였다면, 이하윤은 17세의 나이로 입학이 허락된 어린 천재였다.
그녀는 마공 가문의 후예가 아닌 유명한 재벌가의 딸임에도 각성 전부터 마나 공법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한수호의 기억상, 회귀 전 이 시점에 이하윤이라는 학생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그건 장한설도 마찬가지.
회귀 전의 수석은 한수호 차지였고, 차석이 바로 이대성이었으니까.
‘달라져도 한참 달라졌어.’
회귀 전과 많은 게 달라지고 있었다.
한수호는 이 변화들이 부디 좋은 쪽으로의 변화이길 바라며 다시 눈앞의 이하윤에게 집중했다.
어쨌든 이 소녀가 소문의 그 이하윤이 맞다면, 얼굴에 상처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입학식 때에도 마스크로 얼굴을 가렸던 걸로 아는데?’
분명 입학식 때 단상 위에 오른 이하윤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 이유가 얼굴의 흉터 때문이라고 했는데 방금 봤을 땐 상처는커녕 긁힌 자국 하나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다시 얼굴을 살폈지만 그때 마스크를 썼던 그 이하윤이 분명히 맞다.
‘일부러 가리고 다니는 거구만.’
하기야, 그런 훌륭한 얼굴을 하고 맨얼굴로 다닌다면 사람들 이목이 집중될 건 불 보듯 뻔했다.
장한설만 해도 입학식 때, 그녀의 미모에 홀린 남자가 어디 한둘이던가.
‘근데 왜 말이 없지?’
자신 앞을 가로막더니 지금은 우물쭈물할 뿐 말이 없다.
“저기. 할 말 없으면 가봐도 될까? 무단으로 침입한 건 정말 미안하다.”
“아니, 사과가 필요한 게 아니라…. 잠깐만 기다려 봐.”
그 말을 하고는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갔다가 조그만 박스 하나를 들고나왔다.
붉은색 상자에 하얀 십자가가 새겨진 그건, 구급상자였다.
“상처에서 피가 많이 나잖아. 너무 심하게 훈련한 거 아니야?”
그녀는 안타까운 눈으로 한수호의 온몸에 생긴 상처를 살폈다.
‘얘 뭐냐? 자기 방에 낯선 남자가 무단으로 침입했는데 금방 내 말을 믿고 내 상처를 걱정해 준다니?’
그게 사실이면 정말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다.
아니,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면 바보천치다.
세상 물정 모르고 아무한테나 호의를 베푸는 바보 중의 바보.
“쓸데없는 호의는 네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짓이야. 게다가 낯선 사람은 경계해야지 뭐 하는 거냐, 너?”
한수호는 오히려 화를 냈다.
이건 이하윤의 호의에 대한 그 나름대로 보답이었다.
혹시라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되면 그땐 조심하라는 의미가 담긴.
“아니, 난 그게 아니라….”
이하윤은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낯선 침입자에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피를 철철 흘리는 모습으로 훈련 중에 실수해서 좌표가 틀려 이곳으로 이동했다고 말하는 한수호가 남 같지 않았던 것.
그녀 자신도 지금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서러움을 당했던가?
그걸 알기에 이하윤은 처음 보는 한수호였음에도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한수호는 이하윤을 잠시 응시했다.
다짜고짜 칫솔을 날려 공격하고 누구냐고 묻는 모습을 보고 강단 있는 성격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한수호는 슬쩍 이하윤의 신체 수치를 살폈다.
그리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가슴이 96이나 되네?’
이하윤.
그녀의 다른 곳 수치는 60 좌우였지만, 가슴은 96이나 된다.
그 말은 그녀의 마나력이 진급 끝자락에 있다는 의미.
‘이제 17살이 진급의 마나력을 지녔다니….’
마나력만 놓고 보면 이하윤은 한수호 자신과 맞먹는 능력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