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원거리마법형 마공사 이하윤.
그녀의 특기는 후방에서 속성마법을 난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금 전과 같은 근접 전투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목격한 건, 한수호가 앞장서서 오크 봇과 투덕거리다 옆으로 튀어나온 놈들을 이하윤이 직접 타격으로 하나하나 끝장낸 것뿐이다.
하지만 지평학과 홍수빈이 본 건 달랐다.
이하윤이 가장 쉽게 공격을 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오크 봇들을 적당한 속도에 알맞은 빈틈을 보이게 만든 건 다름 아닌 한수호였다.
우연히 오크 봇이 허우적대며 옆이나 앞으로 튀어나온 게 아니라는 것.
원거리 마법형 마공사인 이하윤의 근접 전투 실력이 꽤나 훌륭하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 한수호의 움직임이 훨씬 놀라웠다.
근처에 있는 사람은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을 정도의 빠른 움직임에 뭘 한 건지도 모를 만큼 빠르고 정확한 기술까지 사용했다.
홍수빈은 이 기막힌 장면을 보고 입맛을 다셨다.
‘D반에 있을 실력이 아닌데?’
당장이라도 A반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저 남학생은 수석인 장한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질 게 없는 엘리트였다.
전장을 전체적으로 살펴 가며 전투를 운영하는 기술적인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장한설보다 뛰어났다.
그녀는 지평학을 바라봤다.
이 남학생을 A반으로 달라는 뜻을 듬뿍 담은 시선으로.
그녀의 표정에 담긴 뜻이 무언지 알아본 지평학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D반에 그냥 두겠다는 명백한 거절.
이에 홍수빈은 한숨을 내쉬며 학생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후우…. 꽤 멋진 콤비 플레이였다. 모두 이 두 학생의 전투를 기억하도록. 다음 조 준비해라.”
한수호와 이하윤은 나란히 대련장 아래로 내려갔다.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전, 이하윤이 작게 말했다.
“고마워. 덕분에 쉽게 이겼어.”
“원딜 치고는 나쁘지 않은 전투였다.”
한수호는 칭찬인 듯, 아닌 듯한 애매한 말만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반면 이하윤은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몸을 돌리기 직전에 한수호가 보여준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았던 것.
자신의 흉측한 얼굴을 직접 보고서도 저런 미소를 보여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마스크 밑의 외모를 본 사람들은 열에 아홉 태도가 180도 돌변했다.
그나마 태도가 변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녀에게 미소를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도 안다.
그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자신의 외모는 누가 봐도 눈살을 지푸릴 만했으니까.
살짝 멍한 기분으로 자리로 돌아가는 그녀에게 A반의 친구들이 조심스레 축하의 말을 전했다.
멋졌다, 역시 이하윤이다, 원딜이 근접까지 잘하면 어쩌냐 등등.
하지만 그 안에 진심이 담긴 축하의 말은 없었다.
그들이 이하윤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건 순전히 장한설 때문이었다.
이하윤은 꽤나 훌륭한 원거리 마법형 마공사였지만, 성격이 상당히 어두워서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은근히 따돌림받기 일쑤였다.
사왕오패의 한 명인 이패궁 박윤주가 스승이라는 배경이 있기에 다른 학생들이 그나마 함께 어울려주는 정도였다.
그녀의 아버지가 100대 그룹 안에 들어가 있는 재벌이 아니었다면, 그녀가 장한설과 친하지 않았다면 아예 대놓고 왕따를 당했으리라.
“하윤이 너, 언제 체술까지 익혔니? 언니한테도 비밀로 했던 거야?”
장한설이 옆에 앉은 이하윤에게 물었다.
“숨긴 건 아니고…. 혹시 몰라서 틈틈이 연습한 정도야. 나 혼자였으면 힘들었을걸?”
“하긴. 장태산이라는 녀석 내가 봐도 신기할 정도로 움직임이 기막히긴 하더라.”
장한설도 한수호의 움직임이 대단하다는 걸 알아봤다.
“그치? 근데 왜 저 사람은 그런 실력을 가지고 보조형을 전공으로 택한 걸까?”
“응? 너 쟤가 무슨 전공을 선택했는지도 알아봤어?”
“어? 아니, 딱히 알아본 건 아닌데. 그냥…. 그렇다고 들었어. 식당에서 D반 학생들끼리 하는 말을 들었거든.”
누가 봐도 급히 둘러대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장한설은 그런 이하윤을 더 몰아붙이지 않았다.
대신 히죽 웃으며 음흉한 미소를 그려 보였다.
“이 언니가 다리 한번 놔줄까?”
“아, 뭐래? 그런 거 아니거든!”
“얼굴 빨개져 놓고 아니긴 뭐가 아니니?”
“아니라니까!”
두 사람이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다음 조가 나서서 전투를 치렀다.
44개 조 모두가 전투를 마치는 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오후 1시 반부터 시작된 수업은 5시가 넘어서야 끝이 보였다.
다른 조들이 보여준 전투는 특별함이 없었다. 대부분은 5분을 버텨내는 게 고작이었고, 5분 내 오크 봇 3기를 쓰러뜨리는 조는 가뭄에 콩 나듯 적었다.
“모두 수고 많았다. 오늘 수업을 통해 다들 많은 걸 보고 느꼈을 것이다. 가장 빠른 시간에 전투를 끝낸 건 장한설, 양소혜 조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전투를 해낸 건 장태산, 이하윤 조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 마공사들이 지닌 마나력은 무한정한 게 아니다. 정해진 마나력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생사가 갈릴 수 있다는 걸 결코 잊지 말도록.”
홍수빈이 수업을 마무리하려고 할 때, 갑자기 백윤후가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이렇게 두 클래스가 합동으로 수업하는 건 흔치 않은 기회인데, 그냥 끝마치기엔 너무 아쉬울 것 같습니다.”
“백윤후 학생이 그런 걸 다 아쉬워할 때가 있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홍수빈은 백윤후가 나서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비록 실력은 좋지만 백윤후의 인성이 실력만큼 훌륭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D반과 내기를 하고 싶습니다.”
“내기?”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역시나 이번에도 뭔가 예감이 좋지 않았다.
“A반과 D반의 대표들이 나서서 평급 오크 봇 다섯 기를 상대로 누가 먼저 쓰러뜨리냐를 겨루는 겁니다. 대신 특성을 쓰지 않고요.”
“특성도 안 쓰고 오크 봇 다섯 기를?”
세 기를 둘이서 상대하면서도 5분 동안 버티는 게 고작이었던 학생들인데, 특성까지 사용 못하는 상태로 다섯 기를 상대하는 건 더욱 무리였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걸 몇 명이 하겠다는 거지?”
홍수빈 교수는 백윤후의 발언을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아버지가 정의국 국장 백진성인 이상 학장인 지평학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오크 봇 다섯 기쯤은 둘도 필요 없습니다. 저 혼자 상대하겠습니다. 하지만 D반은 뭐, 세 명까지는 함께 싸워도 괜찮겠네요. 엄연히 A반과 D반은 기본 베이스가 다르니까요.”
시건방진 백윤후의 말과 표정에 홍수빈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슬쩍 지평학 교수를 보니 그의 표정도 굳어 있었다.
아무래도 이런 내기는 아니라는 생각에 홍수빈은 수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보다 지평학 교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기라고 했으니 뭔가를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의 반응에 백윤후가 옳다구나 한 표정이 되었다.
“각성석이요. 그것도 특급으로.”
백윤후가 허리에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보였다.
그건 메추리알 크기의 에레랄드빛 보석이었다.
엄청난 물건이었다.
튜토리얼 때, 한수호가 사이클롭스를 잡고 획득했던 것보다 더욱 선명한 녹색빛을 띠고 있었다.
최소한 30억 이상. 잘하면 40억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각성석을 아무렇지 않게 주머니에 들고 다니다니.
과연 정의국 국장의 아들은 스케일이 달랐다.
“D반에서도 똑같이 각성석을 걸 필요는 없습니다. 현금으로도 얼마든지 대신할 수 있는 걸로 하면 되니까요. 그래도 마공 아카데미 본교 학생들인데 이 정도는 되어야 내기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이곳 학생들의 배경이 대부분 빵빵하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학생들의 부모가 그렇다는 것이지 학생 본인이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을 리는 없다.
D반이 지기라도 한다면 적어도 한 명당 7천만 원은 내야 한다는 말이라 다들 부담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에 홍수빈이 D반 학생들을 대신해 말을 꺼냈다.
“너희는 아직 학생 신분이다. 때문에 거금이 오가는 내기는 내가 허락할 수 없다. 게다가 D반 학생들도 이런 내기는 원치 않는….”
“내가 80%를 부담하지.”
지평학이 홍수빈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A반이 이기면 각성석의 값어치에 해당하는 금액 80%를 내가 내도록 하마. 그 정도면 D반 녀석들도 큰 부담 없이 내기에 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니냐?”
지평학도 보통 배포가 큰 게 아니었다.
말이 80%이지, 금액으로 치면 24억.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금액이었다.
“그럼 20%는 제가 낼게요.”
자존심이 상했는지 양소혜가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최지혁도 지지 않았다.
“저, 저도 10%는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D반 학생들도 하나둘 손을 들며 내기에 동참했다.
“양소혜, 최지혁 믿고 나도 1억 냅니다!”
“전 5천이요!”
“장태산이 출전한다면 저도 6천 냅니다!”
“난 2천!”
“3천 있어요!”
평소엔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이던 D반 학생들이었지만 D반 전체가 걸린 일이라 그런지 갑자기 단합이 잘된다.
과연 있는 집 자식들답게 학생 신분인데도 몇천씩은 쉽게 책임질 수 있는 모양.
이를 쭉 살펴보던 지평학은 허허 웃는 얼굴이 되어 백윤후를 바라봤다.
“내기가 성립되는 것 같군. A반은 정말 너 하나로 충분하겠느냐?”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배짱이 좋구나. 교수로서 사행성을 조장하는 이런 내기는 말려야 정상이다만, 이번만큼은 징계를 받더라도 꼭 보고 싶구나. A반과 D반의 자존심 대결이라…. 굉장히 재밌겠어. 허허허.”
홍수빈은 지평학 교수가 징계까지 각오하겠다는 말을 하자 말릴 수가 없었다.
그녀 또한 이 자리에 있었으니 징계가 내려진다면 함께 처벌되겠지만, 왠지 지평학 교수에겐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았다.
“D반에서 내기에 나설 사람을 추리는 동안 제가 먼저 도전해 보겠습니다.”
백윤후는 누가 나서도 상관없다는 듯 매우 당차게 대련장 위로 올랐다.
조교수들은 갑자기 이게 뭔 일인가 싶으면서도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는 사실을 즐기며 서둘러 오크 봇을 준비시켰다.
그사이 D반은 잠시 소란을 겪어야 했다.
“백윤후, 저 자식이 재수가 없긴 해도 실력 하나만큼은 진짜배기야. 자존심이 상하긴 해도 나랑 최지혁, 장태산까지 셋이서 나서야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양소혜가 최지혁과 한수호를 꼬드겼다.
최지혁은 바로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한수호는 고개를 저었다.
“난 관심 없다. 이겨봐야 각성석 하나 얻는건데 그걸로 누구 코에 붙이겠다고. 3대 1로 싸워 이기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야, 장태산. 이건 D반의 명예가 걸린 일이라는 거 몰라? 내 말은 저 자식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서 더 이상은 A반이 깝죽대지 못하게 하자 이거야.”
“어…. 양소혜 말에도 일리가 있는 것 같다.”
최지혁은 다른 사람들 눈을 의식해서인지 숙맥 연기가 한창이었다.
어쨌든 양소혜도, 최지혁도 한수호의 내기 참가를 굉장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굳이 이런 자리에 나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냥 너희들끼리 해. 둘이서 해도 평급 오크 봇 다섯 기 정도는 문제없잖아?”
한수호는 알고 있었다.
최지혁의 진짜 실력은 백윤후와 비등하다는 것을.
“그렇긴 해도 시간이 문제지. 저 기고만장한 녀석 확실히 이기려면 너까지 껴야 된다니까?”
양소혜는 끝까지 한수호를 참가시키려고 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이미 오크 봇과 전투를 시작한 백윤후를 향해 턱짓해 보였다.
“저 녀석, 잘해 봐야 4분 컷이야. 지금도 봐봐. 마나력 전도율이 엉망인 목검 들고 설치고 있잖아. 저래선 힘만 빼다가 제풀에 지칠지도 모르…. 음?”
한수호가 말을 하다 멈췄다.
때를 같이해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백윤후에게 일제히 쏠렸다.
촤르르르륵
백윤후가 휘두른 목검이 허공에 수많은 꽃을 수놓고 있었다.
만개한 꽃잎이 화사함을 자랑하듯 다섯 기의 오크 봇을 온통 휘감았다. 그리고.
쩌저저저정-
엄청난 타격음이 울려 퍼지더니 오크 봇이 모조리 튕겨 나갔다.
쿠당탕. 터덩.
다섯 기가 한꺼번에 바닥에 널브러졌다.
[00:01:35]
1분 35초 만에 벌어진 일.
특성인 폭렬검을 쓴 것도 아닌데 엄청난 위력이었다.
이를 본 지평학과 홍수빈은 꽤나 놀란 눈치였다.
교수들이 놀랄 정도이니 학생들은 어떻겠는가.
“여윽시, 백윤후다!”
“이게 바로 광양백가지!”
A반 학생들은 난리였다.
D반 학생들도 백윤후가 2분도 안 되어 평급 오크 봇 다섯 기를 한 번에 쓰러뜨릴 줄은 예상 못 했는지 얼이 빠진 모습이었다.
모두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당차게 내기에 응했지만 이래서는 질 확률이 훨씬 높을 것 같았다.
반면, 한수호의 눈에서는 불똥이 튀었다.
두 손은 꽉 움켜쥐었고 굳게 다문 입에서는 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닮았어….’
방금 백윤후가 펼친 검술은 10년 전 꽃잎 세 장의 가면인이 한수호에게 펼쳤던 그 검술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하늘을 뒤덮는 만개한 꽃잎들.
꽃잎의 소나기 속에서 생로를 찾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한수호였기에 누구보다 그 검술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8할 이상이 흡사하다.
그때의 가면인보다 위력적인 면에서 부족하고 능숙함이 떨어졌지만, 백윤후가 펼친 검술은 분명 그 가면인의 검술에서 파생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제자? 아니면 그자의 자식인가?’
후자는 가능성이 낮다.
백윤후의 아버지는 정의국 국장 백진성이고, 그 가면인이 백진성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으니까.
‘그자가 백진성이었으면 난 도망치지 못했겠지.’
백진성은 10년 전부터 이미 궁급의 마공사였다.
그런 자가 고작 9살짜리 꼬마를 멀쩡히 살려 보낼 리가 없었다. 아무리 그 꼬마가 광폭화라는 특별한 특성을 사용했다 하더라도.
고의로 놓아준 것이 아니라면 절대로 백진성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자가 결코 고의로 놔준 것이 아니라는 걸 한수호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백윤후…. 그 검술을 누구한테 배운 것인지 내가 밝혀내 주마.’
한수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번 내기엔 사실 관심이 없었지만, 이제 생겼다.
천둥벌거숭이 같은 백윤후의 자존심을 처참히 뭉개 준다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반드시 실수가 생길 것이고, 그 실수는 한수호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그 기회를 잘 잡으면 가면인과의 관계도 알 수 있게 되리라.
백윤후가 고개를 쳐든 채 위풍당당하게 대련장을 내려설 때, 한수호는 앞으로 나섰다.
서로 스쳐 가는 와중에 백윤후가 거만하게 넌 뭔데 혼자 나서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수호가 이를 가볍게 무시하고 앞만 보며 걸어가 버리자 백윤후는 똥씹은 얼굴이 되었다.
거침없는 걸음으로 대련장으로 올라서려 하자,
“어? 장태산, 너 뭐야?”
양소혜가 놀라며 일어섰고.
“태, 태산아. 너도 나서기로 한 거야?”
최지혁이 어물쩍대며 한수호를 따라나섰다.
이에 한수호는 둘을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미안한데. 이거 나한테 양보해라.”
이유도 설명도 없는 무조건적인 요구.
하지만 둘 다 한수호의 말을 곧바로 수긍했다.
둘은 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한수호는 대련장 위로 올라섰다.
“D반 대표는 접니다.”
한수호의 말에 홍수빈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백윤후 하나로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이젠 D반에서도 건방짐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이 나타났다.
백윤후야 건방짐을 실력으로 입증해 버렸지만, 아무리 봐도 한수호는 그쪽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잘생긴 얼굴 덕분에 약간의 실력만으로도 급우들에게 찬양받는 아이돌 같은 느낌이었다.
홍수빈도 한수호가 어느 정도 실력이 있다는 건 알아봤다.
그러나 전장을 보는 눈이 아무리 좋아도 피지컬이 뒤따르지 못하면 빛 좋은 개살구일 뿐.
“무리할 필요는 없다. 세 명까지는 가능하니 최대한 이득을 취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은데…?”
“혼자 하겠습니다.”
“허. 네 자존심 세우자고 급우들한테 피해를 줄 생각…. 음?”
홍수빈이 말하며 D반 학생들을 돌아봤는데 불안해하는 학생이 하나도 없었다.
오히려 양소혜가 나서서 장태산이 몇 초 컷으로 끝낼 거 같냐며 급우들과 따로 내기를 걸고 있었다.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던 홍수빈은 지평학 교수를 바라봤다.
그런데 지평학이 양소혜 쪽을 향한 채, 손으로 숫자를 만들어 보이며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58초. 백. 만. 원.’
지평학도 양소혜의 내기판에 끼어든 것이다.
이에 양소혜는 오케이 싸인을 해 보이며 태블릿에 뭔가를 기록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틈인지 장한설과 이하윤까지 D반 쪽으로 넘어와 내기에 참가했다.
백윤후가 질 거라는 걸 확신하는지 장한설은 장난처럼 51초라는 말도 안 되는 시간에 2백을 걸었다.
반면, 이하윤은 백윤후보다 1초 빠른 시간인 1분 34초에 2백을 걸었다. 그녀는 한수호가 백윤후에게 질 일은 없을 거라는 진심을 담아 적어도 1초는 빨리 끝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를 본 A반 학생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상대가 장한설이라 누구 하나 나서서 욕하지 못했다.
단, 백윤후 만은 자신을 철저히 무시하는 장한설과 이하윤을 향해 무서운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시작해도 될까요?”
한수호는 가볍게 웃으며 질문을 던졌다.
기막혀하고 있던 홍수빈이 대련장을 보니 조교수들이 벌써 오크 봇 준비를 마친 상태.
이제 와서 꼭 세 명이 나서야 한다고 시간을 끌면 꼰대 교수가 될 판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너와 D반 모두가 원한 것이니 나중에 내 원망은 말거라.”
홍수빈은 마침내 허락했고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손짓을 해 보이자 조교수가 시작 버튼을 꾹 눌렀다.
삥-
경쾌한 벨 소리와 함께 5대 1의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