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으아아앗!”
장한설은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뒤로 자빠질 뻔했다.
아끼는 동생, 이하윤의 연애 사업을 도우려고 시작한 일인데 같은 여자한테 하트가 두 개나 달린 이모티콘을 받아버렸다.
남자하고 이런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손발이 오그라드는 판에 여자한테 이런 걸 받다니.
아주 잠시 이걸 계속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언니, 뭐 해?”
장한설이 방금 D반 삼총사와 몰래 식사 약속을 잡았다는 걸 전혀 모르는 이하윤은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이 드러나지 않게 조심스레 커피를 마시다가 허둥대는 장한설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아니, 아니야. 그보다 하윤아. 내기에서 번 돈으로 A반 전체에 저녁 사는 건 좋은데 말이야. 솔직히 네가 돈을 번 건 D반의 그 녀석 덕분이잖아?”
“그렇긴 하지. 나도 설마 정말 딱 그 시간에 맞춰서 전투를 끝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거든.”
이하윤은 묘한 눈빛을 보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치. 나도 정말 신기하더라고. 그게 마치…. 뭐냐. 1분 내에도 끝낼 수 있는데도 일부러 그 시간에 맞춘 느낌이라 이거야.”
“…. 어?”
“내 말은…. 네가 말한 시간에 맞춰준 거 같다는 거지.”
“내 목소릴 들었다고?”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거리였으니까. 아무튼. 그게 의미하는 게 뭐겠어? 우리 하윤이가 내기에서 이기길 바랐다는 거잖아. 그럼 그냥 이렇게 입 싹 닦고 모른 척하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장한설의 말에 이하윤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모른 척 안 하려면….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한턱내야지!”
“D반한테도 사라고?”
“아니, 아니. 당사자한테만.”
장한설은 일부러 한 사람만 언급했다. 일부러 급발진시켜서 자동으로 차선책을 선택하게끔 유도하려는 것이다.
“그 사람만 따로? 그건 쫌….”
역시나 이하윤은 화들짝 놀라며 거절하려 했다. 그래서 이 타이밍을 노렸다.
“그 녀석만 따로 보는 게 좀 그러면, 삼인방 다 같이 보든가. 이 언니도 같이 나가줄게.”
“삼인방? 아, 그 사람이랑 친하다는 두 사람?”
“어. 나랑 한 조였던 그 덩치 큰 여자애랑 소심해 보이는 마른 녀석. 그렇게 셋이 삼총사라고 불린다던데? 어디든 같이 다닌다고 소문이 파다하더라고.”
모르는 척 정보를 흘리자 이하윤의 표정이 조금은 밝아졌다.
여럿이서 같이 보자는 말에 부끄러움이 사라진 듯 보였다.
“갑자기 만나자고 하면 이상한 애로 보지 않을까?”
“네가 불편하면 내가 대신 말해도 되고.”
“…. 그래 줄 수 있어?”
이하윤도 내심 바라고 있었던 모양.
장한설은 속으로 ‘됐다’를 외치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여 주었다.
이미 메시지를 보냈으며, 만나기로 약속까지 했다는 사실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 * *
일주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오전에 이론 수업, 오후엔 실전 수업.
한수호는 어느 수업도 대충 하지 않았다.
지평학 교수의 수업은 굉장히 자세하면서도 친절했다.
그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세밀하게 분석하여 학생들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그래서인지 D반 학생들의 실력이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었다.
쓸데없는 의무적인 과제는 아예 내주지도 않았다.
학생들 각자의 특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고, 혼자 끊임없이 파고들어야 해결이 가능한 과제들.
그걸 가지고 서로 토론하게 되면서 조금씩 전문성을 띠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한수호도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었다.
자신의 특성에 대해 좀 더 깊숙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전투 영역은 마나력이 크게 늘어난 것도 아닌데도 40분까지로 확장되었다.
그 덕일까? 전투 영역에 집을 짓는 일도 빠르게 진척되고 있었다.
한수호는 아카데미 근처에서 대형 컨테이너 두 개로 지어진 작은 집을 임대했다.
그리고 저녁 시간대엔 그곳에서 머물며 건축 자재와 필요한 기기를 잔뜩 사들였다.
그리고 월로 하여금 건축과 관련된 전문 지식이 담긴 서적들을 구매해 읽게 했다.
한수호는 전투 영역에 들어선 지 40분이 지나면 6시간 후에나 다시 들어갈 수 있지만, 월은 한수호의 전투 영역 안에서 제한 없이 지내는 게 가능했다.
그 덕에 시간을 아낄 수 있었다.
집 건축이 시작된 지 나흘 만에 기본 토대가 마련되었다.
1개 층 면적으로 따지면 30평 정도지만 지하로 무려 3층 깊이까지 팠고, 지상으로도 3층까지 올릴 예정이라 혼자 쓰기엔 엄청난 규모였다.
재밌는 건, 이 전투 영역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바닥을 파고 보니 흙이 나왔다는 것이다.
그 흙도 그저 하얀색이었다. 하지만 성분은 분명 흙이었고, 지구에서 집을 짓는 방법과 똑같은 방법으로 건축이 가능했다.
집터를 깊게 한 것은 이곳이 전투 영역이기 때문이었다.
언제, 어느 때, 강력한 적을 이곳으로 끌고 와야 할지 모르는데 어설프게 집을 지었다가는 충격 한두 번에 폭삭 무너질 수가 있었다.
그래서 세계 유명 건축가들이 작성한 전문 서적을 사서 월에게 습득시킨 것이다.
핵폭발의 파괴력에도 버텨낼 수 있는 단단한 벙커와 같은, 그런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
한수호는 이 전투 영역에 짓는 집을 가족이 사용할 수 있게 되길 바랐다.
만약, 6년 후에 터질 악몽급 게이트를 막지 못한다면 가족을 이 전투 영역에 데리고 와 살아갈 수 있는 집을 만들고 싶었다.
아직은 생명체를 이곳에 그냥 두었을 때 어떻게 되는지 테스트해보지 못했다.
예상되는 시나리오는 세 가지.
첫째는 월처럼 아무 문제 없이 이곳에 남아 살아갈 수 있는 경우였고.
둘째는 전투 영역의 주인인 한수호가 밖으로 나가면 함께 튕기는 경우였다.
그리고 셋째는 최악의 경우였는데, 한수호가 나가는 순간 이곳에 남겨진 생명체가 소멸하는 상황이었다.
만약 테스트 결과가 세 번째로 나온다면 가족을 전투 영역에 들이는 건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일이었다.
‘어떤 생명체로 그걸 테스트해보느냐…. 그게 문제네.’
한수호는 저녁 약속 전에 전투 영역에 들어갔다가 나오면서 잠시 그런 고민에 빠졌었다. 그러다 컨테이너 하우스 벽에 걸린 시간을 보고 서둘러 움직였다.
오늘은 금요일.
친구들과 유명한 고급 음식점에서 만나기로 한 그날이었다.
약속 시간인 7시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하지만 그곳에 가기 전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를 생각이어서 먼저 움직였다.
컨테이너 하우스는 아카데미에서 15분 거리에 위치했다.
한수호는 그곳에 들르자마자 전투 영역을 사용했고, 자신만의 고유 영역 속에서 크게 심호흡했다.
“후아아…. 좋구나. 여기선 남 눈치 하나도 볼 필요가 없으니 너무 편한데?”
전투 영역에선 혼잣말로 중얼거린다고 이상하게 볼 사람도 없었다.
있는 거라곤 저 멀리서 묵묵하게 집을 짓고 있는 윌뿐이었다.
한수호는 100여 미터 거리에 떨어진 집터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사방엔 온갖 자재가 가득했고, 큼직한 굴삭기와 소형 기중기에 시멘트 배합기까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월은 깊게 파 내려간 지하 공간에서 열심히 바닥 작업 중이었다.
묵묵히 집을 짓는 데 열중하고 있는 월을 보니 자신도 놀지 말고 한시라도 빨리 실력을 키워야겠다는 목적 의식이 차올랐다.
한수호는 집 짓는 일은 월에게 맡기고 넓은 장소로 나왔다.
그저 하얗기만 한 장소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잠시 짬을 이용해 자신이 가진 능력들을 점검해 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살핀 건 광폭화 특성.
이미 3단계에 오른 상태이며, 얼마 전 패널티를 수정함으로써 이지력을 상실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2시간 동안 마나력이 50%로 떨어지는 패널티가 생기긴 했지만 전에 비하면 패널티라 볼 수도 없었다.
두 번째는 지금의 한수호를 있을 수 있게 해준 개조 특성이었다.
이대성에게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봉인이 풀리면서 갑자기 사용할 수 있게 된 특성인데, 도대체 언제 이런 특성이 자신의 몸에 봉인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이 개조 특성은 완전 사기적인 기능을 지녔다.
신체 외부를 일곱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 스탯을 부여함으로써 강함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고, 신체 내부도 여섯 부분으로 구분되어 스탯 부여가 가능했다.
거기에 나중의 일이겠지만 정신, 감각, 면역까지 수치화시킬 수 있었다.
이걸로 한수호는 자신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지 스스로 측정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타인의 수준까지 훔쳐볼 수 있는 능력을 얻었다.
또한 사물이나 던전, 특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읽어내거나, 그 정보를 수정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이 수정을 위해서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레벨 업 포인트가 필요했지만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일이었다.
세 번째로 얻은 특성은 얼음불이다.
이미 광폭화와 개조 특성을 가진 상태에서 각성석을 먹고 튜토리얼에 도전해 획득한 진급 특성.
이 특성으로 인해 라뮬과 그랑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중요성만큼은 다른 특성에 뒤지지 않는다.
게다가 특성을 사용하는 동안 이동 속도를 30%나 증가시켜 주기 때문에 활용도 또한 뛰어났다.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는 약탈[1].
타인의 상처나 상태 이상 등을 약탈함으로써 그와 관련된 내성을 얻어낼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이었다.
내성을 얻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약탈한 상처나 상태 이상을 24시간 동안 버텨내야 하기에 사용이 굉장히 꺼려지는 상황이었다.
한수호는 이렇게 네 가지 특성 외에도 그에 버금가는 강력한 위력을 보이는 기술도 지녔다.
스승 부부에게 10년간 배운 파랑격과 벽력권이 있고, 이 두 가지를 융합해 파괴력을 극도로 높인 분뢰섬도 있다.
거기에 얼음불 특성의 다운그레이드 버전인 열화기에 빙염기까지 있으니 상황에 맞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이 무려 아홉 가지 나 되는 셈.
‘아홉 개라…. 숫자가 많아 좋아 보이긴 하지만, 날 대표하는 능력이 ‘이거다’라고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건 없구나.’
그것이 문제였다.
다재다능.
한수호는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았고, 행운이 겹쳐 여러 특성과 기술을 얻었다.
하지만 깊이가 얕았다.
마나력은 진급을 월등히 넘어 궁급을 바라보고 있지만, 한 가지 특성이나 기술에 수십 년을 바쳐온 진급 마공사들에 비하면 마나 회로에 대한 이해도가 낮다는 것이다.
최근에 옛집에서 마주쳤던 꽃잎 네 장의 가면인만 해도 그렇다.
신체 스탯은 한수호보다 낮지만 그자와 정식으로 맞붙는다고 가정했을 때, 한수호는 반드시 이긴다고 장담할 수가 없었다.
아카데미 안에서야 이제 막 자신의 특성을 파악해 가는 학생들밖에 없으니 자신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일 뿐.
‘모든 걸 다 깊이 있게 파고들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해.’
이것저것 다 손대다가는 6년 후, 멸망의 시기가 도래했을 때도 지금의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모든 시간과 노력을 한 가지에 쏟아부어야 했다.
‘내게 가장 익숙한 것과 내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것. 어느 걸 택해야 하지?’
한수호는 광폭화와 얼음불, 두 가지를 놓고 고민했다.
하지만 결론은 쉽게 내려지지 않았다.
한수호가 가장 잘 파악하고 있는 광폭화는 30분 사용 후에 패널티가 생기기 때문에 다소 불안했고,
마나 회로를 분석해 스스로 터득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얼음불은 파괴력이 높긴 하지만 속성만 파악하면 비교적 쉽게 대처가 가능하다는 문제가 있었다.
‘뭐가 됐든 월말 평가 전까지는 결론을 내리자.’
결국 한수호는 좀 더 심사숙고하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시 집터에 다가가 여전히 열일 중인 월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 다시 간다. 집 잘 부탁하고.”
그 목소리에 월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본다. 그런 녀석의 눈에 글자가 새겨졌다.
[아크로를 개량하고 싶다. 관련된 서적 가져다주길 바란다.]
이젠 자기 몸까지 개량하려는 월의 모습에 한수호는 기분 좋게 대답했다.
“오케이!”
한수호는 그렇게 마음을 먹자마자 전투 영역에서 튕겨나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전투 영역에서의 40분을 꽉 채우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직 4분이나 남았음에도 본인의 의지로 전투 영역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
이 또한 그동안 한수호가 이루어낸 성과 중 하나였다.
* * *
[아크로의 허와 실]
[5중첩 아크 전자 회로의 모든 것]
[아크로 기술자 되기]
[아크로의 치명적 단점]
한수호는 친구들과의 약속 시간을 15분 남겨두고 서점에서 필요한 책들을 대량으로 구입했다.
한글 서적만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언어로 된 원본 서적까지 모두 포함시켰다.
무려 32권이나 되는 책을 기숙사로 배달시킨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다행히 약속 장소는 멀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후드를 살짝 눌러써 얼굴을 가린 채 거리를 거닐었다.
금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많은 사람이 거리를 활보했다.
게이트가 열리고 수많은 사람이 몬스터에게 죽어 나가는 세상이 되었지만,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사람들의 표정에 더 이상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거기엔 마공사들의 공헌이 컸다.
마공 특무부와 정의국, 그리고 대한맹.
이들의 힘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했다.
인구 1만 이상의 도시 내에서는 어디에서 게이트 발생해도 짧으면 10분, 길어도 20분 내로 마공사들이 출동하는 시대였다.
그래서인지 시민들은 조금씩 안전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기 시작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렇게 밤거리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왕복 8차선의 사거리.
네 모퉁이에는 지하상가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어 평소에도 유동 인구가 특히나 많은 장소였다.
그중 한 모서리에 고풍스럽게 지어진, 한옥 같은 7층 건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한 식도락]
건물에 새겨진 커다란 간판.
다섯 글자 속에 여러 가지 의미를 담은 이곳이야말로 자리가 없어서 먹지 못한다는 대한민국 최고의 음식점이었다.
식당 이름은 한식을 표명하지만, 재료는 완벽한 퓨전이었다.
게이트가 열린 후, 소고기보다 더욱 맛있는 육질을 지닌 몬스터가 발견되어 이곳에서 팔고 있었다.
대한 식도락 입구엔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예약하지 않으면 몇 시간은 가볍게 기다려야 할 정도로 손님이 넘쳤다.
그렇다고 음식값이 싼 것도 아니다.
오히려 유명 고급 음식점보다도 높은 가격대의 음식들이 즐비한 곳이 바로 이 대한 식도락이었다.
한수호는 7시 2분 전에 입구에 도착했고, 예약된 자리로 안내받았다.
그곳에 도착하니 벌써 모두가 모여 있었다.
장한설과 이하윤이 붙어 앉았고, 양소혜와 최지혁은 중간 자리를 비운 채로 살짝 떨어져 있었다.
10인용의 크고 동그란 테이블이라 한수호까지 다섯 명이 앉았음에도 자리는 여유가 넘쳤다.
테이블마다 널찍하게 칸막이가 쳐져 있어 다른 손님들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사내자식이 매너도 없이 시간에 딱 맞춰 나타나냐?”
양소혜의 말에 한수호는 시계를 봤다.
“1분 남았는데?”
“우린 10분 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었구만!”
“쟤들도?”
한수호는 싱글거리는 표정의 장한설과 슬쩍 눈인사를 하는 이하윤을 바라봤다.
“우린 5분 전에 왔어. 근데, 소혜는 정말 목소리가 되게 크네. 성악 해도 되겠다.”
“크하하하! 내가 한 목소리 좀 하지. 아버지가 몸 쓰는 마공사 되지 말고, 사자후로 고막 터트리는 음공의 마공사 해보라고 추천할 정도였거든.”
“어머, 정말? 지금도 안 늦은 거 아냐? 내가 잘 아는 음공학 교수님 있는데, 소개해 줄까?”
장한설과 양소혜는 언제 봤다고 벌써 친하게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런데 꽤 의외였다.
마공 아카데미 본교에서도 촉망받는 수석 입학생이자, 사왕오패의 하나인 귀부암왕 장현오의 딸인 장한설이 이렇게나 털털하다니.
회귀 전의 기억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게 의아할 정도로 장한설은 독특했다.
“음식은 이미 시켰어. 여기서 최고로 맛있고 비싼 걸로.”
양소혜가 한수호에게 메뉴판을 펼쳐 보이며 그중 한 음식을 손가락을 짚었다.
“샤크우마 코스 요리?”
“응. 오늘 때마침 신선한 샤크우마육이 잔뜩 입고되었다더라고. 인당 20만 원이 넘긴 하지만, 하윤이한테 이 정도는 애교지 뭐. 안 그래?”
“네? 네…. 그 정도는 괜찮아요. 덕분에 꽤 많이 벌었는걸요.”
이하윤은 아직 낯선 모양인지 존대를 쓰며 어색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근데, 여기에 쿠롤크도 파네? 이것도 먹을 수 있는 건가?”
최지혁이 메뉴판 구석에 작게 쓰여진 ‘쿠롤크 소금구이’라는 항목을 가리켰다.
“당연히 독은 다 빼서 팔겠지. 왜, 한번 먹어보게? 이게 남자들한테 엄청 좋은 음식이라던데…?”
“아, 아니. 난 됐어. 흔치 않은 몬스터 이름이 보여서 물어본 것뿐이야.”
최지혁이 화들짝 놀라며 거부하자 양소혜가 식탁을 치며 웃었다.
“푸하하. 너 그렇게 소심해서 여자 친구는 사귀겠냐? 이렇게나 예쁜 꽃 같은 아가씨가 코앞에 있는데 매력 없게 그게 뭐냐?”
“꼬, 꽃을 고릴라가 막아서고 있으니까 무서워서 그러지….”
“뭐? 고. 릴. 라?”
최지혁의 말에 양소혜가 눈을 치켜떴다.
이 둘의 모습에 장한설과 이하윤은 기분 좋게 웃었다.
또래를 만나 이렇게 편하게 대화해 본 게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
그때, 한수호가 인상을 살짝 굳히고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숨어서 그러고 있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하지?”
갑작스러운 말에 다들 어리둥절해할 때, 옆 테이블에서 누군가가 의자를 뒤로 드르륵 밀어내더니 칸막이 옆으로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났다.
“여어~ 아카데미의 유명인들이 여기 다 모였네? 이거 무슨 열등생 자존감 세워주기, 뭐 이런 자리인가?”
백윤후가 뱀처럼 간사한 눈으로 호선을 그리며 히죽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