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한수호가 기숙사로 돌아온 건 일요일 밤이었다.
친구들에겐 주말에 특무부 일을 도우러 간다고 해 두었기 때문에 그사이 별다른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기숙사 사감 방에 들러 월을 위해 주문해 둔 전문 서적을 챙기는 것도 까먹지 않았다.
책은 자신을 위해 응급 치료를 해준 월에게 주는 작은 보답이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온 한수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니 서둘러 일일 미션을 끝내고, 바로 전투 영역에 들어가야 했다.
거기서 소원의 묘목을 통해 10NP를 얻어내고, 던전 소멸로 얻은 보상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14만이나 되는 LP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도 알아볼 생각이었다.
‘일단, 메일부터 확인해 볼까?’
한수호는 사기환의 메일이 와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랩톱을 켰다.
바로 개인 메일함에 들어가 보니 과연 사기환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메일 내용을 훑어본 한수호의 감정은 크게 격앙되었다.
-태산아. 네가 준 사진들 있잖냐. 그거 대체 누구야? 전화로는 왜 연락하지 말라는 거고? 그냥 통화하는 게 더 편할 거 같은데, 네가 원하니 메일로 답장은 보낼게.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어이가 없긴 하다. 네가 나한테 죽은 사람들 정보를 알아봐 달라고 할 줄은 몰랐거든.
그렇게 시작된 사기환의 메일은 실로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수호가 보내준 건 15명의 얼굴 사진과 정글 속에 위치한 대신전 입구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사기환의 말에 따르면 15명 중 8명이 이미 사망한 상태라 그들의 시체가 있는 위치밖에 알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건 사망한 8명 중 7명의 시체가 있는 곳이 지구가 아닌 뉴에르다라는 점이다.
그리고 단 한 명만이 지구에서 사망했는데, 그 위치가 바로 지리산이었다.
그 인물은 다름 아닌 한수호의 아버지, 한철형이었다.
여기까지만 봐도 사기환의 특성은 굉장히 정확도가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사기환의 말에 의하면 생존해 있는 나머지 7명은 정보가 너무 완벽하게 가로막혀 있어서 이름 외에는 알아낼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사기환은 아무래도 자신보다 뛰어난 특성을 지닌 자가 작정하고 그들에 대한 정보를 보호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나마 알아낸 7명의 이름은 실로 놀라웠다.
유대룡과 송혁은 이미 얼굴을 알고 있었기에 놀랄 게 없었지만 어머니인 이태희를 제외한 나머지 4인은 너무도 의외의 인물이었다.
아버지인 한철형 바로 옆에서 밝게 웃고 있는 청년은 다름 아닌 정의국 국장 백진성이었다.
백진성이 한철형과 친분이 있다는 건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게다가 백진성의 젊었을 적 얼굴은 한수호가 아는 중년의 얼굴과 너무나도 크게 달랐다.
사진을 찍었을 때와 아무리 오랜 시간 차이가 난다고 해도 이건 너무 심했다 싶을 만큼 닮은 구석이 없었다.
성형 수술을 한 건가 의심이 들 정도.
한수호가 놀랄 일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태희 옆에서 무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잘생긴 청년은 사대광마의 최강자인 혈마 신유였고, 사진의 맨 우측에 있는 가장 어려 보이는 청년은 놀랍게도 황도13궁의 교주 박새한이었다.
가장 어처구니없었던 사실은 정 중앙에 있는 나이 든 사내의 정체였다.
그의 이름은 이산.
바로 마공 서고를 탄생시켰으며, 수많은 아티팩트를 창조해낸 전설과도 같은 인물, 마공전뇌 이산이 바로 그였던 것이다.
놀라운 건 또 있었다.
대신전이 위치한 장소가 오래전 폐쇄된 것으로 알려진 국회의사당 게이트라는 것.
당시 국회의사당 내부에 느닷없이 게이트가 생겨 얼마나 큰 혼란을 야기했던가.
세간에서는 국회의원들이 민심을 돌보지 않고 개인의 영달을 위할 줄만 아는 것에 하늘이 노해 벌을 내린 거라며 국회의원들을 죄다 내쳐야 한다고 주창하는 일도 있었다.
그 게이트는 그 어떤 때보다 빠르게 폐쇄되었던 거로 아는데, 이제 보니 엄청난 실력자들이 그 게이트에 들어가 해결을 했었던 모양이었다.
사기환은 한수호가 준 사진으로 신유와 박새한, 백진성의 이름만 알아냈을 뿐이라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어떤 인물인지까지는 몰랐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한수호가 어째서 오래전에 죽은 자들의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그들의 정보를 캐내달라고 한 건지를 더 궁금해했다.
한수호는 사기환에게 일단 간단한 답장을 보냈다.
도와줘서 고맙고, 자신이 그들의 정보를 원했던 건 아카데미 도서관 안에서 우연히 찾은 사진 때문이라고 대충 둘러댔다.
그리고 조만간 찾아갈 테니 그때 한 번 더 도와달라고 미리 언질을 해 두었다.
‘이걸로 형이나 동생들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겼어.’
당장이라도 가족사진의 스캔을 떠서 사기환에게 보내보고 싶었지만 그건 직접 만나서 처리해야 했다.
혹시라도 가면인들이 깔아놓은 정보망에 걸려들기라도 한다면 낭패였으니까.
한수호는 메일을 보내자마자 랩톱을 껐다.
그리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후…. 우선은 장한설이 설아가 맞는지부터 확인해 봐야겠지.’
그러려면 장한설의 왼쪽 어깨에 삼각형 모양의 점이 있는지부터 알아봐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아직 쌀쌀한 이 시기에 수영장에 놀러 가자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 큰 여자 옷을 무턱대고 벗겨볼 수도 없었으니까.
한수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놓고 고민만 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오늘 미션은 뭐가 나왔으려나?’
곧장 개조 특성을 열어봤다.
[오늘의 미션]
-정확한 자세로 스쿼트 5,000회
-획득 포인트: 0.5NP / 50LP
‘어?’
한수호는 눈을 비볐다.
스쿼트 5천 회라는 매우 쉬운 미션이어서가 아니다.
‘한 번에 0.5포인트라고?’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일일 미션으로 얻을 수 있었던 포인트는 0.2NP에 20LP였다.
그런데 갑자기 0.5에 50으로 올라 있다.
무슨 특별 미션도 아닌데 포인트가 크게 늘어난 것이 너무 의외다.
이 개조 특성으로 발생하는 시스템적인 설명은 상당히 불친절 하기 때문에 깊이 이해하려 들면 오히려 머리만 아프다.
한수호는 때가 되면 포인트 수급 수치가 늘어나는 거구나 라고 생각해 버리고는 바로 미션 수행에 돌입했다.
“훅…. 훅…. 훅….”
한수호는 빠르게 스쿼트를 실행했고, 1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5천 회를 모두 마칠 수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가득해졌고, 다리 근육이 잔뜩 긴장해 단단하게 뭉쳤다.
운동 후에 느껴지는 뿌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샤워를 마친 한수호.
그는 곧바로 월에게 줄 책을 손에 들고 전투 영역을 발동시켰다.
슈우욱.
눈앞에 떠오른 동그란 구체에 손이 닿자마자 그의 몸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 * *
한수호의 배낭은 예상대로 전투 영역 안에 잘 보관되어 있었다.
배낭 안에는 라뮬, 그랑, 로크가 다소곳이 들어 있었고, 소원의 묘목이 든 소용량 주머니와 암즈, 유엽비도, 염마갑의 코어가 든 대용량 주머니도 그대로였다.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용마검 팔찌 또한 무사히 들어 있어 다행이었다.
‘월 녀석…. 기특한데?’
한수호의 기억으로는 전투 영역에 들어선 직후 배낭도, 라뮬도, 아공간 주머니들도 모두 바닥에 흘렸던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은 배낭에 모두 잘 담겨 이곳에 가져다 둔 소파에 있는 걸 보니 월이 챙겨둔 것이 분명했다.
한수호는 바로 공사 중인 월에게 가서 책을 넘겨주려다가 일단 소원의 묘목을 꺼냈다.
묘목엔 새로운 열매가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열매를 따 먹자 청량한 느낌이 들면서 바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비물질적인 것에 한하여 소원 하나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소원을 말하세요.
“10NP를 올려줘.”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바로 10NP가 상승했다는 메시지가 등장했다.
한수호는 바로 포인트를 배분하려다가 멈칫했다.
처음엔 소원의 묘목으로 얻게 되는 NP는 바로바로 배분할 생각이었지만, 이번에 듀라한을 상대하면서 생각을 바꾸었다.
‘최소 20NP는 항상 쌓아놓고 있어야겠어.’
흡마력으로 듀라한의 마나력을 흡수한 덕분이긴 하지만, 이번에도 19포인트가 있었던 덕분에 심장과 뇌를 보호해 약탈의 후유증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위험할 때 배분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포인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10.5NP라….’
내일 아침이면 다시 열매를 딸 수 있으니 바로 20NP를 채울 수 있었다.
‘일단 패스.’
한수호는 10.5NP를 그대로 둔 채 책을 들고 월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공사장을 내려다본 한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이 전투 영역에 들어오지 않은 지 이틀 정도가 지났을 뿐인데 엄청난 진전이 있었다.
월은 기초공사를 끝내고 골조를 올리는 중이었다.
곳곳에 세워진 H빔은 벌써 집 모양의 형태를 갖춘 상태.
한수호는 다시 한번 월에게 큰 고마움을 느껴야 했다.
“월! 선물 가져왔다!”
한수호의 우렁찬 목소리에 작업 중이던 월이 고개를 슥 돌렸다.
그리고 눈으로 질문을 던졌다.
[책인가?]
“그래. 책 가져왔으니까 얼른 챙겨가.”
[알았다.]
월은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두 번을 뛰어서 바로 지상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그 움직임이 꽤 가볍고 영민해 보인다.
“오, 뭐야? 너 벌써 업그레이드 한 거냐? 움직임이 꽤 좋아. 아무튼 어젠 고마웠다. 너한테 신세를 다 지네.”
한수호는 월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 했다. 그때였다.
후욱.
월이 한수호의 손길을 피하더니 마치 크로스 카운터를 치듯 주먹을 날렸다.
그 동작이 어찌나 빠르고 강력한지 한수호는 간신히 왼팔로 얼굴을 가리는 게 다였다.
콰앙!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엄청난 충격에 한수호는 뒤로 10여 미터나 퉁겨졌다.
그래도 직접적인 타격은 피한 터라 코피가 터지는 일은 없었다.
촤르르르륵.
두 발과 손으로 땅을 짚은 채 미끄러진 한수호는 얼얼해진 왼팔을 흔들며 월을 노려봤다.
“야, 씨! 너 지금 뭔 짓을…. 어라?”
한수호는 그제야 월의 스탯을 확인했고, 확 달라진 수치에 놀라고 말았다.
올 스탯 78.
놀랍게도 지금의 월은 진급 마공사 수준의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수호는 지금까지 월의 능력치를 특급 수준에 맞춰 놨었다.
평급보다는 아크로의 에너지 소비가 크지만, 특급은 되어야 공사가 제대로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진급으로 해 두면 좀 더 빠르다.
허나 그렇게 되면 에너지 소비량이 많아 두 시간마다 대여섯 시간씩 재충전을 해야 해서 시간 낭비가 크다.
그런데 월이 자기 멋대로 신체 능력을 진급으로 올려놓았으니 어찌 놀랍지 않을까.
[주인. 같은 편이라고 해도 너무 방심하면 잘못될 수 있다고 본다. 어제처럼 큰 상처를 입고 싶지 않으면 아무리 가까운 자라도 늘 조심하길 바란다.]
월이 한수호를 가르치고 있었다.
월로서는 한수호가 어떤 상황을 겪었는지 모르지만, 큰 부상을 입고 나타난 주인이 너무도 답답했던 것이다.
그래서 경각심을 주고자 기습을 시도했다.
월은 지금 거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는 존재로 진화하고 있었다.
“야, 어젠 내가 누구한테 뒤통수를 맞아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말을 하던 한수호는 흠칫 놀랐다.
어제 일은 뒤통수를 맞은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김재우를 믿었기에 윤재희를 믿었고, 그녀의 팀원도 믿었다.
하지만 윤재희의 팀원이 배신을 때렸다. 그것도 둘이나.
직접 배신을 당한 건 아닐지라도 그로 인해 상처를 입고 죽을 위기에 빠졌던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믿어선 안 된다는 피맺힌 교훈.
한수호는 그걸 월을 통해서 깨닫고 있었다.
‘병신같이…. 믿었던 친구한테 배신을 당해 놓고도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르다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리고 그걸 한 번 더 짚고 넘어가 준 월에게 큰 고마움이 느껴졌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내가 너무 안일했던 것 같네.”
한수호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다시 월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뜨린 책을 주워 월에게 넘겼다.
[책은 고맙다. 잘 쓰도록 하지.]
“얌마. 이왕이면 존대 좀 써라. 아니면 말을 좀 예쁘게 하던가.”
[존대? 주인은 월에게 존대를 받고 싶은가?]
“안 될 건 없지.”
한수호는 드디어 월에게 존댓말을 듣게 되는구나 싶어 기대에 찼다. 그런데,
[미안하지만, 월의 프로그램엔 존대의 개념이 없다. 주인이 이해해라.]
“…. 뭐가 어째?”
월은 한수호를 열받게 만드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어휴. 됐다, 됐어. 그보다, 너 목뒤에 있던 패널은 어디 간 거야?”
한수호는 월의 목 뒤편에 있던 패널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에 의문이 생겼다.
그 패널이 있어야 월의 신체 능력 수준을 조절하거나 여러 가지 세부적인 제어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패널은 없앴다. 월을 제어할 수 있는 건 주인과 월, 단둘이면 충분하다. 제삼의 인물이 월을 제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건 지극히 위험할 뿐.]
“패널 없이도 내 말엔 절대 복종하겠다 이거지?”
[물론이다.]
그렇다면 큰 상관은 없었다.
패널을 없애버림으로 인해 다른 사람이 끼어들 여지를 남기지 않는 건 한수호도 찬성이었으니까.
“근데, 계속 지금의 신체 능력을 유지하고 있으면 과부하 생기지 않겠냐? 아크로가 무슨 무한동력도 아니고.”
[월의 기본적인 능력은 이미 업그레이드되어서 큰 문제는 없다. 지금 상태가 평상시라고 보면 된다.]
“정말? 그럼 지금보다 더 높일 수도 있다고?”
[가능하다. 하지만 아크로에 부담이 간다. 그래서 전문 서적을 통해 좀 더 정밀한 부분을 업그레이드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월의 진화 속도는 엄청났다.
나중에 사기환이 월을 본다면 기절초풍할 만큼.
[주인. 부탁이 하나 더 생겼다.]
“뭐든지 말해.”
[마나 코어를 하나 가져다줬으면 한다.]
“마나 코어?”
[아크로 만으로는 월이 계획하는 업그레이드를 모두 감당하는 게 어려울 것 같다. B급 이상의 마나 코어가 있다면 훨씬 강력한 존재로 거듭나는 게 가능하다.]
월은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아 요구할 줄도 아는 너무나도 현명한 A.I였다.
한수호는 월이 필요하다면 최대한 맞춰주고 싶었다.
“당장은 무리겠지만 조만간 구해오도록 할게.”
[고맙다. 주인.]
“짜식. 네가 사람보다 낫다.”
한수호는 빙그레 웃으며 다시 월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그때였다.
후욱.
또다시 월이 한수호의 손을 피했고, 좀 전보다 한층 강력한 크로스 카운터를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