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신소이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한수호의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높은 나무 위였기 때문에 주변 정황을 비교적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두 팀이 뭉쳤는데, 장태산 혼자 상대가 될까?’
그녀는 한수호가 상당히 강한 마공사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상대는 8명이나 된다.
그중에 하나는 A반의 2위 에이스인 백윤후였고, 하나는 B반의 1위 에이스인 박현수였다.
이 둘만해도 만만치 않은데 여섯이나 더 있으니 아무리 한수호라 해도 승률은 너무나도 낮았다.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하나?’
신소이는 자신이 제대로 나선다면 상대를 이길 수는 없어도 이 위기를 빠져나갈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사실 생각보다 약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B반이나 C반의 에이스 중에서도 상위에 가까울 만큼 강했다.
그럼에도 D반 꼴지로 머무르고 있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신소이는 마공 아카데미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 일을 제대로 해내려면 사람들 관심을 받지 않아야 했고, 사적인 친분도 가질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부러 친구들을 멀리했다.
누구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길 바랐다.
그런데 한수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물론 이번 평가를 잘 받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있긴 했지만, 신소이는 한수호의 관심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은 도와줘도 괜찮겠지?’
신소이가 그런 생각을 할 때, 전투가 벌어졌다.
앞뒤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한수호가 택한 건 3인 팀이었다.
핵심 전력이 있는 5인 팀은 교묘하게 한수호의 시야를 피해 움직였다.
그 사이, 한수호는 3인 팀 중 둘을 단숨에 잡아냈다.
급기야 나머지 한 명까지 충분히 제압하기 직전이었다.
그제야 백윤후를 위시한 5인 팀이 공격을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신소이가 나선다면 한수호를 위험에서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선뜻 몸이 움직여 지지가 않았다.
‘신호를 기다려야 해.’
한수호는 분명 자신을 믿고 신호를 기다리라고 부탁했다.
신소이는 그 말을 끝까지 따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수호의 신호가 터져 나왔다.
“지금이야!”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신소이는 준비하고 있던 특성을 힘차게 뿜어냈다.
‘속박!’
특성 속박.
이 특성은 자신보다 마나량이 낮은 상대를 보이지 않는 그물로 옭아매는 것으로, 마나량의 차이가 클수록 그물의 숫자가 늘어나고 굵어지기 때문에 움직임이 크게 제한되는 특징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녀의 특성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속박에는 누구도 모르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2단계 효과: 특성 발휘 시, 상대방의 마나량이 높을 경우엔 사용자의 마나량이 2배 증가합니다.
즉, 신소이는 상대의 마나량이 얼마이든 별 상관없이 자유롭게 이 특성을 사용할 수 있었다.
자신보다 상대방 마나량이 높으면 자동으로 마나량이 2배로 증가할 뿐만 아니라, 특성 단계가 오르면 3배에서 4배까지도 증가가 가능해진다.
특성 효과만 놓고 본다면, 거의 궁급이나 마찬가지.
하지만 그녀는 이 특성의 비밀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걸 아는 이는 오직 그녀의 아빠밖에 없었다.
우뚝.
신소이의 속박에 당한 학생은 둘.
수풀 안쪽에서 후방을 지원하려던 학생 둘은 보이지 않는 그물에 묶여 거의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걸 감각으로 확인한 한수호가 돌변했다.
분명 디버프에 걸려 기력이 빠졌어야 하는데 오히려 더욱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검술을 쓰는 학생의 뒤로 돌아가 정글도로 뒷덜미를 후려쳤고, 그 학생을 앞으로 확 밀쳤다.
백윤후는 낌새가 이상하자 바로 몸을 틀었고, 그 뒤를 따르던 박현수가 대신 방해를 받고 말았다.
갑자기 날아든 학생 때문에 시야가 가려진 그 순간,
터엉. 텅!
두 번의 충격음이 터지며 두 학생이 튕겨 나갔다.
[8]
[46]
박현수는 간신히 치명타를 피했지만 다른 학생은 그렇지 못했다.
이동 속도가 확 느려지고 마나량이 급감하자 그 학생은 어쩔 줄 몰라했다.
그사이 한수호는 백윤후의 등 뒤에 따라붙었다.
“너 이 자식, 우릴 속였구나!”
한수호는 검술 학생의 공격에도, 디버프에도 당하지 않았다.
검술 학생의 공격은 아예 아무 영향이 없었고, 디버프는 면역 스탯에 걸려 효과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면역 없이 당했어도 한수호의 높은 신체 스탯 때문에 별 영향이 없었겠지만, 면역 스탯은 그 미미한 영향마저 없애버렸다.
“생존의 핵심은 뭐다?”
한수호가 백윤후의 등 뒤에서 비아냥거렸다.
“바로 정보거든.”
한수호는 그렇게 말하며 백윤후의 등을 발로 뻥 차버렸다.
“악!”
멀리 튕겨 나간 백윤후는 바닥을 구르다 나무 기둥에 부딪혔다.
하지만 곧바로 일어나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한수호는 뒤를 쫓지 않았다.
‘가서 더 데려와라, 백윤후. 내 점수가 돼줄 희생양들을.’
입꼬리를 올리며 멀어지는 백윤후를 바라보던 그는 몸을 돌렸다.
방금 전 한수호에게 한 대 맞았던 박현수는 타격이 약했기에 벌써 내빼고 없었다.
짧게 전투가 벌어졌던 장소엔 총 여섯의 학생이 빌빌거리고 있었다.
한수호는 그 학생들을 죄다 한곳에 모았다.
신소이의 속박에 당한 두 학생은 거의 석상처럼 굳어져 거의 움직이질 못했다.
“이제 어쩔 거야?”
신소이가 다가와 묻자 한수호는 볼을 살살 긁다가 속박에 당한 학생 둘을 데리고 멀리 이동했다.
“다른 녀석들 도망 못 가게 감시해줘.”
“응? 어…. 알았어.”
신소이는 창을 굳게 잡아 쥐고서 이동 속도 감소에 마나량 20%까지 감소한 학생들을 노려봤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였다.
삐링
단말기에서 묘한 음이 흘러나왔다.
“…. 뭐지?”
단말기를 꺼내 보니 그녀가 개설해 둔 방으로 두 명이 팀 가입을 요청했다.
때를 같이해 저만치 멀어져 있던 한수호가 두 학생을 끌고 돌아왔다.
“가입 허락 좀 부탁할게.”
“어? 어….”
신소이가 가입을 허락하자 이제 그녀의 팀원은 총 4명으로 늘었다.
“이 녀석들 속박도 풀어주고.”
“응.”
속박을 풀자 두 학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수호는 신소이에게 싱긋 웃어주더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네 명의 학생들에게 다가갔다.
학생 중 둘은 A반이었고, 둘은 B반이었다.
그들은 한수호가 다가서자 한 번만 봐달라고 사정했다.
하지만 한수호는 그들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콱. 콰과곽.
정글도로 학생들 어깨를 툭툭 때리자, 가슴 보호대에서 삐리릭 소리를 내며 타격 수치가 확 치솟았다.
[75] / [77] / [71] / [74]
그걸로 끝이었다.
리타이어.
타격 수치가 70을 넘게 되면 리타이어였고, 한 명 당 가산점 5점이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 가산점은 한수호와 한 팀으로 묶여 있는 모두에게 전해졌다.
리타이어된 학생들은 털썩 주저앉은 채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보급 가방 내려놓고 모두 꺼져. 10분 안에 시작 지점으로 귀환 안 하면 추가 벌점 있을 거다.”
한수호의 말에 정신을 차린 학생들은 가방을 황급히 벗어던지고는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신소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 둘은 왜 팀에 넣었어?”
뜬금없이 팀이 된 두 학생.
그것도 D반이 아니라 C반이었다.
“아, 얘네? 둘 다 특성이 괜찮더라고. 중독 특성하고 기력 감퇴. 앞으로 우리가 생존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될 거 같거든.”
“그런…가?”
솔직히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한수호도 몰랐다.
한수호가 그들을 팀원으로 삼은 건, 다른 녀석들을 끌어들일 미끼로 삼기 위해서였다.
적이었던 학생들을 따로 멀리 데려가 한수호가 내건 제안은 하나였다.
팀이 되어주면 학생 넷을 리타이어 시킨 점수를 함께 얻게 될 거라고.
어차피 리타이어할 상황에 처한 두 학생에겐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기존의 팀을 탈퇴하고 한수호의 팀에 드는 것만으로 무려 20점을 얻게 되니 오히려 큰 이득이었으니까.
“반갑다. 앞으로 4일간 함께 지내야 할 사이니 통성명이나 할까? 난 장태산이다.”
한수호는 환하게 웃으며 두 학생에게 손을 내밀었다.
* * *
수많은 기계 장치들로 가득한 장소.
그곳 중앙엔 동그란 모양의 무대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닥에서 20센티 정도 높게 된 동그란 무대 주변엔 바늘 같은 침들이 박힌 기계 팔 수십 개가 타원을 이루며 중앙 쪽을 향하고 있었다.
치이이이이잉-
시끄러운 기계음이 울리더니 바늘에서 빛이 뿜어졌고, 그 빛은 무대 중앙에서 뭉쳐 들었다.
잠시 후, 그곳엔 사람만 한 크기의 거울면이 등장했다.
푸른 물결이 출렁이는 그건 다름 아닌 게이트였다.
게이트가 나타나고 몇 초가 지났을 때, 거기서 사람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 갓 스물이 되었을 법한 여자였다.
그녀는 다름 아닌 이하이였다.
한수호가 해킹 방지용 스티커의 마나 회로를 건드렸을 때, 경고음을 듣고 아빠를 찾았던 소녀이기도 했다.
그녀가 나타난 직후, 또 다른 사람이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왔다.
50대 초반의 사내.
그는 이하이의 아빠였다.
“드디어 돌아왔나?”
사내는 감회가 새로운 표정으로 자신의 실험실을 둘러봤다.
“한 달만인데 달라진 건 하나도 없네, 뭐.”
이하이는 무대 아래로 내려가서는 기지개를 쭉 켰다. 그때, 그들의 귓가로 묘한 음이 흘러들었다.
삐잉. 삐잉. 삐잉.
이건 사내가 제작한 장치에 문제가 생겼을 때 울리는 경고음이었다.
“아빠! 저거 또 울리는데?”
“허. 이거 참. 또 뭐가 고장 난거지?”
사내와 이하이는 서둘러 소리가 나는 방으로 뛰어갔다.
그들이 이 장소를 비운 건 한 달이나 되기에 저 경고음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방 안에는 넓은 탁자가 있었고 그 위엔 두 개의 지구본이 놓여 있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지구본에는 수많은 흰색 점들이 찍혀 있었는데, 경고음은 작은 쪽 지구본에서 울리는 중이었다.
삐잉. 삐잉. 삐잉.
“아빠, 지구 쪽이야.”
이하이는 작은 지구본에 딱 달라붙어서 깜빡거리고 있는 붉은 점을 손가락으로 터치했다.
그러자 곧바로 풍선말 같은 홀로그램이 떠올랐다.
[경고. 시스템이 해킹되었습니다.]
짧고 임팩트 있는 문구였다.
“어? 이런 경고는 처음 보는데?”
“내가 확인해 보마.”
심각한 표정이 된 중년 사내는 바로 지구본에 달라붙어 두 손을 좌우로 가져다 댄 상태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사내가 눈을 떴다.
그의 얼굴엔 놀란 빛이 가득했다.
“누가 내 작품에 손을 댔구나. 스티커를 조작해서 내가 심어 놓은 기능을 아예 무효화했어.”
“에? 그게 가능해? 아빠가 만들어낸 장치들은 누구도 수정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면서?”
“그러니 말이다.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
사내는 도대체 누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또 71번인가?”
조작된 스티커는 71번이었다.
한 달 전, 해킹 시도로 경고음을 울렸던 바로 그 스티커였다.
“아무래도 71번 스티커를 사용하는 자가 나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것 같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만들어낸 장치를 조작하는 건 불가능했다.
마공전뇌 이산.
그것이 바로 이 중년 사내의 이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