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한수호는 정제비용 2천 6백만 원을 일시불로 지불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정제소를 나선 그는 담당자가 마지막에 보인 표정을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심장 하나로 322의 마나가 채워지자 담당자의 입은 벌어진 채로 다물어질 줄 몰랐다.
그리고 한참 만에 이 심장이 대체 어떤 몬스터의 것이냐며 말까지 더듬거리며 물었다.
정제 후의 마나가 300이 되려면 최소 특급 마공사에 버금가는 몬스터여야 했다.
그런데 322나 나왔으니 진급이거나 그에 가까운 몬스터라는 의미다.
대체 이런 엄청난 몬스터가 어떻게 8급의 여의도 게이트 안에서 나타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
게다가 그 심장의 주인이 19살의 아카데미 1학년 학생이라니.
한수호는 담당자의 질문에 그저 운이 좋았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해서인지, 담당자는 한수호가 정제소를 나가는 순간까지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밖에 나와보니 학생들을 태우고 있던 버스들은 모두 출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자신만 쏙 빼놓고 가버린 것에 화를 내려던 한수호는 한쪽에 서 있는 잘 빠진 밴 한 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밴의 운전석 옆에 서서 담배를 빨던 사내가 한수호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다행스럽게도 한수호가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별도의 차량을 준비해 둔 것이었다.
편안히 혼자서 밴을 타고 귀가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한수호는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밴에 올라탄 한수호는 뒷좌석에 편안하게 앉았다.
시트는 푹신했고, 두 다리를 쭉 펴고 눕다시피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밴은 부드러운 배기음을 흘리며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무려 5일.
회귀 이후로는 처음으로 이렇게나 긴 시간을 뉴에르다에 머물렀다.
왠지 감회가 새롭다.
회귀 전에는 하루가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보름 가까이 뉴에르다에 머물며 거의 살다시피 했었다.
그땐, 정말이지 하루하루가 외줄을 타듯 위태로운 삶이었다.
당시, 한수호가 임무를 위해 찾아간 게이트는 낮아 봐야 5급이었고, 때로는 3급 게이트도 있었다.
매 순간이 위험한 삶이었지만 한수호는 그때의 경험을 싫어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믿어 의심치 않는 특무부 동료들과 친형제처럼 자신을 아껴주었던 김재우가 있었고, 그때의 치열한 경험 덕에 지금의 한수호가 있을 수 있었으니까.
‘재우 형이 죽는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야. 그리고 어머니도, 내 형제들도 모두!’
한수호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쭉 꺼져 있던 공법폰을 켰다.
5일 동안이나 폰을 꺼놨으니 부재중 연락이 꽤 있을 것 같아서였다.
예상대로 여러 사람의 연락이 와 있었다.
오랜만에 스승 부부가 연락을 했었는데, 하필 중간 평가 중이라 폰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스승 부부는 조만간 서울에 올 일이 생겼다며, 4월 중에 한번 보자는 메시지를 남겼다.
전화를 해볼까 하다가 운전기사가 신경 쓰여 나중으로 미뤘다.
그다음은 사기환이었다.
한수호가 부탁한 몬스터 봇의 수리가 모두 끝나서 토요일 오전에 직접 챙겨서 찾아오겠다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월의 쫄따구로 쓸 몬스터 봇이 생긴다고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그려졌다.
‘근데 직접 오겠다니, 뭔 일이래?’
그리 멀지 않은 대전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기환이지만, 연구와 몬스터 봇 개발밖에 모르는 사람이 웬일로 서울까지 행차할 생각을 했는지 궁금했다.
‘기숙사 가면 형하고 통화부터 해야겠는데?’
한수호는 1시간 정도 후에 전화하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그 외에는 친구들의 메시지였다.
한수호가 시작 지점에 돌아온 이후 바로 교수들에게 불려간 터라 친구들과는 제대로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다행히 이하윤이 유적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대충 설명해 주었는지, 크게 궁금해하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들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이 주말이니 점심이나 함께하면서 얼굴이나 보자는 내용이었다.
한수호는 따로 답변은 하지 않았다.
답변을 주는 순간 바로 연락이 올 게 분명한지라 지금은 그저 편히 쉬고자 했다.
한수호는 푹신한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댄 상태로 공법폰을 만지작거렸다.
라이선스를 지닌 마공사들만 볼 수 있는 전문 포털사이트에 접속한 뒤, 거기서 이런저런 검색을 시도했다.
먼저 뱀파이어에 대해 검색한 결과, 한수호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 그대로 나왔다.
다음은 도플갱어.
도플갱어라는 단어는 존재했지만, 전설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 등장하는 도플갱어에 대한 내용이 전부였다.
뉴에르다에서 지구로 넘어온 진짜 도플갱어에 대한 건 소문조차 나도는 게 없는 상황.
크게 안심한 한수호는 앞으로 가짜 백윤후를 어떻게 부려 먹을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밴이 신호에 걸려 정차했다.
창밖을 돌아보니 벌써 해가 저물어 하늘에 노을이 깔리고 있었다.
‘이제 마포대교를 건넌 건가? 도착하려면 아직 40분은 더 걸리겠는데?’
신호등 위의 표시판으로 현 위치를 확인하며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밴 오른쪽 한 차선 건너로 빨간색 스포츠카 한 대가 등장했다.
비싸 보이는 차여서 관심을 가진 게 아니라, 그곳이 특수화물차 차선이라 일반 승용차는 운행하면 안 되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 것이다.
‘저 무개념은 또 뭐래? 교차로에서 우회전하려는 거면 깜빡이를 넣든가 해야지.’
우측 깜빡이도 안 켠 상태로 4차로에 서 있으니 괜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한수호는 대체 어떤 무개념 운전자인가 싶어 운전석을 살펴봤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브론즈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를 쓴 젊은 여자였다.
젊어도 너무 젊다.
많이 잡아봐야 스물? 어쩌면 그보다 더 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여자는 왼손을 차창 턱에 걸쳐놓고 누군가와 통화 중인지 계속 입을 달싹거렸다.
‘외국인인가?’
괜한 호기심에 밴의 창문을 살짝 열고는 여인의 말을 몰래 엿들어봤다.
감각이 엄청나게 발달한 덕분에 소음이 많은 이런 도로에서도 여인이 하는 말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 지금 돌아가는 중이야. 사진은 방금 보냈는데 봤어? 나랑 동갑이고, 생긴 건 연예인 뺨치게 생겼더라고. 응. 이름은 장태산. 조사해 보니까 귀돈비살 양자라던데?”
느닷없이 여인의 입에서 장태산이라는 한글 이름이 언급되었다.
여인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였지만 다른 말들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깜짝 놀란 한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여인의 신체 스탯을 확인했고, 자기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208짜리 스텟이 있어?’
놀랍게도 여인의 신체 스탯 평균이 170을 넘는다. 특히 오른팔 스탯은 무려 208이나 되어서 한수호를 경악에 빠뜨렸다.
‘대체 누구길래…?’
시력을 돋구어 보니 여인은 분명 동양인이었다.
게다가 장태산의 이름을 말할 때 발음도 한국인과 다름없었다.
“응? 하아…. 아빠. 날 뭘로 보고 그런 말을 하셔? 당연히 확실하게 조치해 놨지. 문제가 생긴 스티커는 내가 잘 회수했고, 대신 아빠가 이번에 새로 만든 걸로 잘 교체해 놨다니까? 감쪽같이 바꿔놔서 절대 모를걸?”
여인의 영어는 원어민 수준으로 능숙했다.
하지만 한수호도 그 정도 영어는 가능했기에 알아듣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스티커를 교체했다?’
그 말에 한수호는 섬뜩함을 느꼈다.
그래서 곧바로 자신의 공법폰 뒷면에 부착된 스티커를 살폈다.
겉으로 보기엔 붙인 모양이나 위치, 모든 게 전과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개조 특성으로 스티커를 확인해 보니 정보가 뜨지 않는다.
‘정말 바꿔 친 건가?’
스티커의 정보가 뜨지 않는다는 건, 코스트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스티커는 한수호가 LP를 소모해 개조한, 김재우가 준 그 스티커가 아니라는 소리.
당장 스티커를 떼어 버리려고 하다가 멈칫했다.
‘가만. 저 여자의 아빠가 이 해킹 방지 스티커를 만들었다고 했지?’
그 말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마공전뇌 이산.
그자가 아니라면 이 스티커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모가 남긴 단체 사진 속의 인물 중, 이산도 있었기 때문에 그를 찾아야 하는 상황.
괜히 스티커를 떼어냈다가는 저들이 한수호에게 발각되었음을 알고 모습을 감출 수 있었다.
‘잘하면 이산이 있는 곳을 알아낼 수 있겠는데?’
한수호는 이 스티커를 이용해 마공전뇌 이산을 직접 만나볼 생각을 했다.
그때, 여인의 통화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그렇다니까. 지금도 전혀 모르는 눈치야. 최대한 조심하고 있으니까 걱정 말… 어라?”
말을 하던 중간에 여인이 돌연 한수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려던 한수호는 오히려 의심을 살 수 있을 것 같아 재빨리 시선만 살짝 돌려 신호등을 바라봤다.
한수호는 시선을 돌린 채로도 여인이 자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는 걸 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음. 내가 잘못 봤나? 그 녀석이 내 쪽을 보는 것 같아서 아차 했는데, 내가 아니라 신호등 보는 중인가 봐. 빨리 기숙사에 돌아가고 싶겠지 뭐.”
여인의 음성을 훔쳐 들으며 한수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신호 바뀌었다. 지금 돌아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대충 20분 내로 도착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럼 끊어.”
여인은 한 번 더 한수호 쪽을 바라보다가 그대로 차를 몰고 우회전했다.
한수호는 그녀의 차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현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확실해. 마공전뇌 이산과 그 사람 딸이야.’
한수호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이산에겐 자식이 없다.
김재우에게서 받은 특무부 자료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없던 딸이 갑자기 생겨났을 리는 없지만, 통화 내용으로 보건대 딸인 게 분명했다.
‘폰을 조교한테 맡겨놨을 때, 손을 댄 거구나.’
한수호의 몸에서 폰이 떨어져 있었던 건 5일.
그사이 폰을 훔쳐내 붙여놓은 스티커를 바꿔치기해 놓고, 한수호가 그걸 알아보는지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스티커의 마나 회로를 고친 걸 어떻게 알아챘지?’
아마도 이산이 만들어 낸 아티팩트에는 일종의 경고 장치가 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가 마나 회로에 손을 대면 바로 알려 주는 그런 장치가.
한수호는 여인이 타고 있던 차의 번호를 머릿속에 정확히 기억해 뒀다.
여기서 2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이산과 함께 지내는 장소가 있는 게 분명했다.
마침 내일 사기환이 온다고 했으니 그에게 차 번호를 알려 주고 차의 주인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 보기로 했다.
‘마공전뇌 이산….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아버지의 죽음에 당신이 연관되어 있는 거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한수호의 눈빛이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 * *
5일 만에 돌아온 기숙사는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길에 마주친 이산의 딸을 떠올리자 모든 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비좁은 거실, 사람 둘이 서 있으면 꽉 차는 부엌, 그리고 침대 하나만 놓아도 꽉 차는 방.
‘여기에 또 어떤 아티팩트를 설치해서 날 감시하고 있을지 모를 일이잖아?’
이산의 관심을 끌게 된 이상 모든 것에 주의가 필요했다.
우선 급한 일부터 처리한 후, 이 기숙사에 있는 모든 물건에 코스트를 부여하여 정보를 읽어 낼 수 있게 만들기로 했다.
뭔가 변화가 생긴다면 자신에게 경고를 해줄 수 있도록 마나 회로를 수정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어우, 또 LP 엄청 날아가겠네.’
지금 당장은 2,410밖에 안 되니 던전을 돌면서 필요한 LP를 수급해야 했다.
한수호는 먼저 스승 부부와 통화했다.
서해의 작은 섬에 머물며 한수호가 보내준 혈맥보공법을 익히느라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쁘다는 두 사람.
그런데 무슨 일로 서울까지 찾아온다는 걸까?
스승 부부도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그저 만날 사람이 있는데, 약속 장소가 강남 쪽이라는 것만 알려줬을 뿐이었다.
스승 부부가 서울에 오는 시점은 4월 중순.
이제 3주 정도 남아 있었다.
얼굴이라도 잠깐 보려면 가급적 주말에 맞춰 와달라고 말한 한수호는 스승 부부의 건강을 기원해 주며 통화를 마쳤다.
그다음은 사기환과의 통화였다.
“뭐 하러 힘들게 여기까지 직접 차를 몰고 오려고요?”
몬스터 봇 두 대를 탑차에 싣고 사기환이 직접 오겠다는 말에 한수호는 괜한 수고할 거 없다며 그냥 택배로 쏴줄 것을 부탁했다.
하지만 사기환이 직접 오려는 이유가 있었다.
-서울로 이사하는 김에 너도 볼 겸해서 가는 거니까 괜찮아.
“이사요?”
-어. 이번에 연구실이 서울로 이전했거든. 이번 주 초에 연구실이 가동되었다길래 근처에 집도 잡아 놨다. 대현동 쪽이니까 아카데미랑 그리 멀지도 않아.
대현동이면 차로 10~20분 거리다.
“와, 기환이 형! 드디어 서울 입성하는 거예요? 축하드려요!”
-자식. 촌놈이 서울에 자리 잡는다고 놀리는 거냐?
“에이, 놀리다니요. 정말 축하하는 거죠. 아무튼, 내일 11시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그때 봬요.”
-오케이. 그럼 내일 보자고!
사기환과의 통화도 그렇게 끝났다.
한수호는 검게 변한 폰의 액정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지금 내가 통화한 내용도 고스란히 이산한테 넘어가겠지?’
해킹 방지 스티커를 떼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대어를 낚기 위해서 꾹 참기로 했다.
지금은 모르는 척 폰을 사용해야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간단히 저녁을 챙겨 먹은 한수호는 이제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전투영역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무려 4일이나 전투 영역을 들어가지 못한 데다가 중요한 물건들을 죄다 월에게 맡겨놓은 터라 그것도 찾아와야 했다.
가장 중요한 건 소원의 묘목이었다.
‘아우. 3일 치 포인트가 너무 아깝네.’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빠지지 않고 묘목의 열매를 먹었으면 30NP가 더 올랐을 텐데, 아까워 죽을 것만 같았다.
현재 한수호의 포인트는 이랬다.
-보유 포인트: 91NP / 2,410LP
그럼에도 무려 91이라는 포인트가 쌓여 있었다.
이제 전투 영역에 들어가 열매부터 먹고, 포인트를 배분한 다음 집 공사 진척 상황도 체크해야 했다.
‘폰에 어떤 조치를 할지도 확인해 봐야 하고.’
한수호는 마나를 움직여 전투 영역을 활성화했다.
우웅.
바로 손 위에 떠 오른 구체.
한수호의 손이 구체에 닿는 순간, 그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