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넓고 곧게 뻗은 복도를 걷고 있는 백윤후.
그는 지금 아버지 백진성의 부름에 서재로 향하는 중이었다.
뉴에르다에서 백윤후가 벌인 사건으로 인해 특무부에 감금되어 있던 건 불과 1시간뿐이었다.
특무부나 아카데미에서 백윤후가 벌인 짓에 대해 알리기도 전에 백진성의 비서가 찾아왔고, 그의 옆에는 마공 변호사가 함께였다.
특무부는 처음엔 백윤후를 범죄자 취급하며 그냥 풀어주지 않으려 했지만, 백진성이 직접 특무부의 유대룡 본부장에게 전화를 한 덕에 풀려날 수 있었다.
특무부에서 풀려난 백윤후는 연희동에 위치한 저택으로 귀가했고, 바로 백진성의 호출을 받았다.
‘아무리 백진성이라고 해도 내 존재를 눈치채는 건 불가능하겠지.’
원래 도플갱어였던 백윤후는 마음을 단단히 먹으며 백진성의 서재에 들어섰다.
사방이 책장으로 가득한, 널찍한 공간.
창가에 놓인 책상에 누군가가 조용히 앉아 있었다.
“왔느냐?”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있던 사내가 백윤후를 응시했다.
백진성.
그는 상당히 잘생긴, 그리고 부드럽지만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미중년이었다.
백윤후는 그 백진성 앞으로 다가가 똑바로 섰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것이지?”
“사고를 쳤으면서 그걸 제 손으로 깔끔히 마무리 짓지 못해 죄송합니다.”
백윤후는 백진성의 성격을 잘 안다.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백진성.
그는 불의를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열혈 마공사로 유명했지만, 그 이면엔 어떤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철저함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백윤후가 어렸을 때부터, 백진성은 아들이 실수를 하거나 사고를 치더라도 마무리만 스스로 하면 절대 화를 내지 않았다.
11살 때, 같은 학급의 친구를 때렸지만 백윤후는 직접 그 친구의 부모를 만나 합의까지 스스로 처리했다.
14살 때는 몰래 차를 훔쳐 몰다가 사고를 내서 보행자를 다치게 했지만, 경찰이 오기 전에 운전자를 바꿔 자신의 잘못을 숨겼다.
백윤후가 사고를 치고도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고, 제멋대로 하는 이유는 그런 성장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때문에 이번에도 백윤후는 일부러 알파 개체를 깨우고, 동급생을 처리한 뒤 블랙박스까지 없애버리려는 황당한 짓을 할 수 있었다.
증거만 잘 없앤다면 백진성은 얼마든지 아들인 자신을 보호해 줬을 테니까.
“이로써 두 번째다. 네가 나에게 실망을 준 건 말이지.”
“잘못했습니다.”
“길게 말하지 않으마. 이번이 마지막이다. 한 번이라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면 네게 더 이상 자유는 없다. 앞으로 5년이다. 아카데미를 졸업할 때까지만 아무 사고도 치지 말고 조용히 버텨라.”
백진성은 자신이 한 말을 절대 번복하는 법이 없다.
그것이 그의 교육 방침이었고, 그가 이루어온 삶의 방식이었다.
비록 지금의 백윤후가 진짜 백윤후가 아닐지라도 이미 그의 모든 기억을 완전하게 차지한 이상 진짜나 다름없었다.
“알겠습니다.”
백진성은 말대꾸를 싫어한다.
이를 알기에 백윤후는 단 한마디의 변명도 꺼내지 않았다.
“장태산이라고 했느냐?”
백진성은 백윤후가 깔끔한 마무리를 하지 못했던 이유가 장태산이라는 학생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네.”
“이제는 D반 따위한테도 밀리는 거냐? 너보다도 한 살 어리다고 하더군. 내가 널 그리 가르치진 않았을 텐데?”
“면목이 없습니다.”
“졸업 전까지 장태산을 네 힘으로 확실하게 누르는 모습을 내게 보여라. 이 백진성의 아들이 D반 따위의 학생한테 질 수도 있다는 인식을 완전히 없애 놓으란 말이다.”
“그리하겠습니다.”
“좋아. 이제 가 보거라.”
“그럼 이만.”
백윤후는 조용히 물러갔다.
푹 떨군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백진성은 혀를 쯧쯧 찼다.
“한번 마음을 먹었으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말고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거늘…. 쯧.”
백윤후가 문을 닫고 나가자 백진성은 책상 위에 놓인 터치 패널을 툭 건드렸다.
징.
책상 위로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그건 백윤후가 뉴에르다의 유적지에서 동급생들을 앞에 두고 살기를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영상의 시점은 백윤후.
그의 가슴에 달려 있던 블랙박스가 장태산과 다른 학생들을 마지막으로 촬영한 영상이었다.
[블랙박스? 후후. 그건 부수면 간단하지.]
모습은 볼 수 없는 백윤후의 음성.
그 직후 장비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영상이 팍 꺼졌다.
“병신 같은 놈. 블랙박스가 실시간 전송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조차 파악하지 못하다니.”
백진성은 아들의 멍청함에 크게 실망한 듯했다.
그가 다시 터치 패널을 툭툭 건드리자 또 다른 영상이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그건 놀랍게도 장태산의 시점에서 촬영된 영상이었다.
장태산이 유적지의 지하공간에서 게이트를 통과하고, 감옥 같은 터널을 지나 캡슐이 있는 실험실에 도착하는 장면이 쭉 이어졌다.
“묘한 녀석이군.”
백진성은 장태산의 시점으로 보이는 영상에서 여러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행동 하나하나가 19살짜리 학생이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백윤후의 어처구니없는 짓에 흥분해서 날뛰거나,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너무도 침착하게 주변을 자세히 살피고 있었다.
마치 추적을 전문으로 하는 마공사 요원을 보는 것 같은 기분.
“비돈귀살의 양자라고 했지?”
백진성은 마치 누구와 대화하듯 혼자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영상에만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영상은 캡슐에서 짙은 안개를 뿌리며 등장한 독특한 형태의 괴물을 비추고 있었다.
3미터의 장신.
온몸을 뒤덮고 있는 새빨간 근육들.
그리고 선명하게 드러난 네 개의 송곳니.
백진성은 괴물이 입을 쩍 벌리며 괴성을 지르는 장면에서 화면을 정지시켰다.
“송곳니가 네 개라…. 이런 뱀파이어가 있었던가?”
그가 중얼거리자 갑자기 화면 옆으로 또 다른 화면이 떠오르더니 뭔가를 검색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잠시 후, 새로 나타난 화면엔 지금까지 전 세계에 등장했던 뱀파이어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간추려지기 시작했다.
화면은 혼자서 움직였다.
백진성은 그저 턱을 괸 채로 그 화면을 지켜보기만 할 뿐.
화면이 계속 바뀌던 어느 순간, 두 개의 이미지가 크게 나타났다.
하나는 새빨간 빛을 내는 몸체를 지닌 괴물이었는데, 허리가 구부정하고 혀는 뱀과 같으며, 꼬리가 길게 나 있다는 점만 빼면 화면 속 뱀파이어의 모습과 꽤 흡사해 보였다.
그 옆에도 유사한 형태의 괴물 그림이 있었다.
그건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달려 있었고, 온몸이 붉은색 근육질로 된 괴물이었다.
하지만 크기가 4미터에 달한다.
그 괴물 또한 화면 속 뱀파이어와 상당히 닮아 있었다.
백진성은 그 두 마리 괴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둘 다 변종 뱀파이어로 왼쪽은 구울의 습성을 지녔고, 오른쪽은 미노타우르스의 습성을 지닌 존재였다.
하지만 화면 속 뱀파이어와는 둘 다 차이가 있었다.
“새로운 변종이라는 건가? 참 지치지도 않는 몬스터로군.”
여전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백진성.
그는 정지 화면을 풀고 다음 내용을 감상했다.
갑자기 백윤후를 공격하는 뱀파이어와 이를 멀리서 지켜만 보는 장태산.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백윤후를 돕겠다고 나섰고, 뱀파이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지금까지 장태산이 보인 노련함이 사라진 듯한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마치 아무 계획도 없이 무작정 덤벼드는 또래의 학생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뱀파이어의 공격에 블랙박스가 망가져 버리며 화면은 꺼지고 말았다.
치이이이익-
노이즈만 가득한 화면.
백진성은 그 화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꺼버렸다.
“왠지 고의로 블랙박스를 부순 것 같아 보이는데?”
그 말을 하자마자 화면에 사진 한 장이 크게 떠올랐다.
그건 여의도 게이트에 진입한 마공사들이 실험실까지 찾아가서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중엔 캡슐 안쪽을 찍은 것도 있었다.
러닝타임이라는 영문이 선명하게 보이는 사진이었는데, 백진성은 그 사진엔 그리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오히려 그다음에 등장한 부서진 가슴 보호대 사진에 관심을 보였다.
“확대해 봐.”
그의 말에 사진이 크게 확대되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찢겨나간 것이 확실해 보였는데, 측면 쪽으로 검게 그을린 자국이 살짝 보였다.
“합선인가?”
중얼거리듯 한마디 하자 사진이 더 크게 확대되었고 여러 가지 컬러 보정이 들어가고, 형태 보정까지 자동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드러난 건 뭔가에 얻어맞아 움푹 파인 자국이었다.
“뱀파이어 손톱에 찢긴 다음에 생긴 자국이군.”
백진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더니 다시 중얼거렸다.
“장태산에 대해 좀 더 많은 정보를 가져와라. 녀석의 능력이 뭐고, 실제 마나량이 얼마나 되는지 모두 재점검하도록. 그리고 정의국 조사단에 명령을 내리겠다. 당분간 게이트 너머의 유적지 조사는 중단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 두 개의 홀로그램 화면은 빠르게 사라졌고, 백진성의 서재는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백진성은 여전히 손으로 턱을 괸 채, 다른 손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반지에는 드래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입에는 신기하게도 여의주를 물고 있었다.
그리고 드래곤의 두 눈에는 벼락의 형태가 문자처럼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 * *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한수호는 일찌감치 일어나 일일미션을 가볍게 끝마치고, 소원의 묘목에서 열매도 따 먹었다.
그 덕에 보유하고 있는 NP는 어느새 50이나 된다.
하지만 그 포인트는 배분하지 않고 그냥 두기로 했다.
80이 넘는 포인트를 한꺼번에 배분하게 되면서 느꼈던 짜릿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포인트가 생길 때마다 배분하는 것보다 일정 수준 이상 모았다가 한 번에 배분하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잠시 전투 영역에 들러 월에게서 필요한 자재 목록을 받은 뒤, 진화한 월과 가뿐하게 대련을 해봤다.
확실히 월은 강해졌다.
진화하면서 육체에도 변화가 생겨서 움직임이 굉장히 부드러워졌으며, 마나화된 아크로의 에너지를 가지고 별의별 공격을 다 할 수 있게 되었다.
무기에 마나를 두른다든지, 몸에도 마나를 둘러 공격을 방어하는 등 진급 마공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뛰어난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런 월과 대련을 하면서도 한수호는 전혀 곤란해하지 않았다.
점멸이나 다름없는 엄청난 움직임을 보이며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고 불과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어 월을 압박했다.
한수호는 무기도 뽑지 않은 채 월을 완벽하게 제압했다.
[주인. 얄밉다.]
바닥에 나자빠진 월이 부스스 일어나며 눈으로 한 말이었다.
“이건 얄미운 게 아니라 현명하다고 하는 거야. 마나만 잔뜩 퍼부어 봤자, 정확도가 떨어지면 아무 소용 없다니까?”
[정확도는 어떻게 올리지?]
“끝없는 수련. 같은 동작을 계속 반복해서 몸에 완전히 습관처럼 배도록 만들면 될 거다.”
[주인이 매일 아침마다 하는 그런 수련?]
“비슷하지만 조금 달라. 내가 아침마다 하는 건, 일종의 몸만들기고. 바로 이런 게 수련이지.”
한수호는 월 앞에서 파랑격과 벽력권을 선보여 주었다.
파랑격도, 벽력권도 10년이나 스승 부부에게 배운 무공이었다.
그동안 한수호가 이 무공을 익히기 위해 수련한 시간은 수만 시간이 넘어간다.
한 가지 동작을 수천 번도 넘게 반복한 덕분에 이젠 무의식중에도 정확한 동작이 이루어지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수호의 파랑격은 이제 실제 파도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과연 인간의 몸으로 막아 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의 강력한 파도가 격렬하게 밀어닥친다.
때문에 이 파랑격에 적중되면 거대한 파도에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고.
그 충격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첫 공격을 피해내지 못하면 연속으로 네 차례나 강력한 검의 파도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벽력권은 또 어떠한가.
손에서 끊임없이 뇌전을 일으켜 직접 닿기도 전에 목표를 감전시킬 수 있으며, 벽력권에 얻어맞게 되면 스턴 효과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무기에도 이 벽력을 실을 수 있고, 이제는 마나를 이용해 5미터까지는 벽력의 힘을 뿜어내는 것도 가능했다.
한수호가 두 가지 무공을 시연해 보이자 월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지켜봤다.
그리고 시연이 끝났을 때, 박수까지 쳤다.
[주인. 멋지다.]
“하하하. 너한테 칭찬받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인데?”
[칭찬은 곰도 춤추게 만드니까.]
“그래서, 내가 곰이냐?”
[-_-;;]
갑자기 월이 희한한 이모티콘을 눈에 띄웠다.
“그건 뭔데?”
[점점 네거티브해지는 주인에 대한 월의 작은 반항심이랄까?]
“허….”
한수호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제 월은 거의 인간이나 다름없었다.
처음엔 자의식을 지닌 A.I 정도로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한 존재다.
[방금 주인이 보여준 무공. 월이 배워도 되는 건가?]
“네가? 안될 건 없지만, 내가 직접 지도해 주는 건 어려울 거 같은데? 난 누굴 가르쳐 본 적도 없는 데다가 내가 그 정도로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거든.”
[월 혼자서도 충분하다.]
“그게 되겠어?”
[해 보고, 모르는 것만 질문하겠다.]
월이 무공을 배워보겠다는 건 진심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월은 한수호에게 완전히 복속된 존재라 강해진다면 오히려 좋은 일이다.
나중에 가족을 이 전투 영역으로 데려왔을 때, 가족을 지키는 보디가드로 세울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 그럼. 앞으로는 여기 올 때마다 잠깐씩은 내가 봐주마. 나도 반복 수련하는 셈 치지 뭐.”
[고맙다, 주인.]
한수호는 왠지 즐거워 보이는 월에게 손을 흔들며 다시 현실로 되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