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다행스럽게도 한수호의 주장은 잘 먹혔다.
지금까지 수십 번도 넘게 직접 체험한 한수호의 말인데다가, 사기환이 워낙 그를 믿는지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수호는 속으로 찔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투 영역 기술이 상용화되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럼 고블린 워리어도 폐기하는 게 낫겠는데? 그거 내가 챙겨갈까?”
사기환의 말에 한수호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요. 무리해서 사용하는 것만 아니면 아직은 쓸 만하고, 위험하다 싶으면 제가 직접 폐기하죠. 뭐.”
“그래도 되겠어? 그러다 잘못되면 어쩌려고?”
“걱정하지 마세요. 그보다, 형. 특성 쿨타임은 돌아왔어요?”
한수호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침에 쿨타임 돌아왔지. 근데, 다른 일 때문에 특성을 이미 사용했다. 이번 쿨타임은 이틀짜리야. 네가 저번에 말한 그 방태식에 대한 건 다음 주 중에 알아봐 주마.”
“아, 네. 알았어요.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해도 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아직 특성을 사용하지 않은 거면 방태식과 차량 번호 하나를 한꺼번에 조사해 달라고 부탁하려고 했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차량 번호 조회는 재우 형한테 부탁해 봐야겠네.’
한수호는 그렇게 생각하며 크게 한 숟가락 뜬 국밥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런데, 태산아. 요즘 게이트 발생이 빈번해졌다던데, 너도 알아?”
사기환은 특무부 연구실 산하에 소속된 연구원이라 그런지 이런저런 소문에 굉장히 민감했다.
“뉴스에 자주 나오긴 하더라고요. 예년 동 기간에 비해 20% 정도 발생률이 높아졌다던데….”
“내가 거기에 관해 들은 얘기가 있는데 말이야.”
사기환은 괜히 주변 눈치를 보며 은근한 어조로 이야길 시작했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차기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게 되면서, 현 정권의 실세인 여당이 시민들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게 하려고 고의로 게이트를 발생시킨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것.
현재 집권당은 대한의 힘 당으로, 그들이 밀고 있는 박정표의 지지율이 높아 당선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근 박정표의 가족들이 오래전에 벌였던 불법적인 사업에 대한 것이 갑자기 불거졌고, 그 일로 인해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한의 힘 당에서는 거대한 마공사 길드라고도 볼 수 있는 대한맹을 끌어들였고, 그들을 이용해 고의로 게이트를 열고 있다는 게 소문의 골자였다.
한수호는 이 소문에 대한 걸 당연히 잘 알고 있다.
회귀 전에도 이 시기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으며, 똑같은 소문이 퍼지면서 박정표의 지지율은 더욱 급락했다.
불법 사업 문제에 게이트 고의 발생까지 겹쳐 지면서 거의 철퇴를 맞은 것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결국 대선은 제1야당인 새희망당의 고용준이 승리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사실 고용준의 뒤를 밀고 있던 새한교가 비밀리에 벌인 일임이 밝혀지며, 그의 대통령 임기는 2년 만에 막을 내리고 하야하고 말았다.
한수호는 내막을 알고 있었지만, 굳이 대통령 선거에까지 관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너무 깊게 관여하여 미래가 크게 바뀌게 되면, 한수호가 아는 미래지식이 쓸모없게 될 만큼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누가 무슨 뒷공작을 하든, 나라를 제대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되는 거죠. 뭐. 이젠 시민들도 보통이 아니어서 대통령직 제대로 수행 못 하면 멱살 잡혀서 끌려 내려오는 건 시간문제잖아요?”
“그렇긴 하다만, 뭔가 문제가 있는 후보라면 아예 당선조차 못 하게 하는 게 맞는 거 같아서 그러지.”
“아시겠지만 전, 소문만 믿고 이리저리 휘둘릴 생각이 없어서요.”
“그야 나도 잘 알지. 근데 이번 소문은 거의 확실한 것 같던데? 저번에 네가 준 대신전 사진 말이야.”
사기환의 이야기가 갑자기 사진에 대한 거로 빠졌다.
“그 사진이 왜요?”
“그 사진 속 대신전이 있는 장소가 국회의사당에서 생긴 게이트 너머에 존재한다고 했잖냐.”
“그랬죠.”
“사실 그 게이트도 지금처럼 대선 기간에 발생한 거거든. 그때도 국민에게 불안감 심어주려고 일부러 국회의사당에 누가 고의로 게이트 발생시켰다는 소문이 있었고.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대한의 힘 당이었다 이거야.”
사기환의 말은 이거였다.
다른 건 모르지만, 불안감 조성을 위해 일부러 게이트를 발생시키는 후보는 절대 밀어줄 수 없다는 것.
그러니 과거에도 이미 같은 전적을 가지고 있는 대한의 힘 후보한테 투표를 하면 안 된다는 일종의 정치색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수호는 예전에도 그랬듯,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질색이었다.
“어차피 국회는 혈세만 축내는 자들이 잔뜩인 곳이잖아요. 마음 같아선 저라도 국회의사당에 게이트 열어서 싹 갈아엎었으면 좋겠는데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우와. 맛있다. 역시 한국인은 밥심이라니까요? 하하.”
한수호는 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이에 사기환도 더는 길게 이야기를 끌지 않았다.
“넌 어째 한결같냐. 그러니 나도 네 의견을 존중해 줘야겠지.”
“당연한 걸 뭐 그리 진지하게 말해요?”
“그래. 네 말이 맞다. 하하하.”
두 사람은 맛있게 국밥을 먹고 환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컨테이너 하우스 앞마당에 세워둔 탑차가 떠나자 한수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국회의사당에 조만간 들러야겠는데’
게이트는 폐쇄되었지만 다른 던전처럼 흔적은 남아 있을 터.
한수호의 개조 특성이면 그 흔적을 읽어낼 수 있었다.
국회의사당에 게이트가 발생했던 건, 무려 25년 전.
사기환의 말처럼 대선 때문에 여당 쪽에서 일부러 그곳에 게이트를 발생시켰던 걸까?
그럼 자신의 부모와 다른 사람들 모두 여당이 만들어 둔 함정에 빠진 것이고, 그로 인해 절반이 넘는 마공사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건 아닐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어쩌면 하얀 가면인들은 정권 유지를 위해 마공사들을 끌어들여 도구처럼 부리다가, 불필요해진 자들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일을 맡은 하수인에 불과할지도 몰랐다.
‘어휴. 계속 할 일은 쌓이기만 하는구나.’
한수호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제 두 기의 몬스터 봇을 데리고 전투 영역으로 들어가 월에게 부하를 소개해 줄 시간이었다.
한수호는 하우스 거실에 놓인 두 개의 커다란 상자를 모두 풀었다.
그러자 정말 기이한 모습을 한두 기의 몬스터 봇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범 봇.
정말 웅장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실적인 백호였다.
상악에 돋아난 송곳니는 손가락 두 개를 합친 굵기에 30센티나 될 정도로 길었고, 끝은 살짝만 찔려도 피가 날 정도로 뾰족했다.
봇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로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외형이었는데, 이 봇이 이족 보행의 몬스터로 변신까지 한다니 정말 엄청나다는 생각이었다.
불가살 봇은 더욱 기이한 외형이었다.
곰 같은 체형에 사자 같은 머리지만, 코가 길게 나와 코끼리를 연상케 했다.
산범 봇처럼 송곳니는 없었지만, 악어처럼 엄청난 수의 뾰족한 이빨이 있었고, 이마엔 유니콘을 떠올리게 하는 긴 뿔이 솟아나 있었다.
만약 불가살 봇이 이족 보행 몬스터로 변신한다면 산범 봇 보다 50센티는 더 클 것 같았다.
한수호는 두 몬스터 봇의 목덜미 쪽을 살폈다.
그곳엔 패널이 기다란 털 아나에 숨겨져 있었고, 패널을 조작하자 아크로 충전 상태를 볼 수 있었다.
[83%]
[79%]
100%는 아니지만 둘 다 충분한 동력이 충전된 상태였다.
한수호는 두 봇을 작동시켰다.
우우우웅
아크로가 진동하기 시작했고, 두 몬스터 봇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캬르릉.
우어엉..
서로 독특한 소리를 흘리며 두 마리 봇이 주변을 살피다가 한수호를 바라봤다.
외형만 특이할 뿐, 월처럼 자의식이 있는 게 아니라서 독자적인 행동은 보이지 못했다.
“자, 둘 다 나랑 함께 가자. 너희들을 업그레이드해 줄 기술자를 소개해 주마. 일단, 코스트부터 새겨줄게.”
한수호는 그렇게 말하며 산범 봇부터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뺐다.
두 몬스터 봇에는 바로 코스트가 부여되었고, 한수호가 얼마든지 정보를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산범 봇]
-코스트: 14
-사기환이 특별히 제작한 몬스터 봇입니다.
-간편한 조작으로 이족 보행이 가능하게 변신합니다.
-보유 스킬: 강타
[불가살 봇]
-코스트: 15
-사기환이 특별히 제작한 몬스터 봇입니다.
-간편한 조작으로 이족 보행이 가능하게 변신합니다.
-보유 스킬: 조르기
변신이 가능하다는 내용과 각각 강타와 조르기라는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이 사항이 없었다.
사실 몬스터 봇이 변신한다는 점과 스킬을 가졌다는 것 자체로도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너무 대단한 월이 이미 존재하다 보니, 이 정도는 평범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이제 월을 만나게 되면, 이 녀석들 모두 한 단계 나은 존재로 탈바꿈하겠지?’
한수호는 불가살 봇의 등에 올라탄 상태에서 산범 봇의 등 위에 한 발을 척 걸쳐놨다. 그리고 전투 영역을 발생시켰다.
콰우우우우우
손 위로 떠 오른 구체에 손을 댄 순간, 한수호를 비롯한 두 몬스터 봇도 일시에 사라졌다.
* * *
월은 굉장히 기뻐했다.
얼마나 기뻤는지 눈에서 폭죽이 터지는 이펙트를 보이기까지 했다.
한수호가 딱히 두 몬스터 봇에 대해 설명해 주지 않았음에도 월은 바로 특징을 파악해 냈다.
[변신 몬스터 봇이군. 훌륭하다. 좋다. 기쁘다.]
그리고 곧장 두 몬스터 봇을 끌고 공사 중인 집의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 2층엔 월이 임시로 연구실 같은 걸 만들어 놨다.
직접 개량한 발전기도 그곳에 있었고, 여러 가지 공구들도 모두 그곳에 보관 중이었다.
한수호는 두 몬스터 봇에게 각각 ‘범이’와 ‘살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범이랑 살이는 일단 월한테 맡겨두고. 어디 보자….’
한수호는 오랜만에 착용구를 허리에 찼다.
양쪽 허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감.
라뮬, 그랑, 로크의 세 가지 무기를 허리에 차면 왠지 모를 안정감이 느껴진다.
‘나샬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네 자루 단검 중 마지막 하나인 나샬.
그것마저 찾아낸다면 더욱 강력한 힘을 얻어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지난번 같은 우연을 또다시 바라기는 힘들었다.
‘용마검이나 염마갑의 코어는 정말 쓰면 큰일 나려나?’
이번엔 칼집 측면에 부착한 주머니에서 용 문양이 새겨진 팔찌와 붉은 코어를 꺼내 들었다.
단순히 손으로 들었을 뿐인데도 기이한 저릿함이 느껴지는 아티팩트들.
코스트만 놓고 본다면 용마검 팔찌는 로크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무기였다.
‘정신력이 약하면 마화기에 먹힌다라….’
그 말은 정신력이 강하면 먹히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금 한수호의 정신 스탯은 6.
일반인이 1이고, 마공사 진급 정도 돼야 3정도 수준인 걸로 보면 분명 굉장히 높은 편이다.
어쩌면 지금의 정신 스탯으로도 이 용마검을 사용할 자격이 충분할지도 모른다.
‘내가 더욱 강해지면 지금처럼 정체를 숨기고 지낼 필요도 없을 텐데.’
그 무엇도 싸워 이겨낼 힘이 있다면, 오히려 가면인들을 사냥하고 다닐 수도 있었고 그들의 뒤를 캐서 이프리트의 수장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도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코스트가 무려 123이나 되는 이 용마검 팔찌를 어떡하든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다.
‘사실 복잡할 것도 없지. 정신 스탯을 높이면 되니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던전을 찾아가 난이도를 높이고, 그 던전을 클리어하면 정신 스탯을 높일 수가 있었다.
‘위험하더라도 던전을 계속 돌 수밖에….’
한수호는 내일이라도 당장 김재우와 함께 던전을 찾아가자고 생각했다. 그때, 문뜩 한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NP로도 스탯 올리는 건 가능하잖아?’
그러고 보니 배분율이 1%밖에 안 되긴 해도 NP만 있으면 세 번째 항목 모두 스탯을 높일 수 있었다.
한수호가 현재 보유하고 있는 NP는 50.5.
정신 스탯을 1이라도 올리려면 아직 50은 더 필요했다.
게다가 어차피 현재로서는 세 번째 항목에 포인트를 배분할 수도 없었다.
신체 내적인 항목들의 1차 한계치를 채우지 않으면 세 번째 항목들에 포인트를 배분하는 건 불가능하기 때문.
‘내적인 항목들도 똑같이 99가 1차 한계치겠지?’
심장이나 폐, 위 같은 내적인 항목들의 스탯은 이제야 6이었다. 딱 한 번 10NP를 소모해서 시각만 7로 올렸을 뿐이다.
내적인 항목 여섯 개를 모두 1차 한계치까지 올릴 생각을 하니 까마득하기만 했다.
‘6,000 NP를 언제 모으지?’
20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소원의 묘목에서 열매를 따 먹고, 그걸 축적해야만 비로소 가능한 수치다.
‘LP로는 대체 못 하나? 배분율이 더 떨어지더라도 LP까지 스탯 상승에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바람이긴 해도 그게 가능했으면 하는 욕심마저 들었다.
그러다 자신에겐 그걸 가능하게 할 특별한 능력이 이미 있음을 깨달았다.
‘한번… 개조해 볼까?’
한수호는 생각난 김에 개조 특성의 마나 회로를 개조해 보기로 했다.
2단계와 3단계 개조의 스탯 배분율을 높게 올려본 결과 필요한 스탯은 1%당 2백만 LP가 나왔다.
가능은 하지만 그걸 하려면 어마어마한 LP가 필요했다.
이번엔 보유 포인트에 표시되고 있는 LP를 NP로 변경해 봤다. 그러나 이건 불가능하다는 경고 메시지가 나왔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한수호는 답답한 마음이 되어 한숨을 길게 내쉬며 무턱대고 세 번째 항목 중, ‘정신’에 포인트 배분을 시행해 버렸다.
당연히 지금은 배분이 불가능하다는 경고 문구가 떴다. 그런데 그걸 본 순간 한수호는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이 문구에 해당하는 마나 회로를 직접 개조하면 되잖아?’
한수호는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어떻게 개조할지를 천천히 고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