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지금은 ‘정신’에 포인트 배분이 불가능합니다.
>>신체 내적인 항목의 모든 수치를 1차 한계까지 채워야 해금됩니다.
눈앞에 떠오른 문구를 살펴본 한수호는 가장 먼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꿔 봤다.
저장에 필요한 LP는 무려 5백만.
이건 안 되겠다 싶어 앞에 ‘일시적으로’라는 문구를 붙였다.
그러자 필요 포인트가 백만까지 크게 떨어졌다.
‘오, 가능하겠는데?’
희망을 본 한수호는 ‘1회에 한해서’라는 극도로 제한된 문구로 바꿔 봤다. 그러자 놀랍게도 1만 LP까지 하락했다.
여기까지는 오케이.
하지만 배분이 되더라도 LP로는 정신 스탯을 올릴 수가 없었고, 두 번째 문장에 있는 제한 또한 풀어야 했기에 좀 더 개조를 진행해야 했다.
두 번째 문장에서 ‘1차 한계까지’를 ‘5까지’로 변경했을 때 필요한 포인트는 백만.
‘채워야 해금됩니다.’를 ‘채우지 않아도 됩니다.’로 변경하면 오히려 더 늘어 3백만이 필요했다.
‘아, 씨. 다른 문구를 추가하려고 해도 두 번째 문장 때문에 막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네.’
못마땅한 눈으로 그 문장을 바라보던 한수호는 별안간 자기 무릎을 탁 쳤다.
‘장애물은 없애면 되는 거지!’
한수호는 옳다구나 싶어 두 번째 항목을 아예 삭제해 버렸다.
그러자 필요한 포인트는 달랑 3천뿐이다.
첫 번째 문장에 ‘1회에 한해서’라는 문구를 추가한 덕이었다.
즉, 이번 한 번만 ‘정신’ 스탯에 포인트를 분배할 수 있다는 강력한 제한이 걸려 있기 때문에 개조에 필요한 포인트가 엄청나게 줄어 버린 것이다.
한수호는 자신이 개조한 문장을 바라봤다.
>>1회에 한해서 ‘정신’에 포인트 배분이 가능합니다.
‘좋았어!’
이제 LP를 사용해서 스탯을 올릴 수 있게 조건을 추가하면 된다.
한수호는 문장에서 포인트라는 단어를 ‘LP로도’라는 문구로 교체했다.
>>1회에 한해서 ‘정신’에 LP로도 배분이 가능합니다.
이 개조에 소모되는 포인트는 불과 4천.
이렇게 개조하게 되면 LP가 460밖에 남지 않지만 절대 나쁘지 않았다.
1만 7천이라는 어정쩡한 포인트로는 어차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이번에 정신 스탯을 단 1이라도 올릴 수 있다면 충분했다.
한수호는 개조한 문장을 저장시켰고, 보유 포인트는 460만 남기고 증발했다.
정신 스탯의 배분율은 1%.
현재 한수호가 보유한 포인트는 NP와 LP를 모두 합쳐 510.5였다.
한수호는 이중 500을 사용해 정신 스탯을 11로 올려 버렸다.
그 순간이었다.
멀쩡하게 침대 위에 앉아 있던 한수호가 순간적으로 머리를 확 쳐들었다.
그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고, 마치 레이저를 쏘듯 빛났다.
몇 초가 지났을 때, 한수호는 탁한 숨을 내쉬며 정상으로 되돌아왔다.
“후아….”
한수호는 크게 놀라 있었다.
머리가 너무나도 맑고 깨끗하게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
‘정신’ 스탯은 단순히 정신력만 높여주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실타래처럼 얽혀 있던 생각들이 빠르게 풀어지는 느낌이 들고, 지워진 줄 알았던 오래전의 기억도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스탯을 확인해 보니 정신 스탯이 11로 올라가 있었다.
이제 한수호의 정신은 일반인에 비해 11배, 진급 마공사와 비교해도 거의 4배나 높은 수준이다.
‘이 정도면 용마검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자신감이 붙었다.
다시 용마검을 손으로 쥐었다.
[용마검]
-코스트: 123
-발자크가 아스루나에 뿌린 7대 마화기 중 하나입니다.
-용마검의 봉인을 풀면, 용의 박동 호흡법과 용형 4식, 그리고 고통 내성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주의: 정신력이 약한 자가 사용할 경우, 마화기에 먹힐 수 있으니 사용을 금합니다.
마화기에 먹힐 수 있으니 사용을 금한다는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하지만, 어떡하든 강해져야 하는 한수호에게 그 문구는 오히려 이걸 반드시 얻어야겠다는 욕망을 부추겼다.
용마검의 봉인을 풀었을 때 얻을 수 있는 것들은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았으니까.
‘용의 박동’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호흡법 하나와 어떤 기술의 이름으로 생각되는 용형 4식.
이건 특성 같은 게 아니라 이 용마검을 사용하는 자가 직접 수련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강력한 전투 기술임에 틀림이 없으리라.
한수호는 목젖이 크게 울릴 정도로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떡해야 하나….’
한수호는 선뜻 마음에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 부릅뜬 눈을 하고 있는 드래곤의 머리를 잠시 바라봤다.
눈동자에 또렷이 새겨져 있는 태양과 달의 문양.
과연 이 팔찌를 착용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려움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정신 스탯이 11까지 오른 지금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전이 없으면 얻을 수 있는 것도 없는 법. 해보자.’
한수호는 결정을 내렸다.
바로 오른손에 팔찌를 끼웠다.
팔찌는 한수호의 팔뚝보다 훨씬 커서 아무렇지 않게 쑥 들어갔다.
그 순간, 팔찌가 한수호를 인식했는지 갑자기 크기가 확 줄어들었다.
아주 짧게 팔목에서 따끔한 느낌이 나더니 드래곤의 입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 기운은 순식간에 한수호를 휘감았다.
무언가 끈적거리고, 불길함이 가득 느껴지는 기운.
한수호는 어느새 사방이 검기만 한 섬뜩한 장소에 놓여 있었다.
‘여긴…?’
마치 우주에 내던져진 기분.
자신이 지금 서 있는 것인지, 누워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는 상황.
하지만 한수호는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고,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그런 한수호의 눈앞에 주변의 어둠보다 더욱 검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운은 금세 거대한 악마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집채만 한 악마의 얼굴이 피처럼 붉은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한수호를 향해 머리를 바짝 들이밀었다.
[무엇을 원하는가?]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음성.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다.
지옥의 악마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죄를 지은 자에게 천벌을 내리는 신의 음성일까?
한수호는 이 음성이 자신에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고통 내성이 34%나 되는데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마나는 마음대로 움직여지지도 않는다.
한수호가 지닌 그 어떤 무력도 이곳에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끔찍한 음성이 다시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힘을 원하면 힘을, 피를 원하면 피를, 정복을 원한다면 정복자로 만들어 주겠다.]
이번엔 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너무도 달콤한 음색이었다.
이대로 목소리에 모든 걸 맡기고 잠을 청하고 싶을 정도.
[아니면, 복수를 원하는가?]
또다시 확 바뀐 음성.
그 말을 듣자마자 한수호가 그동안 꾹꾹 억눌러 왔던 복수심이 들끓기 시작했다.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었고, 당장이라도 복수를 원한다고 소리치고 싶을 만큼 목이 간지러웠다.
정신 스탯이 11이나 되는데도 목소리의 유혹을 버티는 건 쉽지가 않았다.
한수호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 유혹을 견뎌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그때, 흐릿해지는 한수호의 시야로 아버지 한철형의 모습이 나타났다.
한수호는 혼자가 아니었다.
왼쪽엔 쌍둥이 동생 한설아가 있었고, 오른쪽엔 형 한성찬이 보였다.
두 사람 다 매우 어린 모습이었다.
한철형은 한수호를 포함한 세 아이에게 빙그레 웃음을 그려 보이며 입을 열었다.
“마공사란 말이다. 남을 해치기 위해 강력한 힘을 갖게 된 게 아니란다. 지키기 위해서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약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준 힘. 그 거룩한 힘을 지닌 인간이 바로 마공사란다.”
한철형의 말에 세 아이는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가운데 있던 한수호는 지금의 이 상황을 기억해낼 수 있었다.
‘7살 때였던가….’
한철형은 한수호가 빨리 마공사가 되어서 몬스터를 때려잡고, 악인을 처단하고 싶다고 하자 세 아이를 모두 불러놓고 이런 말을 했었다.
“마공사가 해야 할 일이 무언지 아느냐?”
세 아이가 모른다고 고개를 젓자 한철영은 자신의 왼쪽 가슴을 손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바로 내 안의, 이 심장에 담겨 있는 마나를 완전하게 다스리는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마나를 다스린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하지만 이제는 안다.
마나에 얽매이고, 마나에 굴복하면 마인이 되고 만다는 것을.
마나는 정복하는 게 아니라 다스리는 것.
한철형은 어린 자식들에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 기억을, 그때의 마음가짐을 되새긴 순간, 모두 사라졌다.
한철형도, 한성찬도, 한설아도 모두.
한수호는 다시 어둠 속에 혼자 남겨졌고, 거대한 악마의 형상을 코앞에 마주하고 있었다.
[말하라.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흉측하게 일그러진 악마의 형상이 이젠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머리를 바짝 들이댔다.
목소리는 머릿속으로 가득 울려 퍼지며 터질 듯한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 순간, 한수호는 저항을 그만뒀다.
호통치는 고함에도.
머리를 쪼갤 것 같은 고통에도.
누군가를 죽여 버리고 싶은 살심마저도.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마음을 활짝 열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심장에 꽉 묶여 꿈쩍도 못 하고 있던 한수호의 마나가 대해가 된 것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힘이 싫기라도 한 걸까?
악마의 형상이 갑자기 멀리 물러나더니 머리를 마구 뒤흔든다.
[꺼져라! 나에게서 그 힘을 치우란 말이다!]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악마의 형상.
“날 받아들여.”
한수호는 오히려 한 발 다가서며 악마의 형상에게 손을 뻗었다.
[크아아악! 치워! 저리 꺼지라고! 으아아악!]
악마의 형상이 비명을 질렀다.
거대했던 형상은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비틀렸으며, 사방으로 요동쳤다.
“나와 함께하자.”
한수호가 다시 한 발 다가선 순간, 악마의 형상이 입을 쩍 벌리더니 칠흑처럼 어두운 기운을 폭발하듯 뿜어냈다.
콰아아아아아
어둠은 한수호를 순식간에 덮쳤다.
하지만 한수호는 그 어둠을 밀어내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두 팔을 좌우로 쫙 펼치고, 가슴을 당당히 내민 채.
그의 몸을 관통하듯 지나간 어둠.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한수호를 거쳐 간 어둠이 눈 녹듯 사라졌다.
어둠으로 가득 찼던 주변도 빠르게 빛을 되찾아 갔다.
한수호는 앞을 응시했다.
악마의 형상은 불타듯 화륵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에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래곤.
이전에 대신전 아래에서 마주했던 드래곤보다 훨씬 컸다.
그런데 드래곤의 색이 굉장히 특이했다.
티 하나 없는 흰색을 바탕으로 핏빛처럼 붉은색이 문양처럼 군데군데 새겨진 모습.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는 백적(白赤)의 드래곤이었다.
한수호는 자기도 모르게 한발 다가섰다.
때에 맞춰 드래곤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거대한 머리를 한수호 쪽으로 들이밀더니 서서히 아래로 내려뜨렸다.
다시 눈을 감고, 마치 당신에게 복종하겠다는 듯 머리를 낮췄다.
한수호는 드래곤의 콧잔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조금은 촉촉하고, 따뜻한 느낌.
한수호가 드래곤의 콧잔등을 살짝 쓰다듬는 그 순간이었다.
파아아아앗
엄청난 빛이 한수호와 드래곤을 휘감았다.
거대한 드래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대신 일곱 개의 하얀빛의 띠가 나타났다.
빛의 띠에는 붉은색으로 된 알 수 없는 글자들이 잔뜩 새겨져 있었다.
한수호는 그 띠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백색의 띠가 한수호의 머리를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눈으로, 코로, 입으로, 귀로.
7개의 띠는 찰나의 순간, 한수호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그 시점에, 한수호는 전혀 다른 광경을 보고 있었다.
거대한 벽.
그리고 그 벽에는 한수호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형태의 글자들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글자들은 빠르게 머릿속에 각인되고 있었다.
한수호가 너무도 잘 아는 글자, 한글의 형태로.
[용의 박동]
[용형 4식]
벽에 새겨진 글자들은 바로 용마검이 지닌 진정한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