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한수호는 친구들과 함께 A반으로 향했다.
아카데미의 영재들만 모인다는 A반이라서 그런지 강의실도 D반과 달랐다.
계단식 강의실은 D반보다 두 배는 넓었고, 책상은 죄다 개인용으로 맞춰져 있었다.
사물함도 아예 책상 옆에 붙어 있었고, 상당한 수준의 음향시설이 사방에 설치되어 있었다.
강의실 안에는 각종 음료를 마실 수 있는 무료 자판기까지 있었으며, 좌우 벽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개방감이 엄청 좋았다.
대신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A반은 지정석이라서 친하다고 붙어 앉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한수호의 자리는 앞에서 세 번째 줄 왼쪽 끝이었다.
중간 평가에서 5등까지는 맨 앞줄이라 양소혜도, 최지혁도 멀찍이 떨어졌다.
‘오히려 다행이려나.’
이젠 수업 중에도 용형 4식의 술식을 수련할 생각인 한수호에겐 수다 떨 친구가 옆에 없는 게 차라리 나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앞줄을 보는데, 신소이가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반을 가린 모습으로 뒤돌아봤다.
꼭 귀신이 머리만 돌리는 느낌이라 순간적으로 흠칫 놀랐다.
한수호와 눈이 마주치자 신소이는 고개를 꾸벅하고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입 모양으로 간신히 알아들은 한수호는 피식 웃어 주었다.
그때, 신소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하윤이 갑자기 고개를 팩 돌렸다.
그러고는 신소이와 한수호를 번갈아 바라봤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어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눈썹이 찌푸려지는 건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한수호는 그런 이하윤을 향해 웃어 보이며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에 이하윤이 깜짝 놀라더니 시선을 급히 돌렸다.
등을 돌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이하윤.
그런 이하윤의 두 귀는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때, 한수호는 어디선가 따가운 시선을 느꼈고, 그 시선이 자신의 두 칸 앞자리에 있는 장한설의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몸을 아예 돌려서 한수호를 똑바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러다 한수호와 시선이 마주치자 씨익 웃더니 입 모양으로 뻐끔거렸다.
‘하윤이야, 소이야?’
앞뒤 다 잘라먹은 말에 한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마주 웃어주며 손가락으로 장한설을 가리켰다.
‘너.’
장한설은 쌍둥이 동생 한설아였기에 옛 생각이 떠오르며 장난기가 동했던 것.
그러자 장한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장난인 걸 눈치채고 입을 삐죽거렸다.
그 모습에 한수호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하핫.”
‘삐지면 하는 행동도 그대로네.’
장한설이 한설아라는 걸 알고 난 이후로는 그녀의 모든 행동 위로 옛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럴수록 동생의 기억을 바꿔 버린 누군가를 향해서는 더욱 큰 분노가 치솟았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테다.’
한수호는 방태식의 이름을 속으로 되새겼다.
그때, 강의실 문이 열리며 지평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장에 학생들은 모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A반의 담당 교수는 홍수빈 교수다. 지평학 교수가 이 강의실에 올 일은 합동 수업 외에는 없었다.
지평학은 무표정한 얼굴로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쭉 돌아봤다.
그러다 한수호와 잠시 시선을 마주쳤다.
그리고 맨 뒷줄에 쭈그리듯 고개를 처박고 앉아 있는 백윤후를 바라봤다.
짧게 한숨을 내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A반을 맡게 된 지평학이다. 남은 학기 동안 서로 잘해보도록 하지.”
어떤 설명도 없이 바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그때 책상 위에 올려놓은 공법폰 화면에 칙톡 메시지가 떠올랐다.
양소혜>>소문이 사실이네. 홍수빈 교수가 백윤후를 제대로 징계하지 않은 학장한테 불만을 품고 담당 반 교체를 원했다더니.
무음으로 해 두긴 했지만 수업 중에 보낸 메시지라 그냥 무시했다.
그러자 이번엔 장한설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장한설>>그래봐야 백윤후가 징계를 받는 일은 생기지 않을 텐데? 그냥 다시 홍 교수님이 우리 반 맡으셨으면 좋겠다.
최지혁>>지평학 교수님 수업도 괜찮아. 오히려 난 지 교수님 수업을 계속 듣게 돼서 좋은걸?
한수호는 누가 담당 교수가 되어도 별 상관이 없기에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수업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오전 수업은 마공 특무부와 정의국, 그리고 대한맹의 구조 및 역할에 대한 내용이었다.
한수호에겐 지루한 수업이었지만 혹시라도 회귀 전과 달라진 사항이 있을까 봐 집중해서 들었다.
다행히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자 알 수 없는 기시감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이름은 바로 대항맹의 맹주이자 사왕오패 중 태극검왕이라 불리는 서한광이었다.
회귀 전, 서한광과 한수호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그 이유는 서한광이 2051년 4월에 갑자기 3급으로 격상된 게이트 폐쇄에 직접 나섰다가 큰 부상을 입은 뒤로 외부에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게이트 폐쇄와 관련된 내용은 한수호가 늘 품고 다니는 수첩에도 잘 정리되어 있었다.
한수호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특무부 요원이 된 이후로 가장 이상하게 생각했던 사건 중 하나였기에 꽤나 상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시점엔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3급 게이트가 6곳이다.
하지만 4월 중순에 5급 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비교적 강력한 게이트가 돌연 3급으로 격상됨으로써 7곳으로 늘어나게 된다.
그 5급 게이트의 위치는 서울 대법원 앞.
그곳엔 이미 상당한 규모의 군부대가 주둔 중이고 진급 마공사 십여 명이 3교대로 늘 상주하고 있다.
그럼에도 3급으로 격상되는 순간 게이트에서 토해내진 몬스터들의 공격에 엄청난 희생자를 만들고 말았다.
3급 게이트는 인천 월미도에 열렸던 7급 게이트와는 차원이 다르다.
게이트 격상과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가 기본적으로 미노타우르스나 오거 같은 중형 몬스터였다.
게다가 그 숫자도 가볍게 백을 넘어갔기 때문에, 준비가 된 상태에서도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한수호가 할 수 있는 일은 김재우에게 넌지시 경고해 주는 것뿐.
이 일에 한수호가 직접 나서는 건 너무 위험했고 리스크도 컸다.
지금 한수호가 지닌 무력이면 쏟아져 나올 중형 몬스터들의 상당수를 해치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그가 강력한 무력을 갖고 있다는 게 세상천지에 알려지게 되고, 이프리트에게도 알려질 수밖에 없었다.
한수호가 그들에게 주목을 받는 순간, 더 큰 위험이 촉발될 것은 뻔한 일.
상대의 정체를 먼저 파악하기 전까지는 최대한 자신을 숨겨야 할 상황이기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 게이트는 결국 서한광의 손에 폐쇄된다.
대한맹의 궁급 마공사 셋이 사망하고, 진급은 이십칠 명, 특급은 무려 백 명에 가까운 숫자가 그 게이트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중 안타까운 건 서한광의 심각한 부상이었다.
그로 인해 대한맹의 위명은 곤두박질치게 되고, 서한광의 태극서가 또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까.
‘시점이 이상하게 겹치네….’
한수호가 기시감을 느낀 이유.
그건 스승 부부가 서울에 올라오기로 한 시기와 게이트 등급 격상이 묘하게 겹치기 때문이었다.
이제 20일 정도 남은 상황에서 두 시기가 맞물린다는 사실이 적지 않은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날 드러내지 않고 희생자를 최소화하려면 어떡해야 하지?’
월미도에서도 그렇게 조심했지만 결국 김재우가 흔적을 쫓아 한수호를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한수호는 수업 내내 그 방법을 찾고자 고심해야 했다.
* * *
“역시, 이래서 내가 A반이 되고 싶었다니까?”
양소혜는 A반 학생들만 사용할 수 있는 뷔페에서 큰 접시 가득 음식을 담아왔다.
“남기면 킬로 당 십만 원인 거 알지?”
최지혁은 자기가 좋아하는 초밥류만 담아온 상태였다.
“이거 다 먹고 두 접시 더 먹을 건데? 다 못 먹으면 뭐, 벌금 내고 말지.”
“D반에 있을 때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면서 이 상황을 가장 즐기고 계시네.”
“야, 최지혁. 너 말이 좀 그렇다? 그땐 주어지지 않았으니 욕심내지 않았던 거지, 이렇게 주어졌으면 즐겨야 하는 게 맞지 않나? 흐흥.”
양소혜는 콧소리까지 내며 음식을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테이블엔 총 여섯 명이 앉아 있었다.
양소혜와 최지혁, 장한설에 이하윤과 신소이까지.
한수호 생각엔 양소혜의 삐짐이 하루는 갈 줄 알았는데, 점심시간이 되자 바로 달려와서 식당으로 끌고 오는 친화력을 보여줬다.
그리고 지나가는 장한설과 이하윤, 거기다 신소이까지 잡아다 식탁에 앉혀 버렸다.
“근데, 백윤후가 징계 없이 계속 A반에 수업받는 건 정말 충격이다. 그치?”
장한설이 슬쩍 화제를 바꾸며 친구들을 돌아봤다.
그러다 신소이를 보며 눈을 빛냈다.
“소이, 너도 그 현장에 같이 있었잖아? 백윤후, 그 자식 때문에 다 위험에 빠졌었고. 나 같으면 아빠 찬스 써서라도 백윤후 확실히 징계받게 했을 텐데.”
“어, 음. 우리 아빤 지금 한국에 안 계셔서….”
신소이는 다시 소극적인 모습이 되어 몇 마디 하는데도 힘들어했다.
“아, 맞다. 소이 아빠는 미국 대기업 본부장이라고 하셨지?”
“그, 그냥 평범한 회사야.”
“소이는 좋겠다. 부모님이 모두 외국에 계시니 간섭할 사람도 없을 테고.”
“…..”
소이가 음식을 먹던 손을 딱 멈췄다.
그러자 양소혜가 장한설을 팔꿈치로 툭 쳤다.
“소이는 어머님이 안 계셔. 어렸을 때 사고가 있어서….”
“…!”
그 말에 놀란 장한설이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장한설은 허리를 크게 숙였다.
“미안. 정말 몰랐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괘, 괜찮아. 그럴 수 있지…. 뭐.”
신소이가 사과를 받아들이자 장한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삐리링.
때마침 한수호의 공법폰에서 메시지 수신 알림이 울렸다.
폰을 꺼내 누군지 확인한 한수호는 접시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가볼게. 저녁 약속에서 난 빼주고. 이번 주는 방에서 할 일이 좀 있어서.”
“아오, 저 재수탱. 주말에 우리들 바람 맞춘 거, 기껏 이 누나가 화 풀고 용서해 주려고 했더니 또 저러네.”
“조만간 내가 밥 산다. 큰 걸로.”
한수호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자 양소혜가 금방 표정을 풀었다.
“이번 주 내로 쏜다고 약속하면.”
“금요일 저녁.”
“장소는 우리가 정한다?”
“콜.”
한수호는 한 번 더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러자 양소혜가 다시 친구들을 바라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이번엔 아주 제대로 벗겨 먹자고. 어때?”
“내가 그럴 만한 곳을 알지.”
장한설도 양소혜의 뜻에 적극 동참하기로 했다.
뜻이 일치한 두 사람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그리고 있을 때, 이하윤이 한마디 툭 던졌다.
“내가 최고급 한정식 식당 하나 알아. 거기 어떨까?”
늘 한수호 편에만 서던 이하윤이 벗겨 먹기 작전에 발을 담구자 양소혜와 장한설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윤이 너, 진심?”
“드디어 하윤이가 이 언니들 마음을 이해해 주는구나! 아뵤옷!”
양소혜는 환호성까지 질렀다.
이에 이하윤이 머쓱해했다.
“한 번쯤…. 태산이 오빠 당황하는 게 보고 싶어서.”
“에이. 장태산이 어떤 녀석인데 그 정도로 당황할까?”
“내가 말한 음식점이 어딘지 알면 이해할걸?”
“어딘데?”
“가양 삼도천.”
“…!”
이하윤의 말에 그 자리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양 삼도천.
여긴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음식을 먹어야 하는 위험한 음식점이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선이라고 하는 삼도천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유는, 이 한정식집이 바로 게이트 너머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양대교 남단에 위치한 작은 숲 한복판에 있는 7급 게이트.
8급이나 9급도 아닌 7급 게이트지만, 이 게이트는 정부에서 관리하지 않고 한 메디컬 기업이 구매한 매우 특이한 경우에 해당했다.
그 이유는 게이트에 주로 서식하는 몬스터들이 트롤이나 파이라같은 재생력에 특화된 놈들이기 때문이었다.
트롤 자체는 특급 마공사 서너 명과 맞먹을 정도로 강하지만 거의 단독행동을 하기에 파티만 잘 맺고 있으면 크게 위험하진 않다.
파이라는 트롤보다도 재생력이 뛰어나긴 하나, 전투력이 약한 개체여서 역시나 위험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정부는 이 매디컬 회사에 게이트를 팔았다.
그 회사에서 꾸준한 게이트 탐사를 통해 많은 재생 포션과 치료약을 만들어 내고, 그걸 상품화하여 정부에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가양 게이트를 소유하게 된 메디컬 회사는, 게이트 너머의 이세계에 나무로 만든 커다란 한식집을 차리기까지 했다.
메디컬 기업은 막강한 길드 하나를 등에 업고서 세계 어디에서도 아직 탄생한 적이 없는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그 사업은 대박이 났다.
1인 입장에 오백만 원이라는 엄청난 비용이 들지만, 부호들에게 이 한정식집은 부의 상징이었고 세상에 자신의 용기를 증명할 창구였다.
이곳은 사전 예약이 필수였고, 궁급 이상의 마공사들에게는 특별히 반값 할인을 해 주고 있었다.
일반인의 경우엔 안전을 위해 엄청난 시간과 부담이 필요한 반면, 고위급의 마공사가 손님으로 올 경우엔 그 부담이 크게 줄기 때문이었다.
이하윤의 말대로 ‘가양 삼도천’을 약속 장소로 잡으면 아무리 한수호라도 놀랄 수밖에 없으리라.
다들 벙찐 표정으로 이하윤의 말을 곱씹고 있을 때, 장한설이 이하윤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하윤아. 너…. 장태산한테 서운한 게 많았구나. 얼마나 서운했으면 거길 생각해낼 수가 있니? 휴우….”
아련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장한설이 히죽 웃어 보였다.
“그래서 너무 마음에 든다니까, 이하윤!”
장한설은 신난 얼굴이 되어 이하윤을 꼭 껴안았다.
“좋았어! 내 계획에 거기만큼 딱 어울리는 곳이 없겠는데?”
양소혜도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신소이는 뭔가 불안해하는 표정이었지만, 딱히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에 혼자만 남자였던 최지혁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이래서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이 생겼구나….’
최지혁은 이 상황을 한수호에게 미리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