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이야. 역시 이 선배님이시네요.”
조미란이 가장 먼저 이경호에게 다가가 그의 실력을 칭찬했다.
기다란 창을 주 무기로 사용하는 이경호.
그는 아끼는 후배 마공사인 조미란의 칭찬에 창을 바닥에 푹 박아 넣으며 씨익 웃음을 그려 보였다.
“이 정도야 뭐. 하하하.”
“저는 언제쯤 선배님 같은 베테랑 마공사가 될 수 있을까요?”
“지금도 실력은 충분해. 다만 실전이 좀 부족할 뿐이지. 다음에 마주치는 몬스터는 미란이가 상대해 보겠어?”
“어머, 제가요? 괜찮을까요? 손님도 있는데….”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하는 모습은 아주 보기 좋았다.
한수호와 백윤후가 어느새 그들 뒤로 바짝 다가가 있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저희 없다고 생각하세요.”
한수호가 한마디 하며 그들의 시선을 끌었을 때,
빠박.
백윤후가 기습적으로 그들의 목덜미를 손날로 내리쳤다.
아무 경계를 하지 않고 있었던 터라 바로 기절해 버린 두 마공사.
한수호는 그들이 다치지 않게 쓰러지는 몸을 받아냈다. 그리고 옆의 굵은 나무둥치에 나란히 기대어 앉혔다.
“이 정도면 1시간 동안은 정신 못 차릴 거다.”
백윤후는 자신의 실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혹 모르니까.”
한수호는 백윤후가 보든 말든 상관없이 전투 영역을 일으켰다.
우우웅
가슴 앞으로 주먹 만한 구체가 전류를 빠직거리며 등장하자 백윤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수호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그 구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순간, 한수호의 모습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백윤후는 사방을 둘러보며 한수호를 찾았지만,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약 1분여가 지났을 때였다.
훅 하는 바람 소리가 들리더니 방금 사라졌던 한수호가 도깨비처럼 나타났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한수호의 앞에는 작달막한 키의 고블린이 서 있었고, 좌우로는 커다란 크기의 육식동물이 자리했다.
깜짝 놀란 백윤후가 전투 자세를 취하며 훌쩍 물러났을 때, 한수호가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경계할 필요 없어. 이놈들 내 쫄다구야. 인사해라.”
“쫄다구? 갑자기 어디서 이런 놈들을…. 응?”
백윤후가 자세히 보니 네발로 딛고 선 두 마리는 몬스터 봇이었다.
기가 막히게 현실고증을 잘해서 꾸미긴 했지만, 관절 부위로 틈새가 보였다.
그런데 고블린은 정말 살아 있는 몬스터와 똑같았다.
[난 월이다.]
눈으로 말을 한다는 점만 빼면.
* * *
한수호는 이경호와 조미란을 눕혀놓은 장소에 월과 범이, 살이를 남겨두었다.
이런 숲에 정신을 잃은 사람을 그냥 내버려 뒀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월 등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
사실 월 하나만 있어도 아무 걱정이 없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범이와 살이까지 함께 데려온 것이다.
지금 한수호와 백윤후는 대신전 후미로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 중이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이하이라는 노랑머리 여자는 신체 능력이 한수호를 뛰어넘는 강자라 극도로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 봇들…. 네가 갑자기 어디서, 어떻게 데려온 건지는 묻지 않으마. 그런데, 정말 알아서 마공사들을 지켜줄 수 있을 만큼 실력 있는 거 맞아? A.I가 정상인 건 맞고?”
백윤후는 파이라 한 마리를 들고 와서 우걱우걱 뜯어먹으며 그런 질문을 던졌다.
“범이나 산이가 힘 합치면 지금 너랑 싸워도 이길걸? 특히 월은 너보다 강해. 그러니까 걱정 마라.”
“나보다 강하다고? 그 조그만 놈이?”
백윤후는 작은 키, 작은 체구의 월이라는 고블린 봇이 자기보다 강하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내 말 안 믿냐? 지금 돌아가서 한판 붙어볼래?”
“아니다. 믿지 뭐.”
한수호가 너무도 자신 있게 말하는 것에 움찔한 백윤후는 다시 파이라 고기를 뜯어 먹는 것에 열중했다.
“빨리 먹어. 이제 저 신전에 들어갈 거야.”
“마공사 둘은 밖에 두고 혼자만 들어갔나 보네.”
백윤후도 뛰어난 후각으로 대신전 안에 이하이 혼자 숨어들었다는 걸 이미 눈치챘다.
“그러니까 빨리 뼈까지 삼키라고.”
“인간의 육체로는 뼈까지 씹어먹는 게 어렵다. 지금도 최대한 빨리 뜯고 있으니까 말 좀 그만 시켜.”
“그걸 꼭 지금 먹어야겠냐? 확 버리고 가?”
“너보다 강한 여자라며? 그래도 내가 같이 있는 게 안전할 거다.”
한수호가 백윤후를 함께 데려가려는 건 혹시라도 전투가 벌어지면 조금이나마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큰 도움은 안 될지라도 진급 마공사에 해당하는 능력을 지녔으니 시선 돌리기 정도로는 충분히 써먹을 수 있었다.
“1분 준다.”
“어우, 씨!”
백윤후의 손과 입이 바빠졌다.
물고, 뜯고, 찢으며 파이라를 단숨에 먹어치운 백윤후는 자신의 근육을 꿈틀대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후…. 이제야 좀 살만하군.”
백윤후의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을 본 한수호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의 신체 능력 수치를 읽어봤다.
[가슴] : 92
*[마나] : 724
‘수치가 올랐네?’
파이라를 먹기 전까지는 90이던 가슴 수치가 92로 올랐다.
한수호는 곧바로 자신의 신체 수치도 확인했다.
[가슴] : 195(+46)
*[마나] : 1,805(+362)
한수호의 가슴과 마나력 수치도 조금이지만 함께 올랐다.
도플갱어의 마나 코어는 놈의 생명이자 모든 것이기에 백윤후가 성장하면 마나 코어도 함께 성장하는 것이다.
다만, 지금 백윤후가 지닌 가슴 수치의 절반이 마나코어에 배분된 것일 뿐.
“이제 가도 되냐?”
“내가 앞장서지.”
백윤후가 호쾌하게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백윤후의 몸을 차지한 도플갱어는 원래 아스루나 세계의 존재였기에 이 대신전 안에 어떤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대신전 앞쪽엔 이하이와 함께 온 마공사 두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한수호와 백윤후는 그들의 시선을 교묘히 피해서 대신전 안으로 스며드는 데 성공했다.
신전의 내부는 예전에 한수호가 라그나로크를 얻었던 곳과 무척이나 흡사한 구조였다.
수없이 늘어선 굵은 기둥들과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왕좌와 같은 커다란 의자까지.
두 사람은 그 의자를 향해 직행했고, 백윤후가 의자를 잡아 뒤로 넘기자.
달칵.
잠김이 해제되는 소리가 나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똑같네.”
“음? 너도 이 비밀 통로 가 본 적이 있어?”
“일단 가자.”
한수호는 대답 없이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나선형 계단을 한참 내려오니 지하 동굴이 나왔고, 그 끝에는 커다란 석문으로 꽉 막혀 있었다.
한수호가 그 석문을 향해 다가가려 하자, 백윤후가 붙잡아 세웠다.
“그쪽 아니야. 지금 거기 가 봐야 못 열어.”
“뭐?”
백윤후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냥 울퉁불퉁한 돌벽밖에 없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 너 지금 어딜 가…어?”
백윤후가 벽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훑어봐도 돌벽밖에 보이지 않는다.
손을 가져다 대보니 돌벽의 감촉이 그대로 전해졌다.
‘설마…?’
한수호는 개조 특성을 사용해 눈앞의 벽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순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보가 눈앞에 나타났다.
[보더쉘터 #108]
-보유 포인트: 350,000LP
-위험도: ★★★★★☆☆☆☆☆
-아스루나 대륙의 대마법사 엘로이가 마법적 장치를 추가한 108번째 보더쉘터입니다.
-봉인을 위한 에너지가 결계 유지를 위해 지속적으로 소모되고 있습니다.
-발자크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게이트도, 던전도 아닌 단순한 벽일 뿐인데 어떻게 이런 정보가 나올 수 있는 걸까?
지금까지 한수호가 봐왔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었다.
위험도가 5성이나 되고, 보유 포인트는 35만으로 엄청나게 높다.
게다가 이번엔 포인트를 흡수할 수 있는 선택문도 등장하지 않았다.
‘잠깐. 엘로이라고?’
대마법사 엘로이.
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바로 백윤후, 아니 백윤후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도플갱어가 엘로이에게 잡혀 결계의 축으로 삼아졌다고 말했었다.
‘모든 걸 엘로이가 만든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쉘터에 엘로이가 뭔가를 추가했다는 거잖아?’
한수호는 이런 장치가 지하의 비밀 통로 아래에 설치되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어쩌면 라그나로크를 획득했던 그 지하 통로에도 여기와 똑같은 방식의 ‘보더쉘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여길 어떻게 통과하지?’
백윤후처럼 지나가 보려 했지만 사람을 가리는 건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때, 벽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그냥 벽이 없다 생각하고 자연스럽게 걸어와 봐. 벽이라고 인식하지만 않으면 널 가로막지 못하는 장치다.”
“그래?”
벽으로 인식하지만 않으면 통과할 수 있다는 소리.
한수호는 잠깐 눈을 감았다 뜨고는 벽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다.
‘이건 그냥 통로일 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벽에 머리를 박으려는 순간.
스윽.
정말로 그냥 통과했다.
통과와 동시에 백윤후가 웃으며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의 뒤로는 통로가 있었는데, 도플갱어를 만났던 그 지하 장소와 비슷하게 생긴 인공 구조물이었다.
“이런 게 숨겨져 있을 줄은 몰랐네.”
“엘로이한테 붙잡혔을 때, 나도 꽤 놀랐지. 그 시대의 아스루나에서는 보기 힘든 건축 양식이었거든.”
한수호는 자신이 통과한 곳을 돌아봤다.
거긴 가로 3미터, 높이 4미터 정도 되는 직사각형 모양의 공간이었다.
애초에 벽은 있지도 않았다.
“마법인가?”
“엘로이가 대마법사라고 했잖아.”
“뭐, 어쨌든.”
한수호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는 통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닥엔 앞서 이곳을 지나간 누군가의 발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오랜 세월 쌓여있던 먼지가 방금 생긴 누군가의 발자국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 발자국은 분명 이하이의 것이리라.
“여길 쭉 따라가면 지난번 네가 갇혀있던 그 실험실 같은 장소가 나오는 거냐?”
“좀 더 아래야. 통로 끝에 아마 엘리베이터가 있었던 것 같거든.”
“그래?”
두 사람은 오른쪽으로 살짝 휘어있는 통로를 50여 미터 걸어갔고, 그 끝에서 정말 엘리베이터 문과 똑 닮은 장치를 발견했다.
“정말이네.”
“저걸 타고 내려가면 실험실 바로 앞에 도착할걸?”
“그럼 그 노랑머리 여자애를 만나게 될 테고.”
“그렇지. 근데, 그 여자애가 정말 그렇게나 강해? 너보다도?”
백윤후는 한수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알기로, 현재 한수호는 궁급에서도 거의 끝자락에 오른 강력한 마공사다.
그런 한수호가 잔뜩 긴장할 정도의 인물이 존재하다니.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조심해야 했다.
“여차하면 널 방패로 쓸 거야. 그 정도는 각오했지?”
대놓고 앞장세우겠다는 말에도 백윤후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건 상관없으니까 마나 코어나 잘 간수해라. 그러면 고기 방패든 뭐든 해주지.”
백윤후에게 중요한 건 한수호의 가슴팍에 심어진 자신의 마나 코어뿐.
그것만 무사하다면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으니 당연했다.
“알았으니, 타라.”
한수호는 벌써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다.
백윤후가 뒤이어 올라타자 단 두 개밖에 없는 버튼 중 하나를 눌렀다.
띵.
지구의 엘리베이터와 다름없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아래로 훅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층 표시는 따로 없지만,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깊이가 꽤 되는 듯했다.
대략 1분 정도 지났을 때, 엘리베이터가 속도를 늦추더니 덜컥 멈춰 섰다.
‘최소 500미터 이상이야.’
도플갱어와 만난 실험실 깊이와 비슷했다.
“준비해.”
문이 열리자마자 노랑머리 여자를 마주칠 수 있기에 언제든 반격할 수 있게 준비했다.
띵
맑은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한수호는 바로 뛰쳐나갔으나 공격은 없었다.
그를 맞이한 건 또다시 이어지는 기다란 통로였다.
‘아씨, 괜히 쫄았네.’
기감으로 아무도 없다는 걸 이미 알았음에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극도로 조심했던 것이다.
그걸 본 백윤후가 키득거렸다.
“이야, 인간 장태산이 바짝 쫀 모습을 여기서 다 보네.”
“입 닥치고 따라와.”
“아, 예예. 그러믄입쇼.”
백윤후는 점점 능글맞아졌다.
그나마 악의가 없기에 그냥 봐주고 있는데, 좀 더 심해지면 제대로 교육 한번 해야겠다 싶었다.
통로는 이번엔 왼쪽으로 휘어있었다.
쭉 따라서 가보니 끝에 문 하나가 막아섰다.
그 문은 도플갱어를 만난 실험실로 통하는 문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
문 왼쪽에 파랗게 빛나고 있는 동그란 버튼.
그걸 누르면 문이 열리고 커다란 대공동 형태의 실험실이 나타나게 되리라.
‘그 중심엔 이 게이트의 결계를 유지하는 캡슐이 있겠지.’
한수호야 이미 한 번 비슷한 경험을 해 봤기에 알고 있다지만, 이하이라는 노랑머리 여자애는 이걸 어떻게 아는 것일까?
당연히 그녀도 보서쉘터라는 장소를 이미 가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아니면, 오래전에 여길 이미 와 본 적이 있던가.’
한수호는 다시 바짝 긴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문 너머에 그녀가 있을 확률이 무척이나 높았으니까.
[준비해.]
이번엔 백윤후에게 마나전음을 썼다.
혹시라도 이하이가 목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
한수호도 언제든 라뮬을 검집에서 튕겨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문 앞으로 다가간 한수호는 파란색 버튼을 조심스레 눌렀다.
지잉.
부드러운 소음이 나며 문이 스스륵 열렸다.
그리고 그 안의 광경을 목격한 한수호는 숨을 헙 하고 들이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