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이하이는 경악했다.
알파 트롤의 마력 수치는 612.
이 정도 마력을 지닌 몬스터를 한수호처럼 깔끔하게 해치우려면 이하이로서도 최소 7할의 마력을 쏟아부어야 한다.
하지만 주변에 아무런 타격을 주지 않고 딱 몬스터만 해치우는 건 아무리 이하이라도 쉽지 않은 일.
한수호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해냈다.
물론 그가 쥐고 있는 무기가 보통이 아니라는 건 잘 안다.
[희생의 검, 그랑]
이름과는 전혀 걸맞지 않게 목표를 순식간에 얼어붙게 만드는 강력한 속성을 지녔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한수호가 방금 펼친 검술은 놀라우리만치 부드럽고, 끔찍할 정도로 강력했다.
방금 전의 공격을 자신이 맞닥뜨리게 된다면?
이하이는 아무 피해 없이 그 공격을 받아 낼 자신이 없었다.
이하이가 너무 놀라 할 말을 잃고 있는 동안, 한수호는 알파 트롤의 사체 조각을 헤집고 있었다.
그때 백윤후가 슬쩍 다가왔다.
“저기, 장태산.”
은근한 어조로 운을 떼는 거로 봐서는 부탁할 일이 생긴 모양.
한수호의 입에 피식 웃음이 걸렸다.
“들키지 않게 조심히 챙겨.”
“어, 고맙…. 너 어떻게 알았냐?”
백윤후가 무심코 대답하다 화들짝 놀랐다.
“지금 너, 입에서 침 흘러. 그거나 닦고 말하던가.”
“아…. 젠장.”
백윤후는 알파 트롤의 쫄깃한 근육 덩어리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렸던 것이다.
옷 소매로 침을 훔친 백윤후는 멍한 눈으로 한수호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이하이의 시선을 피해 큼직한 근육 덩어리 몇 개를 챙겼다.
그사이 한수호는 사체 속에서 큼직한 심장을 찾아내 들어 올렸다.
사람 머리보다도 큰 심장.
알파 트롤은 산산이 조각났음에도 심장만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
한층 세분화된 개조 특성으로 심장을 확인해 보니,
[심장] : 91
*[마나] : 612
엄청난 양의 마나력이 심장에 담겨 있었다.
‘이걸로 마나 뽑아서 코어에 담으면 바로 A급이네?’
돈으로 따져도 30억은 가볍게 넘어가고, 무기 제작에 사용하면 어마무시한 걸 만들어 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걸 코어로 만들어 월에게 준다면, 궁급 마공사에 준하는 조력자가 생기는 것이니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이 가질 수 없었다.
한수호는 심장을 손에 쥐고 이하이에게 다가갔다.
“이거 받아.”
짐짝 넘기듯 내미는 손에 이하이가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이걸 왜…?”
“증명한다고 했잖아. 놈들이 애써서 키워 놓은 알파 개체를 죽여버리고, 그놈이 지닌 심장까지 넘기면 내가 이프리트랑 한편이 아니라는 건 믿을 수 있을 거 아니야?”
“…. 어?”
이하이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지금까지 누구를 상대함에 있어 이렇게나 당황스러운 적은 거의 없었다.
항상 우위에 서 있는 입장이었고, 늘 분위기를 주도해 왔었다.
그런데, 눈앞의 이 학생을 만난 뒤로는 스스로가 제대로 컨트롤되지 않았다.
“아니. 난 그거 필요 없어.”
어렵게 꺼낸 말이 고작 완곡한 거절의 표현.
한수호가 씨익 웃었다.
“진짜? 난 준다고 했는데, 네가 거절한 거다? 나중에 헛소리하기 있기 없기?”
무거운 분위기에서 던진 농담이었지만 이하이는 그만 풉 하고 웃고 말았다.
“푸흡. 헛소리 안 할 테니까 그거 네가 가져.”
“쿨 해서 좋네.”
한수호는 한 번 더 권유하는 미친 짓은 하지 않았다.
곧바로 심장을 대형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조그만 주머니 입구에 대어진 심장이 빨려들 듯 쏙 사라져버리자 이하이가 의외라는 눈빛을 보였다.
“그 주머니…. 지구에서 만든 물건 아니지?”
“제작자가 누군지는 나도 모르지만, 적어도 지구에서는 보기 힘든 물건이라는 건 알지.”
“일부러 모르는 척할 거 없어. 비슷한 걸 나도 가지고 있으니까.”
이하이는 귀걸이를 만지작거렸고, 순간 그녀가 들고 있던 혼마청검이 촛불 꺼지듯 훅 사라졌다.
“오호라. 귀걸이에 아공간 능력이 있는 거로구만?”
“안에 넣을 수 있는 건 최대 90코스트까지야.”
코스트라는 단어를 쓰는 거로 봐서는 아공간 귀걸이와 아공간 주머니가 같은 제작자에게서 만들어진 물건인 듯했다.
“내 주머니도 비슷해.”
“역시. 내 예상대로네. 아공간 마법은 아스루나 대륙에서도 난이도가 엄청난 거라, 잘해야 60코스트가 최고거든. 그 이상 넘어가는 물건은 내 귀걸이 빼고는 본적도 없고.”
“우연히 얻은 물건치고는 쓸 만하더라고.”
“하. 쓸 만? 이런 아공간 마도구는 아버지도 쉽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셨어. 적어도 지구보다 몇백 년 앞선 초자연적인 마법이 적용된 건데, 쓸 만이라니!”
이하이는 아예 자신의 아버지가 이산이라는 걸 대놓고 인정하고 있었다.
방금 한수호가 보인 행동으로 그가 이프리트와는 적이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게 된 것.
“뭐, 어쨌든.”
한수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랑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럼 이제 우린 한배를 타게 된 건가?”
한수호가 손을 내밀자, 이하이는 그 손을 잠시 바라봤다.
그러다 입맛을 살짝 다시고는 손가락 끝만 한수호의 손에 닿게 했다.
“이상한 짓거리 하면 내 칼에 죽을 줄 알아.”
“얼마든지. 그리고 이건 내 번호.”
한수호는 이하이의 손을 확 낚아채더니 손바닥에 숫자를 썼다.
묘한 간지러움에 이하이의 얼굴이 괜히 붉어졌다.
“기억했지?”
“내 번호는….”
이하이도 분위기에 편승해 한수호의 손바닥에 자신의 번호를 그렸다.
그 둘의 모습을 한 발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던 백윤후.
그가 슬쩍 다가서며 또다시 한마디 했다.
“그냥 폰 꺼내서 입력하지, 손바닥에 뭔 지랄들이냐?”
정곡을 찌른 말에 이하이가 황급히 한수호의 손을 놓았다.
하지만 한수호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대답했다.
“체온으로 주고받는 전화번호는 거짓일 리가 없는 법이니까.”
“체온…. 뭐?”
백윤후는 기가 막힌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하이도 몸이 간지러운지 몸을 슬슬 꼬았다.
그녀의 성격상 이런 분위기는 적응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디 보자….”
한수호는 두 사람의 상태는 신경도 안 쓰고 찢겨나간 고치를 응시했다.
[알파 #108(대상 검색 중)]
-보유 포인트: 0LP
-보더 쉘터 #108의 알파 개체를 검색 중입니다.
-진화까지 남은 시간 [미정]
한수호의 손에 알파 트롤이 죽었기 때문에, 보터 쉘터가 스스로 새로운 알파를 찾기 시작했다.
보더 쉘터 주변의 감옥 시설엔 많은 몬스터가 사육되고 있기 때문에 찾는 건 어렵지 않을 터.
다시 알파 개체가 정해져야 진화가 시작될 테니 이 보더 쉘터는 훨씬 긴 시간 동안 안전을 확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급한 일은 해결됐으니까, 이제 돌아가 볼까?”
“그래도…. 되는 거냐?”
백윤후가 이하이의 눈치를 슬쩍 봤다.
처음엔 몰랐지만 가까이에서 계속 보다 보니 이하이가 얼마나 강한지 느낄 수 있었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도 더 머무를 이유가 없으니 함께 돌아가지.”
“그럼 가면서 좀 더 이야길 해보자고.”
세 사람은 나란히 보더 쉘터의 한쪽 문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통로가 있는 문이었다.
“우선은, 네가 말한 아스루나라는 대륙에 대해 아는 대로 설명 좀 부탁할까?”
한수호의 질문에 이하이는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넌 아스루나가 어떤 곳인지도 몰랐던 거야?”
“아는데…. 그래도 네가 나보단 잘 알고 있을 거 같아서 말이지.”
차마 잘 모른다고 할 수가 없어서 대충 둘러댔지만, 이하이가 그걸 모를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휴우…. 너랑 손잡은 게 잘한 짓인지 모르겠다.”
잠시 투덜댄 이하이는 알고 있는 사실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한수호에게 설명해 주었다.
아스루나.
이는 균열 너머의 세계에 존재하는 거대한 대륙의 명칭이자, 행성의 이름이었다.
태곳적부터 이어져 내려온 대영웅 아스와 루나의 이름을 딴 것으로, 그 둘은 대악마 발자크를 대륙에서 몰아내 평화를 이끌어 냈다.
대악마 발자크는 아스와 루나의 손에 패해 아스루나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암흑섬에 유배되었다.
섬은 크지 않았지만, 수많은 결계가 몇 겹으로 설치되어 절대 벗어날 수가 없는 곳이었다.
발자크는 주먹만 한 코어만 남긴 채 암흑섬의 지하 깊숙한 곳에 묻혔지만, 긴 세월이 흐르면서 다시 힘을 되찾기 시작했다.
놈은 전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자신이 수백 년간 쌓아온 악의 마나력을 이용해 일곱 개의 무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무기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 암흑섬으로 인간들이 찾아오게 만들었다.
그 일곱 개의 강력한 무기가 바로 7대 마화기, 세간에는 7대 용화기라 불리는 것이었다.
7대 용화기의 소문에 혹한 인간들은 절대 금지인 암흑섬에 발을 디디기 시작했다.
수백, 수천의 인간이 암흑섬에서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죽음은 발자크에게 큰 힘을 안겨주었다.
결국, 7대 마화기는 인간의 손에 들어가 아스루나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 7대 마화기는 발자크의 악의가 가득 담겨 있기에 사람의 심성을 악에 물들게 했다.
그로 인해 영웅으로 칭송받던 7명의 절대 강자들이 발자크의 수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당시 아스루나에 존재하고 있던 3대 제국과 8대 왕국의 절반이 무너져 내렸다.
더불어 몰래 세력을 키운 몬스터들이 대륙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인간을 죽였다.
그나마 대신관 아캄이라는 인물이 신성처럼 등장해 대륙을 구하고자 했다.
그로서도 7대 마화기에 잡아먹힌 7마왕과 몬스터의 힘은 이길 수가 없었고, 결국 신의 힘을 빌려 포탈을 여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그 포탈이 바로 지구로 연결되는 게이트였다.
다른 행성으로 연결되는 게이트를 열게 됨으로써, 몬스터들은 게이트를 통해 다른 곳을 목표로 삼았고, 그 덕에 아스루나는 잠시 안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대마법사로 신망받던 엘로이가 너무도 큰 욕심을 부렸다.
아캄이 만들어 낸 보더 쉘터에 다른 장치를 추가하여 점점 많은 몬스터들을 게이트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적당히 선을 지켰어야 하지만, 그 선을 넘었던 탓에 결국 게이트를 형성시키는 포탈 기술이 발자크에게까지 넘어가고 말았다.
발자크는 그 기술을 자신이 흡수하여 봉인을 깨려고 했다.
보더 쉘터의 결계 에너지를 몬스터에게 주입하고, 그렇게 진화한 몬스터를 지구로 보내어 게이트를 폭파시킬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조작했다.
게이트가 폭파되면 막대한 마나 파동이 발생하는데, 그 파동은 암흑섬의 봉인을 깨뜨리는 데 가장 큰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이하이의 아버지인 이산은 그 사실을 진작 알아내 이를 막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야길 들은 한수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도플갱어, 백윤후의 말에 따르면 아스루나의 인류는 이미 멸망했다.
그런데 이하이의 설명을 들어보면 게이트가 열리고, 보더 쉘터가 만들어진 시기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아스루나에는 왜 인류가 존재하지 않는 걸까?
“아스루나의 사람들은 왜 한 명도 만날 수가 없는 거지?”
“그야 멸종했으니까.”
“지구에 게이트가 열린 건 이제 30년 정도잖아? 그사이에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고?”
보더 쉘터의 캡슐에 기록된 러닝 타임도 800년이 넘은 걸로 되어 있으니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아스루나와 지구의 시간은 다르거든. 아니, 달랐었지.”
“달랐었다?”
“처음 게이트가 열렸을 때는 아스루나의 시간 흐름이 100배 정도 빨랐어. 그러다 게이트를 통해 지구의 인간이 아스루나로 넘어가게 되는 일이 잦아지면서 점차 시간의 흐름이 같아졌지.”
“그럼 게이트가 열린 초창기 때는 헌터들도 그걸 알았을 텐데?”
한수호의 의문은 당연했다.
아스루나의 시간이 100배나 빠르게 흐른다면 게이트 너머에서 열흘을 지내다 돌아와도, 지구는 2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일 테니까.
“그건 또 그렇지가 않았다나 봐. 지구의 인간이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아스루나나 지구나 똑같았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출입이 늘어날수록 두 세계의 시간 흐름도 동일해진 거라고 봐.”
억지스럽긴 하지만 아예 말이 안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정확한 건 아니지만, 두 세계의 시간 흐름이 같아진 건 10년 전부터라고 해.”
그렇다면 게이트가 열린 이후에도 20년 정도는 아스루나의 시간이 훨씬 빨랐다는 말이다.
‘그래서 캡슐의 러닝 타임이 800년을 넘어가는 상황이 생긴 거구나.’
정확히는 892년.
도플갱어가 있던 캡슐이 작동한 시간이 892년이면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스루나의 인류가 완전히 멸종하기에 충분했다.
이미 멸망한 세계, 아스루나.
인간은 멸종했지만, 그들이 남긴 유산이나 몬스터들은 여전히 존재했다.
특히, 7대 마화기나 이하이가 갖고 있는 혼마청검 같은 무기들은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세상에 등장하고 있었다.
“7대 마화기라는 거, 어디에 있는지도 아나?”
한수호의 질문에 이하이는 고개를 저었다.
“나도 거기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어.”
“혼돈의 무구들도?”
이번 질문에는 이하이가 눈매를 좁혔다.
“넌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지? 나처럼 스캔용 아티택트라도 가지고 있는 거야?”
“당연히…. 아티팩트지. 아무튼, 혼돈의 무구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거야?”
“그건 아버지가 대충 파악하셨어. 이제 곧 그 무구들을 찾으러 길을 떠날 예정이고.”
의외로 순순히 말해주는 것에 한수호는 자신이 이하이에게 꽤 깊은 신뢰감을 주었음을 인지했다.
‘잘하면 더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겠어.’
한수호는 이하이와 이산을 어떡하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