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한수호는 5시간 정도밖에 잠을 못 잤지만, 조금도 피곤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에겐 스승 부부에게 배운 청심법이 있어 호흡법에 맞춰 숨을 쉬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피로를 풀 수가 있었다.
반면 백윤후는 그렇지 못했다.
정의국 국장인 백진성의 아들이자 광양백가의 피를 이었으니 마공가문 고유의 호흡법이 있을 테지만, 청심법 만큼 효과가 좋지는 않은 모양.
아마도 한수호는 최근 습득한 용의 박동이라는 호흡법까지 익히고 있어 시너지 효과가 더욱 큰 듯했다.
눈에 다크서클이 깊게 내려앉은 백윤후와는 달리, 최지혁은 아주 개운한지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나 베란다에서 일출을 감상했다.
새벽의 선선한 공기 속에서 아침이슬까지 맞아가며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앉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최지혁.
그런 최지혁에게 한수호가 한마디 했다.
“똥 폼 그만 잡고 밥 먹으러 나갈 준비나 해.”
“백윤후는 아직 잠 덜 깬 거 같은데?”
최지혁의 시선은 침대에 앉아 베개를 껴안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백윤후를 향했다.
“늦장 부리다가 식사 시간 놓친다.”
한수호는 더 닦달하지 않고 혼자 옷을 차려입은 뒤 밖으로 나가버렸다.
“어, 야! 같이 가야지!”
최지혁이 소리치며 뛰어가자 백윤후가 화들짝 놀래며 눈을 떴다.
“왜? 무슨 일이야!”
백윤후는 부릅뜬 눈으로 두리번거리다 침대 앞을 휙 지나가는 최지혁을 보고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잠시 후, 세 사람은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학생들은 아직인지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세 사람이 음식을 챙겨와 입에 넣기 시작할 때쯤, 여학생들이 우르르 내려와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
한수호가 어제 있었던 일은 다시 언급하지 말자고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는 최지혁 앞에서 소란이 이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 모두 스카이 우드캐슬의 일정을 문제없이 소화했다.
마공사들이 트롤을 사냥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구경한다든지, 트롤의 피로 포션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견학하는 등,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한수호는 알게 모르게 이하이의 모습을 찾았지만, 우드캐슬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점심 때가 되었을 때, 이들은 우드캐슬에서 제공하는 점심까지 깔끔하게 챙겨 먹은 뒤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물론 그사이 한수호는 몰래 이경호를 만나 어제 잡은 트롤에 대한 정산 내용과 야간 이용권 구매자에게 주는 여러가지 선물을 받을 수 있었다.
이들이 정산받은 비용은 인당 1천5백만 원.
6명이니 7천5백이라는 엄청난 돈을 벌었다. 게다가 트롤의 피 100미리를 받아 최소 5백만 원 이상을 더 확보했다.
그 덕에 한수호와 백윤후는 4천5백을 쓰고, 2천만 원을 돌려받는 행운을 얻었다.
한수호 일행은 모든 일정을 끝마치고 스카이 우드캐슬 마공사들의 배웅까지 받아가며 무사히 지구로 귀환했다.
오후 3시가 넘은 시각.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은 유난히 막혔다.
평소라면 30분 정도에 도착할 길을 1시간 반이나 걸려야 했으니까.
한수호는 아카데미 정문 근처에서 내렸다.
친구들과 헤어진 그는 기숙사가 아닌 컨테이너 하우스로 향했다.
겉은 허름해 보여도 내부는 꽤 잘 꾸며진 컨테이너 하우스.
방도 두 개나 되고, 욕실과 화장실도 두 개다.
직접 안으로 들어가 보면, 신혼집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안락하고 보기가 좋다.
한수호에겐, 자신의 이름으로 된 첫 번째 집이라 더욱 애착이 가는 집이었다.
그래도 자기 집이라고 침대에 누워있으니 이보다 편한 곳이 없다.
우드캐슬의 호텔도 편안하긴 했지만, 아무렴 자기 집만큼 편할까.
가장 큰 방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잠시 멍을 때리고 있던 한수호.
그때, 그의 머릿속으로 누군가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라라가 묻습니다. 어제, 오늘 왜 아무런 대답이 없냐고.
라라의 정신 공격이 또 시작됐다.
라라는 운명의 끈이 연결된 이후로 틈만 나면 뭐하냐고 묻고, 자기 호수에 놀러 올 생각 없냐고 묻기 바빴다.
한수호는 가급적 반응을 안 보였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텔레파시가 날아왔다.
‘너무 무시하는 건 좀 그렇지?’
한수호는 씁쓸해하며 라라에게 생각을 전달했다.
‘어디 좀 다녀오느라 바빴어. 그러니까 좀 쉬게 내버려 둬라.’
한수호의 생각이 곧장 라라에게 전달되었는지, 그녀가 또다시 텔레파시를 보냈다.
>>라라가 말합니다. 뭘 했길래 그리 피곤해하냐고.
‘보더 쉘터에 좀 다녀왔다, 왜?’
>>라라가 놀랍니다. 보더 쉘터라는 단어는 어떻게 알았냐고.
‘네가 아스루나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질 않으니 내가 직접 알아보고 다녔지.’
한수호는 라라의 호수에 다녀온 이후로 몇 차례나 아스루나의 역사와 그곳의 사정에 대해 물어봤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다리라는 말뿐이었다.
>>라라가 미안해합니다. 어차피 알게 되었으니 이젠 숨기지 않겠다고.
‘그나마 다행이네. 그런데, 너 혹시 이프리트라고 알아?’
한수호는 생각난 김에 라라에게 이프리트에 대해 물어봤다.
>>라라가 말합니다. 이프리트가 먹는 거냐고.
‘아, 됐다. 됐어. 대신 네가 있는 호수 던전에도 보더 쉘터가 있는지 알려줄래?’
>>라라가 대답합니다. 호수 던전에는 보더 쉘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계의 축인 자신이 곧 던전 그 자체라고.
라라의 적극적인 대답에 한수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쭉 그렇게 똑 부러진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군.’
>>라라가 기뻐합니다. 운명의 끈이 이어진 주인에게 칭찬을 들으니 날아갈 것 같다고. 그래서 더욱 기쁜 소식을 전해주겠다고.
‘좋은 소식?’
갑작스러운 말에 한수호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라라의 텔레파시가 이어졌다.
>>라라가 보고합니다. 자신의 마나력이 1,500을 넘기면 결계의 축이지만 던전 밖으로 이동이 가능할 거 같다고.
‘뭐? 던전 밖으로?’
이건 한수호가 바라던 바다.
모처럼 부려먹을 수 있는 요마가 생겼는데, 호수 던전에만 처박아 둘 수밖에 없으니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그런데 라라를 던전 밖으로 데리고 나올 방법이 생겼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까.
>>라라가 걱정스러워합니다. 주인과 함께 세상을 누비고 싶은데, 그렇게 해도 되는 건지 잘 모르겠다고.
‘세상을 누비는 건 모르겠고. 던전을 나올 수 있게 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해.’
>>라라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가능성만 생긴 거라 안 될 수도 있다고. 게다가 지금 마나력이 932밖에 안 되서 아직 600은 더 높여야 한다고.
‘마나력 600?’
사실 지금 한수호에겐 몬스터 심장을 정제해서 마나를 응축시킨 코어가 하나 있었다.
보더 쉘터의 알파 개체에게서 얻은 심장과 사냥으로 잡은 트롤의 심장까지 정제한 결과, 마나량이 487이나 되는 코어가 만들어졌다.
‘적당한 놈으로 몬스터 몇 마리만 더 잡으면 600 채우겠는데?’
마나 코어에 마나력을 채워서, 그걸 라라에게 주면 그녀의 마나력을 높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한수호의 생각이었다.
원래는 월에게 주려고 했던 거라 좀 미안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라라가 기뻐합니다. 당연히 가능한 일이라고. 마나 코어를 선물로 받는다면 주인의 세상으로 나가 평생을 봉사하겠노라고.
‘봉사는 무슨…. 아무튼 알았다. 마나 코어가 준비되면 찾아가지.’
>>라라가 기대합니다. 빠른 시간 안에 그 날이 도래하기를.
한수호는 라라와의 텔레파시를 그렇게 끊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이 있긴 하다.
지금 라라의 모습은 14세 정도의 여자아이.
모습을 마음대로 변형하는 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 모습으로 던전에서 데리고 나왔을 때 주변의 시선을 어떻게 피하느냐가 문제였다.
당연히 기숙사로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었고, 기껏해야 여기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생활하게 해야 하는데, 혼자 내버려 뒀다가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기 때문.
모습은 애일지라도 마나력 1,500이면 궁급에서도 상위에 속한다.
게다가 인간처럼 보일 뿐, 엄연히 세이렌이라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아무 인간이나 잡아 와 매혹 능력을 이용해 노예처럼 부려먹으려 들지도 모른다.
‘뭔가 대처할 방법부터 세워놔야겠네.’
한수호는 일단 그렇게 생각을 마무리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소원의 묘목을 꺼내 열매를 챙겨 먹고, 일일 미션부터 수행했다.
턱걸이 1만 회라는 쉬운 미션이 나와서 금방 미션을 마쳤다.
‘이로써 보유 NP는 83.8인가?’
알파 개체에게서 포인트를 흡수한 덕분에 LP도 60만9천이나 쌓인 상태.
‘이 정도면 특성 업그레이드도 가능하겠는데?’
한수호는 곧바로 자신이 지닌 특성을 쭉 훑어봤다.
‘광폭화랑 개조는 5단계로 가는 데 백만이 필요하고…. 쇄혼이나 약탈은 아예 업그레이드가 없지.’
59만이 넘는 포인트가 있음에도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특성은 ‘얼음불’ 하나뿐이었다.
[특성: 얼음불]
-음과 양의 기운을 마나력 한도 내에서 30분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특성 단계: 4단계(4/5)
-4단계 효과: 이동 속도를 30% 증가시키며, 사용자의 육체와 타인의 육체, 사물, 공간에 얼음불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쿨타임 2시간
-5단계 업그레이드 포인트: 500,000LP
이 특성을 업그레이드시킬까 고민하던 한수호는 한숨을 푹 내쉬다가 눈앞에서 창을 치워버렸다.
‘포인트를 조금만 더 채워서 광폭화나 개조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게 맞아.’
솔직히 얼음불 특성은 이동 속도 증가와 물과 불 속성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빼고는 큰 매리트가 없었다.
이걸 5단계로 업그레이드시킨다고 해도 어떤 특별한 변화가 생길 것 같지도 않았고.
위력적인 면을 따져보면 4단계의 얼음불보다 업그레이드가 없는 ‘쇄혼’ 특성이 훨씬 강력했다.
얼음불은 라뮬과 그랑을 사용하기 위한 속성 발휘용 특성이었으니 나중에 포인트 여유가 있을 때 업그레이드해도 상관없었다.
‘일단 포인트는 모두 킵.’
한수호는 NP도, LP도 사용하지 않고 보관해 두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 어느새 6시가 다 되었다.
저녁으로 간단히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은 그는 수련용 컨테이너에 들어가 용의 박동 호흡법과 용형4식에 전념했다.
용의 박동 호흡법을 통해 심신을 안정시키고 집중력을 끌어올린 뒤, 용형4식을 차근차근 수련해 갔다.
그런데, 예전보다 용형4식의 술식이 몸과 머리에 적응해 가는 속도가 훨씬 빠르다.
그 이유가 마음가짐에 있다는 걸 한수호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가양 게이트에서 이하이를 만나 아스루나와 이프리트에 대한 걸 어느 정도 알게 된 이후로 마음이 상당히 편안해 졌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발자크가 봉인을 풀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을 막고자 하는 인물이 자기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
둘째는, 이프리트라는 비밀 조직에 대해 인지하고 그들의 악행에 철퇴를 날리려는 자들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 덕에 집중력이 크게 급상승했고, 용형4식을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습득할 수 있었다.
시작식, 용의 비늘은 어느새 손쉽게 술식을 새길 수 있게 되었다.
숙련식, 용의 숨결도 어렵게나마 술식을 새기는 데 성공했고, 마나만 충분하면 펼쳐내는 것도 가능해졌다.
용의 숨결을 펼치는데 필요한 마나력은 2천.
지금 한수호가 지닌 마나력으로는 단 한 번 펼쳐 내는 것만으로도 마나를 고갈시킬 기술이었다.
어쨌거나 한수호는 지금의 성과에 크게 만족했다.
자신은 빠르게 강해지는 중이었고, 머지않아 명인식과 초월식까지 자유롭게 펼쳐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수련에 빠져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을 때,
삐링.
공법폰으로 문자가 도착했다.
수련을 잠시 멈춘 한수호는 문자를 확인했다.
[발신자: 김재우]
[나다. 이번 주말엔 다른 일정이 있는 건 알겠는데, 다음 주부턴 나 좀 확실하게 도와줘야 할 거 같다. 마공사들이 그러는데, 요즘 던전들이 이상하게 난이도가 높아진 것 같다고 하네. 아무래도 네 걱정처럼 위험도가 점점 오르는 게 아닐까 싶고. 다음 주말엔 꼭 던전 좀 돌면서 위험도 재점검 좀 하자. 수고비는 제대로 챙겨주마. 오케이?]
‘이렇게 길게 문자 쓸 정성이면 차라리 전화를 하지.’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통화 대신 문자를 보낸 이유가 자신을 배려해서라는 것쯤은 한수호도 알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주말 잘 쉬세요.]
한수호가 답신을 보내자, 곧장 추가 문자가 떴다.
[지금은 시간 괜찮은가 봐? 통화 좀 할까?]
[통화는 내일 해요.]
한수호는 바로 전투 영역에 들어가 볼 생각이어서 김재우와의 통화를 일부러 피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내일 10시쯤 전화하마.]
[네.]
연락을 마친 한수호는 컨테이너 하우스의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는 전투 영역의 구체를 뽑아냈다.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주먹만 한 빛의 구체.
한수호가 구체에 손을 대자마자 그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