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한수호는 이하윤을 만나 저녁을 먹고, 아이스크림도 사줬다.
만나자마자 대뜸 자기 컨테이너 하우스로 가자고 말하기가 조금 민망해서 이리저리 다니며 적당한 타이밍을 노리는 중이었다.
그러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오빠. 어디 가서 차나 한잔할래? 이번엔 내가 살게.”
이하윤이 생긋 웃으며 하는 말에 한수호는 옳다구나 싶었다.
마스크로 인해 눈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이하윤이 환하게 웃고 있다는 것쯤은 너무 쉽게 알 수 있었다.
“뭐 하러 돈을 쓰냐? 근처에 내 집이 있으니까, 거기로 가자. 내가 직접 타 줄게.”
“…. 집?”
집이라는 말에 이하윤이 움찔했다.
17살이 되도록 남자친구 한 번 제대로 사귀어 본 적 없었던 이하윤.
그래서인지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간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긴장했다.
다른 남자였다면 집에 왜 가냐고 바로 거절했겠지만, 상대가 한수호였기에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가서…. 차만 마시는 거지?”
이하윤의 질문에 이번엔 한수호가 움찔했다.
한수호는 당연히 차만 마시려고 이하윤을 집으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 얼굴 흉터 고쳐주러 가는 거라고 말해야 하나?’
한수호가 잠시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자, 이하윤이 얼굴을 붉혔다.
“나, 아직 17살인데?”
“응? 그건 왜…. 아, 이런. 그런 거 아니라고!”
한수호는 이하윤이 뭔가 단단히 오해했다는 걸 깨닫고 손을 휘휘 저었다.
“네 상처…. 그 상처 좀 봐주려고 그래.”
“…. 상처?”
그제야 한수호의 뜻을 이해한 이하윤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
“미안…. 내가 멋대로 오해했어.”
“아니, 넌 어린 녀석이 무슨 그런 오해를 다 하냐? 아우.”
“오빠가 그런 상황을 만들었잖아!”
이하윤도 억울한지 눈매를 확 좁히며 인상을 썼다.
그 모습에 한수호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하핫. 그래, 미안하다. 오해할 만했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조용한 공간으로 가자는 거니까 더는 오해 마라.”
“응….”
목소리에 왠지 실망의 기색이 느껴진다.
‘뭐야. 설마 다른 걸 바라고 있었던 거야?’
생각은 그랬지만, 그렇다고 그걸 물어볼 수는 없었다.
한수호는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진 상태에서 이하윤과 함께 컨테이너 하우스로 향했다.
외적으로는 그다지 볼품없어 보이는 컨테이너 하우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모델하우스 뺨치게 잘 꾸며진 내부 인테리어에 이하윤은 크게 놀라워했다.
“여기 꾸미는데 신경 많이 썼겠다.”
거실 쇼파에 앉아 하는 말에 한수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신경은 무슨…. 돈 많이 주면 알아서 퀄리티가 달라지던데 뭐.”
“아, 그렇구나. 어쨌든 신경을 쓰든, 돈을 쓰든, 뭔가를 쓴 건 맞네.”
“뭐, 그렇지.”
한수호는 커피를 타서 내밀었고, 이하윤은 그걸 손으로 들고 조금씩 홀짝이며 집 안을 슬슬 구경했다.
“보기보다 좁지도 않고, 있을 것도 다 있어서 좋다.”
“주말엔 거의 여기서 지내니까.”
“그럼 나 주말에 여기 놀러와도 돼?”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수호가 살짝 당황했다. 그러자 이하윤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안 되는구나?
“아니, 안 되는 게 아니고…. 음. 와도 괜찮아. 오면 온다고 미리 알려만 준다면.”
“정말? 그럼 나 이번 주에 놀러 올까?”
곧바로 오겠다고 약속을 잡으려는 이하윤.
한수호는 이하윤이 이렇게나 적극적인 성격이었나를 잠시 생각하다가 혼자 피식 웃고 말았다.
“아, 뭐야. 왜 혼자 웃어?”
“그냥…. 그보다, 이하윤. 여긴 볼 사람 없으니까 마스크 벗어도 된다.”
“어? 어….”
대답은 했지만 손은 망설이고 있었다.
이하윤은 자신의 흉한 얼굴을 한수호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차피 여기 온 이유가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으니 용기를 내기로 했다.
마스크가 벗겨지고 이하윤의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흉측해 보이는 상처들.
한수호는 이하윤을 쇼파에 앉히고, 자신도 바로 옆에 나란히 앉았다.
“지금부터 상처 치료할 거니까 놀라지 말고 가만히 있어.”
“정말…. 치료가 가능해?”
“아마도. 대신, 내가 좀 피곤해서 정신을 잃을 수도 있거든? 그런 상황이 오면, 날 침대에 눕혀놓고, 넌 그냥 돌아가. 이해했지?”
“기절할 수도 있다고?”
“그냥, 치료에 의한 반발력? 그런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한수호가 차분하게 말하자 이하윤도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어. 알겠어.”
“좋아. 그럼 시작한다.”
한수호는 조금 쭈뼛거리며 손을 이하윤의 뺨으로 가져갔다.
지난번에는 이하윤이 정신을 잃고 있는 상태에서 약탈을 사용한 거라 어색할 게 없었는데, 이하윤이 눈을 뜨고 있는 상태에서 하려니 굉장히 쑥스러웠다.
어색함을 꾹 참고 이하윤의 뺨에 손을 댄 상태에서 약탈[1]을 사용했다.
투웅
사용과 동시에 한수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리고 이하윤의 흉터에서 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한수호의 손으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크흡.”
한수호는 밀려드는 고통에 입을 앙다물었다.
너무 세게 이를 물어서 입가로 피가 흐르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이하윤이 크게 놀라 소리쳤다.
“오빠?”
“그, 그대로 있어. 으…. 네가 지금 움직이면 말짱 도루묵….이야.”
한수호의 심각한 말에 이하윤이 멈칫했다.
“정말, 정말 괜찮은 거야?”
“잠시만, 끄으…. 잠시만 기다리면….”
털썩
한수호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오빠!”
이하윤은 기겁하며 한수호를 부축했다.
그의 얼굴은 열병을 앓는 것처럼 붉어져 있었다.
온몸에서 땀이 흘러나왔고, 고통을 억지로 참느라 꽉 다문 입에선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하윤은 한수호를 번쩍 안아서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수건을 찾아서 얼음을 담아 뜨거워진 한수호의 이마에 올려주었다.
그리고 그 옆에 가만히 앉아 한수호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오빠…. 저번에도 내 흉터 치료한다고 지금처럼 고통을 견뎠던 거구나? 대체 왜 그랬어…. 이깟 흉터 그냥 있어도 아무 상관없는데. 이젠 습관 돼서 신경도 안 쓴단 말이야.”
이하윤의 얼굴엔 후회와 미안함의 감정이 가득했다.
그러다 감정이 북받쳤는지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며 훌쩍거렸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얼굴을 감싼 손에서 흉터의 느낌이 별로 느껴지질 않는다.
놀란 이하윤은 바로 거울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거기서 자기 얼굴을 바라봤다.
“사라지고 있어?”
놀랍게도 그 흉측했던 상처들이 상당 부분 사라졌다.
그것도 현재 진행 중이었다.
부기가 빠지고, 검은 딱지들이 사라지며 피부색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한수호에게 처음 치료를 받기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흉터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
아직 흐릿하게 자국은 남아 있었지만, 지금 상태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다.
이하윤의 두 뺨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바로 침대로 달려간 이하윤은 다시 한수호의 손을 꼭 쥐었다.
“고마워, 오빠…. 오빠가 아니었으면 난…. 난 정말 살아갈 꿈도, 희망도 없었을 거야.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이하윤은 긴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한수호를 지켜주었다.
* * *
>>내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내성을 한가지 선택하세요.(노화/독/감속/불/고통)
눈을 뜬 한수호가 가장 먼저 본 건 내성 획득 메시지였다.
고통은 상당히 희미해졌지만, 몸에서 일어나는 열기는 여전했다.
‘어우. 이놈의 고통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가 않네.’
고통 내성이 34%나 되는데도 이 정도면, 0%였을 땐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한수호는 이번에도 고통 내성을 선택했다.
>>’고통’에 대한 내성이 상승합니다.
>>내성 효율은 42%입니다.
8%가 상승하자 고통과 열기가 한결 나아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이하윤은 보이지 않는다.
미리 말한 대로 한수호가 정신을 잃자 기숙사로 돌아간 모양.
‘휴…. 이걸로 된 건가?’
아직 한두 번 정도는 더 약탈을 써야 완치가 가능하겠지만, 지금도 상당히 호전되었을 터.
이하윤에게 진 목숨 빚을 그나마 조금 갚은 것 같아 후련했다.
한수호는 여전히 불편한 몸을 일으켜 세워 침대에 걸터앉았다.
시계를 보니 9시 34분.
‘뭐야, 한숨 푹 잘 잔 거 같은데 1시간밖에 안 지났어?’
한수호가 이하윤과 함께 집으로 온 건 8시 반 정도였다.
이상한 기분이 들어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젖혔다.
“어?”
밖이 환하다.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다.
“아침이야?”
오전 수업이 시작된 지 30분이 지났다.
정신을 잃은 지, 꼬박 13시간이 지났던 것.
몸은 여전히 안 좋은 상태지만,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기에 서둘러 대충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금세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지만, 수업에 빠질 수는 없었다.
오늘 수업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중요한 수업이라서가 아니다.
이건 의지의 문제였다.
마공사들에게 시민을 지키고, 몬스터를 쓰러뜨려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듯이, 아카데미 학생인 자신에겐 단 하루도 수업을 빠지지 않고 출석하는 게 책임이자 의무였다.
조금 아프다고, 조금 귀찮다고 쉽게 수업을 걸러버린다면 나중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수업을 불참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렇기에 한수호는 아픈 몸을 이끌고서라도 수업에 참석하려는 것이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문 가운데에 포스트잇으로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오빠. 이제 좀 차도가 있는 것 같아서 먼저 갈게. 오늘 수업 빠진다고 교수님한테 미리 말해 둘 테니까 푹 쉬고. 오후에 다시 갈게. 집 열쇠 두 개라서 하나는 내가 챙겼어. 그리고, 고마워. 오빠 덕분에 상처가 거의 다 나았어.]
누구라는 이름도 없지만, 그 쪽지를 남긴 게 이하윤임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내용이 좀 의외였다.
‘오늘 수업?’
어제 저녁에 여길 나갔으면 당연히 ‘내일 수업’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다. 그런데 오늘 수업이라고 썼다는 건,
‘오늘 아침까지 여기에 있었다는 거잖아?’
이하윤은 이곳에서 밤을 지새웠던 것이다.
한수호는 이제야 주변을 돌아봤고, 주방 식탁에 간단히 음식까지 차려져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밥까지….’
이하윤이 밤에 먹으라고 밥을 차려놨을 리는 없다.
게다가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거로 봐서는 여길 떠난 게 얼마 되지 않는다.
“하아….”
한수호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하윤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너무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수호는 음식을 냉장고에 잘 넣어두고, 집을 나섰다.
이하윤이 놀라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정말 집에서 마냥 쉴 수는 없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교정을 가로지른 한수호.
이 상태로 아직 11시간을 더 견뎌야 했지만, 버틸 만했다.
숨을 헐떡이며 강의실에 도착한 한수호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의 등장에 학생들과 교수가 모두 크게 놀랐다.
“한…수호?”
“뭐야, 아프다며?”
“꾀병인가?”
“뭔가 수상한데?”
숙덕거리는 말들.
“한수호 학생. 오늘 수업 참가 못 하는 거로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 건가?”
지평학 교수는 단번에 한수호의 몸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물었다.
“괜…찮습니다.”
한수호는 그 말만 하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그리고 저 앞쪽에서 큰 눈으로 자기를 바라보며 놀라워하는 이하윤을 바라봤다.
‘챙겨줘서 고맙다.’
입 모양만으로 그렇게 말한 한수호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런 한수호를 힐끔거리는 친구들.
그중 백윤후를 제외한 여섯 명이 모두 있는 단톡방에선 지금 불이 나고 있었다.
양소혜>>이거 뭐지? 아파서 결석하겠다는 녀석이 왜 나타나는데?
장한설>>난 그것보다 장태산이 아픈 걸, 하윤이 혼자만 알고 있었다는 게 더 신기한데?
신소이>>어제 저녁에 둘이 만나는 거 봤다는 애들이 있던데.
양소혜>>뭐? 그럼 둘이 몇 시까지 같이 있었던 거야?
장한설>>설마 내내 같이 있었던 거?
최지혁>>태산이 그런 녀석 아니다. 넘겨짚지 마라.
최지혁이 대화에 끼어든 순간, 세 여학생이 일제히 최지혁을 노려봤다.
양소혜>>같은 남자라고 편드는 거 봐라. 만약 혹시라도 둘 사이에 무슨 일 있었던 거면, 아무리 친구라 해도 용서 못 한다! 하윤이 이제 17살이라고. 알아들어, 장태산!
장한설>>에이, 설마. 같이 있을 수는 있지만, 별일은 없었을 거야. 하윤이가 얼마나 조신한 앤데.
신소이>>뭔가 수상하긴 수상하네.
이하윤>>아, 진짜! 언니들, 그만 좀 해. 오빤 아파서 죽으려고 하는데 다들 놀릴 생각이나 하고. 어제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포션 있으면 좀 내놔요들.
계속되는 언니들의 농담에 이하윤이 도끼눈을 뜨고 쳐다보자 다들 뜨끔했는지 더는 쳇방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았다.